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빈 선생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쉽게 설명하고자 했다. 잠시 그것을 옮기면 우선 김교빈 선생은 인간이란 '3일을 굶으면 담장을 넘는' 그런 존재임을 설명했다. 물론 이 말 한마디 한 것은 아니고 물질 세계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풀이가 이어졌다.
다음으로 덧붙인 것은, 그렇게 굶어 죽기 직전에 처한 인간에게 누군가 밥을 주면서, 정성껏 차리거나 그도 아니면 자기네들이 먹는 상에 숟가락 하나 더하여 같이 먹자고 하는 게 아니라, 먹다 남은 거 긁어 모아서 적선이라도 하듯이 내밀면 비록 사람이 3일을 굶었어도 '싫소, 나는 그거 먹지 않겠소' 하면서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택한다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억압적 현실이 비참한 상황을 강요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땅히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그것이 진실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실천 의식이라는 설명이었다."
내가 여러 번 인용한 정윤수 블로그에 오늘 올라 온 얘기 중 일부다. 내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물질 (혹은 요즘식으론, 유전자) 환원론적 이해에 큰 매력을 못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고. 근대과학, 즉 실험과학 혹은 엄밀과학의 방법론으로 인생사, 세상사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 인문학, 사회이론의 존재감은 바로 그런 인식에서 주어지는 것 아닌가? 자연과학 흉내내서 얻은 것도 많지만, 이제 그 자연과학마저도 변하지 않는가 (cf. '통섭'논쟁). 인문학, 사회이론은 세계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줘야할 시대적 사명까지 갖고 있는 것이다.
ps) 김교빈 교수가 호서대 '철학과' 교수였는데, 이 과의 이름이 '문화기획학과'로 바뀌었다고 한다. 코메디아닌가? 문화기획학교? 상지대 사회학과 교수는 언제부터인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소개되던데... 소리도 요란한 그 '문화의 과잉'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사회 '문화 빈곤'의 징표다. 2MB 일당이 각개 각층의 지원을 받아 활개칠 수 있는 그런 '문화적 토양'말이다.
2008년 11월 13일 목요일
2008년 11월 12일 수요일
'더' 독해지기
기본적으로 여유있고 느슨하지만 나름 독하고 모진 면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뭐 그냥 저냥 만족한다. 내 얘기다. 허나 '자기만족'은 여러 면을 갖고 있다. 정신건강에 좋긴하지만, 동시에 현실안주, 현실정당화하기도 쉽다는 말씀. 그렇다고 내가 자기만족에만 도취되어서 사는 것만도 아니다. 며칠 전에 '악몽'에 대해서 쓰지 않았던가...
인생에서 '자기만족', '자존감'이 꼭 필요하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시기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기본적으로는 항상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허나, 자신에게 너무 관대해선 곤란하고 스스로를 더 모질게 몰아붙여할 때도 있다. 현대사회의 비극은 이른 바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바로 그런 '때'가 쭈욱 이어진다는 데 있지만... 독일 체류 기간이 늘어날수록, 당연히, 추월당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오늘 그런 사례를 또 경험했다. 음... 혹자는 지금도 충분히 모질게 살고 있지 않느냐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럴 근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아니다. 지금은 더 모질고, 독해져야 할 때다. '독한 사람'! 항상 긍정적인 뜻을 전달하려고 쓰는 말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경우, 그 말은 순도 100% 칭찬이다.
