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5일 수요일

그 양반 큰일났다. 중증이다. 과대망상... 그 행태가 사뭇 천박하다. 빈 깡통이 요란한 격이다.  앞뒤 재지 않고 치고 받으면서 인정 욕구 결핍증을 온천하에 광고하고 있다. 그 투정을 받아주면 기회다 싶어서 더 저돌적으로 덤벼든다. 점잖게 논리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면 잠시 꼬리를 내리는 것 같다가 금새 돌변해서 다시 달라든다. 무시가 상책일까. 아... 치유가능성이 보이질 않는다.

이 양반 아주 유치하다. 명백하게 혹은 덜 분명하게 드러난 자신의 잘못, 오독, 무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말꼬리 잡기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A를 질문해서 B를 이야기했고, C를 질문해서 D를 이야기했다면, 거기에 대해서 왜 B,D를 동시에 얘기하지 않느냐라고 물어뜯는다.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니 자가발전해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한다. 오래 못 가 방전될 것이다.

아. 걱정이다. 오래 못가지 않을 것 같다. 방전되지 않을 것 같다. 이 양반에게서 "부러진 화살"의 그 수학교수가 연상된다. 이런 '확신범'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굽히지 않는다.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안타까운 마음에 나라도 얘기를 해주려다 그만두기로 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 (1) 예전에도 여러번 했던 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고, 그건 다시 말하면 그 이후로 바뀌지 않은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2) 좌충우돌하며 흙탕물을 일으키는 사람 한 명쯤 있어도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 모두가 너무 예의바르고 점잖으면 지루하니까.


무척 추운 겨울 밤. 서울역. (2014.2.5.)

2014년 2월 4일 화요일

모처럼 밤 늦게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귀가중. 오늘 만난 사람들 때문에 찜찜함이 남아있다. 하지만 내게 찜찜함을 안겨 준 그 분들 상황을 봐도 크게 부럽진 않다. 이걸 감사해야 할 지, 아님 이렇게라도 위로를 찾는 상황에 안타까워해야 할지...

2014년 2월 3일 월요일

아래 포스팅과 연관지어서 볼 때...

한국에 부정행위가 심하고, 원칙을 잘 지키지 않고, 위선과 말과 행동의 분리가 자주 관찰되고, 상식 즉 대다수가 공감하는 영역이 매우 좁은 까닭은?

역시 근대적 문화의 저발전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화적 차원에서 근대성의 핵심은 개인주의다. 주체! 개인주의는 개인 간의 '원칙적 평등', 자유, 책임 등을 모두 포함하는 얘기다. '자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주인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노예, 노예근성과 구분되는... 루만의 체계이론은 이 개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사회로 확장한 것 같다. 개인의 자율성... 이게 낭만주의인가? 여하튼... 우리는 대개 자신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일에 대해서 더 큰 책임성을 갖는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은 잘 지키지 않을 뿐더러 책임을 져야하는 경우에도 회피하려고 한다.

어제 식구들과 만남에서 느낀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부모와 선생님들 등 위에 대한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거기에 대해서 나는 "네 인생은 네 것이니까 네가 책임져라"라는 얘길 해주었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또 '신앙'이라는 권위까지 빌어와서, 대의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도록 가르친다. 기독교가 한국에서 특별히 사랑받는 이유엔 이런 결합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강요되는 복종, 희생을 기독교에서도 아주 철저하게 내면화시키니까.

