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의 자유는 인간 존재의 근거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선택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등산가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높은 산 정상에 오르는 거다. 내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 (...) 재미있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면 재미있어진다. 아무리 재미없는 행동도 내가 선택하면 재미있어진다. 요즘 유행하는 행동경제학의 ‘너지’(nudge) 같은 개념은 바로 이 ‘선택의 자유’에 관한 경영학적 변형이다. 방향만 은근슬쩍 제시하고, 최종 결정은 스스로 내리도록 해야 행복해한다는 것이다.(...)
- 김정운 -
ps)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그래서 재미 좀 보고 있나, 그대?
2010년 8월 27일 금요일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2010년 8월 22일 일요일
facebook 관람기
facebook에 어떤 흔적을 남기려면 자기 검열을 여러 번 거쳐야 한다. "불특정 다수"라고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범위로 퍼져 나가는 건 분명하고, 다른 한편 인터넷 항해 중에 여기 저기 남기는 댓글과는 다르게 내 발언의 출처를 쉽게 추적당할 수 있기 때문에... 內密한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없다. 제 삼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 포장지를 여러 번 씌운 이야기나 '지당하신 말씀'을 할 수 밖에... 물론 자신의 관심사, 지식, 기호 등을 '불특정 소수'에게 드러내는 일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사람들을 맺어주려는 노력이 지나치는 것 같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쏟아 내라고 재촉하는 그런 모양새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정보를 신속하게 나누는 일엔 장점이 있겠지만, 그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서 쉽게 비만에 이르게 한다. 영양가를 가리기 힘들 정도로 막 쏟아 부으니까... twitter도 그렇지만, facebook도 networking이 긴요한 이들, 이른 바 명사들이나 인맥관리가 절실한 이들에게 유익하겠지만, 뭐 딱 그 정도인듯..
아직 만나거나 연락을 취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 사진이 뜨면서 "한 번 연락을 취해보실라우?"라고 채근댈 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당황스러움이란 느낌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략]
그러나 다른 한 편... 인간에겐 관계를 넓히고 싶은 욕망, 제 삼자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다 - 무엇을? - 남 얘기를 훔쳐서라도 듣고 싶은 욕망도 있으니까...
소셜 미디어는 그런 오래 묵은 욕망을 세련된 방식으로 펼칠 수 있게 해주고 있는 지도...
2010년 8월 12일 목요일
한국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언젠가 한국 정치에서 이념 - 서양적 의미로... - 을 지향하는 정치세력은 2mb로 봐야 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우파,부르조아지, 혹은 강남족들...? 등등), 최근 들어 '친서민' 행보를 강화하고 심지어 '전경련'과도 갈등을 보이면서 적잖은 실망감(?)을 안겨 주고 있다. 물론 그들의 그런 발언이나 행태가 선명한 '우파 정부' 정체성을 희석시키려는 안타까운 '몸짓'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런 이들이 '서민' 운운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한국 정치문화에서 '이념성'을 유지하기란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좌/우나 진보/보수, 자유주의, 사회주의 같은 이념 구분이 아니라면 도대체 한국 정치문화를 어떻 구도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 실마리가 최근 치뤄진 두 번의 선거. 지방선거와 보궐 선거. 지방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이겼던 민주당이 보궐선거에서 참패했다. 이를 두고 2mb씨께서 균형과 견제를 요구하는 민심에 놀랐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신 바 있는데... 실제로 한국 정치문화는 딱 그 정도 아닌가 싶다. 균형과 견제... 시종일관 추구해야 할 가치나 이데올로기를 좇지 않고... 그 때 그 때 형성되는 '판'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실용주의라고 해도 좋고... 물론 지역, 영토를 떠나서 인간의 상호작용은 본질적으로 상대가 있는 '게임'이고 '게임의 규칙'은 그 때 그 때 만들어진다고 봐야겠지만, 내 말은 그 정도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
한국 정치문화의 전개는 주류 정치 문화나 정치 담론과 그에 대한 저항 담론, 대안적 담론 간의 '변증법'적 관계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주류 쪽 담론의 내용은 대개 발전, 경제 성장, 선진국, 선진화 등으로 지속성이 있다면, 저항 담론의 내용은 좀 더 극적으로 바뀌는 편이다. 민주화, 통일, 민족주의, 참여민주주의, 경제민주화, 인권, 환경담론, 여성권리 등등.
