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7일 일요일

시의적절한 낙서

학교 '모처'(^^)에 있는 낙서다. 흘려써서 여러 번 봐야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있는데... 옮겨적으면 이렇다. "Gewinn wird privatisiert und Schulden vergesellschaftet. Die Krise ist der Normalfall." 캬! 두 문장으로 엄청나게 많은 메세지를 전달한다. "이익은 몇몇 개인이 챙겨가고, 손해가 생기면 사회가 나서서 메꿔준다. 위기는 이젠 일상적인 일이다". 사르코지가 했다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 위기의 책임은 잘 나갈때 그 이익을 챙겨가던 사람들에게 물어야 한다'. 이런 비슷한 말이었다. 최근 경제 위기에 직면해서 주요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투자금액을 올리고 경기부양 계획을 쏟아내고 있다. 국가최소개입주의를 신봉하고, 그 원칙을 세계에 전도하던 미국마저도. 국가중심적 발전의 모범적 사례인 한국인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나, 지금 상황은 발전국가의 그런 모습과도 많이 다르다. 발전국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가 주도하는 모습이라면, 최근 모습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도록 방기하다 위기가 발생하자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자해서 기업들의 살려주는 것 아닌가. 이러다가 경기가 다시 좋아지면 그 기업들을 혹독하게 다그쳐서 더 많이 받아낼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그건 복지국가 모델인데, 신자유주의 국가모델이 그리 쉽게 자리를 내줄 것 같지 않다. 결과는 딱 위에서 언급한 대로다. 경제를 잘 나갈 때는 규제를 풀고, 세금깍아주고 [똘아이 정권의 부유세 축소처럼], 이익을 큰손들이 나눠먹게 하다가, 어려워지면 세금으로 그들 빈주머니를 채워주는 것. 2mb 무리들은 그 교과서적인 인물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더 적은 규제가 아니라 더 많은, 아니 더 효과적인 규제다. 망나니처럼 혹은 깡패처럼 거칠 것 없이 세계를 흔드는 그런 자본의 흐름, 투기세력들을 최대한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 금융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허깨비를 치우고 거품을 과감히 걷어내야한다. 냉전이후 지금까지 약 30여년 세계를 지배하던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과연 역사가 될 것인가...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신자유주의자들, 그의 표현으로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입장변화가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 케인즈주의로 돌아서는 것인지, 아니면 구제금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겉만 바꾼, 즉 위장한 '케인즈주의자' 들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어쨌든 더 지켜볼 일이다.

"현재 우리는 모두 케인즈주의자들이 됐다. 미국의 우익진영조차 대거 케인즈주의 진영에 가담하고 있다. 지난 30년동안 외면받은 케인즈주의를 지지해온 사람들에게 이것은 승리의 순간이다.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이성과 증거의 승리가 도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규제받지 않는 시장은 자기교정 능력이 없으며,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경제이론은 오랫동안 설명해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금융시장 종사자들은 일종의 '시장 근본주의'를 밀어부쳤다. (...) 오늘날 특정 이익 세력를 위해 오용될 위험이 있는 것은 새로운 케인즈주의 노선이다. 지난 10년 동안 규제완화를 밀어부친 자들이 교훈을 얻었을까?아니면 그들은 수조 달러의 구제금융을 정당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명분을 얻기 위해 겉만 바꾸는 개혁을 추진할 뿐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전략의 변화만 있는 것인가?"

2008년 12월 5일 금요일

21세기에 믿는 기독교

내용은 다르겠지만 세계의 여러 종교는 세상사, 인생사를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주는 하나의 지식틀이다. 오랫 동안 가장 중요하고 권위있는 지식으로 그 위세를 떨치다가 소위 근대 이후 차츰 차츰 그 지위를 다른 지식체계에 내어 주고 있다. 과학이라는 지식 말이다. 기독교에 한정해 본다면 전지저능한 하나님 때문에 인간은 신의 뜻, 더 정확하게는 신의 뜻으로 표현되는 교회와 성직자의 해석을 좇아서 사는 수동적 존재였지만,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때문에 지구와 인간의 유일성 혹은 특별성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 기독교적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는 이런 지식틀에 근본적인 도전은 바로 근대과학인데, 대표적으로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의 주장을 들 수 있겠다.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다윈 이후로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는 의심 받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인간 사고의 공간적 영역을 확대했다면, 다윈은 시간적 영역을 확대했다. 중세 기독교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정도로... [신약성서가 씌여지던 시기로 돌아가면, 더 '안습'이다. 바울은 스페인을 땅끝으로 생각했었다니까.]

