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화"(ethicization)과 "윤리의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of ethics)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다.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던것... 윤리의 제도화는 상대적으로 분명한 개념이다. 윤리강령, 윤리위원회 등 구체적인 제도의 도입, 운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윤리화는 폭이 더 넓은 개념이다. 공적 담론에서 윤리적 프레미잉이 더 중시되는 경향과, 윤리의 제도화까지 포함한다. 윤리의 제도화는 매우 공식적인 활동에 대한 것이다. 재미가 덜하다. 윤리화, 혹은 "윤리 붐 boom" 같은 것이라야 사회학적으로 할 얘기가 더 많다.
공적 담론의 윤리화는 견해가 서로 다름(dissent)에 대한 공적 인정을 전제로 한다. 합의된 가치를 일방적인 관철시키려는 계몽의 의지의 발현인 도덕, 도덕화와 구별할 수 있다. 도덕과 윤리를 이런 방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현실 분석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도구인 것 같다. 이 구분은 A. Bogner에게서 들은 것이지만 , 최병구의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의 등장과 '행복' 담론의 변화"에서도 비슷한 구절을 발견했다. 아주 반갑게도...
"그런데 이러한 도덕주의는 '윤리'와 엄격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규율과 법칙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기 자신을 성찰대상으로 올리는 '윤리'와 다르게 도덕주의는 외적인 규율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 뿐이다." (p.47)
2013년 3월 16일 토요일
2013년 3월 15일 금요일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왜 제도화된 연구윤리가 필요한가에 대해서... 대부분 여전히 규제가 약하다던지, 이중적이라던지... 그런 식의 접근이 지배적이다. 그보다는 도대체 규제가 왜 필요한가? 반드시 필요한가? 어떤 기능을 하기에 제도화된 윤리가 새롭게 등장하는가? 같은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왜 스스로를 제한하는가? 정치는 왜 스스로를 제한하는가? 서구의 경우 상호관찰을 통해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
동아시아, 아니 적어도 한국의 특징은 있다. 중심부의 경우, 제도화된 윤리는 자율성을 지닌 체계들 간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라면("기능" 지향), 한국 같은 반주변부의 경우에 이는 경제적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최소한 갖추고 있어야 하는 메커니즘의 의미가 크다("성과" 지향).
즉, 일부 제도화된 윤리는 과학체계가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서, 연구의 지속을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연구활동의 일부를 스스로 제한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기능" 지향). 한국의 과학 정치는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최근의 변화는 "성과"지향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측면이 크다(이 때 수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국가, 국가의 결단!).
과학은 왜 스스로를 제한하는가? 정치는 왜 스스로를 제한하는가? 서구의 경우 상호관찰을 통해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
동아시아, 아니 적어도 한국의 특징은 있다. 중심부의 경우, 제도화된 윤리는 자율성을 지닌 체계들 간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라면("기능" 지향), 한국 같은 반주변부의 경우에 이는 경제적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최소한 갖추고 있어야 하는 메커니즘의 의미가 크다("성과" 지향).
즉, 일부 제도화된 윤리는 과학체계가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서, 연구의 지속을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연구활동의 일부를 스스로 제한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기능" 지향). 한국의 과학 정치는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최근의 변화는 "성과"지향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측면이 크다(이 때 수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국가, 국가의 결단!).
오늘은 새벽기도회를 다녀오지 않았고, 스토트님의 오늘치 묵상은 겨우 읽었다. 하지만 커피는 기쁘게 챙겨 마신다. 신맛이 약간 섞여서 아쉬움은 있지만... 마음 속 불편함, 그리고 문제라면 문제들이 생각난다. 한숨만 나오는... 그리고... 어제도 오늘도.... 옆에 앉게되는 "아는 분들"에 대해서 - 크게 아쉬울 것이 없지만 - 내가 먼저 얘기를, 그것도 적극적으로 꺼냈어야 했다. 그건 이해관계, 상하관계를 떠나서 인간에 대한 예의다. 아무리 mundfaul이라지만...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한 편이긴하다. 그렇게 말을 아껴서... 다른 쪽에 에너지를 집중하려는 것이냐?
