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7일 수요일

'중국인의 反韓 정서 이해하기' 혹은 '한국인의 反中정서 이해하기'

내가 며칠 전에 한 얘기를 듣기나 한 듯이 중국 전문가(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왜? 서강대 중국문화과 교수이니까) 이욱연 교수가 대민써비스에 나섰다.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 제목은 "언제까지 '타자'의 눈으로 중국을 볼 건가? [기고] 중국의 '혐한', 그 뿌리를 밝힌다" (부제가 쌩뚱맞다). 제목이 이미 밝히고 있듯이 그는 한중관계를 성찰하기 보다는 '타자의 눈으로 중국을 보'는 우리를 성찰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한국인들의 이런 반중 정서가 바로 중국인들의 반한 정서의 토대다. (...) 따라서 반한 정서를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의 반중 정서부터 치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보는 우리의 눈을 갱신해야 한다. (...) 미국의 눈, 일본의 눈으로 중국을 보지 말고, 냉전의 틀을 버리고 동아시아 공동체 시대에 걸맞게 중국을 보는 새로운 눈, 우리의 눈을 가져야 한다." 백번 옳은 말씀이긴 하지만 왠지 시원하지 않다. 아마 가려운 데가 그 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차라리 며칠 전 소개한 어느 무명의 블로거 글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2008년 8월 26일 화요일

위기, 실망의 일상화

"Die Konservativen beginnen mit Enttäuschung, die Progressiven enden mit Enttäuschung, alle leiden an der Zeit und kommen darin überein. Die Krise wird allgemein." (Luhmann 1996 [Protest]: 91)

사회 발달의 속도에 대한 성찰, 사회가 스스로를 관찰하는 방식의 시간화는 위기의 일상화를 낳는다. 위기의 일상화는 곧 실망의 일상화이기도 하다. 太平聖代는 역사책에서나 찾을 수 있는 개념이 되었다. 또한 이는 정권교체가 코드인 민주주의적 정치체계의 작동방식과 맞물려 증폭된다. 위기와 실망감이 팽배해야 대안이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그 과정에서 보수/진보는 각기 실망과 다른 관계를 맺는다. "보수는 실망에서 출발하고, 진보는 실망으로 끝난다". 루만은 가끔씩 이런 寸鐵殺人 같은 비유로 나를 놀래킬 때가 있다.

ps)보수/진보에 대한 좀 더 익숙한 경구로는...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선인들의 공부법

<성학십도>는 노년의 퇴계 이황(李滉 ; 1501~1570) 선생이 17세의 임금 선조에게 성리학의 기본 이념을 열 개의그림으로 정리하여 올린 책이다 (원명칭은 "진성학십도차병도 進聖學十圖箚幷圖"). 성학이라는 말은 곧 유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로 성학을 풀이하고 있다. 그 중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 Diagram of the Admonition on "Rising Early and Retiring Late")"가 특히 흥미롭다."숙흥야매잠(夙興夜昧箴)이란 남당(南唐) 진무경(陳茂庚)이 만들어 잠언을 삼은 것인데, 왕노재가 이것으로 자신을 가르치고 학생들에게도 외어서 실천하도록 학습시켰다고 한다. 퇴계는 왕노재가 작성한 아홉 번째 그림을 모방해서 그림을 그리고 보충해설을 덧붙였다. '숙흥야매'란 글자 그대로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부지런히 수양하라는 내용이다." 요즘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하는 때 염두에 둘만한 가름침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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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 진무경]
닭이 울어 잠에서 깨어나면 생각이 일게 되니 그 사이에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혹은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모아 차례와 조리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근본이 확립 되었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옷을 갖추어 입고 단정하게 앉아 몸을 가다듬는다. 마음을 끌어 모으되 밝게 떠오르는 햇살처럼 해야 한다. 몸을 업숙하고 가지런히 정돈하여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한결 같아야 한다.

책을 펴서 성현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회와 증자가 앞뒤에 있을 것이다. 성현께서 말씀하신 것을 친절하게 귀담아 들어 제자들의 질문과 변론을 반복하고 참고하여 바르게 고쳐야 한다.

일이 생겨 대응할 경우에는 실천으로 증명해야 한다. 밝은 천명은 빛나는 것이니 항상 눈을 거기에 두어야 한다. 일에 대응하고 나면 예전과 같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아 사사로운 생각을 멈추게 해야 한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순환하는 것을 오직 마음만은 볼 수 있으므로 고요할 때 이 마음 잘 보존하고 움직일 때 관찰하여 마음이 둘 셋으로 나뉘어서는 아니 된다. 글을 읽다가 틈이 나면 간혹 휴식을 취하고 정신을 활짝 펴서 성정을 아름답게 길러야 한다.

