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경고대로 경제적 위기의 심화가 한국에서 파시즘의 도래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선 회의적이지만, 인간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역주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 장담하진 못하겠다. 얼마 전에 본 독일 영화 Die Welle (2008, Dennis Gansel)가 파시즘이 얼마나 쉽게 확산될 수 있는지,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2009년 1월 2일 금요일
공포의 정치, 욕망의 정치, 그리고 파시즘
공포의 정치, 욕망의 정치. 억압적 정권의 행태를 이루는 두 축을 한홍구 교수가 그렇게 표현했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사회과학적인 이론 틀, 개념으로 수용할 수는 없을까?
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이쾌대 19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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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보니 화가의 자화상이다. 손에 들고 있는 도구들을 보라... 노골적이다. 그 화가는 그런데 인상이 참 강하다. 게다가 드러나 보이는 팔뚝도 굵다.
그런데 배경과 화가를 동시에 보면 왠지 어색하다. 어울리지 않는다. 저런 풍경이 보이는 곳에 화가가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물화의 풍경치곤 매우 현란하다. 풍경화와 자화상이 합쳐진 듯하다. 구도를 보면 모나리자가 연상되기도 한다.
내용적으로... 서양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부)조화가 보인다. 중절모와 팔레트가 '신식' 분위기라면 두루마기와 뒷배경은 전형적인 '구식'이다. 또 강한 남성미 풍기는 얼굴과 붓을 들고 있는 '시츄에이션'이 어울리지 않는다. 5일장에 나섰다 얼떨결에 화가용 소품을 들고 사진을 찍은 시골 청년 풍모 아닌가. 물론 주저함이라곤 모를 것 같은 듯한 단호한 표정이 그런 어색함을 덮어 주긴 하지만... 그러고보니 인물의 선을 굵고 진하게 표현한 것은 '약간' 프라다 칼로의 어떤 그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무리봐도 전체구도는 '모나리자'에서 빌려온 것 같다.
이름이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어울린다. 이쾌대. 호방하다. 이 그림은 1948, 1949 그 무렵에 그려졌다니 해방 후 미군정기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쏟아져 들어온 서구의 문물에 저항하려는 화가의 결기의 표현이리라. 좌파 미술인 단체에서 활동하는 등 당대 현실에 깊숙이 개입했다가 한국전쟁후 월북했고,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소외되었다 1988년에서야 해금되었다고 한다. 남한에 남겨 둔 그의 아내가 그림을 보관하고 있어서 해금 후에 이런 그림이 볼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하고... 언제 그렸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래 그림은 훨씬 더 '화가' 자화상 같다. 좀 더 우울해 보이고... '숱검댕이' 눈썹은 여전하지만... 옷도 역시 여전히 한복이네...
이 화가의 '존재'에 대해선... 덕수궁에서 열리는 전시회, "근대를 묻다 -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 를 알리는 기사에서 알게 되었다.

p.s.) 지난 10월 열린 '대구의 근대미술'전에서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실물을 볼 수 있었다. 역시 그림은 실물로 봐야 제 맛이다. 실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질량감, 터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를 극장의 큰 화면에서 볼 때 감흥이 다른 것처럼...
