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5일 월요일

5월 5일

오늘은 어린이날. 1818년 이 날 트리어에서 맑스 선생이 태어났고, 2008년 오늘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셨다. 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냥 우연히 날짜가 겹칠 뿐이다. 굳이 내 안에서 연결시켜보자면, 둘 모두 내가 나름 애정을 들였지만 제대로 읽지 못했던 책을 쓴 이들이라는 정도. 공교롭게 그 책들은 그들의 주저였다. 맑스의 "Das Kapital". '이론과 실천사'에서 나온 그 번역본을 사서 방학을 맞아 고흥 외가에 바람쐬러 가던 길에 들고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서 읽어보려던 호기가 가상할 따름이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사회학도로서 대략 알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박경리 선생의 대표작은 '토지'다. 나름 한국 현대문학을 섭렵하던 대학 시절 유독 '토지'는 읽기가 힘들었다. 그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었던 토지가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세로쓰기판이었던 탓이기도 했다. 이후 가로쓰기판이 곧 나왔고, 또 그무렵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TV로 방영되기까지했지만 난 책도, 드라마도 찾지 않았다. 대하소설은 줄거리를 쫓아가야 하므로 아무데서 내키는 대로 읽기가 힘들다. 시간과 인내력을 갖고 읽어가며 발동이 걸리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토지에서는 그 '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반면 이병주, 이문열, 조정래 등이 쓴 대하소설은 큰 어려움 없이 밤을 새워 가며 너무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고 보니 호평을 받는 최명희의 '혼불'도 못 읽었다. 선입견일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쓴 '대하소설'의 문체에 뭔가 독특한 게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잘 좇아가지 못하게 하는...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은 또 재미있게 읽었으니 아무래도 혐의를 그 쪽에 두게된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런 책들은 늘 부담으로 남는다. "아니 독일에서 그 오래동안 사회학을 공부했으면서 '자본론'도 안 읽었어요?" "세상에 '토지'를 안 읽었다니... 문학 얘기랑은 아애 꺼내지도 마세요" 분명히 이런 시츄이션을 경험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은 '읽은 척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쿨 2

21세기형 인간으로 살 일이다. 시류에 영합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란 말이다. 또 쿨하게 살 일이다. 쿨하게 사는 것에 방해가 되는 일들을 쿨하게 처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발목을 잡지 않도록, 아니 그런게 귀찮아서라도 이웃을 더 배려해야 한다. 쿨하게 사는 걸 방해하는 모든 것들은 내 적이다. 그것들을 모두 포용해 버릴 일이다. 그게 쿨한 삶이다.

그 때 그 사람?

미제 쇠고기 수입 반대를 요구하는 촛불시위 등 각종 집회가 열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촛불시위가 드문 드문 벌어진다. 효선,미순 사건, 노무현 탄핵반대 까지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허나 광기 서렸던 황우석 지지자들의 그 촛불시위를 경험하고선 촛불 왠지 반갑지 않다. 거리에 나서진 않았지만 디워 옹호자들의 그 열광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머릿수로 결정되지 않는 법임을 각인시켜 준 계기였다. 이번 쇠고기 협상에 문제가 많은 건 분명한대 이 무리들이 그 때 그 무리들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왠지 씁쓸해진다. 일종의 '학습효과'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촛불집회(혹은 촛불시위, 촛불문화제? 어떻게 이름붙이느냐가 [naming] 벌써 '정치'행위다, im Sinne von 2MB)의 발생 구조를 좀 더 복합적으로 볼 필요는 있다. 그 사람이 그 때 사람? 분명히 아닐 것이다. 최근 '쇠고기 사태'(내 나름으로 이름붙여본다)의 원인으로 들 수 있는 두 가지 (진중권). 우선 그 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쇠고기에만 촛점을 맞추어 대응하면 이 불 끄기 힘들다. 반대여론이 높아지는 다른 이유는 야당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두번째,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을 들고 서로 싸우는게 정치이고 대신해서 싸워달라고 선거를 통해 국회를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들이 그런 역할을 못할 때 '사람들'(민중, 대중, 시민, 10대들?)이 촛불을 들고 나서는 것이다. 여하튼 대중의 집단적 의사표현 방식은 6-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과 확연히 달라졌다. 운동에 지속성을 부여해주던 "민주화"라는 이슈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새로운 저항양식을 관찰하게 된다. 이슈에 따라 다른 대중이 조직된다. 노무현 지지자들이 ‘황빠’, '디빠'로 전환하기도 하는 것이다. 투쟁으로서의 정치 시대가 지나가고 있고 '놀이로서의 정치' 시대가 열렸다고도 진단한다 (진중권). 촛불시위가지고 사회운동의 변화에 대한 재미있는 논문을 쓸 수 있겠다. 사회운동 연구하시는 분들 뭐하시는가? 이런 것 다룬 논문, 설마 있겠지, oder?