날이 저물어 사람이 피곤해 지면 나쁜 기운이 들어오기 쉬우므로 몸과 마음을 잘 가다듬어 정신을 맑게 이끌어야 한다. 밤이 깊어 잠을 잘 때는 손발을 가지런하게 모아 아무 생각을 하지 말고 마음과 정신을 잠들게 해야 한다.

밤의 기운으로 마음과 정신을 잘 기르면 정이 다시 원으로 돌아 올 것이다. 이것을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두어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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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우(右) 잠(箴)은 남당 진무경(陳茂卿)이 지어 스스로 경계한 것입니다. 금화 왕노재(王魯齋)가 일직이 태주의 상채(上蔡) 서원에서 교육을 맡았을 때, 오로지 이 잠만을 가르쳐, 배우는 사람들마다 모두 외고 익혀서 실행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삼가 노재의 경재잠도를 본떠 이 도를 만들어 그의 도와 상대가 되게 하였습니다. 원래 경재잠에는 공부해야 할 영역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영역에 따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도에는 공부해야 할 때가 많이 적혀 있으므로, 그 때에 따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습니다.

무릇 도의 유행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한 자리도 이가 없는 곳이 없으니, 어느 곳에서 공부를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잠깐 사이라도 정지되는 일이 없으므로 한 순간도 이가 없을 때가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를 그만두어서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사자(子思子)는 이르기를, "道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삼가 조심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고 하였고, 또 "은밀한 곳보다 잘 드러나는 곳이 없고, 세미(細微)한 것보다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활에 있어, 장소와 때를 막론하고 존양(存養)하고 성찰하여 그 공부를 힘쓰게 하는 법입니다. 과연 이와 같이 할 수 있으면, 어느 영역에서나 털끝만큼의 과오마저 없게 될 것이며, 어느 때나 순간의 끊임마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병진해야 합니다. 성인이 되는 요결, 그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상의 다섯 도는 심성에 근원을 둔 것인데, 요점은 일상생활에 힘쓰고 경외의 태도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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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빌레펠트대학 LiLi도서관에 경북대에서 발간한 "퇴계학연구" 여러 권이 꽂혀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아마 기증했을 것이고 어느 한 사람 들춰나 봤을까 싶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일이다.

2008년 8월 25일 월요일

중국 혐한(嫌韓)은 예고된 것

이번 올림픽에서 중국인들이 보인 반한감정에 놀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최근 혐한 분위기의 근원을 두 나라 관계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흥미롭고 설득력도 있다. 전문가가 쓴 글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거칠기도 하지만, 이만한 글도 - 인터넷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 한국언론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많은 중국전문가들은 다 뭐하시나? 물론 이런 진술을 학술적 코드로 판단할 일은 아니다. 학자들이 쓴다면 대국민 서비스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내용을 일부 발췌해 놓는다.

과거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을 아주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호감의 밑바탕이 한민족이 역사상 중국에게 별로 대든 적이 없이 중국의 충실한 꼬붕 노릇을 했다는 경험이라는 점이었다. 단채 신채호는 중국의 주변 민족이 모두 한번 씩은 중원을 차지해 황제 자리에 올라 한족을 지배했으나 오직 조선 민족만이 중원을 차지하기는 커녕 소중화를 자부하면서 한족의 노예 노릇을 자청했다고 한탄했다. (...)
중국인들은 과거 중국의 속국이었고 유교문화에 깊숙하게 빠졌으며, 중국에 반항한 적이 없다는 이유가 한국을 좋게 본 밑바탕이었다. 여기에 한국의 경제성장은 개혁개방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는 중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모델이었고, 마침 한국 드라마와 가요 등도 보고 듣기에 좋으니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당시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부러움과 멸시감이 묘하게 복합된 이중적 양태였다. 단 우리 눈에는 부러움만이 부각됐을 뿐 멸시감이 한쪽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
그런데 중국이 한국과의 교류가 급격하게 늘면서 자세하게 보니 그들의 원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됐다. 우선 중국인들은 한국을 역사적 '꼬붕'으로 봤는데, 한국인들은 중국을 야만인으로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 여기에 중국 안의 의도적인 혐한류 조장도 한 몫을 했다. 특히 중국 연예오락계를 중심으로 한 혐한류 조장이 최소한 5년전부터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연예계는 한국 드라마와 가요가 중국 시장을 장악하자 큰 피해를 봤던 것이다. (...) 반한류 움직임이 좀 더 복잡하게 전개된 것은 중국 정부의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중국 정부는 강대국들의 패권을 분석하면서 단지 무력이 아니라 소프트 파워, 즉 문화 권력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어떤 민족을 지배하는데 단지 무력 만으로는 부족하며 문화적 동화가 훨씬 더 위력적이라고 본 것이다. 정권적 차원의 반한 감정은 더 큰 문제 중국도 자신의 소프트 파워로 아시아를 장악하고 싶은데, 한류가 중요 경쟁 상대였다.

