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국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씨가 러시아 우주인 2명과 함께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날아갔다. '우주사회학'(^^)을 하는 친구가 있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발사 2분부터 발사 후 약 9분까지 서울방송이 중계한 화면을 보게 되었다. 고작 9분 방송을 본 것 뿐이지만 그것으로 전체 방송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진행에 참여한 이들의 발언 내용의 빈약함에 놀랐다. 그 이후 NASA에서 중계한 화면을 잠깐 보았는데, 한국방송의 빈약함의 정도가 심각한 지경임을 확인하고서는 화가 치미는 것이다. 아무리 NASA가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명색이 한국에서 셋 중 하나로 꼽히는 방송사이지 않은가. 서울방송의 이번 중계는 뭐랄까 한국 방송인의 존재가 얼마나 가벼운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참기 힘들 정도의... 우주선 발사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멘트란 고작 '예상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흰 불꽃이 아직도 보인다' 수준. 전문가란 사람도 한 사람 앉아 있었는데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다른 것들은 표절도 잘 하더니만, 왜 이런 것은 꿋꿋하게 무식한 방송이기를 고집하느냔 말이다. 발사 전후에 한국 언론들이 보여준 보도란 것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우주에 처음으로 간다는 사실만으로 뉴스가치는 충분할 것이고, 고산, 이소연 개인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지만, 아이가 엄마 치마자락 놓기를 두려워하는양 거기에만 머무르려고 하는 그 초딩적 행태가 문제인 것이다. 내가 그 중 하이라이트로 꼽는 기사가 이소연씨를 표현하는 세 단어가 '크레이지·섹시·쿨'이라고 전하는 것이다. 특종감이다, 특종. 누렇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독일의 그 Bild지도 차마 그런 내용을 기사에 담기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이후 기사들에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주에서는 이소연이 얼큰이가 된다느니, S라인이 된다느니...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 아니면 인터넷으로 한국 언론을 관찰하기 때문에 그런 '선정적' 기사들(의 제목)이 더 눈에 쉽게 띄는 것일까? 4.11.). 열흘간 18가지 실험을 진행하는 등 '우주관광' 이 아님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그 실험이란 것도 좀 억지스러워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눈길을 끌게 할 아이템이 부족했을까?), NASA에서 이소연씨를 우주인이 아니라 참여자라고 했다는게 뉴스가 되는 등, 뭔가 방어하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주인'을 '우주에 가 본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 같고, '무한한 우주 시대가 열렸다', '우주강국이 될 것이다'(이명박)라는 수사를 넘어서지 못한다. 장기적인 우주계획(개발, 탐사, 연구?)이 없진 않겠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도무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우주인 발사 프로젝트 공식사이트의 영문 버전의 내용이 형편 없다는 얘기를 전해들으며 영어 잘하는 그 많은 '어륀지족'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한탄한 적이 있었는데, '언론고시'를 통과한 하늘(SKY)에서 떨어진 그 많은 수재들은 도대체 다 어디 갔고, 또 그 많은 전문가들은 또 어디에서 무엇하고 있느냔 말이다. '전국민의 초딩화'가 조중동문, SBS 등 언론들의 사훈이나, 정당, 행정부, 전문가 집단의 정강, 정책, 이념이라도 된단 말인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고 위로하고도 싶지만, 그 첫술이 너무도 가벼워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기 힘든 그 너절한 '그래도 이름은 기사'들 사이에서 나름 묵직한 목소리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건 기록해 두어야한다.] (이 목록을 계속 수정해야 했다.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보기에 그들 중 '항공우주 전문가'라고 할만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팔방미인들 뿐...]
- 우주 소동에는 우주가 없다/ 김동광 [한겨레 21] [08.4.10]
- 우주인 사업은 꿈의 실현? 잘못된 짓거리?/ 이종필 [오마이뉴스] [08.4.12]
- 우주인 보도’ 열정과 냉소 사이 / 오철우 [한겨레, 편집국에서] ‘ [08.04.13.]
그 중 백미는
- "차라리 '쇼'라고 말하지 그랬니!"/ 강양구 [프레시안] (역시, 강 기자) (08.04.21)
이제 좀 더 근원적인 성찰도 등장한다.
- ‘돈 먹는 하마’ 유인 우주비행/ 김명진 [한겨레 21] (08.04. 24.)
2008년 4월 9일 수요일
2008년 4월 4일 금요일
상호작용, 성공적 대화?
