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0일 수요일

도덕/ 윤리 구분과,  도덕/윤리의 대상으로서 개인/ 사회의 구분이 필요.

특히, 개인의 도덕/윤리와 사회(체계)의 도덕/윤리 구분이 불분명한 경우 도덕주의로 결론을 내리기 쉽다. 무책임한, 혹은 형식적 윤리만을 지키는 사회(체계), 그리고 개인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푸코, 바우만)
반면에 개인과 사회를 구분하는 경우는... 훨씬 더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니버의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나 루만의 경우...

그리스인들은 윤리(학)을 도덕과 연관시키기보다는 관습과 관례에 연관시켰다(Ethik <---ethos p="">
스피노자(1632 - 1677)에겐 항상 자연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특수한 질서(순서)로 합성에 참여하게 되는 관계들이 있다. 선(Good)과 악(Evil)은 없으며, 좋음(good)과 나쁨(bad)이 있을 뿐이다. "선악을 넘는다는 것은, 적어도 이 말은 좋음과 나쁨을 넘어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좋다는 것은 어떤 신체가 직접적으로 그 관계를 우리의 신체와, 그리고, 우리 신체의 모든 것 혹은 그 힘의 일부분과 합성시킬 때, 우리의 신체를 증대시킬 때이다."

칸트에게 도덕은 환원 불가능하고 초월적인 보편적 요구이고, 윤리는 사회 공동체에 근거하여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다가간다. 칸트는 도덕보다 윤리학을 선호한다.

헤겔은 보편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음으로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의무인 "도덕"(Moralität)과 특정한 장소와 시대에 요구되는 삶의 방식인 "윤리"(Sittlichkeit)를 구분... 헤겔은 엄격한 도덕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니체는 "선과 악"(good/ evil, gut/ böse)의 구분을 도덕으로 보고,  好/不好(good/bad, gut/schlecht)의 구분은 "윤리"로 보았다. 니체는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짐. 존재로부터 도덕적 당위를 거부 즉 "도덕적 존재론"을 거부한 것. 니체의 "비도덕적 도덕"은 인간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힘에 의한 도덕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노예의 도덕"을 거부. "노예의 도덕"은 어떤 것에 의해 부과되는 도덕 즉 규범윤리학을 의미. 따라서 이말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부정이고, 도덕 판단의 절대성과 무조건성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

푸코에 따르면 기독교의 생성과 발전 이후로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발전한 삶을 미적인 관점에서 배려하고 돌보는 의미로서의 "윤리"가 점차 의무나 금지를 강조하는 도덕으로 대체되어갔다고 주장. 자아의 정체성과 윤리적 행동을 둘러싸고 이를 일방적으로 규정하려는 힘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과 투쟁이야말로 윤리적 행동의 시작이다. 윤리적 삶의 목표가 자유의 실천을 통하여 자아라는 형식을 주체적으로 채워나가는 것이라면 현실에 안주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비윤리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코드화되어 있으면서 금지와 의무를 강조하는 도덕 이외에도 우리의 구체적 삶을 대상으로 하는 윤리의 세계가 있고 이것이 지금까지는 너무 소흘히 취급되었다는 사실인 것이다. 윤리란 "개인이 자신과 맺어야만 하는 관계를 말하며...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행동의 도덕적 주체로서 자신을 어떻게 구성하는 가를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어가는 관점에서 보편적인 준칙을 따라야하는 도덕과는 다른 윤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푸코의 윤리학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에서 윤리적인 것은 인간본성에서 도출되지 않음. 윤리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발생. 따라서 본질적인 윤리적 주체를 설정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 윤리의 "기초"가 없다면, 급진적 사회운동이 필요로 하는 윤리 또는 집합적인 윤리적 주체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 "우리가 매일 해야 하는 윤리적, 정치적 선택은 어느 것이 주요한 위험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것. 


 니체와 푸코식의 사고에서 만약 윤리가 존재한다면 보편 법칙 대신 자유로운 정신의 미학적 실험이 장려되고 그것이 다원주의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미학적 윤리"가 됨. 윤리가 실존의 미학과 동의어가 되며, 실존의 미학에 던질 수 있는 "급진적 질문"은 그 미학이 "상호 주관적 미학"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 이 질문은 개인의 자율성의 극대화가 현존하는 사회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변형됨.


바우만은 개인의 도덕이 보편적이고 수단적 윤리의 종속물로 변질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규범적 관점올 유지하고 있다.