다음 사진은 탐사선 보이저 1호가 1990년 6월 명왕성 근처을 지나면서 찍은 지구의 모습이다. 사진의 별칭은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이 사진에 영감을 받아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고... 이 시점에 보이저호는 지구로부터 거리는 40억 마일, 약 64억 km 에 있었다고 하는데, 무척 멀다는 느낌만 줄 뿐 실제 내 수리능력으로 계산되지 않는 그런 거리다. 이런 내력을 알고서 저 사진을 보면 정말이지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히 QT용이라고 할만한 그런 사진이다.





















"보이저 2호는 1977년 8월 20일, 1호는 9월 5일 지구를 떠나 무려 30년 동안 우주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보이저 1호는 인류가 만든 물체 중 우주 밖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다. 태양으로부터 155억 km 거리를 날아간 것. 태양으로부터 약 125억 km 떨어진 지점에 보이저 2호가 있다." (2007년 8월 얘기인 것 같으니 지금은 훨씬 더 멀리 있겠다). 두 우주선은 하루에 160만 km를 이동한다고 하고, 지구로부터의 명령은 빛의 속도로 날아가지만, 보이저 1호에 도달하려면 14시간이 걸리고 보이저 2호의 경우 12시간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그렇게 빠를까 싶긴 한대...
이런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일까? 중세 시대 혹은 그 이전 사람들은 하나님 혹은 각종 신이 구름 위 어드메나 바다 깊숙한 곳에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나와바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뿐이고, 비록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세상의 중심은 아니지만 그걸 알고서 자란 우리들에겐 그리 큰 심리적 손상을 주지도 않는다. 리차드 도킨스처럼 과학으로 신앙을 미몽에서 깰 수 있다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최근 취침용으로 도킨스가 이야기를 이끄는 도큐를 '즐겨' 보고 있는데, 이 양반은 '과학교', 그 중에서도 '진화론교' 신자라 불러도 좋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서 종교적 주장을 강변하는 일부 '무식한' 창조론자들에 대해선 나도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종교, 특히 유신교의 유산과 의의를 그리 싸그리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인류가 사고하는한 21세기, 아니 그 어느 때에라도 종교, 유신교에 대한 수요는 있다는 것. 물론 계속 살아님을 종교는 매우 유연해야 한다. 새로 얻게 된 지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창조론자들, 창조과학자들이 지금 주장하는 바는 머지 않아 중세 기독교처럼 시대착오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2008년 11월 27일 목요일

저자의 죽음, 인간의 죽음

"일찍이 스테판 말라르메는 시인이 언어를 소유해서 부리는 게 아니라 시인 자체를 언어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시인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은 언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 자일 뿐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텍스트에서 저자의 권위를 빼앗고 독자의 탄생을 선언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시는 독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말라르메가 언제적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르트라면 프랑스 구조주의 언저리에서 늘 언급되는 사람아닌가. 이런 진술이 그래서 전혀 놀랍지 않다. '저자의 죽음' 얘길 읽으며 난 역시 그 구조주의 영향에서 씌여졌던 푸코의 '말과 사물' (1966) 말미의 '인간의 죽음 (혹은 사라짐)' 주장을 떠올린다. "man is an invention of recent date. And one perhaps nearing its end. If..., then one can certainly wager that man would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at the edge of the sea." (p.422). 물론 바르트가 얘기한 '저자의 죽음'의 논지가 '인간의 죽음 (혹은 사라짐)'에도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2008년 11월 18일 화요일

'총과 장미'의 '11월에 내리는 비'



.... Cause nothing lasts forever, and we both know hearts can change. And it's hard to hold a candle, in the cold November rain...

... So never mind the darkness. We still can find a way. Cause nothing lasts forever. Even cold November rain ...

Guns N' Roses - November Rain (1992)