사회학에서 등장하는 '상호작용'이라는 우리말 단어는 interaction, Interaktion의 번역어이다 (사실 그 아이디어의 저작권자는 Simmel 이고 그는 'Wechselwirkung'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게 미국에 건너가서 interaction이 되었고, 그것이 독일에 수입되어 Interaktion이 되었다. cf. Jaworski 1995). 허나 '상호작용'이 너무 물리적 -혹은 비인간적인 - 느낌을 주기 때문에 '교섭'(交涉)이라는 대체어를 제시한 학자도 있었다 (박영신). 'action'을 '작용'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색하긴 한 것 같다. 허나 inteaction은 대면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가리키니 (이는 루만의 정의일 뿐이지만, 다른 정의는 잘 모르니 패스), 우리말로는 그냥 '대화'라고 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상호작용 혹은 대화 상황의 가장 큰 특징은 "Zwang zum Sprechen"이다 (Sprechen = 언어를 매개로 이용하는 커뮤니케이션). 성공적인 대화참여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Zwang을 잘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선문답이 이어지는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침묵은 피해야 할 최대의 적이다 (영어의 '얼음깨기'(ice breaking)란 표현이 바로 그런 상황을 가리킨다). 침묵을 피하는 혹은 말해야하는 Zwang을 처리하는 방식은 개인적으로 혹은 문화권에 따라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얼마나 믿을만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우리사회에서는 식사시간에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고 한다 (이 경우는 Zwang zum Schweigen 되겠지만). 화법, 화술, 대화법 등등 많은 책들이 많이 나와있다는 것은 그 Zwang을 처리하기가 만만치 않은 일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초면 혹은 참여자들끼리 서로 잘 모를 때 오히려 얘기가 쉽게 풀리기도 한다.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대화 주제가 적지 않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잘 아는 사이에서도 대화의 서두는 대개 매끄럽게 풀린다. 안부를 묻고 그 동안에 개인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을 확인하는 것도 routine에 가깝게 자리잡혀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어려움은 그 이후에 발생한다. 화제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한 주제가 선택되고 후속 커뮤니케이션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의 연쇄가 만들어진다. 교집합이 적을 때 interaction의 어려움이 극대화된다. 그 해결 방식은? 대화의 실마리는 대개 교집합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 싫은 참여자는 침묵함으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고, 적극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화제를 꺼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자신(ego)의 경험, 지식을 대화의 화제로 anbieten하는 것이다. 후속 커뮤니케이션이 매끄럽게 진행되는지는 타자(alter)의 반응에 달려있다. 대화가 종료되기 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커뮤니케이션이 재생산되기 때문에 사회체계로서 대화는 존속하거나 사라질 뿐이지만, 대화 참여자들은 곧잘 대화 상황을 성공적/만족 혹은 실패/불만족 등으로 관찰, 기술한다. 어떤 경우에 대화가 성공적이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 우리는 매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겠지만, 인격과 인격이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닐까? (인격은 보통 person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 경우 '심리체계'로 보면 좋겠다. 심리체계와의 구조적 연동은 커뮤니케이션으로 구성된 대화가 가능하게 위한 조건이기도 하지만 해서 이미 구조적으로 연동되어있지만, '인격이 만난다고 할 때'는 그 이상 심리체계의 학습 그리고 변화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대화가 겉돈다는 것은 인격이 서로 교류하면서 학습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성공적인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공감대를 찾거나/찾도록 도와주거나, 학습할 준비 태세를 갖추거나/ 갖추게 하거나... 이런 점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Jaworski, Gary D. (1995), Simmel in early American sociology: Translation as social action, in: International Journal of Politics, Culture, and Society 8(3): 389-417
Jaworski, Gary D. (1997), Georg Simmel and the American Prospect, New York: SUNY Press
Jaworski, Gary D. (1995), Simmel in early American sociology: Translation as social action, in: International Journal of Politics, Culture, and Society 8(3): 389-417
Jaworski, Gary D. (1997), Georg Simmel and the American Prospect, New York: SUNY Press
2008년 3월 31일 월요일
道可道 非常道
내가 대략 이해한 바로 이른 바 '언어학적 전회' 이후 인문학, 사회과학의 여러 학문에서 인간의 인간됨, 또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언어가 얼마나 한계를 지닌 매체인지를 알게 된다. 이런 포스트모던한 세계는 道可道 非常道로 표현되는 노자의 세계와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노자의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개인주의적이다. 사회적인 것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기 힘들다). 의사소통에 주목하는 사회학이 보여주는 세계는 언어의 세계보다 훨씬 넓은 것같다. 이중우연성으로 대표되는 의사소통의 난관을 극복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마련해 놓은 각양 각종 '비언어적' 의사소통매체에도 주목하기 때문이다 (경제의사소통을 위해 도입된 '화폐'가 가장 대표적인 비언어적 매체이다). 물론 언어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매체임에 틀림없다. 특히 대면해서 커뮤니케이션하는 '상호작용' 상황에서 특히 중요하다. 비언어적 요소들이 mitspielen 하지만 가격, 권력, 진리 등 상징적 매체를 이용하는 기능체계들에 비하면 더 그렇단 얘기다 (기능체계 중 정치가 특히 언어적이긴 하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상호작용? 상상하기 힘들다. 언어의 사용을 극도로 절제하는 경우는 '선문답'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망망한 우연성의 바다에서 의미가 만날 수 있다는 것, 불가사의한 일이다. 대화분석을 하는 사회학자들이 반드시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사례이리라 (아마 이런 경우에 대한 연구는 없지 않을까, oder?). 상호작용은 의사소통에 참여하도록 - mehr or weniger -강제받은 상황이다. 선문답이 아니라면 그 경우에 침묵을 지키며 오래 버틸 수 있기란 힘들다. 여러 불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Zwang zum Sprechen". Zwang은 자꾸만 달아나는 의미를 붙잡아서 연결 의미를 부여해주도록 애써야 하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Zwang을 피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효과적인 방식 중 하나는 내가 zwingen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의사소통의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정보가 전달된 이상 나는 그것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정보도 전달하지 않으려고 침묵하는 것 그 자체도 하나의 정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상호작용이 지속되도록 다양한 방식의 규칙을 개발해 오고 있다. 