ps) 초딩들 방학일기에나 어울릴 이런 '- 해야겠다'류 얘기를 - 몇 명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 남에게 읽으라고 내 놓기가 좀 '거시기'하지만, 그래도 떡하니 올려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나름 더 독해지기로 생각하고 결심한 바가 있지만 차마 그 내용까지 공개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그 방향은... 뭐겠는가, "논문에 집중하기"지. 특히 홀로 있는 시간에 논문 쓰는 일에 도움되지 않는 일들을 과감히 배제하고, 절제하기. 정신활동을 좀 단순하게 하고, 대신 운동 시간을 늘릴 것. 허나 블로그는 도움되는 정신활동으로 분류했으니 '염려'(?) 놓으시라. 무슨 근거로? 내 맘이지 ㅎㅎ
인생에서 '자기만족', '자존감'이 꼭 필요하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시기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기본적으로는 항상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허나, 자신에게 너무 관대해선 곤란하고 스스로를 더 모질게 몰아붙여할 때도 있다. 현대사회의 비극은 이른 바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바로 그런 '때'가 쭈욱 이어진다는 데 있지만... 독일 체류 기간이 늘어날수록, 당연히, 추월당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오늘 그런 사례를 또 경험했다. 음... 혹자는 지금도 충분히 모질게 살고 있지 않느냐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럴 근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아니다. 지금은 더 모질고, 독해져야 할 때다. '독한 사람'! 항상 긍정적인 뜻을 전달하려고 쓰는 말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경우, 그 말은 순도 100% 칭찬이다.
ps) 초딩들 방학일기에나 어울릴 이런 '- 해야겠다'류 얘기를 - 몇 명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 남에게 읽으라고 내 놓기가 좀 '거시기'하지만, 그래도 떡하니 올려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나름 더 독해지기로 생각하고 결심한 바가 있지만 차마 그 내용까지 공개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그 방향은... 뭐겠는가, "논문에 집중하기"지. 특히 홀로 있는 시간에 논문 쓰는 일에 도움되지 않는 일들을 과감히 배제하고, 절제하기. 정신활동을 좀 단순하게 하고, 대신 운동 시간을 늘릴 것. 허나 블로그는 도움되는 정신활동으로 분류했으니 '염려'(?) 놓으시라. 무슨 근거로? 내 맘이지 ㅎㅎ
2008년 11월 11일 화요일
바디 랭귀지
위대한 인류의 업적을 가능하게 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이 무엇일까? 언어사용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언어는 인간 최대의 발명품. 언어 없는 인간, 사회? 상상하기 힘들다.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다양한 학문적 해석이 있을 터이고, 동물도 '나름' 언어를 사용한다는 주장도 있는 것 같지만, 인간 종의 기원에 대해서 자연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처럼 인간의 언어사용능력에 대해서도 그러하리다. 성서의 경우 인간과 피조된 이후 바로 신과 언어를 사용해 의사소통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언어가 다양한 언어로 나뉘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시도를 응징의 결과로 이해되지만. 어쨌든... 인간의 언어의 능력은 인류가 만들어 낸 문명의 근원 중 근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언어의 발명은 또 한 번 획기적인 전환점이었고.
음성언어나 문자언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동시에 의사소통의 비언어적 수단의 중요성은 줄어드는 것 같다. 대화상황에서 비언어적 요소의 기능, 역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따로 있기도 하지만... 비언어적 요소라... 뭐가 있을까? 제스춰, 특히 손모양, 위치, 움직임 등 몸동작? 이런 것들은 음성언어의 보조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같다.
몸이 의사소통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는 언제일까? 예를 들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경우가 있다. 바디랭귀지를 쓸래야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적극적으로 음성언어의 한계를 이용해서 몸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경우는 무엇이 있을까? 춤은 어떤가? 이런 경우는 의사소통의 목적 장체가 다른 것 아닌가? 의사소통의 목적은 사실 이해아닌가? (오해도 이해다). 춤을 비롯한 현대 예술의 특징은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것을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평론가들이 있긴 하지만, 다양한 해석 가능성 혹은 해석의 불가능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 아닌가? 우리 백남준 형님이 남기신 '예술은 사기다"라는 명언이 바로 이것을 얘기하는 것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예술에 대한 평론가들의 언어가 왜 그리 호사스러운지 이해할만하다. 원래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작품, 예술활동을 말로서 풀어내려니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음성언어나 문자언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동시에 의사소통의 비언어적 수단의 중요성은 줄어드는 것 같다. 대화상황에서 비언어적 요소의 기능, 역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따로 있기도 하지만... 비언어적 요소라... 뭐가 있을까? 제스춰, 특히 손모양, 위치, 움직임 등 몸동작? 이런 것들은 음성언어의 보조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같다.