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한국 최초의 계급 정권: 2mb와 그 친구들

대학시절 맑시즘 정치이론의 핵심 테제인 계급투쟁, 노동자 계급 혁명을 얘기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얼마나 낯설어 보였는지... 그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흘러서 혁명 운운하는 소리는 후일담에서나 듣게 되었고, 그 많던 좌파들, 맑시스트들은 제도정치권으로, 시민운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허나 한국의 정당의 정체성이 여전히 모호하다는 건 누구나가 쉽게 지적하는 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라고 하질 않나, 진정한 좌파정당이라고 자부하는 민노당에는 '민족해방'(NL) 세력의 입지가 더 커졌다. 도대체 한국에서 좌파/우파, 진보/보수가 제대로 나뉘어본 적이 없다. 보수정부라고 얘기하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추, 김영삼 정권에서도 꽤 진보적이라고 할만한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었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된다. 의료보험도입, 과외금지, 고교평준화 같은 걸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보수/진보를 얘기하며 정체성이 불분명하다고 투덜거리게 된 건 사실 매우 행복한 고민이다. 우리는 수십년 동안 독재/민주로 세상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재정권과 보수정권은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때로는 독재정권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대중의 눈치를 살피며 좀 더 평등지향적인 정책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신한국당 출신이지만 여전히 민주화 세력, 상대적으로 진보적 인사들을 많이 기용했고, 스스로 매우 대중추수적 입장을 지녔다. 그렇게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선명한 보수정권, 계급 혹은 지지세력의 이익에 노골적으로 복무하는 정권은 2mb정권이 최초가 아닌가 생각한다. '독재정권' 혹은 '3당야합' 같은 핸디캡 없이 출발했다는 점은 이 정권이 노골적으로 수도권, 건설족, 강부자등으로 대표되는 자신들의 지지핵심집단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참 이 무슨 역사의 장난인가.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가 종부세에 대해서 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일부 인용한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큰 흐름에서 볼 때 우리 현대사는 끊임없는 발전과 진보의 역사였다. (...) 지난 10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보수적 정부가 집권해 왔지만, 진보의 도도한 흐름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흥미로운 점은 주요한 진보적 개혁이 거의 모두 보수적 정부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제도 등의 사회복지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전두환 정부 때였으며, 토지공개념이란 급진적 성격의 개혁안이 나온 것은 노태우 정부때였다. 또한 김영삼 정부 때는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등록이라는 굵직한 개혁이 이루어진 바 있다. 지금 이런 개혁안이 나왔다면 보수진영은 좌파의 책동을 막아야 한다고 난리를 쳐댔을 것임에 틀림없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좌파정책의 표상처럼 되어 있는 평준화교육을 도입한 사람이 바로 보수진영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평준화의 틀은 그 뒤를 이은 보수적 정부하에서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져 왔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 실정중 하나로 들먹여지는 대학입시 ‘삼불정책’의 기본골격도 실제로는 보수적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2008년 11월 14일 금요일

유럽의 자기성찰: Can Europe produce an Obama?

한국에서는 흔히 '서구'라고 통칭하지만, 사실 그 당사자들은 한묶음으로 묶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서로를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 신대륙과 구대륙. 이 구분은 주로 '신대륙' 사람들이 즐겨 쓰는 것 같다. '구대륙'사람들은 다시 대륙과 앵글로색슨으로 나누어 부르는 경우가 잣은 것 같다. 허나 이는 다시 '구대륙' 안에서도 대륙 사람들의 입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토와 '바닷것'들을 구분하고, 그리고 그 '바닷것'의 영향권 아래서 만들어진 '미국' 도 그 편으로 편입시키고. 독일인들 오랫동안 타자를 '서구' 혹은 '선진국' 으로 불렀다. 독일 왼쪽에 있는 개명한 선진국들을 한편으로 부러워하고, 또 그들의 물질문명, 실증주의적 경향을 경멸하며... 이런 자아/타자구분법을 연구해도 재미있겠다. '오리엔탈리즘'이 대표적인 연구일텐데, 그 후 관련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온 것 같지 않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어제 본 신문 기사 하나를 소개하려다 그렇게 되었다. IHT 첫면, 헤드라인뉴스로 박힌 제목: "Can Europe produce an Obama?" 유럽과 미국의 관계, 그 역사는 참 복잡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대 문명의 - 아름다운 그리고 추하기도한 - 꽃은 비록 유럽에서 싹트긴 했지만, 미국 땅에서 비로소 만개했다. 자본주의는 물론이거니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20세기 초반 유럽 지성인들 중 미국 정치제도를 부러워한 사람들이 많았다 (토크빌, 맑스 베버가 대표적).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강력한 패권국가로 등장했지만, 동시에 국제 깡패짓을 많이 해서, 복지국가 체계를 정비해 가던 구대륙 사람들은 미국의 현실적 힘은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경박하게 날뛰는 미국 것들 은근히 무시하였다. 인종주의에 대해서도 그 뿌리는 유럽에 있지만 많은 유럽인들은 그동안 미국의 인종주의, 흑백갈등을 언급하며 그 보다는 훨씬 낫지 않느냐며 자신들의 상황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미국인들의 미국 무시는 이번 부시 정권 시기에 그 정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싶다. 서유럽 국가들의 친미성향 정도를 조사해 본다면 상위권에서 내려 오지 않을 독일에서도 공공연하게 미국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정치인들이 많았으니까.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이번 미대선에서 오바마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것도, 그리고 오바마 당선을 내 일인양 기뻐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터. 허나 공교롭게도 오바마가 당선되자 유럽인들은 자기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흑인을 미국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인들, 미국사회. 누구도 이렇게 쉽게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IHT는 그런 '유럽'이 느끼는 당혹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국회의 경우 본토 출신 의원 중 흑인은 한 명이 있을 뿐이고, 영국에서는 하원 646명중 15명이 비백인. 8천2백만명 인구의 3%에 달하는 2백9십만이 터키계인 (독일 시민권자는 8십만명) 독일에서는 연방의원 613명 중 5명이 터키계라고 한다. 언제쯤 프랑스나 영국에서 흑인 대통령 혹은 수상이, 그리고 독일 같으면 터어키계 출신 수상이 뽑힐 수 있을까?
사실 수치로 보면 미국도 그리 나은 편은 아니다. 오바마는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이고, 이번에 새로 구성된 하원의원 중 흑인은 39명으로 약 9퍼센트라고. 미국인구 중 흑인이 13퍼센트라고 하니까... 하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그리고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대통령으로 흑인을 선택함으로서 미국인들은 그들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부시의 실정과 미국의 쇠락을 은근히 즐기던 이들에게 보기좋게 한 방 먹였다. 지난 수년 동안 부시와 미국 때리기를 즐기던 유럽인들은 이제 당분간 역사 앞에서 또 한 번 선수를 치고 앞서가는 미국을 부러워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IHT 기사 중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영국같은 의회제 아래에선 의외의 인물이 수장으로 뽑힐 기회가 훨씬 줄어든다는 것. "영국에선 오바마처럼 뛰어나게 연설을 잘 한다고 해서 주목을 받기는 힘듭니다. 의회에서 서열을 따라 커가야 하는 거지요" 영 노동부 장관의 말씀.]
이 시점에서 우리 '조국'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바마 당선 이후, "새로운 미국의 변화를 주창하는 오바마 당선자와 새로운 변화를 제기한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의 비전이 닮은 꼴"이라고 주장했다던 2MB와 청와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코미디와 비교를 불허하는 빼어난 수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코디미계, 개그계의 쾌거!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한국 코미디계는 앞으로 2MB가 접수한다.