2008년 5월 4일 일요일

미쇠고기 수입

현대 사회를 지식사회라고 부르는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한국도 당연히 그 일부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광우병'이라는 일상 경험의 지평을 뛰어넘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토론, 평가하고, 나아가 촛불시위를 조직하고 심지어 대통령 탄핵을 도모하기 까지 한다. 서로 다른 과학적 근거가 동원된다. 도대체 우리가 광우병과 미국 축산업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가?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그리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무현 프레임이 만들어 진 이후 노무현과 관련된 모든 일은 그 프레임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겐 이미 '2MB 프레임'이 주어져 있다. 누군지 기가 막힌 작명을 해냈다. 아마 본인은 '(불도저가 아닌) 컴도저 프레임'이 만들어 지길 기대했겠지만, 이번엔 수호천사역을 자처한 주류 언론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려 버렸다. 내가 평가하기에 지난 대선을 좌우했던 시대정신은 지난 10년 정권의 '연장'에 대한 거부였다. 이명박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게 아니었덨 것이다. 허나 용량이 딸리는 우리 2MB는 그 시대적 맥락을 전혀 읽지 못하고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정권을 넘겨받았다. 그 이후 이어진 삽질시리즈는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이번 '쇠고기 괴담'에 대해서도 그 양반은 '정치 논리'라는 표현을 자꾸 쓴다. 참. 광우병 걸린 소가 듣고 정신 멀쩡해질 소리다. STS쪽에서 특히 "boundary work"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것도 한 번 연구해 볼 일이다. 도대체 그 양반에게 정치는 무엇인가? 여의도 정치? 국회? 행정부에 대해 거수기 노릇하던 그 '좋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는데, 그런 '정치적' 공세를 피하려면 다른 정치적 수단을 강구할 일이지, 지금 '경제논리'로 정치 논리를 대체하려고 하는가? 그 경제논리는 또 뭐지? 그 양반의 '경제 논리'란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레토릭인 것이다. 의미론적 자원. 불행한 것은 이 정권이 출범한지 삼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그나마 다행한 점은 '실용정치'를 표방하기도 하고 경찰, 정보기관원을 풀 수 있는 시절은 아니라 여론의 저항에 직면하면 어느 정도 궤도를 수정하기는 한다는 점이다. 그때마다 번번히 등장하는 수사가 또 있지. "그건 오해였습니다. 원래는.... "
재미있는 건 이제 과학적 진술이 정치 논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 5월 6일 연합뉴스는 " '한국인이 인간 광우병에 더 취약하다'는 주장의 빌미가 된 논문을 작성한 김용선 한림대 교수가 해외로 출국한 데 이어 해당 연구실 소속 논문저자 전원이 연락이 두절돼 의문을 낳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해당 논문은 지난 2004년 '인간 유전학 저널(Journal of Human Gentics)'에 '한국인에서의 프리온 단백질 유전자(PRNP)의 다형성'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고 한다). 매우 흥미롭다. 이제 STSer들이 덤벼들 과학정치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논문조작, 생명윤리가 주 이슈였던 황우석 정치와는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지식사회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식사회의 모습을 미리 그리고선 그 특징을 한국에서 발견해 내고 기뻐하는 모습. 우리도 드디어 지식사회에... ㅎㅎ) .

사회평론가?