2008년 12월 26일 금요일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
'가깝고도 먼 나라'는 그 동안 일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주로 쓰였다. 허나 생각해보면 한국인 대부분은 일본보다 오히려 중국에 대해서 더 적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먼 과거 속의 중국이 아닌 '현대' 중국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해 말이다. 싸이버 공간에서는 중국을 희화하하는 이른 바 '대륙'의 엽기적 사진 혹은 사건들이 주의를 끌 뿐이고, 제도권 언론에서도 실체나 그 심각성을 확인하기 힘든 중국의 혐한증을 크게 보도하는 등, 현대 중국에 대한 우리의 담론은 그 깊이가 너무 얕은 것은 아닌지... 경제는 자본주의, 정치는 사회주의, 경제 발전 속도가 빠르지만 여전히 우리 70년대 수준의 '후진국', 그 정도 아닌가? 반면, 다른 극단도 있다. 중국이 좇아오고 있고, 우리를 곧 추월할 것이라는... 위기 없이는 굶어 죽는 정치 커뮤니케이션은 노무현 정부 때 바로 '우리 턱 밑까지 쫓아 온 중국'이라는 그림을 그리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이런 이중적인 시각은 중국에서 살면서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나 잠시 중국을 방문, '구경'하고 온 이들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대개 이미 알고 있는 것에 기초하여 낯선 것을 이해하게 되는데, 중국에 대한 국민적 프레이밍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최근에 한국을 방문했다는 왕후이(49) 중국 칭화대 교수(중문학)의 한겨례 인터뷰 내용을 일부 옮겨 둔다.
“오늘날 중국 정부가 펼치는 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사회주의가 국가·사회의 운영원리가 아니라, 국가 이데올로기가 됐다는 지적은 타당하지요.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오늘날의 중국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의 유산이 현실을 규정하는 힘으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중국 사회에 작용하는 사회주의의 유산으로 △세계 경제로부터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경제 시스템 △국제관계의 대외적 자주성 △제3세계와의 우호·선린 관계 △평등·자율성에 대한 인민의 강한 요구 등을 꼽았다. 이 가운데 인민들 사이에 깊게 뿌리내린 평등에 대한 감수성은 급격한 시장개혁을 통해 양산된 부패와 불평등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왕 교수는 진단했다."
“오늘날 중국 정부가 펼치는 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사회주의가 국가·사회의 운영원리가 아니라, 국가 이데올로기가 됐다는 지적은 타당하지요.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오늘날의 중국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의 유산이 현실을 규정하는 힘으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중국 사회에 작용하는 사회주의의 유산으로 △세계 경제로부터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경제 시스템 △국제관계의 대외적 자주성 △제3세계와의 우호·선린 관계 △평등·자율성에 대한 인민의 강한 요구 등을 꼽았다. 이 가운데 인민들 사이에 깊게 뿌리내린 평등에 대한 감수성은 급격한 시장개혁을 통해 양산된 부패와 불평등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왕 교수는 진단했다."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불확실성의 확실성: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시대
두바이에 실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이명박 정부도 출범 초에 그랬지만 지난 수 년동안 언론들, 정치인들이 두바이 찬가를 얼마나 불러댔던가. 아무리 불확실성, 위험, 무지가 근대사회의 본원적 특징이라고 치더라도 요즘은 그 정도가 너무도 심해서 도대체 전문가들이 내리는 어떤 진단, 전망도 믿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원유값이 급등했을때 CNN은 이 급등세가 조만간에 진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내용을 보도했으나 현실은 정확히 그 반대로 진행되었다. 불과 수 주 후에 유가가 급락했던 것. 최근 온세계를 흔들고 있던 미국발 금융위기의 규모를 제대로 예측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고... '미네르바'의 비관적 예언에 찬사를 보낸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외환 유동성 위기는 지나간 듯한 분위기다.