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 Kyung-Sup/ Song, Min-Young (2010), The stranded individualizer under compressed modernity: South Korean women in individualization without individualism, in: The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61 (3): 539 – 564
매우 흥미롭게 읽은 주장이다. 무엇보다 "individualization without individualism"이란 표현이 마음에 들었고. 이 표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대화의 특징을 간명하게 표현하는 방식일 수도... 근대의 구조와 의미론(문화)을 구분하는 루만 도식을 따르자면 구조적 근대화가 문화적 근대화에 앞서는 것으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윗 논문의 저자는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여성의 개인화'를 설명하지만, 난 오히려윗 논문의 테제를 매우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가져오는 게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2010년 11월 3일 수요일
2010년 11월 1일 월요일
"장점은 신이 내리지만, 단점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양준혁은 후배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야구는 단점과의 싸움이다. 상대의 단점을 파악해 공격하고, 내 단점을 찾아내 방어해야 이길 수 있다. 대타자가 되고 싶다면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는 게 우선이다.”
정확한 지적이다. 장점은 신이 내리지만, 단점은 신이 도와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해결할 수 있다. 단점을 간과한 이상, 성공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박동희 칼럼 중)
정확한 지적이다. 장점은 신이 내리지만, 단점은 신이 도와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해결할 수 있다. 단점을 간과한 이상, 성공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박동희 칼럼 중)
p.s.) 독일에서 한동안 Sueddeutsche Zeitung 을 구독한 적이 있었는데 스포츠면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었다. 대개 경기 내용이나 결과만 전해주는 짧은 기사들이자만 그 속에서 인문학적 교양과 스포츠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어우러진 맛깔스러운 기사들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 수준이 전반적으로 저급한 편이지만 특히 스포츠 저널리즘은 그 중에서도 밑바닥을 깔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천박함이 대세인 그 쪽 업계에서 가끔씩 튀는 기자들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야구 전문인 박동희 기자. 심지어 그의 블로그에도 정기적으로 들르곤 한다 (여기).
2010년 10월 30일 토요일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조용필 1990)
최근 "1박2일"에 소개되어서 큰 방향을 일으키고 있는 옛노래. 박주연 작사, 조용필 작곡. 1990년에 발매된 12집에 실렸단다. 용필 형님 노래만 잘 하시는 게 아니라 작곡 실력도 상당하심. 여러 버전이 이미 유툽에 올라와 있으나 윗 라이브 영상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영심 누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언제적 영상일까...
다중 근대성, 중층 근대성 논의의 한계
多重 근대성, 重層 근대성 (역사적..) 논의가 갖는 장점이자 약점은 비교문명사적, 비교역사사회학적 접근이라는 점. 역사적으로 충실한 접근일 수 있겠으나 근대성/근대화가 가지고 있는 국제성, 세계성, 세계사회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근대성 기원에 "집착"하기 때문에 빚어진 사태가 아닌가 싶다. 근대성이 서구에서 기원했다는 서구중심주의자들, 유럽중심주의자들, 베버의 후예들에게 어떻게든 보기좋게 한 방 먹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문명, 종교, 국가 등 지역을 그 비교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 서구만이 근대성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깨고 싶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서구/비서구라는 도식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후기 혹은 2차 근대, 혹은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러도 좋을 당대를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학자라면 그런 접근이 불만족스러울 수 밖에 없다. 물론 '비서구인'으로 자긍심은 일부 회복할 수 있겠지만... 물론 근대성의 기원에 대한 비교역사적 접근은 그 나름대로 큰 가치를 지닌 분야이나, 당대와 앞으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런 기원에 대한 집착은 버릴 필요가 있다. 역사적 결정론, 경로의존적 사고 말이다. 근대화의 특징은 바로 세계적 차원으로 확산되었던 것이고 그런 변화는 과거와 질적으로 단절되는 혁명적 변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세계가 근대성의 틀로서 완전히 새롭게 재편되었고, 그 이전 역사는 그 구도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English/ modernity/ globalization
Egnlish/ Englishes 그리고 modernity/ modernities (multiple modernity[modernities] 혹은 varieties of modernity) 논의 구도와 또 비슷한 건 globalization과 world society 논의.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세계화'는 대개 일방향적, 서구화, 미국화 등으로 이해되고, 국가의 역할 축소 등등, 세계사회는 세계적 수렴과 분산 혹은 다양성의 혼재로 정의된다. 세계적 거버넌스가 증가하지만 그렇다고 국가 역할이 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국가가 세계화를 이끌어가는 주체 역할을 하기도 한다 등등. 세계화를 근대화론과 비교한다면 세계사회 논의는 신근대화론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큰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있지만, 다양성, 혼재라는 양상에 대한 기술만 놓고 보면 신근대화론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사이의 거리를 그리 멀지 않다. 그 중에서도 죤 마이어는 좀 보수적인 것 같고, 루만은 그보다는 좀 더 래디컬한 것 같고, 몇몇 체계이론가들은 그보다 한 발 더 나간 것 같고... (슈텔리를 그 대표주자로 본다). (...)