이 관계를 변증법적이라고 표현하는 건 주류 담론이 저항 담론의 내용을 일부 수용해 왔고, 저항 담론은 그 상태에 따라 새로운 이슈, 주제를 제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수용'은 매우 선별적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는 저항 담론의 내용을 수용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담론적 상황, 구조적 상황이 그 선택적 수용의 시기, 범위 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른 한편, 사회주의 혁명 같은 저항담론이 사그라들고,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참여민주주의, '시민사회', '시민운동', '경제민주화', 생태주의, 여성주의 같은 담론이 선택되었고... ]
한국 근대화 속에서 정치, 특히 문화적 측면에서 본 한국 정치의 전개를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면, 사회구조적 측면과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ps 1) 내 얘긴 한국 정치에 보수주의, 권위주의, 발전주의, 국가주의 등이 지배적이었다는 견해에 대한 비판이다. 심지어 민주화 이전에도 저항 담론은 꾸준히 지배담론에 '꾸준히' 영향을 미쳤다는 것. 예를 들어 "한국근대화는 오직 발전이라는 하나의 목표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근대화는 실패"(김대환?) 라는 평가는 너무 일면적이라는 것. 87년, 그 찬란한 경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심지어 87년 이전과 이후의 정치 문화 차이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촛불시위' 등장에 놀라는 것 아닌가... 라는...
ps 2) 또한 정치 갈등의 내용을 좌/우나 진보/보수 혹은 정치 이념들로 채우기 힘들다는 것. 이 과정에서 여러 정치 이념들 (보수주의‧자유주의‧민족주의‧급진주의 등등) 간 투쟁이 있었지만 [cf. 강정인 외 2009, 한국 정치의 이념과 사상], 한국 정치의 여러 특성은 그런 방식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당정치가 '여전히' 약하고, 대규모 촛불시위가 뜬금없이 등장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정세에 큰 변화가 없는데 1달 만에 선거 결과가 완전히 뒤바뀌고... 등등.)
ps 3) 이런 문화, 문화 간 갈등은 심지어 한국 근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한편, 근대 초기 사회진화론에서 시작되어 발전, 경제성장, 선진국, 선진화로 이어지는 '근대화' '발전' 담론/문화가 있고, 다른 한 편으로 그에 대한 비판/대안/저항 담론이 있고... 근대화 담론은 수시로 모습을 바꾼다. 일본에 맞서기 위한 사회진화론 담론 이후 친일 담론에서도 발견되고... 일제 시대 때 발전, 진화는 독립 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었고... [예를 들어, 과학조선 운동] (일종의 비판 담론?)... 근대화, 발전, 부국강병 담론이 항상 주류이지 않았다는 말씀. 여하튼 사회구조적 관계 변화와 문화 간의 관계는 매우 역동적이라 단정적으로 묘사하기 힘들 것 같긴하다.
피상적 예절 교육, 피상적 교양, 피상적 읽기...
'로쟈'가 지젝에 대해서 한 얘기를 일부를 옮겨 놓는다. 느낀 바가 있어서... (심지어 오른쪽 마우스 금지 장벽까지 뚫고서 불펌했는데 양해를... 강조는 내가...).