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마샬 버만이 책 제목으로 써서 유명해진 '공산당 선언'의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우리말로 그 책 제목은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굳어진 것은 모두 사라진다' 정도로 번역되는 모양인데, 독일어 원문은 덜 재미있다. "Alles Ständische und Stehende verdampft" "Ständische und Stehende"를 동어반복처럼 이해했나 보다. 사실 ständisch 는 사전에 따르면 '신분제적'이란 뜻 밖에 없는데... 실제로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독일어 원문에서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엔 대개 "모든 신분적인 것과 정지해 있는 것은 사라지고" "신분적인 요소와 정체된 것은 모두 사라지고" 등으로, 영어에서 번역할 경우엔 "딱딱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정도로 옮기는 것 같다.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이명박 정부도 출범 초에 그랬지만 지난 수 년동안 언론들, 정치인들이 두바이 찬가를 얼마나 불러댔던가. 아무리 불확실성, 위험, 무지가 근대사회의 본원적 특징이라고 치더라도 요즘은 그 정도가 너무도 심해서 도대체 전문가들이 내리는 어떤 진단, 전망도 믿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원유값이 급등했을때 CNN은 이 급등세가 조만간에 진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내용을 보도했으나 현실은 정확히 그 반대로 진행되었다. 불과 수 주 후에 유가가 급락했던 것. 최근 온세계를 흔들고 있던 미국발 금융위기의 규모를 제대로 예측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고... '미네르바'의 비관적 예언에 찬사를 보낸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외환 유동성 위기는 지나간 듯한 분위기다.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마샬 버만이 책 제목으로 써서 유명해진 '공산당 선언'의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우리말로 그 책 제목은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굳어진 것은 모두 사라진다' 정도로 번역되는 모양인데, 독일어 원문은 덜 재미있다. "Alles Ständische und Stehende verdampft" "Ständische und Stehende"를 동어반복처럼 이해했나 보다. 사실 ständisch 는 사전에 따르면 '신분제적'이란 뜻 밖에 없는데... 실제로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독일어 원문에서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엔 대개 "모든 신분적인 것과 정지해 있는 것은 사라지고" "신분적인 요소와 정체된 것은 모두 사라지고" 등으로, 영어에서 번역할 경우엔 "딱딱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정도로 옮기는 것 같다.
'공산당 선언' 해당 부분을 독문과 영문으로 옮겨 놓는다.
"Alles Ständische und Stehende verdampft, alles Heilige wird entweiht, und die Menschen sind endlich gezwungen, ihre Lebensstellung, ihre gegenseitigen Beziehungen mit nüchternen Augen anzusehe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all that is holy is profaned, and man is at last compelled to face with sober senses his real condition of life and his relations with his kind."
"Alles Ständische und Stehende verdampft, alles Heilige wird entweiht, und die Menschen sind endlich gezwungen, ihre Lebensstellung, ihre gegenseitigen Beziehungen mit nüchternen Augen anzusehe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all that is holy is profaned, and man is at last compelled to face with sober senses his real condition of life and his relations with his kind."
反美食 同志
정윤수씨 블로그에 이어 내가 거의 매일 들르다시피하는 블로그가 생겼는데 그 이름이 '로쟈의 저공비행'. 주인장은 러시아문학전공자인 듯하지만, 주로 한국에서 새로 출간되는 인문학, 문학 쪽 서적에 대한 정보와 소감을 열심히 올리고 있다. 물론 개인 블로그인만큼 그런 무거운 얘기만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 올라온 글에서 주인장의 美食에 대한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게 바로 내 얘기인듯한 구절을 발견하고선 반가운 마음에 일부 옮겨 놓는다.