그건 그 상황에서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Vorrat는 역사적, 문화적, 국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부르드외가 잘 보여주는 대로 그건 계급적 습관이기도 있고 (Habitus), 개인적 역량(Leistung)이기도 하다. Interactor로서 어떤 능력이 더 높게 평가되는가, 그것은 당연히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좁은 의미로 '사회적'이란 것은 interaction 상황 자체를 의미한다). 홀로 자신과 대면하는 것조차 두려워 하는 현대인들에게 침묵은 매우 불편한 상태이다 (어짜피 인위적인 소음으로 둘러쌓여 있으니까, 그 소음이라도 내가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walkman, mp3 player 제조업자들을 먹여 살리는 것 아닐까?). 신과 대면할 때조차도 침묵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바로 통성기도로 타나는 것이다. 티비, 라디오, 최근에는 인터넷까지, 매체를 통해 그것이 비록 소음일지언정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놓치는 것은 道可道 非常道의 세계이다.
2008년 3월 24일 월요일
꿈 2
음. 꿈에 대해 쓰며 착한 잠을 잘 수 있기를 기대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왠걸 못지않게 끔찍한 꿈을 꾸고야 말았다. 굳이 장르를 부여하자면 호러액션무비쯤됨직한 꿈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것이다. 그것도 부활절을 맞이하는 날.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억누르지 않고 살아보려고 애쓰는데, 그것도 객관적인 조건을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더 마음을 비울 일이다. 더 버릴 일이다. 움켜잡고 있는 것들을 모두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아주 흔적도 없이 마음 속에서 모두 털어내야 할 것이다.
2008년 3월 22일 토요일
Falling Slowly (from 'Once')
I don't know you
But I want you
All the more for that
Words fall through me
And always fool me
And I can't react
And games that never amount
To more than they're meant
Will play themselves out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We've still got time
Raise your hopeful voice you have a choice
You've made it now
Falling slowly, eyes that know me
And I can't go back
Moods that take me and erase me
And I'm painted black
You have suffered enough
And warred with yourself
It's time that you won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We've still got time
Raise your hopeful voice you had a choice
You've made it now
Falling slowly sing your melody
I'll sing along
2008년 3월 18일 화요일
'예배와 제사' (정용섭)
아래는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인 정용섭 목사의 글이다. 매우 압축적으로 써서 잘라내기가 마땅찮은 탓에 좀 길지만 전문을 옮겨 놓는다. 예배의 본질을 이 정도로 시원하게 정리한 글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예배가 인간의 종교적 감수성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 부분엔 큰 박수를 보낸다. 전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데 다만 '예전'에 대한 강조와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이른 바 '열린 예배'에 대한 부정적 시각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한국 예배형식의 변화는 한국 기독교 신앙행태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전에는 건조한 주일예배가 한 편에 있고, '은혜체험'을 제공하는 수련회, 부흥회, 기도회 등 이른 바 '집회'가 다른 한 편에 있어서, 그 둘이 분업하는 형태였다. 모던한 한국 교인들은 그 분리를 '열린 예배' '찬양예배' 같은 형식으로 지양하는 것 같다. 예배의 행위자인 인간의 정신세계는 知情意 등 여러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서 신앙형태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이 전통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도 기독교인들은 情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전통을 만들어 왔으리라 (수도원 전통?). 그런 점을 모른척하며 예전예배만 강조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좀 떨어진다. 예배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한 형식의 문제에 대해서는 좀 관대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 인용 중 강조는 내가 첨가한 것).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아마 예배가 자주 드려진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이기에 힘쓰라는 가르침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며, 신앙적 열정의 발로이기도 하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보다야 자주 드리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도 예배가 바르게 드려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조금 비판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너무 많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는데서 오는 역작용인지 모르겠다. 주일에 진정한 마음으로 한번 예배를 드렸다면 사실 더 이상의 예배는 필요하지 않다. 군것질을 많이 하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줄 모르고,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하니까 결국 자주 군것질을 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지나치게 자주 드리는 예배행위와 잘못된 예배는 일종의 악순환인 것 같다.이런 악순환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예배 개념의 왜곡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참된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에서 신자들의 종교적 욕구인 은혜가 더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말이 “은혜를 받으러 간다.”는 말과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건 분명히 예배에 대한 몰이해이며, 변질에 이르는 첩경이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지평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면 당연히 은혜를 경험하겠지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예배에서 은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은혜는 예배에서 결코 주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일 뿐이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한민족의 전통적 전례인 제사행위를 예로 들겠다. 