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8일 수요일

이번 정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참 '착한' 정부다. 반면교사라고 하지... 특히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철학, 역사관, 가치관, 세계관을 분명히 세우는 일이 사람에게나 정부에게나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낀다. 단지 이 정부 고위직에 계신 '높으신' 분들 중에서 병역의무를 다한 사람이 희귀하다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다. 군복무, 군필이 중요하다면 군대에 수십년 복무했거나 복무하고 있는 저 '별'들의 한심한 언행, 대응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최고봉은 아마 평시전작권 가져오기를 두려워하는 저들에 대해서 노무현 전통의 일갈에 대한 그 별들이 보여준 행태일 것이다. 그때 이미 본색이 천하에 드러나 버려서 천안함, 연평도 사건은 속편 정도로 느껴진다).

'쥐'정부(G 20의 그 'G', 혹은 '어륀쥐'[orange]의 그 '쥐'^^)는 국방, 외교에 관해선 철저하게 미국 형님 보호를 받고, 경기부양은 4대강 삽질을 통해서 그리고 세계 시장에서 어찌 어찌 떡고물 떨어지기를 기대하겠다는 국정'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이 주장하는 '잃어버린 10년'은 다름 아닌 기득권을 잃어버렸던 10년이었음을 알려주듯 5년 동안 챙겨갈 수 있는 건 최대한 챙겨가려는 그런 국정철학도 가지고 있다. 그 언저리에서 충성한 똘마니들 밥그릇 챙겨주고, 대기업들 숙원사업도 해결해주고... 뭐, 그것도 철학이라면 철학이겠다.

특정 철학, 가치관, 세계관을 신봉하다시피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저런 실용주의도 아닌 빌붙어 생존하고 제 잇속을 채우려는 '가치관'을 가진 이들도 못지 않은, 아니 그보다 더 심한 문제이고 실제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불행한 사건이다. 현 시점에서 더 슬픈 건 2년 후에 정권을 넘겨 받을 세력들이 누가 되는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예감 때문이다. 내 '슬픈 예감'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틀린 적이 없다.

ps) '다행히' 예보와 다르게 눈도 내리지 않는 날에 신문 기사 몇 개 챙겨보다가, 아니 보고 싶지 않아도 수시로 떠 오르는 그런 기사들 때문에 괜히 욱해서 그만...

2010년 12월 7일 화요일

슬픈 눈

내일 적지 않은 눈이 온다고 하는군.
'한 개'도 반갑지 않다.
눈 '따위'에 설렐 나이도 아니지만 마음 편하게 즐길 수는 더더욱 없기에...



(사진은 여기에서 훔쳐왔다)
뭔가를 좀 제대로 설명해보려면 말이 더 많아진다.
그럴수록 의미가 풍부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쪼그라든다.
정말 소중한 것은 입 밖으로 내기 힘든 것.
그런 면에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주저리 주저리 지껄여야 하는 학문은 기껏해야 차선일 뿐이다.
제도화된 종교도 마찬가지고. 설교는 왜 그리 길까...
타자와 구별하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세우는 순간 의미의 풍성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는다.
현대 사회의 체계들, 의미의 풍성함이 탈각되고 뼈대만 남은 그 체계들의 작동에 몸을 맡겨서 사는 현대인들.
사회학은 기껏 그 정도를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생각, 표상, 개념은 단지 기호와 설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재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자신을 우리 나람의 자기 개념에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자아상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어떤 확고한 이미지에 너무 집착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예배하게 된다. (...)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이란 돕는 행위와 애틋한 감정, 헌신된 관계 그리고 낭만의 결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사랑의 일면이지만, 그것은 마치 날씨를 비에, 바다를 파도에 비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형태에 따라 사랑하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심리적, 영적 신경증을 겪게 된다. 심리적인 면에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다.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사랑의 거룩한 신비를 놓치게 된다"

Gerald G. May 2006, 사랑의 각성. IVP, p.42 [org. Awakened Heart (1991)]

2010년 12월 6일 월요일

현대 한국어에서 전화를 이용해서 대화를 할 경우 그 시작을 알리는 표현은 있어도 - 여보세요! - 끝내겠음을 분명하게 알리는 표현은 없다. 오죽하면 노홍철은 '뿅'이란 의성어를 가져다가 쓸까. 별도로 정해 놓은 표현은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을 길게 늘이는 것으로 전화통화를 끝내겠다는 신호를 준다. 여하튼 나는 아직도 그렇게 신호보내는게 영 어색해서 - 예전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만 - 가끔 불쑥 전화를 끊는다는 인상을 상대방에게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은 반대의 경우여서 연결이 끊어진 줄도 모르고 전화기를 한동안 들고 있었다. 음... 뭔가 국가적 대책이 필요한 듯.
이번 주에 '다시' '한국화' 전시회다. 음. 역시 깊이가 느껴지질 않는다. 강렬한 자극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턱없이 옅고 더 없이 가볍다. 현대인들의 심성을 담는 '용기'가 아닌 것이다 [형태 -> 내용]. 물론 거기에 깊이를 담는 작가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깊이를 알아채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 아닌 모양이다. 그나마 검정 먹물의 농도로만 표현한 그림이 색을 더한 그림보다 더 깊게 느껴진다. 그리고 서예의 경우 그림보다 더 깊은 것 같고...
좀 더 '쿨'해질 필요가 있다. 긴장의 끈을 잠시 놓쳐도 'uncool'한 것들이 사정없이 비집고 나온다 (예를 들어 잠잘 때,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화가 날 때, 논쟁을 할 때...). 그렇다고 긴장의 끈을 놓칠 새라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uncool한가! Wie uncool!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아마 '영성'에 대한 관심을 실행으로 옮겨보는 게 한 방법일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주 틈틈이 오강남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독일 체류 말기에 가졌던 묵상, 영성에 대해 생각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그 언저리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새로운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탓일까?

2010년 12월 1일 수요일

마침내 12월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_- 그나마 막혀서 나를 괴롭히던 문제 하나가 풀려서 '작은' 위로가 되지만... (물론 분명히 다른 문제가 곧 튀어 나올 것이다. 그래왔다. 지난 수 년동안...). 그러면서 '여유 없음'과 '유머'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여유가 없으면 웃음기가 사라지면서 표현이 거칠어지고 직선적이게 된다. 지성의 정수가 '유머'라면 감성 혹은 삶의 태도의 경우에서도 켜켜이 쌓인 내공은 유머, 해학으로 피어 날 것이다. 어르신네들이 가끔씩 가볍게 던지는 우스개는 그래서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오고 가는 표현들이 거칠고 직선적이라면 그건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의 눈에 게으르게 비쳐졌던 우리 조상들은 분명 달랐을 터. 우린 좀 더 잘 살게 되었고 대신 웃음을 잃었다. 독일 사람들도 유머와 거리가 먼 편인데 이는 아마 날씨 탓일 것이다. 남부유럽인들과 비교해 보면.. 아니, 영국 날씨도 나쁘기로 유명한데 왜 브리티시 유머는 유명한 걸... 세계제국을 경영해 본 이들, 가져 본 자들의 여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