"먹성이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특별한 미식가도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식단은 저렴하면서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느껴지는 식당의 음식들이다. 20년이 넘게 먹어온 대학 식당에서도 가끔 '감동'하며 밥을 먹을 때가 있고, 5000원짜리 칼국수나 김치찌개, 청국장, 곱창전골 등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맛보기도 한다(값비싼 음식들도 더러 먹어보았지만 그저 '호사로군!' 할 따름이다). 파리가 들어간 수프도 후루룩 먹어치우는 고골 소설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먹는 일에 목숨 걸지는 않는 편이다('다 먹자고 하는 일이지!'란 말을 나도 덩달아 내뱉곤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몸에 해롭지 않고 특별히 불편하지 않은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이며 가끔씩 누리는 호사에 감사할 따름이다(비록 정신의 양식에 관해서라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
"먹성이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특별한 미식가도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식단은 저렴하면서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느껴지는 식당의 음식들이다. 20년이 넘게 먹어온 대학 식당에서도 가끔 '감동'하며 밥을 먹을 때가 있고, 5000원짜리 칼국수나 김치찌개, 청국장, 곱창전골 등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맛보기도 한다(값비싼 음식들도 더러 먹어보았지만 그저 '호사로군!' 할 따름이다). 파리가 들어간 수프도 후루룩 먹어치우는 고골 소설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먹는 일에 목숨 걸지는 않는 편이다('다 먹자고 하는 일이지!'란 말을 나도 덩달아 내뱉곤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몸에 해롭지 않고 특별히 불편하지 않은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이며 가끔씩 누리는 호사에 감사할 따름이다(비록 정신의 양식에 관해서라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말하기의 원칙: 私心없는 유연성
한자 言은 會意文字로 매울 신(辛)+입 구(口)의 조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서로 말로(口) 신랄(辛)하게 따지는 상황에서 나온 단어인 것. 말의 인간, 인생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를 커뮤니케이션이 재생산되는 체계로 본 루만의 견해가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가 다 있지 않겠는가. 물론 비언어적 의사소통도 포함하고 있지만, 오늘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에 한정한다. 갓난 얘기는 말을 익히게 되면서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격언, 속담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문자 커뮤니케이션이 인간사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일상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에도 여전히 언어 커뮤니케이션이 자리잡고 있다. 말은 어떻게 하느냐,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팔할은 되지 않을까? (cf.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서정주).
말이 너무 많아서도 곤란하고, 너무 적어서도 안된다. 특히,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쏟아붇는 말의 폭포수, 오, the worst of the worst다. 過猶不及! 그 다음 순위는 말이 많긴 하지만 상대방, 분위기를 고려하는 경우.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문제는 '참을 수 없는 입의 가벼움' 때문에 곧잘 '오버'하게 된다. 말이 너무 없어서 유사 '투명인간'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당연히 말이 많은 경우보다 말실수를 저지를 위험성은 급속히 줄어들겠지만, 수비만 잘 해선 잘해야 비기는 것 아닌가.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말 많음/적음이 아닐 것이다.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가, 그게 요점이지 않겠는가? 말을 '잘하기' 위한 어떤 원칙이 있을까? 우선 私心을 버리고 의사소통에 임하는 것 아닐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허나, 사심없음이 또 하나의 강한 원칙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상대방의 마음, 상황을 제대로 읽고, 그에 맞출줄 알아야 사심없음이 비로소 전정한 '배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심없는 유연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학문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는 서로 비슷한 모습, 겹치는 부분이 참 많다. 그런 교집합을 염두에 둔다면, 종교인들 혹은 학문의 세계에 투신한 이들과의 대화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아 할까? 쌍방에 기대되는 태도는 어떤 것일까? 사심 버리기, 속물근성 벗기, 내면의 본질을 좇기... 그런 태도로 임해야 그 대화는 좀 '고상한', 혹은 심지어 '영적인'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심, 사익, 사견에 치우친 대화의 경우 그 뒷끝이 씁쓸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로 사심, 사익, 사견의 경계는 정말 불분명하다. 이걸 가지고 무슨 학술논문을 써보려면 아마 시작도 하지 못할 그런 개념이고 주장이다. 