열등감과 자부심의 기묘한 결합이라고 봐야 하겠다. 컴플렉스는 적게 가질수록 좋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2008년 8월 22일 금요일

영화의 문법

영화가 방송드라마와 다른 점은 그 문법이 좀 더 복잡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영화평론가는 있지만 드라마평론가는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고. 영화에 대해서는 뭔가 할 말이 더 많은 것이다. 그 더 복잡하다는 문법의 내용이 무엇일까? 우선 '장르'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의 내적 분화라고 볼 수 있겠다.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자면, 액선, 스릴러, SF, 호러, 드라마, 슈퍼히로, 애니메이션, '에로' 등등. 장르에 대한 거라면 우리 드라마 쪽도 할 얘기가 있을 것이다: 불륜, 신분을 초월한 연애, 역사물, 정치물 등등. 하지만 영화 쪽 장르가 더 세분화되어있고, 장르에 대한 충성도도 더 높다. 왜 그럴까? 단순하다. 드라마는 불특정 다수가 보는 것이고, 혹은 적어도 그걸 전제하고서 만들고, 영화는 입장료를 내고서 영화를 볼 준비가 되어있는 관객층을 고려해서 만드는 것이다. 영화 역사가 길고 영화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한 지역의 관객일수록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이다 (딱히 제시할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긴 블로그아닌가). 코흘리개서부터 80대 할머니까지, 4천만이 보는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보기 시작해도 심지어 몇 회를 빼먹었더라도 계속 따라올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아닌게 아니라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대개 그렇다. 물론 영화에 대한 담론이 세분화되기 전에 영화도 그런 식으로 작동했고, 아직 그런 '전통'이 남아있기도 하다. 한국에서 수백만 심지어 천만 관객이 드는 영화는 대개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최근 상영되고 있는 '놈놈놈'은 깐느 버전이 아닌 한국용 버전이라는 얘길 들었다. 깐느 버전은 액션을 더 강조했고, 한국 버전은 줄거리를 좀 더 강조했다고 한다. 액션영화를 그것으로 즐길 수 있는 관객이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몇 년 전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영화 '디워'도 CG나, 괴물/괴수에 초점을 맞춰서 보면 그 정도로 혹평을 받아야 할 영화는 아닌데 뜬금없이 애국심 마케팅이 끼어들어서 오히려 더 이상한 영화로 만들어 버렸다. 허나 최근에는 한국 관객들 취향이 좀 더 까다로워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수준이 높아졌다'고 표현은 좀 거북하고, 장르이해도가 높아졌다고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앞으로는 감독이나 관객이나 더 장르에 충실하게 될 것이다. 장르를 지키건 깨건, 그것을 중심으로 영화 커뮤니케이션이 프레이밍될 것 같다는 얘기다. 사실 '장르'에 대한 이해는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데 실제로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007 씨리즈를 보면서 왜 저리도 비현실적이냐는 핀잔을 던져서는 곤란하다. 007에서는 제임스 본드의 카리스마, 적성국 설정, 본드걸, 무기, 자동차 추격전 등 007영화 코드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본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벼랑 위의 포뇨' (2008),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2004).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과 예비거장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다. '포뇨'는 감독의 전작에 비해서 줄거리가 빈약하기 그지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진정한 아동용이었다. '구름의...' 는 그 양반 특유의 '잔잔함'이 너무 강해서 끝까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언제가 두 영화를 극장에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림이 참 보기 좋았던 것이다. '포뇨'는 CG를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화면이라고 하고, '구름의...'에 대해선 다른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자세한 묘사가 뛰어나서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다. 최근에 미국에서 엄청난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다크 나이트'도 장르적 특성을 고려해야 잘 감상할 수 있다. 이른 바 '슈퍼히로'물인데, 배트맨은 슈퍼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과는 다르게 매우 인간적인 인물(?)이다. 과거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소심하기도 하고... '다크 나이트'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전작 '배트맨 비긴스' (2005)에서는 배트맨을 더 '인간화'시켰다. 이번 영화에서는 심지어 배트맨과 조커의 선악구도를 훨씬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런 영화는 '슈퍼히로물'이라는 장르의 진화로 봐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핸콕'(2008, Peter Berg)도 전형적 '초딩용' 영화인데도, 그나마 인상에 남는 건 새로운 슈퍼히로상을 만들려 고 했다는 점. 세상에... 노숙자 슈퍼히로라니... 물론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라면 장르같은 문법을 모르는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을 것이고,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런 '명화'가 나오는 일은 참 드문 일 아닌가. 또 한 가지 중요한 영화의 문법으로 '감독'을 들 수 있을텐데, 그 얘긴 나중에... 어쨌든 난 드라마나 텔레비전을 멀리 하는 편인데, 많은 시간을 요구하기도 하려니와, 당장 먹기에는 좋은, 설탕 많이 넣은 음식 같아서 그렇기도 하다. 내 음식 취향을 찾아가는 그런 재미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티비프로그램도 찾아가며 볼 수 있긴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않다. 대개 한 손에 리모콘을 들고 있거나, 적어도 손이 닿는 범위 안에 놓아 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지만... 참, 놀기 위해서도 공부해야 하다니. 직업병인가... 근처 도시로 간단한 여행을 떠날 때도 그렇지 않은가. 대략 역사, 주요 건물 건축양식이라고 알고 가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직업병? 문화병? 문명병?