며칠째 진중권님이 분당 오가는 길의 동반자다. 어제는 "미디어아트"에 대해서 오늘은 "교수대 위의 까치"에 대해서... 인상은 참... 좋지 않은 편이다. 사람을 기분나쁘게 하는... 얄미운... 특히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 질문자의 나이가 적지 않아 보이는데도 -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식으로 묵살하는 태도... 물론 바람직하진 않다. 하지만 겸손하고, 점잖고, 세심한 지식인들이 너무 많은 터라, 저런 할말을 다하는 "싸가지 없는" 지식인의 존재는 심지어 고맙기까지 한 것이다.
며칠째 진중권님이 분당 오가는 길의 동반자다. 어제는 "미디어아트"에 대해서 오늘은 "교수대 위의 까치"에 대해서... 인상은 참... 좋지 않은 편이다. 사람을 기분나쁘게 하는... 얄미운... 특히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 질문자의 나이가 적지 않아 보이는데도 -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식으로 묵살하는 태도... 물론 바람직하진 않다. 하지만 겸손하고, 점잖고, 세심한 지식인들이 너무 많은 터라, 저런 할말을 다하는 "싸가지 없는" 지식인의 존재는 심지어 고맙기까지 한 것이다.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현대인은 Individuum이 아니라 Dividuum이다!
- Der Soziologe Ulrich Beck spricht ironisch vom "Dividuum", wenn er den in viele Rollen und unverbundene Teilpersönlichkeiten zerfallenen Menschen charakterisiert.
- Der Soziologie und Systemtheoretiker Peter Fuchs bezeichnet damit eine Differenzierung der sozialen Adresse (ein theoretischer Terminus, dessen theoretische Rolle im Rahmen systemtheoretischer Kommunikationstheorie einfängt, was sonst meist unter den Begriff "Person" gebucht wird)
Peter Fuchs는 (특히, 상호작용 차원에서의) 유연성, 집단지향성 같은 일본의 정서가 주체와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서구의 정서보다 오히려 체계이론이 주장하는 근대의 Dividualismus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일본(혹은 아시아인)이 더 근대적?
유연성이 있는 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유연성이 대개 상호작용 차원에서는 잘 작동하는데, 오히려 조직 지향성이 체계적 차원으로 확대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다양한 체계들에서 요구되는 역할, 인격을 갖추는 유연성으로 확장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런 유연성은 오히려 기능체계부패로 이어진다. 그러니 푹스의 견해는 결함이 많은 것.
cf.
Peter Fuchs (1995). Die Umschrift
Ulrich Heinze (2013). System Theory as Global Sociology - Japanese Ramifications of Parsonian and Luhmannian Thought.
- Der Soziologie und Systemtheoretiker Peter Fuchs bezeichnet damit eine Differenzierung der sozialen Adresse (ein theoretischer Terminus, dessen theoretische Rolle im Rahmen systemtheoretischer Kommunikationstheorie einfängt, was sonst meist unter den Begriff "Person" gebucht wird)
Peter Fuchs는 (특히, 상호작용 차원에서의) 유연성, 집단지향성 같은 일본의 정서가 주체와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서구의 정서보다 오히려 체계이론이 주장하는 근대의 Dividualismus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일본(혹은 아시아인)이 더 근대적?
유연성이 있는 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유연성이 대개 상호작용 차원에서는 잘 작동하는데, 오히려 조직 지향성이 체계적 차원으로 확대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다양한 체계들에서 요구되는 역할, 인격을 갖추는 유연성으로 확장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런 유연성은 오히려 기능체계부패로 이어진다. 그러니 푹스의 견해는 결함이 많은 것.
cf.
Peter Fuchs (1995). Die Umschrift
Ulrich Heinze (2013). System Theory as Global Sociology - Japanese Ramifications of Parsonian and Luhmannian Thought.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사안에 따라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어느 한 쪽으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주위 사람들도 가끔씩 지적을 하기도 하고... 이는... 최대한 많은 걸 고려하려 하기 때문이다. 성급하게 설익은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독단적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의 여지, 여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점이기도 하다. 논문이 오래 걸리는 데에 그런 성향 탓이 크다. 어떤 한 측면을 때로는 과장하면서 강조하기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어떤 주제에 집중할 것인지 여전히 고민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장점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복잡한 것을 복잡한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 내가 루만의 체계이론에 느끼는 매력이 바로 그런 점이다. 그런 접근의 단점은... 확실한 진술을 끌어내기 힘들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