내용이나 표현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런 얘기들을 그냥 쏟아내는 일은 좀 무책임한 짓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중에라도 고쳐 볼 마음으로 당장 떠 오르는 생각을 쏟아놓는 것이다. 뭐, '인적드문' '블로그'가 갖는 장점이라고 보면 마음 편하겠다.
"아시안 잉글리시" (리처드 파월, 푸른숲, 2010)
"원어민 영어에서 벗어나라"는 제목으로 한겨레에 서평이 실렸다 (여기). 내 평소 지론이기도 해서 반갑게 읽었다. 길지 않으니 원문을 그냥 옮겨 놓는다.
"지은이는 영국 출신의 법학자 겸 언어학자다. <아시안 잉글리시>는 25년째 아시아에 살면서 이 지역을 구석구석 다닌 그의 눈에 비친 ‘영어 풍경’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은(아시아인들) 왜 그렇게 영어에 집착하지요?”라고 묻는 한 서양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침투한 영어는 싱글리시, 타이글리시, 콩글리시 같은 현지 영어를 만들어 냈다. 이런 영어는 문법과 어순이 어긋나고, 근거 없는 단어의 조합도 많지만 현지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의 한 대출회사는 ‘貸(대) me more’란 이상한 광고를 냈는데, 데미 무어를 연상한 중국인들에겐 그만한 광고가 없다. 자동차 핸들(handle)이란 표현을 영어권(steering wheel)에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국에선 일상용어다. ‘Let’to go for steamboat’(증기선 타러 가자)는 말레이시아에서 생선스튜 먹으러 가자는 표현이다. 그 나라 문화를 수혈받아 적응하고 변형된 ‘다른 영어’를 ‘틀린 영어’로 부를 수 없다는 게 지은이의 견해다. 한국에서 핸들이란 단어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원어민’의 문제이지, 한국 사람들 탓은 아니다. 영어권에선 거꾸로 아시아와 소통하기 위해 아시아 영어를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그러니 근거도 없는 원어민 영어나 표준 영어에서 해방될 것을 주문한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에 있지, 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익숙한 명제와 함께."
p.s. 1) 당연히 번역서일 거라는 생각에 원전을 찾으려 '구글'해보았더니 왠걸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준다. 저작 소개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 "2009 (forthcoming): English in Asia, Asia in English. Seoul: Prounsoop" 물론 번역을 하긴 했겠지만 '푸른숲'이 기획해서 한글로 처음 출간된 책인 듯하다. 한국 출판계가 이런 '짓'도 하다니. 사실이라면 참 기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옆에 있다면 머릴 쓰다듬어 주고 싶다. ㅎㅎ
"지은이는 영국 출신의 법학자 겸 언어학자다. <아시안 잉글리시>는 25년째 아시아에 살면서 이 지역을 구석구석 다닌 그의 눈에 비친 ‘영어 풍경’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은(아시아인들) 왜 그렇게 영어에 집착하지요?”라고 묻는 한 서양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침투한 영어는 싱글리시, 타이글리시, 콩글리시 같은 현지 영어를 만들어 냈다. 이런 영어는 문법과 어순이 어긋나고, 근거 없는 단어의 조합도 많지만 현지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의 한 대출회사는 ‘貸(대) me more’란 이상한 광고를 냈는데, 데미 무어를 연상한 중국인들에겐 그만한 광고가 없다. 자동차 핸들(handle)이란 표현을 영어권(steering wheel)에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국에선 일상용어다. ‘Let’to go for steamboat’(증기선 타러 가자)는 말레이시아에서 생선스튜 먹으러 가자는 표현이다. 그 나라 문화를 수혈받아 적응하고 변형된 ‘다른 영어’를 ‘틀린 영어’로 부를 수 없다는 게 지은이의 견해다. 한국에서 핸들이란 단어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원어민’의 문제이지, 한국 사람들 탓은 아니다. 영어권에선 거꾸로 아시아와 소통하기 위해 아시아 영어를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그러니 근거도 없는 원어민 영어나 표준 영어에서 해방될 것을 주문한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에 있지, 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익숙한 명제와 함께."
p.s. 1) 당연히 번역서일 거라는 생각에 원전을 찾으려 '구글'해보았더니 왠걸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준다. 저작 소개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 "2009 (forthcoming): English in Asia, Asia in English. Seoul: Prounsoop" 물론 번역을 하긴 했겠지만 '푸른숲'이 기획해서 한글로 처음 출간된 책인 듯하다. 한국 출판계가 이런 '짓'도 하다니. 사실이라면 참 기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옆에 있다면 머릴 쓰다듬어 주고 싶다. ㅎㅎ
p.s. 2) 오래 전 IHT 기사에서 이젠 "English"가 아니라 "Englishes"라고 불러야 한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다. 재미있게도 English를 modernity로 바꾸면 기가막히게 비슷한 논의를 펼칠 수 있다. "modernity"와 "modernities" 사이의 논쟁 말이다. 흠. 이 얘긴 길어질 테니까 새로운 글에서...
2010년 10월 29일 금요일
운동의 2원칙: 힘 빼기, 핵심 동작 발견하기
귀국 후 주중엔 거의 매일 수영을 하고 있다. '출근'하는 공공도서관 바로 옆에 수영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수영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는데...