최근에 떠오른 생각을 남겨 놓으려고 급하게 만들어 낸 개념일 뿐이고, 이 생각의 실마리를 좀 더 붙들고 있다보면 아마 더 그럴듯한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말이 너무 많아서도 곤란하고, 너무 적어서도 안된다. 특히,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쏟아붇는 말의 폭포수, 오, the worst of the worst다. 過猶不及! 그 다음 순위는 말이 많긴 하지만 상대방, 분위기를 고려하는 경우.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문제는 '참을 수 없는 입의 가벼움' 때문에 곧잘 '오버'하게 된다. 말이 너무 없어서 유사 '투명인간'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당연히 말이 많은 경우보다 말실수를 저지를 위험성은 급속히 줄어들겠지만, 수비만 잘 해선 잘해야 비기는 것 아닌가.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말 많음/적음이 아닐 것이다.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가, 그게 요점이지 않겠는가? 말을 '잘하기' 위한 어떤 원칙이 있을까? 우선 私心을 버리고 의사소통에 임하는 것 아닐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허나, 사심없음이 또 하나의 강한 원칙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상대방의 마음, 상황을 제대로 읽고, 그에 맞출줄 알아야 사심없음이 비로소 전정한 '배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심없는 유연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학문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는 서로 비슷한 모습, 겹치는 부분이 참 많다. 그런 교집합을 염두에 둔다면, 종교인들 혹은 학문의 세계에 투신한 이들과의 대화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아 할까? 쌍방에 기대되는 태도는 어떤 것일까? 사심 버리기, 속물근성 벗기, 내면의 본질을 좇기... 그런 태도로 임해야 그 대화는 좀 '고상한', 혹은 심지어 '영적인'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심, 사익, 사견에 치우친 대화의 경우 그 뒷끝이 씁쓸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로 사심, 사익, 사견의 경계는 정말 불분명하다. 이걸 가지고 무슨 학술논문을 써보려면 아마 시작도 하지 못할 그런 개념이고 주장이다. 최근에 떠오른 생각을 남겨 놓으려고 급하게 만들어 낸 개념일 뿐이고, 이 생각의 실마리를 좀 더 붙들고 있다보면 아마 더 그럴듯한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12월 20일 토요일
중국, 한국
요즘 중국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덕분에 중국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이 좀 넓어진 것 같다. 물론 아직까진 매우 단편적인 지식 혹은 인상에 불과하겠지만, 누가 알랴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뤄 볼 일이 생길 지... 생각나는 대로 그런 지식, 인상 모아 놓을 생각이다.
우선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지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수십편의 한국 드라마를 섭렵한 Ting은 최진실을 가장 좋아하는 배우였다고 꼽았는데 자살했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심지어 옷도 한국에 직접 주문해서 입는다고 하고, 옷을 주문하는 그 한국 사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울까 생각중이라고 할 정도... 남녀를 불문하고 '김치'를 상당히 좋아한다. 만들어 먹는다는 학생들도 있으니.. 참고로 이들 출신은 상하이, 텐진, 난징, 우한 등 다양한 편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김치가 중국에 이 정도로 확산되었는지 참 신기한 따름이다.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Xin이 전언에 따르면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에 대해서는 불만족도는 대체로 높은 편인 것 같다. 그렇다고 당장 서구적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또 꺼리는 편이다. 어떤 대안이 있을지, 적어도 그 친구는 많이 생각해 본 것 같진 않다. 공산당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직접투표가 아애 없는 것도 아니란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직접선거로 뽑는 모양. 또, 1989년 6.4. 천안문사건 때 죽은 학생 수가 만명 가까이 된다는 얘기도 있는 모양이다. 영문, 한글 위키피디아를 보니 사망자 수에 대한 주장은 2,3백명에서 5천명까지 그 편차가 매우 크다. 여하튼 대륙인들 스케일은 어디로보나 크다. 티벳사태 같은 등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독일 등 서구 언론들이 너무 편중된 시각으로 보도한다며 불만이 많았다. 한국에서도 그렇단 얘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허나 중국에 '혐한'감정이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라고.
한 친구는 중국에 민주주의는 시기 상조라고 대놓고 얘기한다. 인구 80%가 세상사에 무지한 농민이라는게 그 이유. 80년대 이후 자본주의를 도입하고서도 일당지배체제를 유지한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고 얘기한다. 물론 부패등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지만... 천안문사건이 처음에 부정, 부패에 대한 저항이어서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나중에 변질된 측면이 있다는 얘길를 들을 땐, 왠지 묘한 기분. 많이 듣던 논리 아닌가? 그리고 오히려 천안문 사건이 그 이후 사회를 더 움추르게 만들었다는 비판까지 덧붙이는 걸 보면... 우리 독재시대와 다른 점은 어쩌면 젊은이들, 나름 지식인들이 반정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싶다.
