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그런 마음을 먹고 살았는다면... 참 잘 된 경우다. 차악만 골라 살았는데 저 정도면... 허나 그의 인터뷰 다른 부분을 보면 의심스럽다. 중고등학교 시절 음악에 대해서 가졌던 열정 같은... 혹은 신문사를 그만두는 얘기 등. 그건 차악을 선택하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최선아니면 차선이라도 얻으려고 앞만 보고 뛰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삶을 위해서라면 때로 '최선','차선'처럼 보이는 일도 쉽게 포기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만 결국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해나간다면 그처럼 최선인 삶도 없지 않을까? 어떤 지향점 없이 차악만 골라서 과연 만족할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 지 의심스러워서, 그리고 셈나기도 해서, 말꼬리를 한 번 잡아 보았다.
2011년 4월 8일 금요일
나이가 들수록 맺게되는 관계가 넓어진다. 다양한 역할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 복잡성! 어떤 경우에서건 복잡성을 줄이려면 단순한 '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 공정성! 'fairness'! '페어 플레이'할 때의 그 '페어'... '편애'나 그런 오해를 살만한 언행을 피하기! 아래 사람을 대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아닌지.
김응룡 감독얘기였던 것 같은데... 그 양반은 그런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선수들과 식사한 번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너무 인간미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특정 선수에 대한 호/불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감독들보다 고수인 것 같긴 하다. 감독이 편애를 드러내고 상식적인 판단으로 이해하기 힘든 선수기용을 하면 팀워크는 무너지게 되어있다. 적은 대개 내부에 있는 법이니까.
또 목숨 끊은 카이스트 학생...무슨 일이?
올 들어서만 네 번째...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의 '뒤늦은 후회'
"안팎에서는 잇단 학생들의 죽음의 원인으로 '무한경쟁'을 꼽고 있다. 서남표 총장은 지난 2007년 취임직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학점이 4.3 만점을 기준으로 3.0 이하가 되면 벌금 형식의 등록금을 내게 했다.
학점을 돈으로 계산해 학점 3.0 이상은 수업료를 면제하고 2.0~3.0미만은 0.01점마다 6만원씩 본인이 부담하는 방식이다. 평점이 2.0미만일 경우에는 수업료 600만 원과 기성회비 150만 원 전액을 본인이 내도록 했다. 학생들이 수업료를 낸 비율도 2008년 4.9%, 2009년 8.0%, 2010년엔 12.9%로 매년 늘어났다."
"서 총장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학부모님들께, 학생들께 머리 숙여 죄송하다는 말씀 드린다"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 일을 되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올 들어서만 네 번째...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의 '뒤늦은 후회'
"안팎에서는 잇단 학생들의 죽음의 원인으로 '무한경쟁'을 꼽고 있다. 서남표 총장은 지난 2007년 취임직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학점이 4.3 만점을 기준으로 3.0 이하가 되면 벌금 형식의 등록금을 내게 했다.
학점을 돈으로 계산해 학점 3.0 이상은 수업료를 면제하고 2.0~3.0미만은 0.01점마다 6만원씩 본인이 부담하는 방식이다. 평점이 2.0미만일 경우에는 수업료 600만 원과 기성회비 150만 원 전액을 본인이 내도록 했다. 학생들이 수업료를 낸 비율도 2008년 4.9%, 2009년 8.0%, 2010년엔 12.9%로 매년 늘어났다."
"서 총장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학부모님들께, 학생들께 머리 숙여 죄송하다는 말씀 드린다"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 일을 되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오늘 확인한 오마이 뉴스 기사 중 일부다. 경쟁은 사람이 가진 - 때로는 본인도 가진 줄 몰랐던 - 역량을 끌어내기 위한 좋은 장치다 ('나는 가수다'가 좋은 사례고). 하지만 역시 지나치면 안된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아니, 경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숨 쉴 틈을 줘야 한다. 채찍과 당근... 조임과 풀림... '개혁 피로' 같은 표현도 있지 않은가. 야구에서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로 꼽는 게 '완급조절'이고.
2011년 4월 7일 목요일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이해한다 (라쇼몽 효과!). '이기적'라는 말이다. 거기에서 자유롭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타인을 '이기적'이라고 자신있게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서도 대부분 이기적 동기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이기적 인간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한 내용들이 서로 충돌할 때... 그런 위기 상황을 헤쳐나가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결국 그 중에서 자기에게 편한 방식을 선택한다. 또 다른 갈등, 충돌... 그렇게 끊이지 않는 위기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지속되고 사회생활이 유지된다는 것. 기적이다 기적.
그 기적의 비밀을 파헤치라는 임무가 바로 사회학자에 주어진 것 아닌가? 이중, 삼중 우연성 속에서 피어나는 '질서'를 설명하라는? 역할, 제도, 문화, 성찰성, 성찰적 점검, 상호작용, 신뢰...