스포츠와 연애의 공통점

오늘 한일전 야구 준결승 소식을 들으면 든 생각. 8회말 2대 2, 상황에서 이승엽의 홈런으로 극적인 역전. 캬... 왜 이럴 때 아나운서들이 쓰는 상투적 표현이 있지 않은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어쩜 실제로 '시청자'는 스포츠와 드라마를 같은 맥락에서 소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맥락이란 게 뭘까? 특히 전문화된 운동경기는 왜 그렇게 성공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상상하기 힘든 엄창난 액수가 오가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가? 드라마나 전문스포츠가 갖는 기능을 '예측불가능한 상황, 극적인 상황의 체험'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사회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근대화는 합리화, 분화의 과정이다. 베버는 합리화를 탈주술화, 예측가능성 증대 등으로 표현한다. 예측가능성의 극대화가 근대를 이끌어 낸 힘의 원천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비합리적으로 치부되던 모든 것들이 원천적으로 배제되거나 관리가능한 영역 안으로 포섭된다. 광기, 감정, 신분, 도덕, 육체 등등. 허나 모든 게 예측가능한 사회란 또 얼마나 지루한가. 그렇다고 우연, 예측불가능성이 과도하게 드러나는 상황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전쟁, 공황, 외환시장 붕괴 등을 생각해 보라. '재미있게'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드라마적인 요소는 있어야 하지 않은가?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욕구를 합리적인 방식, 관리가능한 범위에서 채울 수 있는 방식으로 전문 운동경기가 등장한 것은 아닌지... 드라마, 영화도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지 않는가? 누구나 불륜, 일탈, 복수 등을 꿈꾸지만 그런 욕망은 통제당한다. 안전한 방식으로 극적인 상황을 간접체험하게 해주는 기능을 하는 건 아닌지. 우리 마교수님의 지론이 '문학의 기능은 대리배설'아니었던가? 문학, 영화, 스포츠는 어짜피 '문화상품', '소비재'라는 점에서 경제체계와 연동된다.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연애도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결혼, 신분 이동 혹은 신분확인, 경제적 안정성, 경제력 확보 등에 대한 부담에서 해방된 현대 연애는 어떤 면에서 스포츠, 드라마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은 실제로 체험한다는 것. 아, 실제로 운동경기에 참여하는 것도 그런 욕망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담 결국 인간일까? 인간의 욕망? 허나 그 욕망이란 것도 본원적으로 주어진 것만은 아니니, 결론은 다시 共進化인가? 욕망과 사회의 공진화?