남녀간 양성 평등은 훨씬 강력하게 자리잡힌 것 같다. 남편이 요리를 전담하다시피하는 경우가, 심지어 아버지 세대에서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여학생들이 술은 거의 즐기지 않는다고 한다. 남녀평등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할 지... 한국 여성들이 성차별받는 부분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야 대개 인정하지만, 많은 경우 지구 어느 곳에서보다 더 씩씩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cf. '엽기적인 그녀').
그 친구에겐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때리는 장면이 눈에 띄나보다.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 경찰서에서... 어디에서나 때리는 장면이 등장한다고. 비록 많은 경우 장난스러운 설정이지만... 흠. 가벼운 폭력은 용인하는 그런 사회인가? 폭력으로 치면 미국영화도 만만치 않은데, 그런 영화에선 오히려 총질처럼 폭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cf. 'no country of old man'). 일상생활에 스며든 미시폭력,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이 우리 사회엔 정말 있나?
우선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지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수십편의 한국 드라마를 섭렵한 Ting은 최진실을 가장 좋아하는 배우였다고 꼽았는데 자살했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심지어 옷도 한국에 직접 주문해서 입는다고 하고, 옷을 주문하는 그 한국 사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울까 생각중이라고 할 정도... 남녀를 불문하고 '김치'를 상당히 좋아한다. 만들어 먹는다는 학생들도 있으니.. 참고로 이들 출신은 상하이, 텐진, 난징, 우한 등 다양한 편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김치가 중국에 이 정도로 확산되었는지 참 신기한 따름이다.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Xin이 전언에 따르면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에 대해서는 불만족도는 대체로 높은 편인 것 같다. 그렇다고 당장 서구적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또 꺼리는 편이다. 어떤 대안이 있을지, 적어도 그 친구는 많이 생각해 본 것 같진 않다. 공산당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직접투표가 아애 없는 것도 아니란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직접선거로 뽑는 모양. 또, 1989년 6.4. 천안문사건 때 죽은 학생 수가 만명 가까이 된다는 얘기도 있는 모양이다. 영문, 한글 위키피디아를 보니 사망자 수에 대한 주장은 2,3백명에서 5천명까지 그 편차가 매우 크다. 여하튼 대륙인들 스케일은 어디로보나 크다. 티벳사태 같은 등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독일 등 서구 언론들이 너무 편중된 시각으로 보도한다며 불만이 많았다. 한국에서도 그렇단 얘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허나 중국에 '혐한'감정이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라고.
한 친구는 중국에 민주주의는 시기 상조라고 대놓고 얘기한다. 인구 80%가 세상사에 무지한 농민이라는게 그 이유. 80년대 이후 자본주의를 도입하고서도 일당지배체제를 유지한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고 얘기한다. 물론 부패등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지만... 천안문사건이 처음에 부정, 부패에 대한 저항이어서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나중에 변질된 측면이 있다는 얘길를 들을 땐, 왠지 묘한 기분. 많이 듣던 논리 아닌가? 그리고 오히려 천안문 사건이 그 이후 사회를 더 움추르게 만들었다는 비판까지 덧붙이는 걸 보면... 우리 독재시대와 다른 점은 어쩌면 젊은이들, 나름 지식인들이 반정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싶다.
남녀간 양성 평등은 훨씬 강력하게 자리잡힌 것 같다. 남편이 요리를 전담하다시피하는 경우가, 심지어 아버지 세대에서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여학생들이 술은 거의 즐기지 않는다고 한다. 남녀평등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할 지... 한국 여성들이 성차별받는 부분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야 대개 인정하지만, 많은 경우 지구 어느 곳에서보다 더 씩씩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cf. '엽기적인 그녀').
