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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6일 금요일

"국정에서 사라져보린 과학기술" (이덕환) (디지털타임스 2014.06.03)

좀 길지만 전문을 옮겨 놓는다. 어쩌면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기대는 박정희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서 부침을 겪다가 노무현 정부에서 정점에 달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GNP 대비 과학기술투자비 같은 지표상으로는 2mb 정부나 심지어 그네 정부에서도 늘었을 법도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과학기술중심사회'같은 거대 담론이나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격상하는 조치(2004년)는 그 이후론 등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멩박씨는 과기부와 교육부를 합쳐서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로 만들지 않았던가 (2008년). 아래 글에서도 지적하듯이 그네씨의 미래창조과학부는 과학기술이 아닌 ICT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던가. 과학이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가 노무현 이후로 급 줄었음을 보여주는 현상 아닐런지. 과학과 기술을 선진국에서 수입하거나 좇아가던 시기가 지났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면서 동등하게 경쟁해야 하는 탈추격시대가 도래하면서, 특정 첨단 분야에서는 - 대표적으로 줄기세포연구 - 한국도 경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첨단과학에 기초한 기술개발, 경제화의 가능성을 보면서 지원했지만 그 성과가 그리 크지 않자 이제 그런 접근 자체를 포기하는 것 아닌지... 물론 기초과학연구소(IBS) 설립 자체는 "과학지원을 통한 경제성장에 기여"를 위해서라도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담론이 먹힌 것일지 모르겠지만.. 그것마저 지지부진하다면 앞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적 기대는 크게 높아질 것 같지 않다. 또 이러다가 특정 과학 분야가 급부상하면 그 쪽으로 쏠리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노무현 정부 이후로 분위기가 다름은 분명한 것 같다. 이것 모두 '과학기술을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보는 문화의 산물이다. 경제성장의 수단에 대한 기대치의 상승, 하강에 조응하는 정책기조 변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우선주의 자체는 바뀌지 않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 이후로는 과학기술이 성장의 수단으로서 갖는 매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인 효과를 갖는 수단을 선호하는 것 같다. 4대강이나 CIT. 어쩌면 "줄기세포연구"처럼 효과를 빨리 얻길 기대할 수 있었던 분야마저 실망감을 갖게 되니 더 그런 것 같다. 절대지원금액이 줄지는 않을지라도... 뭐든지 과도하게 부풀리면 곧 실망하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들통나기 마련이다. 이덕환 교수는 정부만을 탓하지만 과학계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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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ICT(정보방송통신)와 함께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가는 창조경제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오래 전에 잊혀졌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선진 창조형으로 도약시키고, 노벨 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겠다는 목소리도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돼버렸다. 오늘날 과학기술 정책은 중소기업과 창업 지원에 매달리고 있고, ICT 정책은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이동통신사에 끌려 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미래부, 산업부, 교육부가 모두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현실은 절망적이다. 우리 과학기술의 가장 중요한 구심점인 출연연의 현실이 그렇다. 공기업과 함께 비정상적인 공공기관으로 분류된 출연연은 강도 높은 개혁의 대상으로 추락해버렸다. 출범 이후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미래부가 갑자기 물을 만난 듯 힘을 내고 있다. IMF 이후 어렵게 회복되고 있던 복리후생 혜택의 일방적인 축소를 강요하는 미래부의 정상화 요구는 그나마 남아있던 출연연의 자존심마저 짓밟는 것이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의 출범도 출연연의 진정한 정상화를 위한 노력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연구회를 통합해서 국가 과학기술의 미래 전략 수립, 융합 연구 기획, 중소기업 지원, 인력 개발 등을 총괄하는 지원형 연구회로 강화한다는 주장은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왔던 전형적인 관료적 발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연구회를 통합한다고 미래 전략 수립과 융합 연구 기획 기능이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순진한 것이다. 통합 연구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원장 선임이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매년 평균 8명의 원장을 선임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출연연의 원장 선임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독선과 무능은 도가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박 겉핥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출연연의 예산과 결산 심의는 더욱 부실해질 것이다. 출연연의 예산이 각 부처에 묶여있는 현실을 개선하지 못하면 통합 연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어렵게 만들어놓은 기초과학연구소(IBS)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초대 원장은 임기도 채우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인사 문제에서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정부의 형편을 고려하면 후임 원장의 선임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IBS가 기초과학 분야의 투자를 독식하고 있다는 비난을 벗어나기도 어려울 것이고, 핵심 시설인 중이온가속기의 건설도 우선순위에 밀려나고 있다. 과학기술의 어설픈 정치 참여의 후폭풍을 수습할 준비가 시급하다.

이공계 대학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부가 공허한 특성화와 산학협력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취업률이 낮은 기초과학 분야의 학과들이 줄줄이 문을 닫게 될 위기 상황이다. 공학 교육을 산업 현장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발상도 위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약화된 대학의 교육이 더욱 약화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초중등학교의 과학 교육도 위기에 빠져있다.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최소한의 과학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문ㆍ이과 구분 폐지로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과학기술계는 이공계 진학자의 과학 교육 약화를 걱정하고 있고, 과학교육학자들은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 과학기술 시대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갖추지 못한 교육학자들에게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구걸해야 하는 과학기술계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다.

