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는 진리가 아니라 지도다" (Alister E. McGrath, 옥스포드대 신학부 교수)
흠. 어디에서 어떤 맥락에서 나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2008년 12월 9일 화요일
푸코: 고고학자, 족보학자
"푸코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푸코가 이론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던 것은 현재, 즉 현재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였다. 이것을 분석하기 위해 역사라는 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고학의 시기. 유럽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다. 서구만큼 이성이 지배적인 규준이 되는 사회는 없다. 푸코는 유럽의 이성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사유했다. 푸코가 보기에 이성은 정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것은 비이성이고 광기이다. 이성이 내부라면 비이성은 외부이다. 이성 외부에 있는 자들은 타자이고, 내부에 있는 자들은 동일자(同一者, the same)이다. 이런 식으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유럽 자본주의는 이 경계선을 가지고 작동한다. 그런데 이 경계선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타당한 것인가? 푸코는 경계선을 허물려는 혹은 경계선의 역사를 추적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러한 푸코의 작업을 왜 고고학이라 하는가? 경계선 밖에서 ‘침묵’을 강제 당해왔던, 역사 속에 매몰되어 있던 타자들의 목소리를 발굴하려 했기 때문이다. (...) 고고학 작업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광기의 역사』...
계보학 시기의 대표적인 책이『감시와 처벌』... 계보학은 권력이 어떤 성격을 가지면서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작동하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계보학이란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권력의 존재 형태를 분석하는 것, 혹은 그 권력 행사의 효과들을 분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강의 내용을 정리한 내용인 것 같은데 그 이상 출처에 대한 정보는 없다. 푸코의 고고학적, 족보학적 (계보학적) 관심을 잘 요약해 놓은 것 같아 여기에 옮겨 놓는다.
계보학 시기의 대표적인 책이『감시와 처벌』... 계보학은 권력이 어떤 성격을 가지면서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작동하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계보학이란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권력의 존재 형태를 분석하는 것, 혹은 그 권력 행사의 효과들을 분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강의 내용을 정리한 내용인 것 같은데 그 이상 출처에 대한 정보는 없다. 푸코의 고고학적, 족보학적 (계보학적) 관심을 잘 요약해 놓은 것 같아 여기에 옮겨 놓는다.
2008년 12월 8일 월요일
슬픈 예감...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멋진 노랫말이다. 오석준과 함께 만들었던 '이오공감'이라는 앨범에서 이승환이 부른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라는 노래의 한 대목이다. 내가 입대하던 그 무렵에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난다. 듣기는 좋은데 따라부르기는 힘든 그런 노래였고. 이 노래야 이별에 대한 예감을 얘기하고 있지만, 틀린 적이 없는 슬프예감의 적용 범위는 매우 넓어서 보편적 진실, 쓰린 진실 (bittere Wahrheit)에 가깝다. 아무리 부인하려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그 틈을 비집고 기어코 파고들고야마는 그 슬픈 예감이 있다면 대부분 그 예감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최근에 경험한 슬픈 예감 중 하나는... 매우 불편한 자리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다. 피하려고 했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정말 편치 않았고 심지어 그 여파로 악몽을 꾸기까지 했다. 왜 있잖은가,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이상하게 어떤 자리에선 불편한 그런... 다시 한 번 얻은 교훈: 슬픈 예감이 든다면 무릎쓰고, 마인드 콘트롤해서 긍정적으로 해보려고 애쓸 일이 아니다. 아애 처음부터 슬픈 예감이 들지 않도록 사전 작업을 잘해야 한다. 한 번 '슬픈 예감'이 찾아오면 극복하기 힘들다. 차라리 그런 자리는 처음부터 피할 일이다. '슬픈 예감'은 어떤 경우에도 반갑지 않다. 걔네들이 친한 척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준비시키고 훈련시킬 것. 아애 원천봉쇄할 것.
2008년 12월 7일 일요일
훔쳐 본 사랑
Luhmann als Medium

지금 학교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이다. 위는 사회학, 정치학 학생들이 여는 파티를 알리는 내용이고, 아래는 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루만과 예술'에 대한 전시회 안내다. 바햐흐로 우리 루만 선생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빌레펠트 대학에선]. 하나의 icon이 된 것. 체계이론 개념을 쓰자면 하나의 Medium이 된 것. 도대체 루만이 누구인지, 무슨 얘길 했는지 묻지 않고서도 '루만'이 의사소통을 연결하는, 혹은 가능케 하는 매체가 된 것이다. 아래 사진은 또 어떤가... Soziologie Fanshop에서 파는 '루만티셔츠'다 (비싸다. 21유로, 18유로씩이나 한다). 