수영을 처음 배울 땐 물과 싸우려 든다. 빠져 죽지 않으려고... 물은 내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움의 대상이다. 겨우 뜨는 법을 배운 이후에도 물은 내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이겨내야 하는 대상이다. '선배들'이 몸에 힘을 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머리로만 이해할 뿐 체현해 내긴 쉽지 않다. 물이 극복하거나 이겨야 할 대상이 되지 않아야 비로소 몸에서 힘을 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큰 힘 들이지 않고 긴 시간 수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지'에 이르면 지상에서 이런 저런 무게에 짓눌린 내 몸이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물 속에서의 그 상황이 무척이나 반갑다.
물 속에서 속도를 내어 실제로 수영 실력을 쌓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인간의 몸은 물속에서 이동하기 위해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상태가 최적일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몸의 중심축을 몸의 진행방향에 맞추는 일이고 그 축이 좌우나 상하로 움직이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물이 내 몸을 타고서 흐를 때 편안하도록 내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머리다. 크롤영법('자유형')의 경우 고개를 최대한 안쪽으로 당겨서 시선이 바닥 정면이나 다리 쪽을 볼 수 있는 상태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머리와 고개를 잇는 축이 직선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또,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선 몸을 최대한 수면 가까이 그리고 수평으로 유지하는 게 낫다..
요약하자면 (1) 힘빼기 (2) 물 속에서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원칙을 발견할 것!
이런 기본적인 원리(?)는 다른 운동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특히, 힘 빼기! 투수들의 경우에도 몸상태가 '약간' 좋지 않을 때 오히려 투구내용이 오히려 더 좋다고 자주 얘기한다. 몸 상태가 너무 좋으면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씀!
어쩌면 이런 원리(라면 원리)는 운동 바깥 세상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도 기본적으로 유연할 필요가 있지만,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어디 학문이라고 다르겠는가. 평생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엄숙하게 대해서는 재미도 없고 또 잘 부러진다.
물 속에서 속도를 내어 실제로 수영 실력을 쌓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인간의 몸은 물속에서 이동하기 위해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상태가 최적일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몸의 중심축을 몸의 진행방향에 맞추는 일이고 그 축이 좌우나 상하로 움직이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물이 내 몸을 타고서 흐를 때 편안하도록 내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머리다. 크롤영법('자유형')의 경우 고개를 최대한 안쪽으로 당겨서 시선이 바닥 정면이나 다리 쪽을 볼 수 있는 상태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머리와 고개를 잇는 축이 직선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또,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선 몸을 최대한 수면 가까이 그리고 수평으로 유지하는 게 낫다..
요약하자면 (1) 힘빼기 (2) 물 속에서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원칙을 발견할 것!
이런 기본적인 원리(?)는 다른 운동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특히, 힘 빼기! 투수들의 경우에도 몸상태가 '약간' 좋지 않을 때 오히려 투구내용이 오히려 더 좋다고 자주 얘기한다. 몸 상태가 너무 좋으면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씀!
어쩌면 이런 원리(라면 원리)는 운동 바깥 세상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도 기본적으로 유연할 필요가 있지만,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어디 학문이라고 다르겠는가. 평생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엄숙하게 대해서는 재미도 없고 또 잘 부러진다.
global (universal)/ local (specific)
근대 이후 역사에선 보편성을 지향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문명/ 야만 도식을 넘어서, 온인류, 인간에게 적용되는... (cf. '자연법' 논의). 보편성에 대한 각양각종 담론은 비록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최근 버전 중 하나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개인주의'는 근대 담론의 精髓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인주의에 대척하는 표현은 '집단주의'인가? collectivism? 낯설다). 개인주의는 대항해야 했던 집단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가족, 가문, 신분...), 그 관철 과정에서 개인주의는 또 다른 집단주의를 만들어 낸다. 대표적으로 내셔널리즘 (nationalism, 국가주의 혹 민족주의)! 국가의 이해과 글러벌 문화 관계에서 보면, 국가이익을 지향하는 담론이 글로벌 문화를 수용하기도 하고 (아니, 그런 과정에서 글로벌 문화는 비로소 형성되고)... 결과적으로 개인주의와 (새로운) 집단주의는 함께 성장한다. 그러 과정에서 개인주의, 집단주의 모두 진화한다. 2010년 대한민국의 국가주의는 박정희 시대의 그 민족주의와 같을 수 없는 것.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긴장관계는 아마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될 것인데, 그 양상 변화를 추적하는 일이 매우 흥미로울 것 같다. 1960, 70년대에 한국 정부가 '발주'했던 출산조절 '프로젝트'는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단지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는 인구증가 억제라는 정부 홍보가 먹혀들어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당시 출산을 계획했던 개인들의 이해관계, 판단, 결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국 정부는 최근엔 오히려 출산장려 정책을 펴고 있는데, 아직 그 '성과'가 신통찮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공존하면서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생명공학정책의 형성과정을 보면 그런 갈등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to be continued...
어쨌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공존하면서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생명공학정책의 형성과정을 보면 그런 갈등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