과학기술의 역할이 고작 중소기업과 창원 지원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출연연과 대학의 획일적인 관리보다 자율성과 다원성을 보장해주는 노력이 훨씬 더 시급하다.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평범한 문과 출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ICT 전문가를 과학자로 분류해서 중용하는 실수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이스라엘을 흉내 내고, 소프트웨어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미래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ICT가 분명하게 과학기술의 한 분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과학기술을 다시 국정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노력이 절박하다."


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라투르 책 번역 얘긴 이미 20세기말부터^^ 있었는데 마침내  첫 번역서가 나왔다. 국내에선 STS쪽에서만 알아주는 스타급 학자였는데 이번 번역서 출간을 계기로 인지도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STSer들 서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두 개를 연결시켜 놓는다: 김환석의 서평 (프레시안), 김종영의 서평 (교수신문). 아무래도 지면 제약이 없다시피한 프레시안에 실린 서평에선 책 내용이 좀 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고, 교수신문 서평은 그보다는 간략하지만 '촛불시위'에 대한 라투르적 해석가능성을 소개하는 등 책 바깥의 맥락까지 짚어주고 있다.
서평을 읽으면서 새삼 든 생각이지만 라투르만큼 창의적인 사회이론가도 드물다.
"라투르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공학을 넘나드는 탈경계적 분석방식과 사회/물질(자연)세계를 동시에 관계론적으로 분석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따라서 이 책의 부제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의 대칭적 인류학(상징적인 의미.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와 역동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학문)이란 인문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공학과 소통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학문적 체계를 의미한다." (김종영)

같은 서평을 또 일부 인용하자면...
"라투르의 야심은 근대에 대한 해석을 넘어 인문사회과학의 전면적인 혁신을 주장한다. 그가 비판하는 세 가지 학문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학자는 다음과 같다. 윌슨(자연화), 부르디외(사회화), 데리다(해체)이다. 윌슨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윌슨의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오직 한국에서만 ‘통섭’이라는 기괴한 괴물로 진화했다. 한국학계의 수준이 얼마나 얕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부르디외는 사회론적 환원주의, 데리다는 담론 환원주의(기존의 재현방식을 해체시키지만 여전히 세계의 물질성과 잡종의 정치를 보지 못하고 재현과 담론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방식. representational perspective (데리다) vs. performative perspective (라투르))로 비판받는다".

이 책 독일어 번역서를 사 두고 일부 읽어보긴 했지만 이런 내용이 있는 줄 몰랐다 (뭘 읽은 거지 ... ).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구분이다. 이에 따르면 루만은 부르디외와 데리다 중간 정도로 위치시킬 수 있겠다. 커뮤니케이션에서 출발하지만 (데리다) '사회적인 것'으로 사회를 설명하려는 이론이니까 (부르디외). 이 블로그 어디 쯤에 있을텐데, 루만과 라투르를 비교하는 논문들은 이미 적지 않게 나와있다. 라투르를 들어 루만을 치기는 쉬운 편이다. 루만을 전형적인 '사회학주의자'로 보면 되니까. 루만을 들어서 라투르를 칠 수 있을까?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라투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지? 음. 이 부분을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을 듯. 한국 STS 맥락에서 루만을 소개하려면... 루만 이론의 출발은 Sinn인데 철저하게 인간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라투르가 강조하는 비인간 행위자를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봉쇄되는 건데, 'Protosinn'이란 개념을 도입하자는 주장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좀 군색해 보이는 제안이다. 여하튼 라투르 이론을 좀 더 진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루만과 비교하는 일도 앞으로 본격적으로 해 봐야 할 듯 싶다. 어짜피 사회이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을 상태에서 연대해야 필요성이 커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체계이론과 STS

루만의 체계이론과 Science & Technlogy Studies 관계에 대해서 이미 적지 않은 논문들이 나와있다. 최근에 '발굴'한 G.Wagner(1998)의 논문을 읽던 중 눈에 띄는, 그러니까 정곡을 찌르는 비교점이 있어서 옮겨 놓는다.

"Soziale Systeme wie die Gesellschaft bestehen nicht aus Dingen, aber sie bauen auf ihnen auf. Der Satz, die Gesellschaft besteht aus Kommunikation, ist also eine extrem verkürzte Schreibweise einer vollständigeren Version...(SS 240). (...) Die STS interessieren sich aber nun gerade für diese Gesamtheit, sie wollen sie keinesfalls aus den Augen verlieren. Alles, was in einer Situation anwesend ist, sollte auch in seinem Anteil daran gewürdigt werden, und sei dieser noch so marginal. Die ommunikation wird nicht für wichtiger erachtet als die Telephone, die sie ermöglichen."(578f)
"Diesem Vollständigkeitsanspruch der STS scheint die kommunikationsfixierte Systemtheorie nicht genügen zu können" (582)

이렇게 루만과 STS를 서로 나란히 진행되어 교집합을 찾기 힘든 두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는 건 익숙한 설명방식이다. Wagner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루만이 확장시킨 '인식','관찰' 개념에서 STS적 가능성을 발견한다.

