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c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 (Leviathan, ch. 26)
홉스 형님께서 남긴 말씀이란다. 번역하자면... Autorität, nicht Wahrheit schafft das Recht 혹은 Authority, not truth, makes the law. 매우 현실적인 관찰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푸코 형님을 만난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단순한 도식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권력은 지식을 통해서, 지식은 권력을 통해서.... 규율하는 힘은 그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2010년 10월 29일 금요일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루만, 체계간의 관계, 개입...
루만은 한 체계가 다른 체계의 작동에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런 개입으로 인한 변화 가능성을 별로 높게 보지 않고, 또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체계외부의 영향이란 환경에서 찔러 보는 정도일 뿐이고 (irritieren), 체계의 경계를 유지시키는 작동은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명쾌하다. 과학의 경우 정치, 경제 등 외부 체계들이 각종 정책이나 자금지원 등을 통해서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주제 선정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지속은 결국 과학 내적 코드, 즉 진술의 참/거짓이란 코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이를 Willke 같은 학자는 정치체계의 다른 체계에 대한 (대표적으로 경제) 조정과 개입 가능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컨텍스트조정' (Kontextsteuerung) 같은 개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루만도 옳고, 빌케도 옳고, 케인즈주의자들도 옳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부 개입을 반대하는 이들의 유사과학적 진술을 배제하고, 실제 정치와 다른 체계의 관계에 대한 경험적 연구들은 대개 개입의 현실을 인정한다. 몇 년 전부터 배회하던 미국발 세계경제위기가 여러 학자들이 경고했던 것처럼 제2의 Black Friday 사태로 이어지지 않은 건 각국 정부들이 '적절히'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제는 "개입이냐 방임이냐"가 아니라,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 일 것이다. 그런 결정은 대개 정치, 행정에서 내려지고 학자들은 그 결정 전후에서 이러쿵 저러쿵할 뿐이다.
경제 못지 않게 체계의 자율성과 개입의 갈등이 문제가 되는 영역이 과학이다. 과학의 자율성, 연구와 학문의 자유는 절대적일 수 없다. 특히, 20세기 이후 과학이 가져 오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물론 이 같은 과학의 힘 증대는 과학 스스로 해낸 게 아니다. 국가, 자본이 없었다면?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젠 과학을 좀 그냥 내 버려두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도 있다 (U. Beck). 그런 대안은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 영역에 대한 사회적 (과학의 사회적 환경의) 개입은 불가피한 것 같다. 역시 문제는 어느 정도, 어떻게...
이 같은 근대화의 상태는 근대성에 대한 이상적, 규범적 담론이 설 자리를 크게 좁혔고, 마찬가지로 '다양한 근대성들' 같은 낭만적 주장 역시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세계사회의 내적 수렴이 대세인 것 같고, 국가간 지역간 차이는 단일한 근대성의 변이 정도로 이해되는 게 옳을 것 같다.
문제가 복잡해지고, 내 놓을 대안도 변변치 않으니, 그저 우리 시대는 복잡하고, 다양하고.. .등을 얘기하는 사회이론은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게 바로 우리 시대, 우리의 현실인데도...
사회이론, 거시 사회이론의 분화가 사회학의 대세인 것처럼 얘기하나, 내가 보기엔 '큰' 사회이론들은 대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런 현상은 세계사회, 세계화라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 못지 않게 체계의 자율성과 개입의 갈등이 문제가 되는 영역이 과학이다. 과학의 자율성, 연구와 학문의 자유는 절대적일 수 없다. 특히, 20세기 이후 과학이 가져 오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물론 이 같은 과학의 힘 증대는 과학 스스로 해낸 게 아니다. 국가, 자본이 없었다면?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젠 과학을 좀 그냥 내 버려두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도 있다 (U. Beck). 그런 대안은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 영역에 대한 사회적 (과학의 사회적 환경의) 개입은 불가피한 것 같다. 역시 문제는 어느 정도, 어떻게...
이 같은 근대화의 상태는 근대성에 대한 이상적, 규범적 담론이 설 자리를 크게 좁혔고, 마찬가지로 '다양한 근대성들' 같은 낭만적 주장 역시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세계사회의 내적 수렴이 대세인 것 같고, 국가간 지역간 차이는 단일한 근대성의 변이 정도로 이해되는 게 옳을 것 같다.