몸이 의사소통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는 언제일까? 예를 들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경우가 있다. 바디랭귀지를 쓸래야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적극적으로 음성언어의 한계를 이용해서 몸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경우는 무엇이 있을까? 춤은 어떤가? 이런 경우는 의사소통의 목적 장체가 다른 것 아닌가? 의사소통의 목적은 사실 이해아닌가? (오해도 이해다). 춤을 비롯한 현대 예술의 특징은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것을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평론가들이 있긴 하지만, 다양한 해석 가능성 혹은 해석의 불가능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 아닌가? 우리 백남준 형님이 남기신 '예술은 사기다"라는 명언이 바로 이것을 얘기하는 것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예술에 대한 평론가들의 언어가 왜 그리 호사스러운지 이해할만하다. 원래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작품, 예술활동을 말로서 풀어내려니 무리가 따를 수 밖에.
현대문명이 오해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의사소통에 기반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생의 많은 부분이 지니는 의미는 그런 방식으로 표현될 수 없다. '지식'의 증가는 동시에 '비지식'의 증가를 가져온다. 도대체 뭘하는지 알기조차 힘든 현대예술이 '장사가 되고', 종교에 대한 열정이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이런 포스트모던한 현상은 어쩌면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이루어낸 현대 문명의 이면일지도 모르겠다.
만화 출처: 한겨레 비빔툰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地平融合
'지평융합'. 해석학의 용어 'Verschmelzung der Horizont'의 번역어인데 그 동네에서 어떤 뜻으로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개념이 마음에 들어서 내방식으로 이해해서 쓰기로 한다. 그래도...급하게 검색해보니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텍스트를 대하기 전에 일종의 편견을 갖는다. 이 편견을 선이해라 한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우리의 선이해가 만들어놓은 한계 - 지평 - 속에서 이루어진다. 각자의 선이해 와 모순되는 텍스트는 선이해 속 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이 때 각각의 선이해는 텍스트 속의 선이해와 융합하여 새로운 선이해로 변화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선이해가 만나 하나의 선이해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지평융합이라고 한다. 이 새로운 선이 해는 다시 다른 텍스트들을 해석하는 데 사용되며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 내가 '지평', '지평융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분명히 다르지만, 신경쓰지 않고 내 길을 가련다. 뭐, 글 개념들에 특허가 있는 것도 아니니... 지평은 다분히 공간적 개념이다. 유사표현으로 '경계'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평이란 개념으로 난 심리적인 상황을 기술하고 싶으니 - 루만식으로 얘기하자면 - '심리체계의 경계' 정도로 정의해도 되겠다. '사회 세계'라 표현을 염두에 둔다면 '심리 세계'라고 해도 될것이고, 그 '심리세계'의 경계로 생각하면 되겠다 (Psychische Welt, cf. Soziale Welt). 그렇다고 가능한 모든 심리체계 작동이 가능한 범위로 이해하려는 것은 아니고 개인적 심리 체계 혹은 심리체계로 제한한다. 사회체계의 경계가 끊임없이 재설정되는 것처럼 심리체계 역시 그러하다. 공간적으로 표현을 계속 사용하자면, 내 심리체계의 중심에는 분명히 내가 있다. 그 '나'를 중심으로 이제껏 내가 경험한 온갖 사람, 사물, 사건, 지식, 정보들이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것들은 가까이, 어떤 것들은 멀리, 또 어떤 것들은 감춰진 채로... 지평, 즉 경계가 있다는 건 그것을 기준으로 그 안쪽과 바깥쪽이 구분된다는 얘기... (그러고 보니 지평과 경계에 대해서 조금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지평이 단선적이라면 경계는 원형적이란 느낌을 주는 것. 굳이 둘을 일치시키려한다면 '둥그런 지평'을 상상하면 될 듯. 어쨌든...). 모든 심리체계가 그런 지평/ 경계를 갖고 있다면, 다른 두 심리체계가 의미를 주고 받는 상황에선 어떤 방식으로는 그 두 지평이 만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을 지평융합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체계이론 개념으로는 strukturelle Kopplung이 비슷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 그 배경을 설명하자면...