"Folgen wir hier Luhmann, läßt sich eine ganz neue Hierarchie von Fähigkeiten erstellen, die das Soziale unter sich ausmachen: Wer beobachtet, gehört dazu. Mit einem solchermaßen 'flach' ansetzenden Beobachterbegriff läßt sich ganz ausgezeichnet techniksoziologisch arbeiten." (582)

이후 Wagner가 설명하는 내용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내 독해력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듯. 왜냐면 그 스스로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Einer fruchtbaren Zusammenarbeit steht also vielleicht doch nicht soviel im Wege." (588)

여하튼 루만은 "die ältere Technikkritik"처럼 "Marginalisierung des Individuums durch die Technik"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 기술결정론에 가까운.. - "Tandem von Technik und Individualisierung, mit dem wir in die Nebel der Zukunft fahren" (1991b: 23) 같은 얘기로 그런 혐의를 피해보려고도 한다. 다른 관심, 즉 출발점,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이론을 애써 화해시킬 필요가 있을까? 차이를 분명하게 해두는 것은 필요한 일지만... 다름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악수를 교환하고서 제 갈길을 가면 된다.

- Wagner, Gerald (1998), Niklas Luhmanns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und ihre Bedeutung für die Wissenschafts- und Technikforschung, Journal for History of Law (Rechtshistorisches Journal) 17: 574 – 588.

- Albertsen, N./ Diken, B. (2004), Artworks networks - field, system or mediators? Theory, Culture & Society, 21 (3): 35-58
- Farías, Ignacio (2005), Gebt mir einen Doppeldecker und ich werde die Stadt von dessen Dach aus verwandeln, in: die Stütze: Nr. 10 Oktober 2005: 5 – 8.
- Fuchs, Stephan/Marshall, Douglas A. (1998): Across the Great (and Small) Divides. In: Soziale Systeme 4 (1): 5-30.
- Lorentzen, Kai F. (2002), Luhmann goes Latour - Zur Soziologie hybrider Beziehungen. In: Rammert, Werner/Schulz-Schaeffer, Ingo (Hg.): Können Maschinen handeln? Soziologische Beiträge zum Verhältnis von Mensch und Technik. Frankfurt a.M./New York: Campus, S. 101-118.
- Noe, Egon/ Alrøe, Hugo Fjelsted (2006), Combining Luhmann and Actor-Network Theory to see Farm Enterprises as Self-organizing Systems. In: Cybernetics and Human Knowing, 13 (1): 34-48.
- Teubner, Gunter (2006), Rights of Non-humans? Electronic Agents and Animals as New Actors in Politics and Law, in: Journal of Law and Society 33(4): 497 – 521.

2009년 1월 5일 월요일

다윈, 진화론 그리고 한국

'올해는 찰스 로버트 다윈(1809-1882)이 태어난 지 200년이 되고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국내 다윈 전문가인 최재천(54)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는 4일 다윈의 탄생 200주년과 관련해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많은 얘기를 했는데, 내겐 다음 구절이 인상에 남는다.

"다윈은 서양사상사에서 이단아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사상은 2천년 전통의 플라톤 철학을 뒤엎은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불멸의 진리가 존재하고, 사물이나 동물은 그 진리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 다윈은 사물 하나하나가 허상이 아니라 중요하고 아름다운 실체라고 주장한다. 그냥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다르기 때문에 섞이고, 자손을 만들어가면서 변화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불완전한 존재다. 다윈은 불완전하지만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일종의 상대성을 말한 것이다. 이는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사실 다윈은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그의 저서를 통해 말한 적이 없다. 이는 영국의 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한 말이 다윈의 말로 와전된 것이다. 다윈이 썼다면 아마 최상급이 아니라 비교급(The Survival of the Fitter)으로 썼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윈은 모든게 최고의 경지에 올라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일정한 상대보다 잘 하면 살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우린 복잡해 보이는 걸 한 '큐'에 정리해 주는 이런 전문가들을 좋아한다. 플라톤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사상사를 다윈이 마침내 깼단다. 이 얼마나 명쾌한 구분인가.

그 밖에 이런 얘기도 했다.

"일본 도쿄대의 사쿠라 오사무 교수가 '생물철학'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진화론 수용을 분석한 적이 있다. 사쿠라 교수에 따르면 일본은 대단히 잘 수용한 편이고 중국도 때늦은 서구 문물 도입에 비해 비교적 빨리 진화론을 습득했다. 동아시아 3국 중 유독 한국만 다윈에 대한 저항이 강했다. 사쿠라 교수는 그 이유를 "기독교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사쿠라 교수의 의견에 덧붙이자면 한국 자연과학 발달사를 살펴봤을 때 물리학과 화학에 비해 생물학 수입이 매우 늦은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생물학은 압축성장을 해야했고, 그 과정에서 생물학 중 분자생물학이 조명을 받은 반면 상대적으로 진화생물학은 발달이 늦었던 것이다."

그런가? 진화생물학 혹은 생물학 이론으로서 진화로 수용은 늦었을 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기독교가 어느 정도 '기여'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화론의 결과인 '사회진화론'의 영향은 20세기 초 한국에서 대단했다고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인을 포함한 소위 선각자들이 대거 그런 입장을 취했었고. 사회생물학, 우생학과 생물학 이론으로서 진화론을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 진화생물학은 굳이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인간사의 질서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사고방식 속에서 자리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재천 교수가 인용한 일본의 그 교수가 어떤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했는 지 알아봐야겠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주장임에는 분명하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을 유명한 진화론자 스테판 굴드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정의했다(고 한다)

"굴드에 따르면 다윈의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은 단순한 이론이다. 생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자손을 낳고 이 중 환경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가장 강하게 변화한 자손이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리며 이 변이가 각 개체군에 축적된다는 것이 자연선택이다."

