2010년 3월 25일 목요일

"전국민의 가족화", 혹은 "가족 호칭의 일반화" 현상

도서관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 우연히 엿듣게 된 대화 상황이다. 아마 취업을 위한 스터디모임에 한 남자가 새로 참여하게 되었나 보다. 3인(남 1, 2와 여)의 대화는 대략 이렇게 진행되었다.

: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1: 스물 아홉이요.

: , 좋아라. 나보다 나이가 많으시네

2: 저와는 동갑이시네요

1: (여자에게) 몇 살이세요?

: 스물 여덟이에요. 그런데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귀국 후 낯선 상황이 적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게 바로 이런 "나이 따지는 청년 문화"다. 아주 엽기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나이가 확인되어야 비로소 대화가 진행되는 건 사실 오래된 "한국 문화"이긴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10대, 20대들까지 그 대열에 동참하다니...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선 30만 넘겨도 아주 '왕' 늙은이 취급을 받고, 어린 '아이돌' 좋아하는 소위 '로리타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10대 '아이돌'이 라디오 방송에서 나이 따지고... 그런 맥락에서 또 눈에 띄는 현상은 가족을 지칭하던 호칭의 보편화다. 아저씨, 아줌마가 그 원조격이었고, 젊은 여인을 '언니' 라고 부르는 것 까진 경험했었는데, 이젠 어지간하면 형, 누나, 오빠, 아버지, 어머니 관계를 맺는다. 특히, 나이드신 어르신들에겐 아버지, 어머니. 연예이들끼리도... 2시의 데이트 박명수에게 전화를 거는 젊은 남자들은 대뜸 '명수 형님'이다. 만약 이런 호칭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면, 영어의 경우 '(elder) brother'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hyung"인 거지. ['화이팅'이 'fighting'이 아니라 'whaiting/ hwaiting' 인 것처럼...]어찌보면 "근대화=개인화"라는 사회이론이 공유하는 전제를 깨부수는 (듯한) 이런 "전국민의 가족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경향이 지속되면 실제 가족들을 가리키기 위한 새로운 호칭이 필요할 것도 같다.

호칭 의미론의 변화를 추척해서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을 내가 하진 않겠지만, 적어도이건 '기생적 현상' 혹은 '반작용'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나이 서열이 불분명한 상태, 평등한 관계에선 어떻게 행동해할 줄 모르는 위기 상황? 합리적, 평등한, 혹은 추상화된 매체를 통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 ....

어찌되었건 10대, 20대 청년들이 '쫀쫀하게' 한 두 살 나이 따지는 모습에서 긍정적인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2010년 3월 7일 일요일

타인의 기대 (Die Erwartung der Anderen, Fremderwartung)

이러 저러하게 살고 싶다! 이런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나 그런 기대를 갖고 살지 않겠는가? 중고등학교 시절 인생상담 상황에서 자주 등장하던 '자아실현'이 문구는 대개 두 눈 부릅뜨고 애를 쓰면 대개 삶은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설령 그렇지 못해도 그건 네 탓이다! 이런 인상을 적어도 내겐 낢겼다. 열심히 자아를 '계발啓發'(not 개발開發^^) 하면 - 그게 어떤 것이건... - 뭔가가 이루일 것 같은 희망 혹은 환상을 품고 사는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를 부르지 못하던' 홍길동 같은 '전근대인'의 눈엔 '완전' 환상적인 시츄에이션 아닌가?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삶이라!
허나 '자아실현' 같은 담론은, 좀 낡은 언어로 표현하자면 근대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다. 전적으로 개인에게 책임묻기! ('개인'個人이란 번역어는 물론이고 individuum 이란 단어도 중세에야 등장했고, 근대적 주체를 지칭하는 말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남탓을 하면 'loser' 취급을 받는... 그래서 남탓하기는 '빨갱이'나 '노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거나, 혹은 '술자리'에서나 허용된 주제가 되어 주류 담론에서 배제된다 (왜 있잖은가? 다양하게 변주되는 "모든 게 xx 탓!").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남의 기대에 맞춰서 살아주거나, 커뮤니케이션 해야 하는 상황이 많고, 아니 더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사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대개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알게 되니까 "자아의 기대" 같은 건 허구에 가까운 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에서 형성되었건 '자아의 기대'에서 출발을 하자면,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은 게 인지상적인데, 그 과정에서 타인의 기대와 충돌하는 경우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커뮤니케이션 상황이 복잡해지고, 내가 그 참여자들과 맺는 관계가 친밀할수록 그런 충돌이 가져오는 '데미지'는 클 수밖에 없다. 그 '데미지'를 줄이려면? 자아의 기대와 타인의 기대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자아의 기대를 바꿀 수도 있고, 타인의 기대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런 기대 조정법 익히는 과정을 '어른화'라고 불러도 좋겠다. 어른isierung]. 혹은 그냥 그대로 살기, 익숙해지길 기대하면서... 혹은 그런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최대한 피하기... '팔자려니' 생각하며 그런 상황과 더불어 그럭저럭 살아가기 (독일어로 '둘러가기'... umgehen).
루만은 심지어 얼굴을 맞대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상황에서도 개별 인간, 즉 심리체계는 환경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심리체계를 사회에서 쫓아냈다기 보다는, 그를 통해서만 그 독자성, 개별성이 보호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을지... (negative anthropology). 정말 심리체계를 보호하려면, 그건 영원히 사회의 '환경'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한 번씩 '사회' 속으로 '출장' 나올 때마다 기대를 조정하는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소우주라고도 얘기하는 그 심리체계들, 복잡한 기대구조를 가지고 있는 그 심리체계들이 모여서 의사소통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참 신기한 일이다 [이중 우연성 double contingency]. [부록: '일본인'들은 - 그런 대상이 있다치고 - 본론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면서도 의사소통을 한다는데, 그런 쪽에선 아마 압도적인 차이로 Weltmeister일 것 ].

쉬운 얘길 참 열심히 돌려서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