(바우만의 도덕/윤리 구분은 니체, 푸코와는 정반대다. 니체, 푸코는 사회적의 강제되는 도덕과 개인의 윤리를 구분했는데, 바우만은 보편적, 수단적 윤리와 개인의 도덕을 구분한다. 이런 걸로 볼 때도 알 수 있지만 도덕, 윤리 구분은 그때 그때 다르다)
바우만과 루만은 여러 면에서 상반된다. 바우만이 포스트모던을 얘기한다면 루만은 모던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바우만은 기능적 분화, 분업 등으로 인한 책임감 상실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규범의 회복을 강조한다면, 루만은 규범화 경향을 비판한다. 바우만은 관료제적 합리성이 홀로코스트를 만들어 낸 원인으로 본다.

2013년 4월 9일 화요일

신우회 모임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오셔서 설교하시는 목사님.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메세지 내용이 없는 건 아닌데... 이건 뭐 성경 본문은 그저 장식일 뿐이고... 그 메세지의 근거가 신앙인지 신학인지 인생철학인지 교양독서인지... 불분명하다.
점심 식사하면서... "차별금지법" 얘기를 어떤 분이 꺼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라고... 그 분은 무엇보다 '동성애자'를 언급했다. 식사 자리에서 그런 주제로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 댓구를 하진 않았다. 게다가 그 분은 분명히 '신우'들 사이엔선 공감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얘기를 꺼낸 것 같아서... 또 그 양반은 일상적으로 규율될 일들도 지나치게 법으로 규제하려드는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세상에... "차별 금지"만큼 법적으로 규제할 일이 필요한 일이 또 어디 있다고... 목사님은 또 요즘 한국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불분명해진다는 탄식도 쏟아냈다. 그런가? 60, 70년대의 그 개발독재 시절에는 발전, 근대화, 경제성장이라는 "옳은" 목표로 온국민의 의지와 열정, 노력이 모아졌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분명한 시기였다는 것인가? 동성애자 차별 금지를 얘기하는 분위기가 도덕적 타락의 징후로 읽히는가?
차별금지 공론화의 출발점이자 가장 큰 의의는 사실 차별을 인정하는 것이다. 차별 받는 자, 차별 받는 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그 내용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동성애자가 차별받는 소수자라는 점, 법률적으로 보호받아야하는 대상으로서의 정당한 위치를 얻게 되는 것, 그게 불편한 것이다. 모든 소수자들은 그런 대접을 받게 된다. 어디 여자가... 어디 장애자가....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예수라면... 어떠셨을까? 답은 분명하게 나와있자 않은가? 예수께서 오정현 목사가 설교하는 사랑의 교회 신축 성전에 기꺼이 찾아가실까?
오랜만에 한국 영화 두 편을 봤다. 극장에서 제대로 감상한 것이 아니라 컴으로 듬성 듬성... "분노의 윤리학"(박명랑)과 "남쪽으로 튀어"(임순례). "분노의 윤리학"은 재미있게 봤다. 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 그 직전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은 "펄프픽션"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방식이 계속 사용되면서 오히려 긴장도가 떨어지고 느슨해진다. 공식에 대입해서 답이 나오는 수학 문제 풀기 같은... 연기가 대부분 좋은 편이고, 또 극의 중심이 여러 인물들에게 분산되어 있고, 독특한 캐릭터들도 있고(문소리), 인간의 이중성, 삼중성을 드러내는 내용들이라 나름 재미있게 봤다. 나중에 찾아 보니 흥행은 죽을 쓴 모양이고 "네티즌"들의 평도 거의 악담 수준이다. "저런 것도 영화냐... " 참. 이렇게 다르구나.
"남쪽으로 튀어"는 기대를 좀 한 탓인지 역시 실망이 컸다. 일본 원작이고 임순례 감독, 김윤석 주연 등. 기대감을 갖게 할 요소들이 없지 않았는데... 역시 뭔가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코미디도 아닌 것이... 연기도 대부분 겉돈다. 김윤석의 연기 역시 매우 작위적이다. "황해"완득이""추격자" "타짜" 같은 좋은 쪽이 아니라, "즐거운 인생"에서의 김윤석이었다. 뭔가. 자연스럽지 않고 "연기"하는 듯한...  인물들이 대부분 겉돈다. 원작의 설정이 한국 현실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동진 씨는 얘기했던데... 맞는 얘기다. 코미디도 아닌 것이, 주제의식만 떠다니는.... 그나마 볼만했던 연기는 큰 딸, 막내딸, 선생님, 그리고 공안 1,2.
'사회통합'과 '체계통합'을 구분해서 볼 때... 나는 체계통합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역시 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인간의 활동과 구분되는 사회의 작동(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인간 없이 사회 없고 사회 없이 인간이 없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난 인간과 사회의 관계(사회통합)가 아닌 사회체계들 간의 관계(체계통합)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체계통합이 반드시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 둘은 원칙적으로 다른 질서다. 사회통합과 체계통합의 분리는 근대의 성과이자 동시에 근대 위기 혹은 비극의 뿌리다. 이 둘에 생태적 통합을 더 해서 모두 세 가지 통합양태를 서로 조화시키는 것이 지금 인류가 잘 살기 위해서 다뤄야 할 과제다.