자연선택된 개체 혹은 適者는 혼자만 단독으로 살아남으려는 게 아니라 (이건 많은 인간들이 보여주는 모습이긴 하다), 후손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2008년 9월 18일 목요일

과학지식/ 일상지식

„Das wissenschaftliche Wissen ist weniger sicher als das Alltagswissen. In der Interpretation von Wahrnehmungen des Alltags entstehen normalerweise keine Zweifel.“ (Luhmann 1990 WissG: 325)

2008년 5월 20일 화요일

위험관리 유형

딴지일보에 1990년대 초 광우병에 대한 영국의 대응과 2008년 한국의 대응을 비교하는 총수의 글이 실렸다 (이미지로 만들었는데 너무 긴 탓인지 올라가질 않는다). 축산업 보호를 위해 소고기를 먹어도 안전하다고 강변했던 당시 영국 정부와 현재 한국 정부의 모습이 중첩된다는 것이다. (딴지 기사는 기사의 좋고나쁨의 변동 폭이 매우 큰 편인데 이건 좋은 쪽에 속한다. 특히나 황우석 사태 때 총수와 딴지가 한 뻘짓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기사를 보는 일은 반갑다. 전반적으로 딴지가 지금 침체기에 있음은 분명하다. 여전히 틈새시장이 있어 명맥을 유지하긴 하지만, 글쎄 오래 갈 수 있을까...). 1990년 초중반 영국과 서유럽이 경험한 BSE 사건은 이후 영국 정부와 EU의 위험관리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한계야 항상 있겠지만, 위험관리에 있어서 정보공개, 시민참여 등을 통해 투명성과 신뢰를 확보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특히 90년대 말 유럽 GMO 정치는 이 같은 BSE 경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90년대를 거치며 각국의 위험규제 정치 유형의 차이를 지적하는 연구들이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 (미국, 유럽의 차이를 강조하는 논문들이 많았었는데 몇 년 전부터 일부학자들은 수렴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물론 규제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일부 경향이 그렇다는 얘기). 지금 한국 정부의 위험관리정책은 90년대 초 영국식이나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이다 (위험관리 유형을 국가별로 구분할 수 있는가는 학문적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는 저널리스틱한 구분으로 사용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도 하지만, 굳이 전철을 밟아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다른 나라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위험 연구가 한국에서 한 때 유행이었는데 그 많던 위험 사회학자들, 위험연구가들은 다 어디 가셨는가? (이런 진술을 용감하게 할 때마다 늘 찜찜하긴 하다. 극히 제한적인 범위의 담론을 좇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식하니까 용감하다는 말, 이런 경우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내 관찰 범위에 들어온 드문 경우가 서울대 홍성욱 교수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 지난 5월 14일에 "광우병 민심 '확률'로 풀 일 아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미국식 위험관리, 위험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고 한국 관료, 전문가들이 배울 것을 충고하는 내용이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위험'에 대한 오랜 연구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과학자나 전문가는 광우병 같은 경우 확률로 위험을 계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은 시민이 위험을 확률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재앙의 정도, 통제 가능성, 형평성, 후속 세대에의 영향을 고려해서 총체적으로 지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위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대화의 의지, 투명한 정보의 공개, 신뢰의 구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버드대 Jasanoff 교수 팀에 있는 김상현 박사가 STS 메일링리스트를 통해 이 칼럼에 대한 짧은 비판적 논평을 돌렸다.


"따라서.. '광우병 민심 '확률'로 풀 일 아니다"라는 홍성욱 교수님 주장에는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미국에선 안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문가들은 그러고 있으니 큰 일"이라는 식으로 그리고 계신 것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한국이 위험평가, 위험관리에 대한 미국식 기준과 미국 스타일의 실천들을 더 열심히, 더 강하게 받아 들이면 들일수록, 홍성욱 교수님께서 우려하는 상황이 강화될 수도 있지 않나 합니다". 

홍 교수가 언급한 위험관리유형은 유럽에서 더 쉽게 관찰된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위험관리정책 연구 결과에 대한 지식에 비쳐 보더라도 김상현 박사 견해가 옳은 듯하다. 한국의 위험관리정책의 사례로서 이번 사건을 연구하고 다른 국가들의 경험과 비교하면 재미있겠다.

p.s.) 김명진씨가 한겨레 21, 5월 22일자에 광우병 발생에 대한 과학지식은 불활실하고, 위험 판단에는 결국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는 전형적인 STS 시각에 기초한 글을 기고했다. 제목: "광우병 걸릴 확률? 아무도 모른다"