문제가 복잡해지고, 내 놓을 대안도 변변치 않으니, 그저 우리 시대는 복잡하고, 다양하고.. .등을 얘기하는 사회이론은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게 바로 우리 시대, 우리의 현실인데도...
사회이론, 거시 사회이론의 분화가 사회학의 대세인 것처럼 얘기하나, 내가 보기엔 '큰' 사회이론들은 대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런 현상은 세계사회, 세계화라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망함도 힘이 되나?
슬픔이 힘이 되고 분도도 힘이 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민망함, 자괴감도 혹 힘이 될까? 답은 "어느 정도..."에 있을 것이다.
바닥까지 떨어져야 비로소 딛고 올라 설 수 있으니, 어설픈 민망한, 자괴감은 물론 어설픈 슬픔, 분노로는 힘을 낼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아직 멀었다.
바닥까지 떨어져야 비로소 딛고 올라 설 수 있으니, 어설픈 민망한, 자괴감은 물론 어설픈 슬픔, 분노로는 힘을 낼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아직 멀었다.
다시, 디지털도서관
앉아서 뚫어져라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직원들. 흠. 무얼 그리도 열심히들 보시는지. 그리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지켜보고만 있는 - 기도' 혹은 '어깨'들을 연상시키는 - '양복'입은 남성직원들. 공공기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하나 너무 노골적이라 보는 내가 당황스럽다.
2010년 10월 16일 토요일
Across The Universe (Rufus Wainwright)
오늘 '무한도전'을 재미있게 봤다. 녹화분량 걱정 탓인지 '오버'하는 모습이 가끔씩 걸리긴 했지만, 역시 '무도' '김태호'라는 얘길 할 수 있을... 'across universe'가 배경음악 중 하나로 들렸는데 낯선 목소리였다. 인터넷의 힘은 대단해서 마우스 몇 번 누르지 않고서 찾아낼 수 있었다. 원곡의 분위기를 모던한 방식으로 잘 살렸다 (2010년에 듣기에 원곡은 사실 좀 촌스럽거든). 가수는 낯설지만 이 영상은 이 음악이 OST였던 영화 'I am Sam'(2001)이다. 영화는 매우 재미있게 봤었는데 이런 음악이 깔렸던가, 새삼스럽다. Dakota Fanning의 야무진 모습도 기억에 남지만 Sean Penn의 연기력에 한 번 더 놀란 영화... ('Forrest Gump'[1994]의 더스틴 호프만 연기와 비교할 만한...).
ps) '텔레파시' 2편도 대부분 볼 수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속편 재미있기 어렵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음. 함께 보던 이들에게 '무도'를 과도하게 '찬양'한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2010년 10월 15일 금요일
본격문학/ 대중문학
충남대 오길영 교수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 중 일부를 옮겨 놓는다. 내가 생각하던 바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출처)
"(...) 대중 문학과 본격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놓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그 중 하나. 대중 문학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감수성에 호소하고 영합한다. 그러나 본격 문학은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불편하게 만든다.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대중의 감수성에 영합할 때, 그래서 얄팍한 인기를 얻고 책이 많이 팔리는 것에 만족할 때 작가는 통속 작가가 된다.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작가가 항상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를 나누는 근거가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근거 중 하나는, 역시 애매한 말이지만, 현실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냉정함, 무자비함, 냉철함이다. 내가 이해하는 글쓰기의 '유물론'이다.
작가가 견지하는 시선의 냉철함은 <엄마>나 <전화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신경숙 소설의 전매특허인 아름답게 포장된 미문의 '감상성'과는 거리가 멀다. 문체는 곧 사유의 표현이다. 신경숙 문체에서 때때로 느낄 수 있는 느끼할 정도의 아름다움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신경숙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사표'이다. 생활인으로서 작가가 '천사'인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정신'이 천사의 시각에 머문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작가들은 적어도 그들의 작품에서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일이지만, 인간의 삶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삶은 때로 아름답지만, 훨씬 더 자주 추하고, 혐오스럽고, 잔인하고, 역겹고, 위선적이고, 동물적이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의 그런 악마적 심성, 마성에 친숙해야 한다. 그걸 모르고서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런 판단은 생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작품에 드러난 작가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작가 개인의 성품이 천사표인지 악마표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신경숙 소설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악한'이 없다. 모두가 선하다. 이것은 비단 신경숙 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읽은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나는 제대로 된 악한을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최근 한국 영화에서 그나마 '악한'들을 만난다.)