(...)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얼마 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한 경찰관이 곤봉을 손에 들고 흑인 부인을 뒤쫓아 가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부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그러자 경찰관은 자동적으로 ‘깍듯한 예의(good manners)’를 지켜 신발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의를 차린 다음에는 다시금 그 부인을 쫓아가 곤봉으로 내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그래서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일화에서 지젝이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찰관이 갑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그래,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거야!” 따위의 깨달음은 이 일화와 무관한 또 다른 몽매주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 경찰관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받은 ‘피상적인’ 예절 교육이라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백인 경찰관과 흑인 부인은 단지 신발을 건네주고 받으며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이 ‘피상적인’ 접촉에 의해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전혀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적-상징적 세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쳐 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기대는 물론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러한 마주침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교양’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가 깊은 예술적 교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해서 서로 마음의 장벽 쌓고 사회적 분리벽을 만들며, 서로 무시하고, 곤봉으로 패고 칼로 찌르는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옆에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앞으로 동행하게 될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가 목표로 하는 것은 ‘깊이 읽기’가 아니라 ‘피상적인 읽기’다. 더 깊이 읽는 건 각자의 몫이자 자유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를 거는 ‘마술’은 피상적인 읽기와 조우를 통해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어디까지 우리를 데려다줄 수 있을까. 당신도 궁금해하면 좋겠다. 이제 다음 회부터는 걸음을 ‘실재계의 사막’으로 옮겨놓도록 하겠다.
피상적 읽기/ 깊이 읽기를 구분했는데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내용' 아니겠는가? 무엇을 깊이 읽을 것인가? 무엇을 피상적으로라도 읽을/ 읽힐 것인가? 로쟈는 지젝의 글이 널리라도 읽히길 기대하는 모양인데 꼴통 오른 쪽 날개 할아버지들도 젊은 세대들에게 충심으로 읽히고 싶은 책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상식이고, 누구의 예절이고 교양이냐다.
상대주의를 피하기 위해 우리가 기댈 곳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본성' '이성' '성찰' '상식' '글로벌 스탠더드' 같은 걸 상정할 수 밖에 없을까?
2010년 8월 7일 토요일
obstacle épistémologique?
Thinking in terms of dichotomies
and obsessed by a sense of victimization.
Enjoying a mood of tragedy
Drawn somehow to conspiracy theories.
Distrusting local discussions
and believing that macro-theories will explain all.
These are the obstacles
that the intellectuals of this land have to overcome.
- 조한혜정 -
ps) 영어로 번역된 논문 앞 쪽에 실려서 무슨 詩인가 했더니... 공감한다. more than before...
and obsessed by a sense of victimization.
Enjoying a mood of tragedy
Drawn somehow to conspiracy theories.
Distrusting local discussions
and believing that macro-theories will explain all.
These are the obstacles
that the intellectuals of this land have to overcome.
- 조한혜정 -
ps) 영어로 번역된 논문 앞 쪽에 실려서 무슨 詩인가 했더니... 공감한다. more than before...
2010년 8월 5일 목요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박새별)
대단한 날씨다. '푹푹 찌는 찜통 더위'란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뜨거운 김이 나는 찜통 속에 들어 있는 그런 기분..
지하철에서 내려 걷는다. 땀이 좀 흘러 내려도 그냥 놔둔다. 쿨하게... 조금만 참으면, 저 건물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금새 식힐 수 있을 테니...
시원한 건 건물 속 공기만은 아닌지 이런 청승맞은 노래가 '땡긴다'. 박새별이라... 누군가 했더니, 유희열이 발굴했다는 그...
노래를 맛깔나게 잘 부른다. 광석이 형 색깔이 강한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해서 자기 노래로 만들었음. 특히 고음 부분이 듣기 좋다. 연주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좋고.
p.s.) 나만 좋게 느끼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 노래에 대한 일종의 '뒷담화'를 발견해서 덧붙여 놓는다.
"작년 이맘때쯤 시대의 가객 김광석 다시부르기 특집에서 싱어송라이터 박새별이 부른 너무 아픈 사랑은...이다. 공연 당시 모든 관객들은 숨을 죽였고 한켠에서는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박새별의 이 노래는 가슴에 남아 눈가를 축축하게 했다. 그래서 제작진은 가슴으로 노래하는 박새별이 난장MC의 적임자라는 판단으로 그녀를 마냥 꼬드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