2008년 5월 14일 수요일

과학, 정치

미쇠고기 수입 논쟁이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 등 3개 교수 단체는 13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환경재단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정을 즉각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프레시안 기사 참고). 이 기자 회견문에는 경제학, 정치학, 의학 등 각 분야 교수와 연구자를 포함해 총 1008명이 서명에 동참했다는데... 음. 교수 단체가 어떻게든 움직이는 건 시의적절한 것 같은데 전략적으로는 좋은 방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번 광우병처럼 서로 다른 지식주장이 정치이슈의 근간을 이루고 있고 교수 정도 되는 전문가들이, 그것도 집단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며 개입할 때 가장 영향력 있는 방식은 현재 관련분야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과학지식을 건조하게 알려주는 것 아닐까. 언론이나 기타 논쟁의 당사자들은 마음먹으면 언제나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 전문가를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 '집단'의 발언에는 특별한 힘이 실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성명서를 발표한 주체인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는 너무도 정치색 짙은 조직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프레시안도 이렇게 연결시키고 있다: "지난 3월 한반도 대운하에 반대하는 2500여 명의 교수들이 이름을 걸고 나선 데 이어 다시 한 번 교수들이 정부 정책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 전문지식이 아닌 교수단체의 정부정책에 대한 반대가 부각되는 것이다. 이 조직들은 또 늘 정부의 결정에 반대할 때나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가. '경제학, 정치학'이 포함되는 것이 도움이 될까? (국제 협약 통상문제 전문가들로 표현되지는 않는 그냥 경제학, 정치학...).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나 같은 학교 수의대 우희종 교수가 그나마 해당 분야 전문가로 등장하지만 좀 약하지 않은가? 더구나 의학자, 수의학자라고 해서 광우병에 대한 전문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어렵지 않은가. 나름 광우병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판이니...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외국 전문가들의 발언, 의견을 따와서 전하는 언론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광우병 연구자 네트워크가 세계적으로 분명히 있을 텐데. 광우병을 연구하는 관련 학자들이 정말 어떤 견해를 더 지지하는지 '탐사'하지 않고, 그저 늘 그렇듯이 서로 상반되는 주장만 구색맞춰서 보도하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반대하는 이들도 어째서 그런 일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 (사실, 이렇게 단호하게 얘기할 정도로 내가 언론보도를 모두 섭렵한 것은 아닌긴 하다. 하지만 여러 티비 토론 프로그램의 경우 인터넷 신문들 보도보다 그리 사정이 나은 것 같지 않고, 혹 피디수첩 정도가 관련 학계의 견해를 심도있게 보도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경우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과학과 정치를 분리할 필요가 있겠다. 과학적 논증에서 이길 자신이 있다면 말이다. (글쓴이 일단 사라짐. fade out...)

(다시 등장). 이렇게 써 놓고 또 다른 기사를 보면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지금 미쇠고기수입 '사태'는 "광우병 괴담"운운하며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에 대해 논쟁하던 단계를 지나 '재협상' 국면으로 넘어간 듯하다. 이미 '충분히' 알려진 과학지식, 반대여론 등을 등에 업고 재협상을 촉구하는 측과 협상은 기본적으로 불가하고 광우병 발생시 GATT 조항에 의거 수입중단할 수 있다는 정부 측 입장이 대립되는 모양이다. 어쩌면 '과학정치' 진행에 일정한 패턴이 있는 건 아닐까? 황우석 사태 때도 초기에는 논문의 진위 여부가 핵심 논쟁거리였지만, 논문의 조작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이후에 지지자들은 쉽게 다른 이슈로 (예를 들어 원천기술) 논쟁의 방향을 틀 수 있었으니까. 그럼 결론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 정치는 정치요 과학은 과학? 과학정치도 결국은 정치?

2008년 5월 9일 금요일

과학적 불확실성

광우병 관련 논점 중 하나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광우병 사망자가 200여명이라는 것. 이는 '광우병 걸릴 확률은 벼락맞을 확률보다....' 이런 진술로 연결된다. 하지만 - 언제나 그렇듯 - 전혀 다른 주장도 있다. 이 인간 광우병이라는 것이 치매 증상과 원체 유사해서,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낮은 아주 젊은 사람들 외에 한 4~50살만 넘어가도 그냥 치매로 치부된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 "‘매드 카우보이’ 라는 책으로 유명한 하워드 라이먼"가 이런 근원으로 인용되고 있다 (아카데믹 과학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대개...). 미국에는 450만 명의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있는데, 피츠버그 노인병원이 예일대와 함께 사망한 치매 환자들의 뇌를 분석한 결과 조사 대상의 13%나 되는 노인들이 치매가 아니라 사실은 인간 광우병 증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따라서 이 13%를 450만에 대입하면 물경 50만 명이 넘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사실은 광우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말이 되어 버린 것. 이상은 영국에서 살다 온 것 말고는 광우병과 별 관련 없을 이가 딴지에 (이런 것도-)칼럼이라고 올린 글의 앞부분 내용이다 (딴지스럽긴 하다). 이런 건 참 '광우병 괴담'스럽다. 그 피츠버그 노인병원과 예일대 연구 내용을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저런 딴지스런 진술로 그들의 연구가 해석된다는 걸 알면 분명 펄쩍 뛸 거다. 과학은 좀 과학으로 놔두면 안되나. 우리의 네티즌들 황우석사건 때 모두 줄기세포연구 전문가가 되더니 이제는 다들 광우병 전문가들로 전향하시는구나. 그 배후에는 ... 음... 내가 보기엔 ... 언론과 정부가 있다. 의도적으로 함량미달 기사들을 양산하거나 어설프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우리 '네티즌'들의 탐구욕, 어린 시절 이후 숨겨져 있던 '과학'에 대한 열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 중 몇이라도 전문가의 길로 나서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지식사회로 가는 길에 어쨌든 도움이 되는 일 아닌가.ㅎㅎ 안타까운 일은 '진짜' 전문가들 쪽 사정도 크게 나아보이지 않는다는 점. 아, 전문가다운 발언이 희귀한 세상이다.