어제 태어난지 약 30시간 정도되는 '생명체' (표현이 좀 '거석'하지만...)를 만났다. 오랫동안 좁은 동네에서 큰 변화없이 살면서 내 지평이 굳어져서인지 처음에 이 새로운 생명체, 인간 존재를 심리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좀 난감했다. 사실 몇 달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구나 (다른 아이). 그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낯선 느낌... 낯선 성인을 만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인의 경우 상대도 분명한 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이미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 지평과 내 지평의 Kopplung은 자석이 서로 달라붙듯 쉽게 되는 편이다. 서로 공감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상점에서 생전처음보는 판매원에게서 그리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 않지 않는가? 허나 이 아이의 경우는... 그 아이의 지평은 이제 막 형성되는 중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 지평 안에서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낯설게 느끼는 모양이다. 익숙하지 않은 interaction 상황인 것. 갓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을 관찰해보면 대개 말을 알아듣는 큰 애들에게 하듯이 말을 건네며 그런 상황을 처리한다... 그런 상황을 자주 겪지 않는 손님들ㅇ를 배려해서라도 더 익숙한 상황의 하나로 치환하려는 노력아닐까?
그 일을 계기로 내 지평이 매우 굳어져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굳어진 지평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좀 변화를 주고 싶다면, 심리체계의 한 가운데, 그러니까 좌표로 표현한다면 (0,0) 이거나 (0,0,0)이 될 그 자리를 내주면 어떨까. 인식의 주체마저 내가 아닐 수는 없으니까, 일종의 심리 실험이 되겠지만. 즉, 타인(혹은 절대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지평을 상상하고 그것을 내 지평으로 삼아보기.
어제 태어난지 약 30시간 정도되는 '생명체' (표현이 좀 '거석'하지만...)를 만났다. 오랫동안 좁은 동네에서 큰 변화없이 살면서 내 지평이 굳어져서인지 처음에 이 새로운 생명체, 인간 존재를 심리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좀 난감했다. 사실 몇 달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구나 (다른 아이). 그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낯선 느낌... 낯선 성인을 만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인의 경우 상대도 분명한 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이미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 지평과 내 지평의 Kopplung은 자석이 서로 달라붙듯 쉽게 되는 편이다. 서로 공감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상점에서 생전처음보는 판매원에게서 그리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 않지 않는가? 허나 이 아이의 경우는... 그 아이의 지평은 이제 막 형성되는 중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 지평 안에서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낯설게 느끼는 모양이다. 익숙하지 않은 interaction 상황인 것. 갓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을 관찰해보면 대개 말을 알아듣는 큰 애들에게 하듯이 말을 건네며 그런 상황을 처리한다... 그런 상황을 자주 겪지 않는 손님들ㅇ를 배려해서라도 더 익숙한 상황의 하나로 치환하려는 노력아닐까?
그 일을 계기로 내 지평이 매우 굳어져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굳어진 지평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좀 변화를 주고 싶다면, 심리체계의 한 가운데, 그러니까 좌표로 표현한다면 (0,0) 이거나 (0,0,0)이 될 그 자리를 내주면 어떨까. 인식의 주체마저 내가 아닐 수는 없으니까, 일종의 심리 실험이 되겠지만. 즉, 타인(혹은 절대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지평을 상상하고 그것을 내 지평으로 삼아보기.
2008년 11월 5일 수요일
惡夢
꿈은 매우 독특한 현상이다. 아직 그 기제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다). 우리 프로이트 할아버지 적보다야 많이 알려졌겠지만 주로 수면 행태에 대한 연구인 것 같고 꿈의 발현, 해석에 대해서 획기적 진전을 이루었다고 들은 바 없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영역이니 동서고금 꿈은 이용하고 가지고 장난치기 매우 좋은 소재였음에 분명하다. 특히, 일상적 경험에 의해 해석하기 어려운 상황에 '꿈'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각종 역사책, 경전에서 꿈은 단골 소재였다. 성서에서도 그 흔적을 여기 저기 찾아볼 수 있고. 많은 경우 굳이 '꿈'과 '현실'을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 '꿈'을 '현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그러니까 순수한 '비현실' 세계의 영역으로 몰아내는 과정이 바로 근대화였다 [근대화에서 삶의 공간 밖으로 내쫓겨났던 것들, 혹은 합리적 '터치'를 거쳐야만 다시 유입될 수 있었던 사례들은 많이 있다. 푸코 형님 저작을 참고할 것. 미침(고광기), 몸, 건강, 태어남, 죽음, 감정 등등. biopolitics라고 부르던...]. 프로이트 할아버니가 꿈을 무의식 세계의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거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때 '근대인'들이 펄쩍 뛰었던 일도 큰 무리는 아니다. '탈근대인'이 프로이트에 거부감이 없는 건 바로 그 '탈' 때문이고. 그래도 '꿈'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진 않다. 꿈이 없을수록 숙면을 취한다는 '건강상식' 정도.