우리의 전통적 제사행위가 조상신에 대한 숭배이며, 신약의 예배 및 구약의 제사가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배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형태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양측 모두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모든 걸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사행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조상에게 집중한다. 그들은 제사행위에서 어떤 반대급부를 원하지 않고 최선으로 그 행위에 천착할 뿐이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요구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만 집중해야 한다.제사는 엄격한 절차와 의식에 따라서 진행된다. 제상에 음식을 올리는 방법이나 술 따르는 방법도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 제사의 방식이 이렇게 일정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조상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드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배도 역시 그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예전이라고 한다. 그 예전은 지난 2천년동안 교회가 하나님에게 최대한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선택한 종교적 의식이다. 기도, 찬송, 말씀봉독, 교독, 성찬, 설교 등등,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순서는 오직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에게 맞춰져 있다. 그런 모든 예전도 역시 역사 과정에서 사람들이 결정한 것이니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그래서 그 시대에 맞도록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전통적 예전 예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완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쉽게 상대화하지도 말아야한다. 오늘 소위 <열린 예배>라는 방식의 예배는 이런 전통적 예전을 상대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하다. 이런 예배의 무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은혜에 놓인다. 예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적 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은혜 지상주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의 근본을 허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은혜까지도 세속화한다. 은혜의 주체인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은혜에 종속되어야 할 인간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해서, 은혜를 인간의 종교 심리적 차원으로 끌어내릴 위험성마저 보이고 있으니, 은혜의 세속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우리가 지금 로마 가톨릭의 미사가 빠지기 쉬운 형식주의나 엄숙주의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예배의 주체를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단순히 청중들의 종교적 친교 모임인지, 아니면 참되게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doxology)인지 조금만 세심하게 살펴보라. 모든 실상이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아마 예배가 자주 드려진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이기에 힘쓰라는 가르침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며, 신앙적 열정의 발로이기도 하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보다야 자주 드리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도 예배가 바르게 드려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조금 비판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너무 많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는데서 오는 역작용인지 모르겠다. 주일에 진정한 마음으로 한번 예배를 드렸다면 사실 더 이상의 예배는 필요하지 않다. 군것질을 많이 하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줄 모르고,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하니까 결국 자주 군것질을 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지나치게 자주 드리는 예배행위와 잘못된 예배는 일종의 악순환인 것 같다.이런 악순환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예배 개념의 왜곡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참된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에서 신자들의 종교적 욕구인 은혜가 더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말이 “은혜를 받으러 간다.”는 말과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건 분명히 예배에 대한 몰이해이며, 변질에 이르는 첩경이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지평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면 당연히 은혜를 경험하겠지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예배에서 은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은혜는 예배에서 결코 주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일 뿐이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한민족의 전통적 전례인 제사행위를 예로 들겠다. 우리의 전통적 제사행위가 조상신에 대한 숭배이며, 신약의 예배 및 구약의 제사가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배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형태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양측 모두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모든 걸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사행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조상에게 집중한다. 그들은 제사행위에서 어떤 반대급부를 원하지 않고 최선으로 그 행위에 천착할 뿐이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요구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만 집중해야 한다.제사는 엄격한 절차와 의식에 따라서 진행된다. 제상에 음식을 올리는 방법이나 술 따르는 방법도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 제사의 방식이 이렇게 일정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조상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드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배도 역시 그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예전이라고 한다. 그 예전은 지난 2천년동안 교회가 하나님에게 최대한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선택한 종교적 의식이다. 기도, 찬송, 말씀봉독, 교독, 성찬, 설교 등등,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순서는 오직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에게 맞춰져 있다. 그런 모든 예전도 역시 역사 과정에서 사람들이 결정한 것이니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그래서 그 시대에 맞도록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전통적 예전 예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완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쉽게 상대화하지도 말아야한다. 