광우병 논쟁

한국인이 유전적으로 인간광우병에 취약하다는 논란의 시발점이 된 논문을 냈던 한림대 김용선 교수는 9일 '유전자가 질병 발병의 중요한 한 요인이지만 유전자 하나 만으로 인간광우병에 잘 걸린다고 단정적으로 얘기하기 어렵다'고 말했단다. "핀란드로 출국했던 김 교수는 이날 오후 1시 10분쯤 KE906편으로 귀국, 최근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 논란에 대해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 사실 이런 언급은 8일 KIST 신희섭 교수의 주장에 대한 반론은 아니다. 그는 '김 교수의 논문은 인간광우병인 변형 크로이츠펠트야곱병(vCJD)이 아니라 아직 감염경로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산발형 크로이츠펠트야곱병(sCJD)에 대한 것'이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이런 신교수의 언급도 애매하긴 하다. vCJD와 sCJD가 단지 감염경로만 다른지 아니면 발생기전이 다른지를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선 교수는 유전자와 광우병 발생 관계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번복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요인이 광우병 발병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것만 놓고 보면 '미쇠고기 수입업자'들이 그리 좋아할 발언도 아니다. 언론은 워낙 지들 맘대로 과학 진술을 보도하니까 (무식하니까 쉽게 왜곡한다), 언론보도를 가지고 과학적 논쟁을 재구성할 생각을 포기하긴 해야 한다. 김용선 교수는 9일 '전세계적으로 광우병 발생 환자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아직 발병 기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대응이다. 과학적 사실은 흔히 대중들에게 사실로 알려지나 - 언론은 단정적으로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 조금만 다그치면 대개 불확실한, 잠정적 지식으로 '후퇴'한다. 언론 혹은 '정치적' 목적에 써 먹으려는 이들은 논쟁적인 주제일수록 쉽게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과학'사실'을 동원할 수 있다. 그러면서 언론이 누구를 광우병 전문가로 만들어 가는지도 지켜 볼 일이이다.
또 대한의사협회(의협)도 9일 광우병에 대한 학술적 견해를 내놓았다고 한다. 연합신문 보도를 보니 나름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는데, '좋은 얘기'는 다 해 놨다. 그러면 누구나 필요한 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다. 연합은 기사제목을 "의협 '광우병ㆍCJD 등 프리온 질환 감시시스템 구축'"로 뽑았다. 건조한 편. 다른 신문들은 더 논쟁적인 이슈에 초점을 맞췄다. 조선일보는 이 소식을 전하면 대문에선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의협 '광우병 소 먹는다고 인간광우병 걸리는 것 아니다' (기사의 제목은 연합 그대로). 한겨레나 많은 언론싸이트는 같은 기사를 전재(轉載)하면서 [의협 "한국인 ‘사람광우병’ 취약 결론 낼 수 없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언론이 실제를 전달하면서 왜곡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언론 없이 우리는 실제에 접근할 수 없다. 언론을 통해서 실제가 비로소 실제가 되는것(cf. N. Luhmann 1996, Die Ralität der Massenmedien).