뼈속 깊이 타의에 의해서 키워지는 아이들, 국민들... 심지어 내 동년배들에게서도 그런 성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적어도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문제는 내 발언에 무게를 더해줄 그런 사회적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데...
한국 정부, 각종 단체, 국민들의 위선적 행태, 혹은 대놓고 저지르는 부정, 불법 행위는 국내 문제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국제적 혹은 세계적 차원의 공적, 사적 거버넌스에 도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페북에서 발견한 견해... 미국 고등학교에서 한국 같았으면 쉽게 저릴렀을 부정행위를 잘 보기 힘들다는 증언에 이어서... (부모 동의[사인]만 있으면 가능한 결석계, 어떤 과목의 1교시 시험을 3교시에도 치는 경우 그 사이 문제, 답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상황. 이 두 경우 부정을 저리는 경우는 드물다. 왜? 부정행위니까. Cheating..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도덕과 규칙에 대한 존중이 자리잡지 못할 경우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우리는 감수해야만 합니다. 결석통보서의 위조 가능성을 막기 위해 부모에게 확인 전화를 일일히 해야 하고, 인감증명서까지 제출토록 하여 진위를 확인해야 한다면 그만큼 사회적 비용이 지출되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시험문제의 유출 가능성을 막기 위해 시험 볼 때마다 다른 유형의 문제지를 사용해야만 한다면 이것 역시 그만큼의 사회적 비용이 지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몇십년 동안 별 탈 없이 운영되어온 SAT와 TOEFL의 문제은행 제도가 한국 학생으로 인해 딜레마에 빠진 것도 이러한 잘못된 문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결국, 문제은행의 데이타량이 아무리 많더라도 10년이면 모든 문제유형들이 노출되게 됩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년 교수들과 선생님들을 모처에 가둬놓고 문제를 출제토록 하는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풍경입니다. 
(1) 조카들에게 새배를 받고 덕담이라고 하긴 했는데... 찜찜함이 남는다. 사실 이야기의 힘은, 특히 화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경우, 이야기 내용과 화자에 대한 판단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이야기는 "이러저러해서 결국은 이렇게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했어야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지난 주 신우회에서 경험했던 일도 같은 맥락이다. 생각한 것, 내 지론이라는 것과 그것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지는 일치하지 않다. 나는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없다. 그러니 그런 말에 무게가 실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일이다.

(2) 내가 사랑하는 프로그램 "K팝스타 3" 오늘 편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지난 주 편을 너무 재미있게 본 후유증일까? 아니 지난 주가 특별히 재미있었던 까닭은 이쯤해선 재미가 반감될 거라는 내 추측을 깼기 때문이다. 오늘은 노래가 많은 편도 아니었지만, 눈에 띄는, 다시 말해서 다시 듣고 싶은 노래도 별로 없었다. 버나드 박의 Lately 정도?
일단 믿고 보는 감독. 코엔 형제. 최신작 "인사이드  르윈"을 보다. 동진 형님이 일말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는 영화라고 극찬을 해서 자신있게 한 달만의 극장행 메뉴로 이 영화를 고를 수 있었다.

결과는... 실망이 컸다. 이 양반들 영화를 좋아하는 건 충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면서 보는 재미도 얻게 해주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집중해서 보게 해준다는 점인데... 이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래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포크송. 음악도 너무 촌스러워서 음악 듣는 재미조차 허락하질 않았다. 내가 영화가 담고 있는 시대, 분위기, 노래 가사 등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서 이 영화의 작품성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페친 차정식 님의 영화평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긴 한다. 페이스북 글은 인용하기기 어렵고,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그냥 긁어와서 붙여놓는다. 차교수님. 이해해 주세요!


* 절룩거리는 운명의 순환 궤도
-<인사이드 르윈>을 보고

우리 생의 이면에 얼마나 컴컴한 우수의 심연이 드리워져 있는지 궁금하면 이 영화를 꼭 보시라. 걸작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이 작품을 외면할 수 없다. <바톤 핑크> <파고>를 거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시리어스 맨>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진지한 팬을 실망시킨 적이 없는 코엔 형제 감독의 예술세계를 맛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운명처럼 마주쳐야 한다.

외면상 이 영화는 극적인 사건 한 번 없이 밋밋하게 사회적으로 루저에 불과한 한 부랑자 가수의 짧은 몇 일을 다룬 로드 무비다. 그 배경에 자리한 가수는 밥 딜런의 전성기를 위한 대로를 깔기 위해 세례 요한의 역할을 한 데이브 반 롱크라는 포크송 가수다. 그의 분신인 르윈 데이비스(Llewyn Davis)는 웨일스 출신의 가문에 동가숙서가식하는 빈털털이 가수의 역할을 참 '재수없게도' 잘 연출해 보여준다.

그의 앞길에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왕년에 두엣으로 활동하던 마이크는 이미 자살해 죽어버렸고, 음반의 성과는 금전적 보상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친구의 아내를 건드려 임신시키는 바람에 낙태수술비를 구하느라 전전긍긍하고, 매일 몸을 눕힐 '카우치'를 찾으러 이 집, 저 집 눈치 보며 다녀야 하는 신세다. 평생 고기 잡던 어부 아비는 치매환자로 요양원에 유폐된 상태이며 누이 하나 있는 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그가 가수 때려치고 어부로 전업하고자 할 때 그의 선원 자격증을 쓰레기통에 내버려 그의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린 장본인이 바로 그 누이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로 힘들게 시카고에 갔지만 '뿔의 문'(The Gate of Horn)이라는 업소의 사장은 그의 노래 한 곡(The Death of Queen Jane)을 들어보고 별로 돈이 안 되겠다고, 수염 깎고 핵심 보컬에 화음이나 맞추어보라고 냉정하게 심판한다. 초장에는 그나마 호의적이던 교수님 댁의 고양이 율리시스를 실수로 떠맡게 되어 짐을 지더니 시카고에서 초라하게 되돌아가던 야간 운전 길에서는 여우를 쳐서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린다.