나는 이 점이 한국 소설이 처한 곤경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라고 판단한다. 되풀이 말하지만 인간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깝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균열적이고, 위선적이다.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악마가 살고 있고, 아무리 악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한줌의 선함이 존재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애초에 '선'과 '악'의 구분조차 그렇게 손쉽게 나뉘지 않는다. 일급의 작가들은 주어진 '선'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선'이라고 주어진 것들이 과연 선한 것인지를 좋은 작가들은 따지고 묻는다. (...)"
"(...) 대중 문학과 본격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놓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그 중 하나. 대중 문학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감수성에 호소하고 영합한다. 그러나 본격 문학은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불편하게 만든다.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대중의 감수성에 영합할 때, 그래서 얄팍한 인기를 얻고 책이 많이 팔리는 것에 만족할 때 작가는 통속 작가가 된다.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작가가 항상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를 나누는 근거가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근거 중 하나는, 역시 애매한 말이지만, 현실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냉정함, 무자비함, 냉철함이다. 내가 이해하는 글쓰기의 '유물론'이다.
작가가 견지하는 시선의 냉철함은 <엄마>나 <전화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신경숙 소설의 전매특허인 아름답게 포장된 미문의 '감상성'과는 거리가 멀다. 문체는 곧 사유의 표현이다. 신경숙 문체에서 때때로 느낄 수 있는 느끼할 정도의 아름다움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신경숙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사표'이다. 생활인으로서 작가가 '천사'인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정신'이 천사의 시각에 머문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작가들은 적어도 그들의 작품에서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일이지만, 인간의 삶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삶은 때로 아름답지만, 훨씬 더 자주 추하고, 혐오스럽고, 잔인하고, 역겹고, 위선적이고, 동물적이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의 그런 악마적 심성, 마성에 친숙해야 한다. 그걸 모르고서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런 판단은 생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작품에 드러난 작가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작가 개인의 성품이 천사표인지 악마표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신경숙 소설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악한'이 없다. 모두가 선하다. 이것은 비단 신경숙 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읽은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나는 제대로 된 악한을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최근 한국 영화에서 그나마 '악한'들을 만난다.)
나는 이 점이 한국 소설이 처한 곤경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라고 판단한다. 되풀이 말하지만 인간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깝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균열적이고, 위선적이다.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악마가 살고 있고, 아무리 악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한줌의 선함이 존재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애초에 '선'과 '악'의 구분조차 그렇게 손쉽게 나뉘지 않는다. 일급의 작가들은 주어진 '선'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선'이라고 주어진 것들이 과연 선한 것인지를 좋은 작가들은 따지고 묻는다. (...)"
2010년 10월 7일 목요일
호감, 친구, 소셜 네트워트...
"깊이 있는 사적인 교류는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많은 만남이 인터넷이나 문자 메시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글로 쓰면 인간성을 위장하기 쉽다. (…) 호감의 신호가 전해지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시선을 마주해야 한다. 개인적인 만남이 드물수록 우리의 자존심도 확신을 얻기 어렵다. (…) … 에서 벌인 설문조사를 보면, 95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친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에 비해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율은 88퍼센트이다. 친구가 가족을 앞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친구들은 서로 확실하게 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 사이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 프랑크 나우만, 호감의 법칙. (그책, 2009) [원제, Frank Naumann, Die Kunst der Sympathie, 2007]
소셜 네트워크라고 불리는 공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분명히 오프라인의 경우에 비해서 친절한 내용으로 채워지는 편이다. 친절하게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선 뭔가 모를 조급증, 불안함 같은 게 느껴진다. 그 친절함을 통해서 주고 받으려는 호감, 그리고 보장받으려는 자존감의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일 거다. 나우만씨 '말씀'처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시선을 교환할 때 비로소 그 호감의 '질'이 드러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난 트위터, 페이스북 따위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 프랑크 나우만, 호감의 법칙. (그책, 2009) [원제, Frank Naumann, Die Kunst der Sympathie, 2007]
소셜 네트워크라고 불리는 공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분명히 오프라인의 경우에 비해서 친절한 내용으로 채워지는 편이다. 친절하게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선 뭔가 모를 조급증, 불안함 같은 게 느껴진다. 그 친절함을 통해서 주고 받으려는 호감, 그리고 보장받으려는 자존감의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일 거다. 나우만씨 '말씀'처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시선을 교환할 때 비로소 그 호감의 '질'이 드러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난 트위터, 페이스북 따위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