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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1일 월요일

정체성, 체계

교회 규정 검토하는 일을 마무리 하려고 열심히 논의하던 중 발견한 사실. 규정엔 '교인'과 '회원'이라는 표현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이 비슷한 두 표현이 도대체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을까?
우선 '교인'을 다시 세 등급의 '회원'으로 구분하는 맥락에서 두 표현으로 사용된다. 교인을 정회원, 준회원, 아동회원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하지만 '교인'이라는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하려면 '정교인', '준교인', '아동교인'으로 부르면 되는데, 굳이 왜 '회원'이라는 표현을 도입했을까?
 내 생각에 이는 서로 다른 체계에 준거하고 있는 정체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 같다. 체계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교인'은 Vollinklusion을 전제로 하는 종교 (혹은 기독교) 라는 '기능체계'에 대한 것이고, '회원'은 구성원 포함/배제가 일상사인 '조직체계'에 대한 것이다. 규정 작성자가 이런 체계이론적 구분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상상하긴 힘들지만, 만약 내 견해에 일리가 있다면 이는 체계이론이 도입하고 있는 사회체계의 구분이 - 사회, 조직, 상호작용 - 현장에서 (vor Ort) 일어나는 개별 커뮤니케이션을 분석하는데 유용한 범주를 제공함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체계는 그저 체계이론가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단위"(imagined unity)가 아닌 것이다.
그나저나 교회'일'을 하면서 '포함/배제' '정체성'등 사회학적 연관성을 떠올리는 이 '직업의식', 캬... 이런게 '사회학'의 매력이자 '사회학(도)/자'의 운명, 뭐 그런 것 아닐까. 문제라면 당사자들 빼곤 그 누구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얘길 주로 한다는...^^ 그 정도?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정체성 - 가족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위치

질병관리본부가 2006~2008년까지 응급실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회복된 자살시도자 1천59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족구성원 또는 연인과 갈등’을 원인으로 든 사례가 46.5%를 차지했다고 한다. 반면 우울증을 포함 각종 정신건강 상태로 인해 자살을 시도했다는 답은 14.1%에 그쳤다.

이런 통계치를 해석할 때는 항상 삐딱한 시선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선 자살 시도한 후 '실패(?!)해서' 응급로 후송된 경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 (기사에서도 "자살 사망자의 동기와는 다를 수 있다"는 질병관리본부의 설명을 덧붙이긴 했다). 또 기사에서도 연구자의 발언으로 소개되었듯이 "이같은 결과는 외국에 비해 우울증 치료를 많이 받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만약 가족 간 갈등의 결과 우울증 치료를 받는 경우는 어느 쪽에 해당하는 것이지? 두 가지 카테고리 '가족 간 갈등', '우울증'이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고서라도 기사가 전하는 내용이 내 평소 관찰 혹은 상식에 비추어 봐서 크게 어긋나지 않기에 정보가 쉽게 수용된다.
생명윤리학자들도 비슷한 얘길한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 참여할 때 '정보를 제공하고서 동의'를 받는 절차가 있는데 ('informed consent') '서구적' 전통에서는 대개 '당사자'가 그 결정권자이다 (혹은 다른 의료시술에 대한 결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터이다). 현대 문명은 지역적 편차가 있겠지만 대개 개인, 개인주의, 개별 책임을 근간으로 하고 있고, 이 경우도 그런 이해를 근거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아시아권'에서는 개인의 동의 이외에 '가족'의 동의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실정'에 맞는 것이라고 생명윤리학자들은 얘기한다.

주체, 개인의 위치는 여러 좌표에서 설정되는데 - 계급, 체계, 지역, 학교 등등 - 특히 한국인들에 '가족' 내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맺어진 관계 속에서 갖는 위치가 무척 중요하다는 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얘길 좀 실감나게 전해주는 사회과적 연구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다들 큰 얘기에만 너무 열중하는 탓일까? including me....

2009년 9월 10일 목요일

정체성... 포섭/배제

나는 누구인가? 동서고금 이런 질문을 무수한 '사람들'이 던졌겠지만,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묻는 일이 자연스럽다는 건 지극히 '근대'스러운(?!) 현상임에 분명하다 ('근대'는 커녕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도 이미 낡아버린 이 포스트-포스트모던 시대에 '근대' 운운하는 '큰 얘기'를 꺼내기가 부담스럽긴 하다. 계속 고민할 거리...). '개인'(individuum)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에 출생했으니까. (우리말 '개인'은 일본에서 만들어낸 번역어). 인간을 '개인''주체'로 보는 것, 개인의 탄생, 주체의 발견, 사실 이게 근대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권'의 탄생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스토리'다. 다른 정체성의 등장은 좀 더 역설적이다. 예를 들어 '시민'(권), 국민, 민족 같은 정체성은 개인, 주체 발견과 그것의 사회적 조건인 기능적 분화의 뒷 이야기다. 기능체계는 모두 개인들이 각 기능체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universalism). 여러 기능 체계마다 다른 '출입증'이 필요한 것. individuum 은 dividuum이 되었다. 정체성 혼란, 위기... 민족, 시민, 국민 등은 그런 '주체 분열'에 대한 긴급처방인 것이다 (루만 표현으로 transitorische Semantik). 모두가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것 사실 커뮤니케이션에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구분을 할 수 없으니... '불평등'에 대한 기능적 요구.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혹은 근대적 의미로 재창조해낸다 (물론 체계 내부에서 다른 역할을 갖기에 주어지는 다른 정체성, 그것은 배제하고서라도... cf. Stichweh). 우선 "조직"이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어떤 대학 출신인지.. 학벌! 심지어 '지방대', '수도권대'라는 구분. 혹은 지역적 차별: 전라도, 경상도. 혹은 성에 기초한 정체성, 남성, 여성; 호모, 헤테로. 한국인, 외국인; 백인, 흑인, 이도 저도 아닌; 등등. 기능체계와 크게 관련 없는 여러 정체성들이 커뮤니케이션 재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체계이론은 '불평등'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능체계의 재생산은 '불평등'에 상당히 강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Luhmann, Nassehi). 그래서 조직 차원에서 포섭, 배제 메카니즘을 봐야 불평등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Nassehi).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직'을 통해서 다룰 수 있는 불평등, 정체성 제공 논의의 여지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아.. 원래 하려고 했던 얘기는... (1) '국민''한국인' 혹은 '인종'(피부색깔)으로서의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계에 기초한 정체성을 쉽게 무력화시키는. (2) 한국인들의 정체성 중에서 가장 취약한 게 '시민'이 아닌가 싶다. '공화국의 시민'. 국가와 계약을 맺은 그런 존재. 그 계약 속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시민'이라는 인식, 한국인이 아니라. 탁석산씨가 '시민국가'라는 개념을 제기했다는데 이런 맥락에서 한 얘기일 것이다. 아, 생각이 come and go... here and t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