꿈에 대해 권위있는 해석이 아직 없는 것 같고, 대개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꿈을 이해하는 것 같다. 요 며칠 惡夢을 꿔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에 보았다.
악몽이 뭘까? 을 여러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깼을 때 '휴,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싶으면 악몽을 꿨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며칠 간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출현했고, 영화 여러 편 찍었다. 굳이 장르로 얘기하자면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시원하게 웃기지도 않고 아픈 부분을 꼭꼭 찌르는...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관계 혹은 감추고 싶은 내 안의 어떤 것들이 꼭 드러난다. 요즘 많이 생각했던 주제나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는 좀 더 이해할만하지만, 어제처럼 요새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아니 그랬다고 믿고 있는 얘기가 뜬금없이 등장할 땐 좀 황당하다. 무의식... 아, 그 부분까지 비워야 하고, 맡겨야 하는 것일까? 기도 중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이런 표현을 종종 듣게 되는데, 정말이지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하게 해달라고 분명하게 요청해야 할 모양이다.
꿈에 대해 권위있는 해석이 아직 없는 것 같고, 대개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꿈을 이해하는 것 같다. 요 며칠 惡夢을 꿔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에 보았다.
악몽이 뭘까? 을 여러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깼을 때 '휴,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싶으면 악몽을 꿨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며칠 간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출현했고, 영화 여러 편 찍었다. 굳이 장르로 얘기하자면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시원하게 웃기지도 않고 아픈 부분을 꼭꼭 찌르는...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관계 혹은 감추고 싶은 내 안의 어떤 것들이 꼭 드러난다. 요즘 많이 생각했던 주제나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는 좀 더 이해할만하지만, 어제처럼 요새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아니 그랬다고 믿고 있는 얘기가 뜬금없이 등장할 땐 좀 황당하다. 무의식... 아, 그 부분까지 비워야 하고, 맡겨야 하는 것일까? 기도 중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이런 표현을 종종 듣게 되는데, 정말이지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하게 해달라고 분명하게 요청해야 할 모양이다.
2008년 11월 1일 토요일
축제 (1996, 임권택)
난 임권택 감독 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다. 왜 너무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작품'이나 '물건'들은 값어치있게 여기지 않게되는 그런 심리 있잖은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런 이유로 내게 괄시를 받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고흐도 그 중 한명이어서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고흐 그림 때문에 막상 화가에 대해서, 그 그림에 담겨있을 지도 모를 '깊은 뜻'에 대해서 더 알아볼 생각을 하질 않았었다. 그런 탓에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 방문에선 살아 생전 그림 몇 점 팔아보지 못해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았던 화가의 그림들이 그토록 '삐까뻔쩍'한 건물 속에 담겨져 있다는 어색함만 확인하고 왔고, 수 년 전 브레멘에서 열려서 성황을 이루었던 고흐 전시회에선 전독일에서 구름떼처럼 몰려든 독일의 그 중산층, 고만고한해 보이는 문화병 환자들 구경한 기억 밖에 남아있지 않다. 최근 읽은 클리프 에드워드(Cliff Edwards)의 책 '하느님의 구두. 거룩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989/2004)가 비로소 고호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 비슷한 역할을 임권택 감독에 대해서는 '축제'가 했다. 꼽아보니 애써 찾아 보지 않았던 걸 고려하면 이 양반 영화를 많이 본 편이다. '씨받이'(1986), '아제아제바라아제'(1989)에 대해선 별 기억이 남아있지 않고, '장군의 아들'(1990)은 그저 그런, '태백산맥'(1994)은 내가 봤던 임권택 영화 중 최악 [10권짜리 대하소설을 2시간 남짓한 영화로 옮기면서 너무도 싱거운 얘기가 되어버렸다], '취화선'(2001)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외국 손님용' 혹은 '국제 영화제용'이란 인상을 너무 강하게 풍기는 게 거슬렸고,
역시 '서편제'(1996)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다행히도 '축제는 '서편제'에 가까운 편이었다. 하지만 '서편제'처럼 물흐르듯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윗길로 쳐줄 수는 없겠다.
