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잠언을 읽는데 어제는 이 구절이 마음을 때렸다.
"주님의 눈은 사람의 길을 지켜 보시며, 그 모든 길을 살펴보신다" ( (5:21, 새번역)
"For human ways are under the eyes of the LORD, and he examines all their paths" (NRSV)
"禮記"에 나오는 표현이라는 "愼其獨"도 생각났다.
어려운 일이다. 결코 쉽지 않은...
2014년 6월 6일 금요일
"국정에서 사라져보린 과학기술" (이덕환) (디지털타임스 2014.06.03)
좀 길지만 전문을 옮겨 놓는다. 어쩌면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기대는 박정희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서 부침을 겪다가 노무현 정부에서 정점에 달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GNP 대비 과학기술투자비 같은 지표상으로는 2mb 정부나 심지어 그네 정부에서도 늘었을 법도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과학기술중심사회'같은 거대 담론이나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격상하는 조치(2004년)는 그 이후론 등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멩박씨는 과기부와 교육부를 합쳐서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로 만들지 않았던가 (2008년). 아래 글에서도 지적하듯이 그네씨의 미래창조과학부는 과학기술이 아닌 ICT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던가. 과학이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가 노무현 이후로 급 줄었음을 보여주는 현상 아닐런지. 과학과 기술을 선진국에서 수입하거나 좇아가던 시기가 지났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면서 동등하게 경쟁해야 하는 탈추격시대가 도래하면서, 특정 첨단 분야에서는 - 대표적으로 줄기세포연구 - 한국도 경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첨단과학에 기초한 기술개발, 경제화의 가능성을 보면서 지원했지만 그 성과가 그리 크지 않자 이제 그런 접근 자체를 포기하는 것 아닌지... 물론 기초과학연구소(IBS) 설립 자체는 "과학지원을 통한 경제성장에 기여"를 위해서라도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담론이 먹힌 것일지 모르겠지만.. 그것마저 지지부진하다면 앞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적 기대는 크게 높아질 것 같지 않다. 또 이러다가 특정 과학 분야가 급부상하면 그 쪽으로 쏠리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노무현 정부 이후로 분위기가 다름은 분명한 것 같다. 이것 모두 '과학기술을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보는 문화의 산물이다. 경제성장의 수단에 대한 기대치의 상승, 하강에 조응하는 정책기조 변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우선주의 자체는 바뀌지 않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 이후로는 과학기술이 성장의 수단으로서 갖는 매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인 효과를 갖는 수단을 선호하는 것 같다. 4대강이나 CIT. 어쩌면 "줄기세포연구"처럼 효과를 빨리 얻길 기대할 수 있었던 분야마저 실망감을 갖게 되니 더 그런 것 같다. 절대지원금액이 줄지는 않을지라도... 뭐든지 과도하게 부풀리면 곧 실망하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들통나기 마련이다. 이덕환 교수는 정부만을 탓하지만 과학계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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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ICT(정보방송통신)와 함께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가는 창조경제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오래 전에 잊혀졌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선진 창조형으로 도약시키고, 노벨 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겠다는 목소리도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돼버렸다. 오늘날 과학기술 정책은 중소기업과 창업 지원에 매달리고 있고, ICT 정책은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이동통신사에 끌려 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미래부, 산업부, 교육부가 모두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현실은 절망적이다. 우리 과학기술의 가장 중요한 구심점인 출연연의 현실이 그렇다. 공기업과 함께 비정상적인 공공기관으로 분류된 출연연은 강도 높은 개혁의 대상으로 추락해버렸다. 출범 이후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미래부가 갑자기 물을 만난 듯 힘을 내고 있다. IMF 이후 어렵게 회복되고 있던 복리후생 혜택의 일방적인 축소를 강요하는 미래부의 정상화 요구는 그나마 남아있던 출연연의 자존심마저 짓밟는 것이다.