앞으로 시사적인 풍경에 대한 스케치를 좀 자주 해 볼 생각이다. '풍경'이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 사회학도에게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게 사회학적 진술의 근거이고 재료다. 늘 곁에 있어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 풍경이 화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전문적인 활동의 소재인 것처럼... 스케치만 해도 될 것 같다. 지금 정밀화, 세밀화를 그리겠다고 덤벼들 계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화실'에서 기술을 갈고 닦았으니 이제 바깥에 나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의 특징을 잡아내는 훈련을 해 볼 생각이다. 또 사실 이건 마음먹지 않아도 늘상 하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들이 영화를 보며 분석, 평가하는 것을 좋아할 뿐더러 안 그럴려고 해도 안 된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이동진). 사회학자들의 작업을 '좀 더' 진지하고 엄밀한 진술과 시대진단적인 진술로 구분하고, 그 차이를 논문주제로 삼는 동료가 있다. 에세이적인 글도 사회이론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친구는 그런 사회학내 흐름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을 시도하는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사회평론가'와 '사회학자' 정도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는 이념형적 구분이고 대개 현실은 언제나 그 중간 어드메쯤...). 역시 언제나 그렇듯이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내리막길 위에 있고 얼마나 더 내려가야 바닥을 보게될지 알 지 못하는 사회학이란 학문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나는 오히려 '사회학자'에 더 방점을 찍고 싶다. 어설픈 사회평론, 사회참여보다 차라리 더 진지한 '사회학적' 성찰을 내 놓는 것이 필요하다 (그게 반드시 사회통계학 전문가들만 이해하는 형식일 필요는 없다) . 혹 사회평론가로 나설 때에도 가능하면 평소 이론적 입장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스케치할 때도 사회학적 성찰 (사회의 자기기술의 일부)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할 필요가 있다.

공부총량 불변의 법칙

"경험 -> 이론세우기 -> 검증 -> 이론 확인 --> 공리, 법칙".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정립'한 법칙 하나가 있다: 이름하야 "공부총량 불변의 법칙". '공부량'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으로 양화시켜 계산한다고 가정했을 때, 특정한 단위 내 개인 공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 하루나 1주일 단위로 실험해 본 결과이지만, 1달 혹은 심지어 1년 단위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일 기준으로 오전에 놀았다면 오후, 저녁에 집중하게 되고, 1주일 기준으로 주중에 놀았으면 주말에도 공부가 잘 된다는 것이고, 결국, 1일, 1주일 단위로 보면 전체 공부양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1일, 1주일 단위의 적용사례는 바로 내 생활 자체되겠다. 이 이론이 널리 알려진 이후 한 건의 반증사례가도 제기된 적이 없어서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법칙의 첫 예외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높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음. 널리 알려져 있다는 말은 과장이긴하다. 법칙의 발표가 점심시간 동안 Uni 와 FH 를 오가는 동안 이뤄진 그 대화 상황에서 이루어졌으니까. ㅎㅎ). 이 이론은 최근 이 착상을 확장한 결과 1일, 1주일이라는 사소해 보이는 단위를 넘어서서 수년 간의 단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사례가 발견되어 이론 적용의 범위가 기대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 사례는 바로 군제대후 복학한 대학생들. 이 법칙에 따르면 '복학생들의 엄청난 공부량'도 바로 군대라는 수 년 간의 공부 공백기라는 변수도입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학계는 공부 총량의 개인차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두 가지 이론이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뇌 용적 한계설' 과 '양심설'이 그것이다. 뇌용적설은 인간이 저장,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개인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설명인데, 개인차를 유전 등 외부적인 원인에 돌리는 것으로 공부양이 적은 이들이 적극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심설'은 이런 유전환원론을 거부하는 사회구성주의라는 인식론에 기초한 이론으로, 공부에 대한 압박이 특정한 심리적 메카니즘을 형성해서 - 양심이라고 표현된다 - 그것이 공부 집중력에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다. 공부에 대한 압박의 원인을 시대상황, 부모님의 기대치, 개인의 비전 등 다양하게 언급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 변수들의 상관관계에 대한 설득력있는 모델을 나오지 않았다.
흠흠. 이상,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에까지 줄창 논 것에 대해 일요일 오전 컴 앞에서 양심찔려하는 한 늙은 학생의 신세한탄이었슴다.

2008년 5월 1일 목요일

쿨

어쩌다 보니 오늘 하루 종일 '관계'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렇게라도 써 놓아야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또 자판에 손을 맡긴다. 타인 혹은 상황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이 갖게된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의 결과로 우리는 대개 그런 감정 표현을 조절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된다. 물론 그 조절의 정도, 방식 등은 각양각색 다를 것이다. 타인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능력, 나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에 대해서 평정심을 잃지 않는 능력 등은 깊은 인격에 연결되는 성질이다. 좀 쿨하게 살 일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쿨하게...

루만 저서 목록의 끝은 어디인가?