재미있는 건 <서편제>와 <축제>가 모두 이청준 원작이라는 점. 한 때 이청준의 작품을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있었던 터라 생각해 보면 까닭있는 '우연'일수도 [이청준 원작인 '밀양'도 재미있게 봤으니...]. 이청준 원작이라고 하지만 약간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서편제>의 경우 소설이 완성된 이후에 영화로 각색되어 나온 것이고, <축제>는 "임권택 감독의 요청에 의해 처음 시나리오와 대본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을 새삼 소설로 도로 펼쳐낸 " 것이라고 한니... 축제는 자전적 얘기라고 한다. 주인공은 소설가고, 배경도 남도 어디이고, 좋은 학교를 나왔는데 고작 소설가나 하고 있고, 군수가 대학 친구이고... 허나 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전적 얘기임을, 안성기가 이청준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영화는 사실 그리 극적인 이야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 주인공 노모의 장례를 치루게 위해 모여든 식구들, 친척들, 친구들,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갈등... 죽음이 산 사람들의 관계를 새로이 배열하는 그런... 한 가지, 이오덕 선생께서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축제>(祝祭)가 일본말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제목이 좀 찜찜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잘 어울림을 알 수 있다. 영화 포스터를 보라. 상복을 입고 활짝 웃는 모습이라니... 우리나라 영화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블랙코미디'풍이랄까... ["우리나라의 제사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지낸다. 그래서 제사 제(祭)자 앞에 축(祝)자를 붙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의 제사는 시끄럽게 떠드는 행사로 치른다." 이오덕 지음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임권택 감독은 우리 전통을 어떻게든 영상으로 남겨놓으려 애쓰는 티를 '너무' 내는 편인데...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화면을 잡아내기도 하고, 또 영화 곳곳에 해설용 자막을 집어 넣기도 한다. '취화선'에서 그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서편제'에서도... '축제'는 그 사용이 가장 심한 편인 것 같다. 얼핏 다큐를 보는 것 같기도... 물론 좋은 공부이긴 하지만 영화의 영화로서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고 판단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자막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길 위 군데 군데 놓인 돌멩이들 같다.