시의적절한 낙서
학교 '모처'(^^)에 있는 낙서다. 흘려써서 여러 번 봐야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있는데... 옮겨적으면 이렇다. "Gewinn wird privatisiert und Schulden vergesellschaftet. Die Krise ist der Normalfall." 캬! 두 문장으로 엄청나게 많은 메세지를 전달한다. "이익은 몇몇 개인이 챙겨가고, 손해가 생기면 사회가 나서서 메꿔준다. 위기는 이젠 일상적인 일이다". 사르코지가 했다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 위기의 책임은 잘 나갈때 그 이익을 챙겨가던 사람들에게 물어야 한다'. 이런 비슷한 말이었다. 최근 경제 위기에 직면해서 주요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투자금액을 올리고 경기부양 계획을 쏟아내고 있다. 국가최소개입주의를 신봉하고, 그 원칙을 세계에 전도하던 미국마저도. 국가중심적 발전의 모범적 사례인 한국인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나, 지금 상황은 발전국가의 그런 모습과도 많이 다르다. 발전국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가 주도하는 모습이라면, 최근 모습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도록 방기하다 위기가 발생하자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자해서 기업들의 살려주는 것 아닌가. 이러다가 경기가 다시 좋아지면 그 기업들을 혹독하게 다그쳐서 더 많이 받아낼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그건 복지국가 모델인데, 신자유주의 국가모델이 그리 쉽게 자리를 내줄 것 같지 않다. 결과는 딱 위에서 언급한 대로다. 경제를 잘 나갈 때는 규제를 풀고, 세금깍아주고 [똘아이 정권의 부유세 축소처럼], 이익을 큰손들이 나눠먹게 하다가, 어려워지면 세금으로 그들 빈주머니를 채워주는 것. 2mb 무리들은 그 교과서적인 인물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더 적은 규제가 아니라 더 많은, 아니 더 효과적인 규제다. 망나니처럼 혹은 깡패처럼 거칠 것 없이 세계를 흔드는 그런 자본의 흐름, 투기세력들을 최대한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 금융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허깨비를 치우고 거품을 과감히 걷어내야한다. 냉전이후 지금까지 약 30여년 세계를 지배하던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과연 역사가 될 것인가...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신자유주의자들, 그의 표현으로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입장변화가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 케인즈주의로 돌아서는 것인지, 아니면 구제금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겉만 바꾼, 즉 위장한 '케인즈주의자' 들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어쨌든 더 지켜볼 일이다.
"현재 우리는 모두 케인즈주의자들이 됐다. 미국의 우익진영조차 대거 케인즈주의 진영에 가담하고 있다. 지난 30년동안 외면받은 케인즈주의를 지지해온 사람들에게 이것은 승리의 순간이다.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이성과 증거의 승리가 도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규제받지 않는 시장은 자기교정 능력이 없으며,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경제이론은 오랫동안 설명해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금융시장 종사자들은 일종의 '시장 근본주의'를 밀어부쳤다. (...) 오늘날 특정 이익 세력를 위해 오용될 위험이 있는 것은 새로운 케인즈주의 노선이다. 지난 10년 동안 규제완화를 밀어부친 자들이 교훈을 얻었을까?아니면 그들은 수조 달러의 구제금융을 정당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명분을 얻기 위해 겉만 바꾸는 개혁을 추진할 뿐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전략의 변화만 있는 것인가?"
"현재 우리는 모두 케인즈주의자들이 됐다. 미국의 우익진영조차 대거 케인즈주의 진영에 가담하고 있다. 지난 30년동안 외면받은 케인즈주의를 지지해온 사람들에게 이것은 승리의 순간이다.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이성과 증거의 승리가 도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규제받지 않는 시장은 자기교정 능력이 없으며,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경제이론은 오랫동안 설명해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금융시장 종사자들은 일종의 '시장 근본주의'를 밀어부쳤다. (...) 오늘날 특정 이익 세력를 위해 오용될 위험이 있는 것은 새로운 케인즈주의 노선이다. 지난 10년 동안 규제완화를 밀어부친 자들이 교훈을 얻었을까?아니면 그들은 수조 달러의 구제금융을 정당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명분을 얻기 위해 겉만 바꾸는 개혁을 추진할 뿐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전략의 변화만 있는 것인가?"
2008년 12월 5일 금요일
21세기에 믿는 기독교
내용은 다르겠지만 세계의 여러 종교는 세상사, 인생사를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주는 하나의 지식틀이다. 오랫 동안 가장 중요하고 권위있는 지식으로 그 위세를 떨치다가 소위 근대 이후 차츰 차츰 그 지위를 다른 지식체계에 내어 주고 있다. 과학이라는 지식 말이다. 기독교에 한정해 본다면 전지저능한 하나님 때문에 인간은 신의 뜻, 더 정확하게는 신의 뜻으로 표현되는 교회와 성직자의 해석을 좇아서 사는 수동적 존재였지만,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때문에 지구와 인간의 유일성 혹은 특별성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 기독교적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는 이런 지식틀에 근본적인 도전은 바로 근대과학인데, 대표적으로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의 주장을 들 수 있겠다.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다윈 이후로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는 의심 받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인간 사고의 공간적 영역을 확대했다면, 다윈은 시간적 영역을 확대했다. 중세 기독교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정도로... [신약성서가 씌여지던 시기로 돌아가면, 더 '안습'이다. 바울은 스페인을 땅끝으로 생각했었다니까.]