지난 주말 도서관에 갔다가 "삼국유사" "한국미술사 2"(유홍준, 삼국시대, 고려시대 편)을 훑어보았다. 도대체 한민족, 조선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어떤 방식으로 성립, 유지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남긴 조상과 지금 나와 어떤 연속성이 있을까? 발해, 신라, 고려는? 그나마 현재와 연속성을 꽤 갖는 조선, 특히 조선 후기 정도가 되어야 연속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일상적으로 남아있는 유교적 관습 정도? 그것도 제사 정도로 남아있을 뿐이긴 하다. 예를 부부유별을 강조해서 남편, 아내가 거하는 곳이 다른(사랑채, 안채) 조선 양반의 풍습이 남아 있나? 불교의 연속성은? 삼국, 고려 이후로 이어지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한반도 불교의?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건 본능에 가깝다. 익숙한, 가까운 시선으로 낯설고 먼 것을 보게 되는 것... 본능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성찰 능력, 특히 역사적 성찰 능력도 가지고 있다. 낯선 시각으로 익숙한 것을 재단할 수도 있는 능력...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지금 현 인류가 싸우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가까운 미래에도 벌써 우습게 여겨질 것이다. 예를 들어 인종, 민족, 성별 차이 등에 대한 수십년 전 견해가 지금 시각에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후진' 관점인 것처럼.... 지금 익숙하고, 상식적인 견해, 행동 중 수십 년 뒤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미래를 현실에 과잉투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긴 하지만...
사람은 참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 페북에서 김동호 목사님은 "가난은 개인이 극복할 수 있다"는 요지의 글을 남겼다. 이 분은 이런 내용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파하고 그 때마다 공감을 얻기도 하지만 그에 맞먹는 비판, 비난을 받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데 이는 그 주장에 대한 비판이 그 분의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난? 개인이 극복할 수도 있겠지. 실제 극단적 가난 상태를 벗어나 부자가 된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고. 그리고 깨끗하게 돈을 많이 벌면 좋겠지(소위 "청부론"). 깨끗한 부자들이 기부를 하면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 구제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문제는 시야가 개인의 게으름/부지런함에 고정될수록 가난과 부자 간의 불평등 구조는 오히려 더 고착화된다는 데 있다. 원칙적으로 틀린 얘기는 아니나 그 얘기만 반복하는 건 참... 물론 내 생각 역시 어지간해선 잘 바뀌지 않는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의 눈엔 내가 고집불통으로 보이겠지...

2013년 4월 5일 금요일

요즘 딸은 새벽 4시 반경에 배고픔을 호소한다. 대개 분유를 먹인 후 나도 더 자는데.... 어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이 든 터라 오늘은 이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늘어난 하루를... 내친 김에 새벽기도회에도 다녀올까 한다. 愼獨...

2013년 4월 2일 화요일


정당정치가 약한 대통령중심제는 5년마다 나라틀이 휙휙 바뀌는 부작용이 있다. 같은 정당에서 배출한 대통령도 전임자의 틀을 완전히 뒤집는다. 변화, 개혁도 필요하지만... 글쎄... 더구나 일부 퇴보의 경향마저 보인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까지는 긍정적 변화의 흐름이 그래도 있었다면,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면서 매우 퇴행적인 행태를 보인다. 정부 조직은 5년마다 큰 틀에서 바뀌고... 정책의 연속성은 물론 관료제 조직을 통해서 이어지긴하지만... 지속가능한 정치, 행정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