한국 공영방송의 미래

강형철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최근호 창비주간논평에서 한국 공영방송을 이렇게 평가한다. 우선 그동안 "KBS와 MBC 그리고 EBS라는 우수 공영방송을 가진 데에 자긍심을 느꼈"다고 얘기하면서, "한국의 공영방송은 방송 품질 면에서 서구의 우수 사례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창의력이나 건전성이 서구의 그것들에 크게 뒤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적으로 미약한 공적 재원 규모나 군부독재가 남긴 외상을 고려한다면 지난 20년간의 발전상은 사실 놀라울 정도이다. 한국의 공영방송은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역동적 사회변혁의 중심에 서서 문화적·정치적 진보에 일정부분 기여하며 서구 공영방송의 일반적 모델에 근접하는 길을 걸어왔다. 이는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정적인 일본 체제를 반영하는 데 그쳐 문화적, 정치적으로 모두 보수적이며 관료적인 색채를 띠어온 것과 대비되는 점이었다." 지속적으로 방송을 관찰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진 않지만, '어둠의 경로'를 통해 접하게 되는 프로그램들을 일별해보면 난 강교수의 평가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본 것만 언급하자면... "EBS 다큐 프라임 상황심리프로젝트: 인간의 두 얼굴" 삼부작이었다. 그 제목은 각각 1.상황의 힘, 2. 사소한 것의 기적, 3. 평범한 영웅.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상황의 힘을 실제로 실시한 다양한 실험, 국내외 자료화면, 전문가들의 발언을 토대로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실 전형적인 사회학적 주제임에도 - ethnomethodology 혹은 '사회'심리학 (not 사회'심리학') - 초대받은 사회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 심리학자, 교육학자들이 '우리도' 할 수 있는 얘기를 독점하고 있었다. 아니 사회학자가 참여했다면 더 재미있는 다큐가 되었을 것이다. 허나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이 분야를 심도있게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는 사회학자는 - 내가 아는한 - 없다. 어쨌든 EBS에게 이 한 마디는 해 주고 싶다. Weiter so!
허나 현 시국은 공영방송에 불리하고 전개되고 있다. 강교수도 "이번 KBS 사장 해임사태를 보면서 그간 공영방송에 관심을 두고 공부해온 사람으로서 착잡한 마음이 든다"고 얘기한다. "정연주 사장의 해임사태는 한국에서 어렵게 건설해온 공공영역의 가능성을 일거에 없애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권력이 쉽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 자체가 공공영역이며 공영방송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상업방송의 난립상황에서 공영방송이 방송의 표준 향상을 위해 기여하는 기능이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언젠가도 썼지만 난 이명박씨에게 빚을 진 게 있다. 내게 역사가 거꾸로 흐를 수도 있다는 귀중한 가르침을 내려주신 것이다. 또 덕분에 한국 현대사가 이뤄낸 성과가 그냥 마땅히 주어져야 할 것도 아니었고, 언제든지 뺏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내 어찌 고마워하지 않을소냐... 그들은 그 언저리에 있으면 그동안 직접 투자했던 '주주'들에게 전리금, 이익금 배당하는데 혈안이되어 최소한의 상식, 양식, 체면지키기를 포기한 집단이다. 자리챙겨주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제 본격적으로 계급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촛불시위도 그렇다. 촛불시위를 이해하고 이어나가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하다던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건의 현장에서 함께 웃고 울고 분노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대중, 언론이 잦아들 때 덩달아 말 수가 적어지면 곤란하지 않은가? 무슨 새역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그들은 모두 어디 갔는가? (아, 아애 사건의 시대사적 의의, 맥락을 좇아가지 못하는 부류는 당연 논외다). 최장집 욕하는 이들이 많은데, 내 관점에서 보면 그만한 인물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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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우울한, 아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뉴스를 또 접한다. 아... 정말이지...
"청와대가 22일 신임 KBS 사장 인선문제로 청와대 주요 인사들과 KBS 전현직 임원들이 만난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모임의 목적은 사장 인선 개입은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저를 포함해 정정길 실장과 최시중 방통위원장, 유재천 KBS 이사장 등이 만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하면서도 “그러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KBS의 공영성 회복과 방만경영 해소라고 하는 과제에 대해 방송계 원로분들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자리”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경향신문> 이날치 신문에서 지난 17일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이동관 대변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유재천 KBS 이사장 등이 서울시내 모 호텔에서 만나 KBS 신임 사장 인선과정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이번 신임 사장 공모에 응해 이사회에서 추린 5명의 후보에 포함된 김은구 전 KBS 이사도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