다음 사진은 탐사선 보이저 1호가 1990년 6월 명왕성 근처을 지나면서 찍은 지구의 모습이다. 사진의 별칭은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이 사진에 영감을 받아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고... 이 시점에 보이저호는 지구로부터 거리는 40억 마일, 약 64억 km 에 있었다고 하는데, 무척 멀다는 느낌만 줄 뿐 실제 내 수리능력으로 계산되지 않는 그런 거리다. 이런 내력을 알고서 저 사진을 보면 정말이지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히 QT용이라고 할만한 그런 사진이다.
"보이저 2호는 1977년 8월 20일, 1호는 9월 5일 지구를 떠나 무려 30년 동안 우주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보이저 1호는 인류가 만든 물체 중 우주 밖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다. 태양으로부터 155억 km 거리를 날아간 것. 태양으로부터 약 125억 km 떨어진 지점에 보이저 2호가 있다." (2007년 8월 얘기인 것 같으니 지금은 훨씬 더 멀리 있겠다). 두 우주선은 하루에 160만 km를 이동한다고 하고, 지구로부터의 명령은 빛의 속도로 날아가지만, 보이저 1호에 도달하려면 14시간이 걸리고 보이저 2호의 경우 12시간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그렇게 빠를까 싶긴 한대...
이런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일까? 중세 시대 혹은 그 이전 사람들은 하나님 혹은 각종 신이 구름 위 어드메나 바다 깊숙한 곳에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나와바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뿐이고, 비록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세상의 중심은 아니지만 그걸 알고서 자란 우리들에겐 그리 큰 심리적 손상을 주지도 않는다. 리차드 도킨스처럼 과학으로 신앙을 미몽에서 깰 수 있다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최근 취침용으로 도킨스가 이야기를 이끄는 도큐를 '즐겨' 보고 있는데, 이 양반은 '과학교', 그 중에서도 '진화론교' 신자라 불러도 좋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서 종교적 주장을 강변하는 일부 '무식한' 창조론자들에 대해선 나도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종교, 특히 유신교의 유산과 의의를 그리 싸그리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인류가 사고하는한 21세기, 아니 그 어느 때에라도 종교, 유신교에 대한 수요는 있다는 것. 물론 계속 살아님을 종교는 매우 유연해야 한다. 새로 얻게 된 지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창조론자들, 창조과학자들이 지금 주장하는 바는 머지 않아 중세 기독교처럼 시대착오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다음 사진은 탐사선 보이저 1호가 1990년 6월 명왕성 근처을 지나면서 찍은 지구의 모습이다. 사진의 별칭은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이 사진에 영감을 받아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고... 이 시점에 보이저호는 지구로부터 거리는 40억 마일, 약 64억 km 에 있었다고 하는데, 무척 멀다는 느낌만 줄 뿐 실제 내 수리능력으로 계산되지 않는 그런 거리다. 이런 내력을 알고서 저 사진을 보면 정말이지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히 QT용이라고 할만한 그런 사진이다.

"보이저 2호는 1977년 8월 20일, 1호는 9월 5일 지구를 떠나 무려 30년 동안 우주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보이저 1호는 인류가 만든 물체 중 우주 밖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다. 태양으로부터 155억 km 거리를 날아간 것. 태양으로부터 약 125억 km 떨어진 지점에 보이저 2호가 있다." (2007년 8월 얘기인 것 같으니 지금은 훨씬 더 멀리 있겠다). 두 우주선은 하루에 160만 km를 이동한다고 하고, 지구로부터의 명령은 빛의 속도로 날아가지만, 보이저 1호에 도달하려면 14시간이 걸리고 보이저 2호의 경우 12시간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그렇게 빠를까 싶긴 한대...
이런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일까? 중세 시대 혹은 그 이전 사람들은 하나님 혹은 각종 신이 구름 위 어드메나 바다 깊숙한 곳에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나와바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뿐이고, 비록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세상의 중심은 아니지만 그걸 알고서 자란 우리들에겐 그리 큰 심리적 손상을 주지도 않는다. 리차드 도킨스처럼 과학으로 신앙을 미몽에서 깰 수 있다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최근 취침용으로 도킨스가 이야기를 이끄는 도큐를 '즐겨' 보고 있는데, 이 양반은 '과학교', 그 중에서도 '진화론교' 신자라 불러도 좋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서 종교적 주장을 강변하는 일부 '무식한' 창조론자들에 대해선 나도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종교, 특히 유신교의 유산과 의의를 그리 싸그리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인류가 사고하는한 21세기, 아니 그 어느 때에라도 종교, 유신교에 대한 수요는 있다는 것. 물론 계속 살아님을 종교는 매우 유연해야 한다. 새로 얻게 된 지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창조론자들, 창조과학자들이 지금 주장하는 바는 머지 않아 중세 기독교처럼 시대착오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