프리온

신문을 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광우병 이야기를 듣지, 아니 보지 않을 수 없다. 90년대 후반 영국에서 한참 광우병으로 시끄러울 때도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최근 수입 쇠고기 사태 덕에 배우는 것이 많아진다. 인터넷에는 찌질이들이 아는 척 써 놓은 것들이 워낙 많이 돌아다니는데 믿을만한 내용이 한글 위키피디아에 잘 정리되어 있어서 큰 품 들이지 않고 파악할 수 있다 . 광우병을 이해하는 핵심은 프리온(Prion)인데 이는 단백질성 감염성 입자(Proteinaceous Infectious Particle)의 줄임말이다. 단백질을 뜻하는 'protein'에서 pr을, 감염성을 뜻하는 'infecious'에서 i를, 입자를 뜻하는 접미사-on을 붙여 만들었다. 1997년 미국의 스탠리 프루시너가 프리온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하였고 하니 참 최근 일이다. 프리온은 바이러스와 대단히 흡사하긴 하지만 살아있는 세포가 아니라 단백질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살아있지 않으니 죽지도 않는다.이 단백질은 좀 특이하다. 유전자 없이도 증식을 할 수 있다. 정상적인 형태일 때는 문제가 없으나 어떤 이유로 분자구조가 미세하게 바뀌게 되면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분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수백 도의 높은 온도에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기타 자외선, 소독물질, pH의 변화 등 외부환경에 대단히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어 바이러스를 포함한 일반적인 미생물의 소독 방법으로는 불활화가 불가능하다. 고압증기멸균(autoclave)기에서 134도로 18분 이상 가열하면 성질이 변형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주변의 정상 프리온들까지 물들여버린다는 사실. 똑같은 변형 프리온으로 바꿔버린다. 이 변형 프리온이 소의 몸 안으로 들어간 경우를 생각해보자. 결코 대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주변에 같은 형태의 변형 프리온들을 늘려나갈 것이다. 이 현상은 뇌세포에 치명적이다. 정교한 기계에 난데없이 구멍을 숭숭 뚫어놓는 꼴이 된다. 그 구멍들은 점점 커질 것이다. 뇌 기능을 마비시킬 것이고 결국 생명을 위협할 것이다. 이것이 광우병이다. 이 불행의 메커니즘은 인체에서도 그대로 진행된다는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프리온 인자는 단백질 구조를 다시 접음(refolding)으로써, 정상적인 단백질 분자를 비정상적인 구조를 가진 단백질로 변환시킨다고 알려져있다. 가설이 있다. 알려진 모든 프리온들은 아밀로이드 접힘(amyloid fold)을 형성한다. 프리온은, 중추신경계에 쌓여서 아밀로이드라고 알려진 반점(plaque)을 형성함으로써 정상적인 조직구조를 붕괴시켜 신경퇴행성질환(neurodegenerative disease)을 일으킨다. 이런 현상은 뉴론의 공포(空胞; vacuole) 형성으로 하여 생기는 스폰지 모양의 구조로 인해 조직 내 “구멍”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바뀐 구조는 극히 안정적이며 감염된 조직에 축적되어, 조직손상과 세포의 사멸을 일으킨다. 프리온 질환의 잠복기는 상당히 길지만 일단 증상이 발현하면 질병은 신속히 진행하여 뇌손상과 사망에 이르게 된다. 신경퇴행성질환의 증상은 발작이나, 치매, 운동기능장애 및 성격이나 행동의 변화 등이 있다.
알려져 있는 모든 프리온 질환들은 치료방법이 없으며 치명적이다. 하지만 쥐에서는 백신이 개발되었는데 사람에서의 프리온 감염을 막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더해 동물에서 프리온 단백의 발현을 막는 유전처리를 함으로써 프리온 감염에 내성을 갖게 하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물건너 간 황우석 씨의 광우병내성소 만들기 프로젝트도 그 중 하나 되겠다].
프리온은 포유류에서 몇 종의 질환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흔히 광우병(mad cow disease)이라 부르는 소해면상뇌증(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BSE)과 사람에 발생하는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 등이 있다. 다른 종 간의 프리온 단백질 간에는 작은 차이가 있어 종간의 프리온 질환 전파는 흔하지 않긴 하지만 인간의 프리온 질환인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병(variant Creutzfeldt-Jakob disease)의 경우는 소에서 감염을 일으키던 프리온이 감염된 육류를 통해 사람에게 질환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우병의 역사에 대해 논문을 쓴 김기흥 박사에게 얻어들은 바에 따르면 영국에서 그동안 양이나 염소에서 발병하는 '스크래피'란 질병에 대한 기록이 오래 전부터 (그 양반 인터뷰를 보니 250년전부터였던 모양이다) 있었다고 한다. 그건 우리가 흔히 광우병이라고 하는 소해면상뇌증(BSE)의 원조 격으로 보는 것이고. 책으로 출간된 그 논문의 제목이 The Social Construction of Disease. From Scrapie to Prion (2006, Routledge) 인데 부제가 좀 거시기 하다. 스크래피는 질병이름이고 prion은 발병인자인데 from...to.. 호응이 안되는 것 아닌가? From Scrapie to BSE 라고 해야 더 논리적일 것 같은데...
이 양반을 손석희 시선집중에서 인터뷰했는데 누군가 친절하게도 그 녹취록을 올려놓았다. 녹취록을 읽어보니 한 편으로 씁쓸하기도 하다. 광우병 자체가 아닌 광우병의 사회사 혹은 사회학을 대중들은 어디에 연결시켜야 할 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도 어쩌다 보니 과학, 기술 관련된 주제를 디플롬 시절부터 계속 다루고 있는데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내 디플롬 논문 주제가 유전자조작식품 (GMO)였는데, 정확하게 이야기하지만 GMO 규제 논쟁이었지만, 어쨌든 한국에 가니 가족 중 한 명이 묻는 것이다. "그래, 도대체 GMO가 안전한 거야, 먹어도 되는거냐구?" 당연 나는 거기에 대해 별로 해 줄 얘기가 없었지만... 또, 언젠가 베를린에서 열렸던 생명공학 반대운동가들 컨퍼런스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사회학도로서 생명공학 문제 연구하기'가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확이할 수 있었다. 생명윤리학과 구분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고, 생명공학에 대한 의식조사를 떠 올리는 이도 있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과학 혹은 학문에 대한 기대는 경험적으로 확정된 지식 제공인 것 같다. 아무리 과학 지식의 불확실성, 전문가들 간의 의견불일치를 경험했더라도, 여전히, 지지치 않고, 자연과학자들에게 전문가적 소견을 묻는다. 한번도 예측이 맞은 적이 없을 것이지만 우리는 다음 분기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반복해서 경제학자들에게 묻는다. 거기에 대해 전문가적 아우라를 가지고서 소수점 아래까지 숫자를 제시하는 경제학자들. 그렇게 자신있게, 분명한 확률, 수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학문들은 환영받지 못하고 왠지 찌질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학문의 유용성, 실용성에 대한 기대의 변화... 중세 때 신학은 매우 실용적인 지식이었다. 복잡성을 척척 감소시켜 주었으니까. ...