2011년 4월 1일 금요일
2011년 3월 28일 월요일
아래 얘기는 지당한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내용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할 생각을 해보면 생각처럼 그리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적 균형'이란 얘기는 매우 상대적, 구성주의적 발언이다. 균형을 잡아 줄 중심의 존재을 상정하지 않는 거니까. 한 마디로 그 때 그 때 다르다. '나는 가수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나는 가수다'에서 재도전 허용이 비난받았던 까닭을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찾을 것인가?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그렇다. 하지만 한국 시청자들, 네티즌들 - 그게 누구건 간에... - 이 언제부터 그렇게 '원칙'을 깐깐하게 지킬 것을 요구했나?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이런 선택상황이 무수하게 많을 텐데 우리는 실제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원칙을 적용한다. 동일한 시청자, 네티즌은 유권자이기도 할텐데 그들이 원칙을 깨는 정도가 아니라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하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인데도 표를 줘서 당선시키기도 하지 않은가. 세상에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란 없다. '나는 가수다' 사태에 대해서 우리는 왜 그 프로그램에 대해서 유독 '원칙'을 강조했는 지를 물어야 할지 일반적인 경향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저 아래 글에선 나도 그랬던 것 같지만).
'절대적인 원칙이란 없다'는 발언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원칙이라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사례를 하나만 들어보자. '살인 금지' 어떤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자명해 보이는 이런 원칙도 일탈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식에 의해서 깨지고 있다. 대표저긴 방식으로 전쟁, 사형, 정당방위...
내겐 어떤 '원칙'이든 '원칙적으로(ㅋ) 상대적'이라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할 특별한 필요가 있다. 귀국 이후 접하게 되는 여러 낯선 상황에 대해서 그동안 짜증, 분노를 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따져보니 그 밑바닥엔 내 판단기준이 더 우월하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기준의 우월함을 믿고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전에 한국 상황이나 타인이 전제로 하고 있는 원칙을 우선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것 같다. 사실 그게 더 사회학적 접근이기도 하다.
탈중심 사회에서 균형잡기: 동적 균형
통일성과 다양성, 갈등과 질서, 자유와 평등... 이렇게 묶어 놓으니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걸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가치나 상태 외에 실제 존재하는 모든 현상엔 다면성이 내재되더 있다. 대개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느냐의 문제다. 게슈탈트심리학! 우리는 두 면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시점을 바꿔가면서 불안한 균형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불안정성, 불확실성은 인간 사회의 역사를 얘기할 때 지나쳐버릴 수 없는 측면이다.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제약, 유한성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한 불안감, 공포를 떨칠래야 떨쳐버릴 수 없다는 점이 불안정성, 불확실성의 더 본원적 이유일 수도 있겠다 ('천국행 티켓'은 중세 유럽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 사고하는 존재 -호모 사피엔스 - 가 존재하는 그것에 대한 수요, 공급은 없어질 수가 없다).
불확실성, 불안정성, 복잡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인류 역사의 단계를 그 처리 방식의 차이에 따라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유럽 근세사에서는 새로운 처리방식의 등장을 구분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바로 근대의 등장이다. 중세의 질서는 크게 중심부와 주변부로 구분되며, 그것들 사이엔 위계적인 방식으로 질서가 유지되었다면, 근대엔 중심이 없이 동등한 차원의 다양한 단위들로 나뉘고 (탈중심적) 그것들을 위계적으로 조정하던 메카니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니 불확실성, 불안정성, 복잡성의 정도를 강하게 느끼게 되는 건 당연지사.
이런 상태에서도 질서는 유지된다. 쭈욱... 하지만 그런 질서는 불안정하기 그지 없다. 동적 질서, 동적 균형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듯. 계속 움직여야 겨우 균형을 잡을 수 있는 팽이같은 운명이라고나 할까. 그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면? 카타스트로피! 국가 (당?)가 생산을 통제하던 소비에트연방의 몰락을 볼 것! 하지만 이 균형을 잡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 역사에서 승리했다고 자화자찬하던 모델 (후쿠야마),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 역시 몇 년 전 거의 무너질 뻔 하기도 했다.
이런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그 어떤 영웅이라도 세상을 단 칼에 구원할 수는 없다. 울타리 세우고 그 속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살지 않는 이상 - 그런 경우에도 이웃에서 날아오는 방사능 물질까지 피할 수는 없을 것 - 이 불안정성과 어울리면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정답은 없다. 다른 나라 쫓아가면서 우리도 좀 잘 살아보자며 허리띠 조으던 시절에 그나마 지향해야 할바가 분명해 보였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지도 않다. 다양성, 불안정성 속에서 균형 잡기. 대단한 통찰력과 지혜와 심지어 예술적 감수성까지 필요한 작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