영화'축제'의 장점도 많이 있다. 특히 조연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자들은 하나 같이 자연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하고 연기 또한 빼어나다. 허나 너무 빼어나서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기도 하다. 얼핏 무대 위의 연기 같은 것 (연극배우 출신들이 적지 않을 거라는데 백원 건다^^). 주연급도 다 괜찮은 편인데, 다만 갈등관계, 긴장감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오정해의 연기가 좀 거슬린다. 위악적인, 좀 까칠하고 튀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음을 고려해도, 시종일관 크게 바뀌지 않는 오버성 평면적 연기로 일관하는 건 좀 그렇다. 임권택 감독이 특별히 사랑하는 배우인것 같은데, 더 클 수 있을지... 아니, 10년도 더 된 영화이니,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면 안성기 연기는 나무랄데 없다. 이토록 잘 맞는 '옷'을 입은 안성기를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듯.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또 영화의 내러티브를 진행시키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헤치는 인물로 서울말 쓰는 기자를 설정해 놓은 점도 거슬린다. 끝으로 영화는 액자소설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장례식 이야기와 나란히 동화같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그 이야기는 결국 극중 작가가 쓴 동화의 내용이라는 점이 끝무렵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얻긴 하는데, 영화의 흐름을 끊는다. 꼭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소설 '축제'의 구성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건 아닌지... ] 내 눈에 이런 점들이 보인다는 얘기일 뿐이고, 영화는 거장의 손길이 닿은 작품답게 생동감 넘치고, 좋은 영화로 볼 근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내게 있어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한국 전통장례를 체험하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 죽음을 보는 우리의 '시선', 죽음에 대한 우리 '목소리'를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역시 '서편제'(1996)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다행히도 '축제는 '서편제'에 가까운 편이었다. 하지만 '서편제'처럼 물흐르듯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윗길로 쳐줄 수는 없겠다.재미있는 건 <서편제>와 <축제>가 모두 이청준 원작이라는 점. 한 때 이청준의 작품을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있었던 터라 생각해 보면 까닭있는 '우연'일수도 [이청준 원작인 '밀양'도 재미있게 봤으니...]. 이청준 원작이라고 하지만 약간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서편제>의 경우 소설이 완성된 이후에 영화로 각색되어 나온 것이고, <축제>는 "임권택 감독의 요청에 의해 처음 시나리오와 대본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을 새삼 소설로 도로 펼쳐낸 " 것이라고 한니... 축제는 자전적 얘기라고 한다. 주인공은 소설가고, 배경도 남도 어디이고, 좋은 학교를 나왔는데 고작 소설가나 하고 있고, 군수가 대학 친구이고... 허나 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전적 얘기임을, 안성기가 이청준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영화는 사실 그리 극적인 이야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 주인공 노모의 장례를 치루게 위해 모여든 식구들, 친척들, 친구들,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갈등... 죽음이 산 사람들의 관계를 새로이 배열하는 그런... 한 가지, 이오덕 선생께서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축제>(祝祭)가 일본말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제목이 좀 찜찜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잘 어울림을 알 수 있다. 영화 포스터를 보라. 상복을 입고 활짝 웃는 모습이라니... 우리나라 영화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블랙코미디'풍이랄까... ["우리나라의 제사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지낸다. 그래서 제사 제(祭)자 앞에 축(祝)자를 붙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의 제사는 시끄럽게 떠드는 행사로 치른다." 이오덕 지음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임권택 감독은 우리 전통을 어떻게든 영상으로 남겨놓으려 애쓰는 티를 '너무' 내는 편인데...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화면을 잡아내기도 하고, 또 영화 곳곳에 해설용 자막을 집어 넣기도 한다. '취화선'에서 그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서편제'에서도... '축제'는 그 사용이 가장 심한 편인 것 같다. 얼핏 다큐를 보는 것 같기도... 물론 좋은 공부이긴 하지만 영화의 영화로서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고 판단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자막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길 위 군데 군데 놓인 돌멩이들 같다.
영화'축제'의 장점도 많이 있다. 특히 조연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자들은 하나 같이 자연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하고 연기 또한 빼어나다. 허나 너무 빼어나서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기도 하다. 얼핏 무대 위의 연기 같은 것 (연극배우 출신들이 적지 않을 거라는데 백원 건다^^). 주연급도 다 괜찮은 편인데, 다만 갈등관계, 긴장감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오정해의 연기가 좀 거슬린다. 위악적인, 좀 까칠하고 튀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음을 고려해도, 시종일관 크게 바뀌지 않는 오버성 평면적 연기로 일관하는 건 좀 그렇다. 임권택 감독이 특별히 사랑하는 배우인것 같은데, 더 클 수 있을지... 아니, 10년도 더 된 영화이니,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면 안성기 연기는 나무랄데 없다. 이토록 잘 맞는 '옷'을 입은 안성기를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듯.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또 영화의 내러티브를 진행시키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헤치는 인물로 서울말 쓰는 기자를 설정해 놓은 점도 거슬린다. 끝으로 영화는 액자소설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장례식 이야기와 나란히 동화같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그 이야기는 결국 극중 작가가 쓴 동화의 내용이라는 점이 끝무렵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얻긴 하는데, 영화의 흐름을 끊는다. 꼭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소설 '축제'의 구성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건 아닌지... ] 내 눈에 이런 점들이 보인다는 얘기일 뿐이고, 영화는 거장의 손길이 닿은 작품답게 생동감 넘치고, 좋은 영화로 볼 근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내게 있어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한국 전통장례를 체험하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 죽음을 보는 우리의 '시선', 죽음에 대한 우리 '목소리'를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强敵
"한밤의 한반도 사진입니다. 촛불같은 평양 빼고 새까만 북한 사진 때문에 유명해진 사진이지요. 그런데 남한의 수도권과 지방의 불빛을 보십시오. 수도권은 작열하다 못해 터질 것 같은데, 지방은 깜박깜박하지요? 과열 수도권과 침체 비수도권과의 관계를 한마디로 보여주는 사진입니다."인용한 글과 사진은 건축가 김진애씨 칼럼에서 가져왔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제봤던 조선일보 기사를 떠올렸다. 아, 그것도 칼럼이었던가? 발로 쓴 것 같은... 지방대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는 현상을 너무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지적해서 불쾌함을 안겨주기도한... 일부를 인용하면...