루만 선생이 1998년 11월 6일 돌아가셨으니, 이번 가을이면 서거 10년이 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도 그의 새 책이 출간되고 있다. 매년 꾸준히 나오더니 최근에 세 권이 한꺼번에 선을 보였다. „Die Moral der Gesellschaft“, "Ideenevolution“, „Schriften zu Kunst und Literatur“ (모두 Suhrkamp). "Schriften..."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권은 논문에 참고할 필요가 있는 책이라 당장 구입했다. 소감은? 한 마디로, 실망. 두 책 모두 이미 다른 곳에 발표했던 논문을 모은 것이었다 (한 논문을 제외하고). 특히 "Die Moral der Gesellschfaft"에 실린 논문은 내가 모두 복사해서 가지고 있는 논문들이라, 흩어져 있덛 논문을 그냥 보기좋게 한 권으로 제본해 놓은 것 외에 큰 의의를 찾을 수 없다. 일부 선입견과 다르게 루만이 도덕, 윤리, 규범, 가치 등의 주제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분량의 글을 남겼음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도덕도 ".... der Gesellschaft" 시리즈의 하나로 기능체계인양 오해할 수 있게 되었지 않느냔 말이다. 예상보다 일찍 찾아 온 죽음 때문에 순서가 좀 얽히긴 했지만 루만의 사회이론은 'Soziale Systeme' 에서 시작해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로 끝나도록 계획되어 있었고, 도덕은 그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루만이 살아 있었다면 결코 이런 제목으로 책을 내지 않았으리라 (편집인 스스로 루만에게 제안했다고 밝히고 있듯이 'Soziologische Aufklärung' 시리즈에 포함되었음직하다). 또, 이 책에서는 그 동안 어떤 루만 저서에서도 볼 수 없었던 편집자 해제(Nachwort)가 붙어있는 것도 별로 반갑지 않다. 루만 저서 출간을 총괄하는 편집위원회 같은 게 있었다면 이런 식의 제목달기와 편집은 아마 불허하지 않았을까. 편집자 Detlef Horster 교수가 출판사 사장과 친한 건 아닌지... Kieserling 교수가 편집을 맡은 "Ideenevolution"은 그나마 좀 낫다. 첫 논문 "Sinn, Selbstreferenz und soziokulturelle Evolution"은 짧은 버전이 "Luhmann und die Kulturtheorie" (2004, Suhrkamp)에 실리긴 했지만 이 책에 실린 버전은 내용이 훨씬 풍부하다. 특히 구조와 의미론의 관계를 명확하게 Coevolution으로 규정한 점이 눈에 띄인다. 또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Rationalität in der modernen Gesellschaft"는 처음 소개되는 논문이기도 하다. 편집인이 밝히고 있는 대로 이 책은 애초에 루만이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의 시리즈 중 한 권으로 펴낼려고 했었던 만큼 "Die Moral ..."에 비해 루만 저작으로서 딛고 설 자리가 더 단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계획은 사랑의 의미론에 대한 글이 너무 길어져서 독립된 책으로 출간하면서 틀어졌다고 한다). 아마 앞으로 구조/의미론 관계가 체계이론 내적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라라 개인적으로 전망하는데 이 책이 거기에 적지 않은 자극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사후에 출간된 책들은 몇 권의 "... der Gesellschaft"(Politik, Religion, Erziehungssystem)를 제외하고는 대개 논문모음집이었던 것 같다. 아마 앞으로 어떤 책이 나오더라도 크게 반가워하거나 놀랄 일은 없지 않을까? Zettelkasten이 어떻게 정리되거나 해서 나오지 않는 한 말이다.
그의 이름을 단 책이 앞으로 몇 권이나 더 나올 것이며 그러면 그의 저서는 도대체 총 몇 권이될 것인가? 우선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세어보니, 번역본을 제외하고도 32권이다 (이 정도면 출판사 뿐 아니라 루만과 그 후손들의 살림에 나도 어지간히 공헌한 셈이다). 흠. 어쩌면 루만 저작은 단행본으로 100권에 육박하거나 어쩌면 그것도 넘어설지 모르겠다. 루만 저서에 중복이 많음을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 이는 독자가 자신의 다른 저서를 읽었음을 전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루만은 밝힌다. 또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러 번 반복되는 부분도 새롭게 표현하려고 애쓴다는 점을 알아챌 수 있다 - 초인적인 능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