좀 길지만 전문을 옮겨 놓는다. 어쩌면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기대는 박정희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서 부침을 겪다가 노무현 정부에서 정점에 달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GNP 대비 과학기술투자비 같은 지표상으로는 2mb 정부나 심지어 그네 정부에서도 늘었을 법도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과학기술중심사회'같은 거대 담론이나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격상하는 조치(2004년)는 그 이후론 등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멩박씨는 과기부와 교육부를 합쳐서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로 만들지 않았던가 (2008년). 아래 글에서도 지적하듯이 그네씨의 미래창조과학부는 과학기술이 아닌 ICT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던가. 과학이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가 노무현 이후로 급 줄었음을 보여주는 현상 아닐런지. 과학과 기술을 선진국에서 수입하거나 좇아가던 시기가 지났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면서 동등하게 경쟁해야 하는 탈추격시대가 도래하면서, 특정 첨단 분야에서는 - 대표적으로 줄기세포연구 - 한국도 경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첨단과학에 기초한 기술개발, 경제화의 가능성을 보면서 지원했지만 그 성과가 그리 크지 않자 이제 그런 접근 자체를 포기하는 것 아닌지... 물론 기초과학연구소(IBS) 설립 자체는 "과학지원을 통한 경제성장에 기여"를 위해서라도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담론이 먹힌 것일지 모르겠지만.. 그것마저 지지부진하다면 앞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적 기대는 크게 높아질 것 같지 않다. 또 이러다가 특정 과학 분야가 급부상하면 그 쪽으로 쏠리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노무현 정부 이후로 분위기가 다름은 분명한 것 같다. 이것 모두 '과학기술을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보는 문화의 산물이다. 경제성장의 수단에 대한 기대치의 상승, 하강에 조응하는 정책기조 변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우선주의 자체는 바뀌지 않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 이후로는 과학기술이 성장의 수단으로서 갖는 매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인 효과를 갖는 수단을 선호하는 것 같다. 4대강이나 CIT. 어쩌면 "줄기세포연구"처럼 효과를 빨리 얻길 기대할 수 있었던 분야마저 실망감을 갖게 되니 더 그런 것 같다. 절대지원금액이 줄지는 않을지라도... 뭐든지 과도하게 부풀리면 곧 실망하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들통나기 마련이다. 이덕환 교수는 정부만을 탓하지만 과학계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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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ICT(정보방송통신)와 함께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가는 창조경제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오래 전에 잊혀졌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선진 창조형으로 도약시키고, 노벨 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겠다는 목소리도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돼버렸다. 오늘날 과학기술 정책은 중소기업과 창업 지원에 매달리고 있고, ICT 정책은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이동통신사에 끌려 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미래부, 산업부, 교육부가 모두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현실은 절망적이다. 우리 과학기술의 가장 중요한 구심점인 출연연의 현실이 그렇다. 공기업과 함께 비정상적인 공공기관으로 분류된 출연연은 강도 높은 개혁의 대상으로 추락해버렸다. 출범 이후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미래부가 갑자기 물을 만난 듯 힘을 내고 있다. IMF 이후 어렵게 회복되고 있던 복리후생 혜택의 일방적인 축소를 강요하는 미래부의 정상화 요구는 그나마 남아있던 출연연의 자존심마저 짓밟는 것이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의 출범도 출연연의 진정한 정상화를 위한 노력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연구회를 통합해서 국가 과학기술의 미래 전략 수립, 융합 연구 기획, 중소기업 지원, 인력 개발 등을 총괄하는 지원형 연구회로 강화한다는 주장은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왔던 전형적인 관료적 발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연구회를 통합한다고 미래 전략 수립과 융합 연구 기획 기능이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순진한 것이다. 통합 연구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원장 선임이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매년 평균 8명의 원장을 선임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출연연의 원장 선임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독선과 무능은 도가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박 겉핥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출연연의 예산과 결산 심의는 더욱 부실해질 것이다. 출연연의 예산이 각 부처에 묶여있는 현실을 개선하지 못하면 통합 연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어렵게 만들어놓은 기초과학연구소(IBS)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초대 원장은 임기도 채우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인사 문제에서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정부의 형편을 고려하면 후임 원장의 선임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IBS가 기초과학 분야의 투자를 독식하고 있다는 비난을 벗어나기도 어려울 것이고, 핵심 시설인 중이온가속기의 건설도 우선순위에 밀려나고 있다. 과학기술의 어설픈 정치 참여의 후폭풍을 수습할 준비가 시급하다.