"지방대학에 대한 편견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약 200여개의 4년제 대학이 있다. 이 중 서울 소재대학은 45개교, 22.5%다. 나머지 77.5%인 155개교는 비서울 지역에 위치한다. 이들 대학들은 '인(in)서울' 대학과 '지방대학'으로 불린다. ...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방대를 수도권대학과 '지잡대(지방에 잡스러운 대학)'로 분류한다. 수도권대학은 거리에 따라 학교 서열이 달라진다. 서울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접근성이 떨어질수록 학교평가가 절하된다. 지잡대는 지방에 소재하고 있는 존재감 없는 대학으로 인식된다. '지잡대'도 '지거국', '돋보잡대', '지잡의대' 등으로 구분된다. '지거국'은 지방의 거점 역할을 하는 국립대, '돋보잡대'는 약간 돋보이는 지방대학, '지잡의대'는 지방의 의대라는 뜻이다. "
'지잡대' 같은 혐오스런 표현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구글해보니 꽤 많은 검색결과를 알려준다. 허나 아무리 저자거리에서 그런 표현을 쓴다고 하더라도, 자칭 일등신문이 그런 것까지 친철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글쓴이는 한병선이라는 교육평론가. 교육평론가는 또 뭔가? 참, 가지가지한다.
최근 미국에서 돈을 받기로...스와프, 스머프... 어쩌구 해서 한국 시장이 좀 안정을 찾아가는 모양이다. 유로가 1,500대까지 내려갔다고 하고 (오늘은 1,600대인 것 같긴 하지만...). 그러자마자 들려오는 소식은 환율급등 못잖게 우울한 혹은 으스스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진애 선생이 전하는 대로 "불황에 수도권에 더 투자하여 그 이익을 지방에 나눠주는게 낫다... 30일 국가경쟁력위원회(위원장:사공일)를 앞세워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수도권 투자활성화 대책’의 명제입니다".
그리고 오늘자 한겨레에 따르면... "정부·여당이 국민적 역량 결집이 절실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법안과 정책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7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초당적 협력과 사회 각 분야의 협력을 요구한 지 4일 만이다. ...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날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박희태 대표와 한승수 총리, 정정길 대통령실장 등이 참석한 고위당정회의를 열고 정기국회 법안처리 대책 등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당정 수뇌부는 전날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확정한 불법시위 피해자 집단소송제 등 이른바 ‘떼법 방지 법안’, 금산분리 완화를 담은 은행법, 대기업의 방송진출을 허용한 방송법·신문법 등 131개 ‘이명박 중점 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난 2MB와 그 일당을 보면서 조직을 망치는 리더 유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머리가 나쁘지만 부지런한 사람". 허나 그들이 망치는 건 그냥 단순한 한 조직이 아니지 않은가. 비극의 시작이다. 경제위기 때문에 그 동안 좀 조용했던 것 뿐이지... 이들은 부지런할 뿐 아니라 집념까지 강한 강적 중 강적이다. 누가알랴. 시절이 더 좋아지면, 운하파겠다고 다시 덤벼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