그 친구에겐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때리는 장면이 눈에 띄나보다.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 경찰서에서... 어디에서나 때리는 장면이 등장한다고. 비록 많은 경우 장난스러운 설정이지만... 흠. 가벼운 폭력은 용인하는 그런 사회인가? 폭력으로 치면 미국영화도 만만치 않은데, 그런 영화에선 오히려 총질처럼 폭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cf. 'no country of old man'). 일상생활에 스며든 미시폭력,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이 우리 사회엔 정말 있나?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Beck, Simmel 그리고 사회학의 경계
최근에 좀 다른 맥락에서 겪은 몇 가지 일을 종합하면 이런 내용이다: "사회학은 언제 사회학인가? 사회학/비사회학의 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빌레펠트대 Japp교수가 Beck의 "Weltrisikogesellschaft"라는
책을 신랄(辛辣)하게 깐 '서평'을 오늘 읽었다. 그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벡의 이 책은 참 서평쓰기 곤란한 책이다. 사회학 저널, 특히 서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저널에 사회학자로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사회학 저서가 아니다. 이걸 사회학 신간 서평이라는 틀 안에서 쓰려고 하니 곤혹스럽다." 뭐, 대략 그런 내용... (벡의 일련의 작업이 과연 사회학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Bora 선생도 지나가면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Bielefelder들에게 사회학이란 과연...? Luhmann이 사회학인가? 라는 질문도 여기 저기서 하고 있을 것 아닌가... 도대체 사회학의 경계는 어디에?). 벡의 이 책은 박미애 박사의 번역으로 곧 한국판이 나올 모양인데, 우연히 본 소개 기사를 보니 찬사 일색이다. 그렇다. 그 정도만 해도 사회학으로선 충분한 것이다. 특히, 한국적 맥락에선...
책을 신랄(辛辣)하게 깐 '서평'을 오늘 읽었다. 그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벡의 이 책은 참 서평쓰기 곤란한 책이다. 사회학 저널, 특히 서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저널에 사회학자로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사회학 저서가 아니다. 이걸 사회학 신간 서평이라는 틀 안에서 쓰려고 하니 곤혹스럽다." 뭐, 대략 그런 내용... (벡의 일련의 작업이 과연 사회학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Bora 선생도 지나가면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Bielefelder들에게 사회학이란 과연...? Luhmann이 사회학인가? 라는 질문도 여기 저기서 하고 있을 것 아닌가... 도대체 사회학의 경계는 어디에?). 벡의 이 책은 박미애 박사의 번역으로 곧 한국판이 나올 모양인데, 우연히 본 소개 기사를 보니 찬사 일색이다. 그렇다. 그 정도만 해도 사회학으로선 충분한 것이다. 특히, 한국적 맥락에선...좀 다른 맥락에서... 며칠 전에 만난 Simmel 전공 선배는 짐멜의 에세이식 글쓰기에 대해 찬사를 날린다. 사실 짐멜의 에세이를 하나도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사실 이러쿵 저러쿵 하기가 좀 '거시기'하지만, 에세이란게 그냥 근거를 대기 힘드니 상상의 나래를 펴서 한 번 써보자꾸나, 하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횔더린의 시를 극찬했다고 하던가... (잘 모르는 얘긴 꺼내면 안되는데, 그냥 내 블로그니까...) 때로는 학술적 언어의 세계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답답함이 문학의 세계, 혹은 종교적 세계로 인도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 그러니까, 쌓이고 쌓인 것들이 시의 세계, 혹은 탄식으로 터져 나오는 건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불충분한 지식, 정보에 근거한 개똥철학, 역사소설을 학술적 글쓰기랍시고 내세워서는 안되겠다. 반드시 벡, 짐멜이 그렇단 얘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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