오늘 소위 <열린 예배>라는 방식의 예배는 이런 전통적 예전을 상대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하다. 이런 예배의 무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은혜에 놓인다. 예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적 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은혜 지상주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의 근본을 허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은혜까지도 세속화한다. 은혜의 주체인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은혜에 종속되어야 할 인간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해서, 은혜를 인간의 종교 심리적 차원으로 끌어내릴 위험성마저 보이고 있으니, 은혜의 세속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우리가 지금 로마 가톨릭의 미사가 빠지기 쉬운 형식주의나 엄숙주의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예배의 주체를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단순히 청중들의 종교적 친교 모임인지, 아니면 참되게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doxology)인지 조금만 세심하게 살펴보라. 모든 실상이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
2008년 3월 17일 월요일
이중우연성의 해소는 우연?
사회적 행위 혹은 커뮤니케이션은 이중우연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중우연성은 각각 우연성을 가지고 있는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 SZ 152) 타자와 자아가 서로의 우연성을 고려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중우연성은 만약 자아가 타자의 행동의 결과에 자신 행동의 가능성을 종속시키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각각 자기준거적 심리체계인 자아, 타자 사이에서 이중우연성은 피할 수 없다 (가장 단순한 사회형태라고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대화상황에서조차도). 그것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모델을 제시한다 (파슨즈, 하버마스, 루만). 파슨즈의 경우 상호작용에서 이중우연성을 해결하는 방식을 특정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있는 가치, 문화에서 찾았고, 그것에 하나의 독립적 체계의 위치를 부여했다 ("shared symbolic system") (파슨즈가 루만과 달리 현대사회를 단수가 아닌 복수로 본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루만은 이중의 우연성의 해소를 진화론적 선택으로 본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이중우연성은 커뮤니케이션의 비선형적 동학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환경과 구분되는 체계가 '우연히' 생성되고 체계의 지속성, 즉 커뮤니케이션의 연결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구조가 형성된다. 하지만 루만도 그 구조를 '사회구조'와 '의미론'(적 구조)로 크게 구분하면서 구조 안에 매우 다양한 메카니즘을 수용할 이론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문화, 개념, 상징, 기억 등등은 의미론으로 포함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파슨즈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갈리는 부부은 구조가 먼저냐 체계가 먼저냐 하는 질문이다. 그에 대한 답은... 파슨즈는 구조기능주의, 루만은 기능구조주의.
사회는 창발적 질서
'Soziale Systeme' 국역본이 나온 이후 루만이 좀 더 활발하게 소개되는 것 같다. 연세대 대학원 신문에 루만의 사회론을 간략하게 소개한 글이 실렸는데 (필자: 정성훈), 그 중 일부를 옮겨 놓는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의식적 내지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사물적 내지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는 창발적(emergent) 질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과 객관적 사회학을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하버마스처럼 주체 개념을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체계들은 어떤 공동의 실재 차원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가능한 것은 ‘기대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우연성, 즉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이다.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계들이 각각의 의도를 억제하여 기대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 구조화된 우연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통지, 이해라는 3중의 선택 과정인 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은 의식체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실재의 차원, 즉 사회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인간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보며, 인간은 사회적 체계와 상호침투할 수는 있지만 환경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다루어온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루만의 전환 지점, 즉 사회적 체계를 창발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
"루만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의식적 내지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사물적 내지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는 창발적(emergent) 질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과 객관적 사회학을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하버마스처럼 주체 개념을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체계들은 어떤 공동의 실재 차원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가능한 것은 ‘기대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우연성, 즉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이다.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계들이 각각의 의도를 억제하여 기대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 구조화된 우연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통지, 이해라는 3중의 선택 과정인 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은 의식체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실재의 차원, 즉 사회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인간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보며, 인간은 사회적 체계와 상호침투할 수는 있지만 환경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다루어온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루만의 전환 지점, 즉 사회적 체계를 창발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