그 고양이 이름 율리시스(오딧세우스)에 표상된 운명의 노선과 차에 치어 절룩거리며 숲속으로 숨어버리는 그 여우의 운명이 바로 르윈 데이비스의 억수로 재수 없는 운명에 복선으로 깔린다. '개스등'(Gaslight) 카페에서 한 여가수의 공연을 조롱하다가 다음 날 저녁 그의 남편에게 호되게 얻어맞는 폭력 사건에서 시카고의 추운 겨울 차도에 깔린 눈에 신발이 푹 빠져 양말이 젖는 사소한 해프닝의 모양새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자존심 하나로 버텨가는 한 포크송 가수의 여정 위에 울울한 잿빛 비극으로 스멀거리지 않는 구석이 없다.

사회적 루저에 불과한 한 가수의 시덥지않은 이야기의 표면적 서사를 넘어 그 이면으로 심층 잠수하여 코엔 형제 감독의 의중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의 수미상관적 구조를 잘 음미해야 한다. 첫 장면이 곧 끝 장면과 맞물리는 구조 속에서 코엔 감독은 우리 생이 결국 비극적 아이러니의 순환 가운데 한 겨울밤의 꿈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이전 작품들에 비해, 아마 그 훈훈한 음악의 훈기 덕분이겠지만, 르윈 데이비스를 조명하는 감독의 시선은 꽤 따스한 편이다. 따스한 비관주의의 역설이 그 어느 작품보다 여기서 돋보인다.

또 한 가지 이 작품을 읽는 독법은 음악을 따라가는 것이다. '자신을 목매달아 죽여달라'는 'Hang me, O Hang me'가 처음과 끝에 배치되어 두 번 반복되는데, 예술가의 열정이 왜 죽음을 담보로 하는 곡예인지 그 담담하면서도 치열한 눈짓을 읽을 수 있다. 파트너 마이크와 함께 부르던 곡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내려온 뒤, 그 무대에 올라가 노래부르는 가수는 포크송의 전성기를 열었던 밥 딜런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그린, 그린, 로키 로드'을 부르는 가수는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 데이브 반 롱크이다. 실제로 밥 딜런은 그의 출중한 실력을 인정하여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항상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냉정하게 가른다.

우발성의 미묘한 낙차를 코엔 감독처럼 영화적 효과로 잘 살려내는 감독도 드물다. 이 영화의 후유증은 밋밋한 그 리듬과 함께 오래 갈 것이다. 그 내구성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의 후미진 구석에 틈입한 우수어린 비극적 운명의 곡예를 꽤 모질게 견뎌낼 수 있을 듯하다. 르윈 데이비스의 노래와 함께 호흡하는 동안 우리는 환도뼈 부러진 야곱처럼 절룩거리며 걷는 법에 꽤 익숙해질 수 있으리라.

굴절된 운명이 왜 구질구질한 비애의 풍경을 동반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럼에도 삶의 온갖 비루한 속내를 끝내 포용하길 서슴치 않는다면 '인사이드 르윈'을 직접 만나보시길...

(*참고로 르윈 데이비스 역을 맡은 오스카 아이삭의 노래 실력, 기타 실력은 꽤 출중하다. 립싱크 한 번 없이 모든 곡을 현장 녹음했다. 그는 줄리어드 음대 출신의 음악도로 코엔 감독의 오디션을 거쳐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선발됐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듯한 그의 더부룩한 이미지가 르윈 데이비스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2014년 2월 1일 토요일

1) 루만에 대한 논쟁이 페북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참으로 당혹스럽다. 이게 루만인가?

2) 주장을 해야 한다. 꼭꼭 감춰두고 못 알아채게 하는 건 참으로 비겁하고 불성실한 행동이다. 꺼내놔라. 야단을 맞더라도. 좀 불확실하더라도... 완벽해지는 걸 내놓으려고? 어떤 아이디어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설익은 것들도 내놓을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  매번 설익은 걸 내 놓으면 그것도 보기 좋진 않지만... 여하튼 적어도 지금 내겐 그런 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