ps) 지난 주말 독일 녹색당 전당대회에서 터키계 2세인 Cem Ozdemir가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1994년 터키계 최초로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고, 2004년 대단치 않은 스캔들로 유럽의회로 물러났었는데 이번에 국내정치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 "흑인최초..."를 달고 다녔던 오바마가 미대통령이 되었으니, 어쩌면 오즈데미르도 독일 수상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 42살이라니 아주 불가능해보이지도 않고. Wer weiss...

2008년 11월 13일 목요일

'독립'의 의미론

'인문계' 쪽 출신들은 외우기에 능하는 전설 혹은 선입견이 전해져 온다. 하긴 인문계 시험에 외워서 치루는 과목의 비중이 높고, 인문계 출신들 성공의 지름길인 각종 '고시'의 당락도 대개 암기력에 좌우되는 것 같으니 아주 근거 희박한 주장도 아닐 터이다. 외우기를 잘 한다는 사태 그 자체는 판단중립의 영역일 것이나, 어디 그것을 판단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보자.
우선 한국 인문계열에서 요청되는 외우기 방식의 문제점은 그들이 외워야 하는 지식이 너무 편협하는 데에, 또 닥달 외운 지식이 더 종합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허나 정확한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채 후자만을 강조하다 보면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귀결되기 쉽다는 점도 잊지말하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의 엄밀성,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허나 역사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부터 함량미달이다. 예를 들어 다음에 인용할 史實.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일수호조약(1876)에서 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일관된 주장은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이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조선 진출의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에서 '독립'의 주장은 '친일'과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독립문 현판을 '매국노' 이완용이 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독립'이라고 다 같은 '독립'이 아니었던 것. '독립'의 의미론. 이 멋진 주제를 누가 연구했을까?

인식의 전환

" '한국은 3면이 바다이고 70%가 산이어서 별로 뻗쳐나갈 데가 없는 데다, 석유 등 천연 자원도 별로 없기 때문에, 한국이 살 길은 '인재', 즉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활용해 수출을 많이 하는 길밖에 없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1968년에 초등학교를 입학한 이후 십여 년 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
삼면이 바다이고 70%가 산이란 것도 어떻게 잘 보면 고유의 소중한 천연자원이다. 이미 윤구병 선생이 <조그마한 내 꿈 하나> 및 <잡초는 없다>에서 지적한 바 있듯, 동, 서, 남쪽 바다에 온갖 해산물을 기르고 오염이 되지 않도록 잘 관리만 한다면 '무한히' 해산물을 건져 올릴 수 있다. 또 70%의 풍부한 산에 온갖 좋은 나무를 심고 약초와 나물, 꽃을 심거나 길러 조심조심 활용하기만 해도 '엄청난' 산림자원과 먹을거리가 나온다. 삼면의 바다와 70%를 단점으로만 보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장점으로 만들려는 컨셉과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
자원이 많은 나라는 제국주의 침탈로 오히려 시달림을 받는다는 '자원의 역설'까지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늘 타자의 장점을 부러워할 줄만 알았지 우리의 장점을 들여다볼 줄 몰랐다."


강수돌 교수의 얘기다. 흠. 흥미로운 얘기인데 좀 '소화'를 시킨 다음에라야 뭐라도 논평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