2008년 5월 8일 목요일

과학 정치

며칠 전 최근 광우병 논쟁에 '과학'적 진술이 자주 등장한다고 썼었는데, 이제 본격적인 과학논쟁으로 접어 드나보다. 조중동은 촛불문화제 혹은 시위로 고조된 저항을 광우병 '괴담'으로 프레이밍하더니 이제 그 근거로 과학적 진술을 가져오고 있다 (언론이 어떻게 현실을 만들어내는지가 더 재미있다. 정부 쪽의 그 찌질한 발언, 대책보다는). 과학자들이 스스로 조직화하고 발언을 강화한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8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원장 이현구)이 주최한 ‘광우병과 쇠고기의 안전성’ 원탁토론회가 열렸단다 ('과총'도 9일 설명회를 열 예정). 이런 민첩하게 대응하는 모습, 평소 과학자들답지 않다. 황우석 사태 전후 그 여유로움은 어디 가고 ㅎㅎ 그 동안 이런 '정치적' 논쟁 (im Sinne von '2MB')에 과학자들이 앞장서거나 과학지식에 대한 발언이 정치적 논쟁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반갑다 '지식사회'. 사회학자 혹은 STSer들이 분석할 made in Korea 논쟁이 이제 본격적으로 늘어날 것을 보여주는 전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 길지만 논점을 남겨둔다는 점에서 기사를 대폭 인용하기로 한다.
우선 초기 한국인이 광우병에 유독 취약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 한림대 김용선 교수 연구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인간광우병이 아니라 다른 질병을 분석했다는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신희섭 신경과학센터장은 8일 오후 KIST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 교수의 논문은 인간광우병인 변형 크로이츠펠트야곱병(vCJD)이 아니라 아직 감염경로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산발형 크로이츠펠트야곱병(sCJD)에 대한 것'이라고 밝혔다. vCJD는 광우병에 걸린 소에서 비롯된 질병으로 주로 영국 20대에서 발병했다. 반면 sCJD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발병하는 질병으로 60대 이상 고령층에서 발병한다".
문화일보는 또 서울대 이영순 교수의 발언을 이렇게 보도한다 (이 보도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 인터넷 기사에서 인용된다. 조선은 문화에선 안 보이는 사진까지 덧붙였다. 두 기사를 비교해 보니 '사진'의 효과도 있을 것 같다. 나이지긋한 점잖[아 보이]는 남성의 모습 발언의 근거에 신뢰감을 더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국내 학계에서 광우병 관련 최고 권위자인 누가 최고 권위자라는 지위를 부여했을까? 이영순(서울대 인수공통질병연구소장·전 식품의약품안전청장 이전 경력 꼭 써넣을 필요는 없는데 왜? 알 만한 사람은 안다ㅎㅎ) 서울대 수의대 교수가 '광우병은 원인이 밝혀졌고 곧 사라지게 될 질병'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특히 '광우병 감염 위험성이 있는 소라 하더라도 고기나 우유는 안전하다'고 강조했다.이 교수는 8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과학기술한림원(원장 이현구)의 ‘광우병과 쇠고기의 안전성’ 원탁토론회 주제 발표를 통해 '미국산 쇠고기의 살코기와 우유의 경우 아무 문제가 없음이 밝혀졌다'며 '문제가 되는 뇌 등 특정위험물질(SRM)의 경우도 법으로 엄격하게 통제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이 교수는 이날 토론회에 앞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프루시너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프리온 단백질이 광우병의 원인임을 밝혔고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광우병을 일으킬 수 있는 동물성 육골 사료를 모두 금지시켰다'며 '이에 따라 광우병은 1993년 3만5000건에서 2007년에 141건으로 급격하게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광우병은 호흡기, 접촉 등으로 걸릴 수 있는 전염병이 아니라 프리온이 든 물질을 먹어야만 걸릴 수 있는 전달병(transmissible disease)'이라며 '따라서 이미 밝혀진 SRM이 축적되는 부위만 전 세계가 통제할 수 있다면 광우병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또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수억 마리의 소가 도축됐지만 그중 3마리만 광우병에 걸렸을 뿐'이라며 '식품에서 100% 안전한 것은 없으며 이 정도 확률이면 우리가 흔히 먹고 있는 식품보다도 더 낮은 수치'라고 말했다." 위험논쟁에서 전형으로 등장하는 수사다: '100% 안전은 없다'. 또 친근한 위험과 문제가 되는 위험을 대비시키며 얼마나 확률이 낮은지를 보여주는 방식도 애용된다 (이미 여러 번 그런 주장을 읽은 것 같다. '광우병 걸릴 확률은 ...' 운운하는 ). 이와 대척점에 있는 레토릭은? 대표적으로 '사전예방의 원칙'(의심스러울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과학지식의 불확실성' 논변이 있다. 그리고 이 쪽 진영에서는 위험이 새로운 것임을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관전 포인트를 이후 저항 진영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 지에 두어야 한다. 다른 과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할까? 저항 쪽에 있는 이들은 어떤 과학지식을 근거로 삼을까? 특히 초기에 한국인이 광우병에 취약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 연구결과를 발표한 김용선 교수 팀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주목된다. 이들이 다른 학자들의 반론을 인정하는 순간 저항의 근거는 급속로로 약해지리라. 이들이 '잠수'를 탄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일까? 그들의 입장을 지지해 줄 다른 학자들은 없는가? 적어도 과학계에서는 그가 소수 입장을 대변하리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 지금 상대는 과학한림원, KIST, 서울대, 식품안전청 아닌가? 아무래도 무게 중심이 그 쪽으로 쏠려있는 형국이다. 지난 밴쿠버 STS 학회에서 김모박사가 한국 광우병 연구자의 의심쩍은 행적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었는데 ,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연구자는 강원도 쪽 대학에 재직중이었다. 흐음. 그렇담 더 흥미로와진다. STS 쪽 논문 쓸 거리들이 그냥 여기 저기 널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