이공계 대학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부가 공허한 특성화와 산학협력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취업률이 낮은 기초과학 분야의 학과들이 줄줄이 문을 닫게 될 위기 상황이다. 공학 교육을 산업 현장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발상도 위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약화된 대학의 교육이 더욱 약화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초중등학교의 과학 교육도 위기에 빠져있다.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최소한의 과학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문ㆍ이과 구분 폐지로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과학기술계는 이공계 진학자의 과학 교육 약화를 걱정하고 있고, 과학교육학자들은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 과학기술 시대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갖추지 못한 교육학자들에게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구걸해야 하는 과학기술계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다.
과학기술의 역할이 고작 중소기업과 창원 지원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출연연과 대학의 획일적인 관리보다 자율성과 다원성을 보장해주는 노력이 훨씬 더 시급하다.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평범한 문과 출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ICT 전문가를 과학자로 분류해서 중용하는 실수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이스라엘을 흉내 내고, 소프트웨어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미래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ICT가 분명하게 과학기술의 한 분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과학기술을 다시 국정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노력이 절박하다."
어렵게 만들어놓은 기초과학연구소(IBS)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초대 원장은 임기도 채우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인사 문제에서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정부의 형편을 고려하면 후임 원장의 선임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IBS가 기초과학 분야의 투자를 독식하고 있다는 비난을 벗어나기도 어려울 것이고, 핵심 시설인 중이온가속기의 건설도 우선순위에 밀려나고 있다. 과학기술의 어설픈 정치 참여의 후폭풍을 수습할 준비가 시급하다.
이공계 대학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부가 공허한 특성화와 산학협력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취업률이 낮은 기초과학 분야의 학과들이 줄줄이 문을 닫게 될 위기 상황이다. 공학 교육을 산업 현장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발상도 위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약화된 대학의 교육이 더욱 약화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초중등학교의 과학 교육도 위기에 빠져있다.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최소한의 과학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문ㆍ이과 구분 폐지로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과학기술계는 이공계 진학자의 과학 교육 약화를 걱정하고 있고, 과학교육학자들은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 과학기술 시대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갖추지 못한 교육학자들에게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구걸해야 하는 과학기술계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다.
과학기술의 역할이 고작 중소기업과 창원 지원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출연연과 대학의 획일적인 관리보다 자율성과 다원성을 보장해주는 노력이 훨씬 더 시급하다.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평범한 문과 출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ICT 전문가를 과학자로 분류해서 중용하는 실수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이스라엘을 흉내 내고, 소프트웨어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미래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ICT가 분명하게 과학기술의 한 분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과학기술을 다시 국정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노력이 절박하다."
2014년 6월 5일 목요일
페친 이민규 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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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됨의 중요성에 새로운 흐름인 톰 라이트나 독일 신학자들의 신학까지 결부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글은 그런 담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관련한 제자도는 초대교회부터 개혁주의자, 청교도 모두 언제나 강조한 내용입니다. 비록 실현은 더딥니다만 성장과 성과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는 복음을 왜곡시키는 가장 흉악한 원흉입니다. 제자도 없이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고 강한 적은 기독교 역사 속에 없었습니다. 다 양적성장을 위해 필요한 돈, 성장, 성과 중심이여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현상입니다. 물론 돈은 언제나 우상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가치에서 돈이 전부입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사람의 명예나 인간미가 돈 못지 않게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전부지요. 맘몬이 우상인 천민자본주의와 하나님 나라는 상극입니다. 이런 대립은 역사 속에 찾기 힘듭니다. 제가 굳이 ":따듯한 자본주의"까지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한 복음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은 지금 어느 때보다 더합니다."
"안일한 믿음주의는 미국의 경제성장주의와 함께 지난 수십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 신앙이 한국에 수입된 것도 대략 빌리그래험 시절인 70년대 이후입니다.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보편적으로 믿던 신앙아 이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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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됨의 중요성에 새로운 흐름인 톰 라이트나 독일 신학자들의 신학까지 결부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글은 그런 담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관련한 제자도는 초대교회부터 개혁주의자, 청교도 모두 언제나 강조한 내용입니다. 비록 실현은 더딥니다만 성장과 성과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는 복음을 왜곡시키는 가장 흉악한 원흉입니다. 제자도 없이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고 강한 적은 기독교 역사 속에 없었습니다. 다 양적성장을 위해 필요한 돈, 성장, 성과 중심이여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현상입니다. 물론 돈은 언제나 우상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가치에서 돈이 전부입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사람의 명예나 인간미가 돈 못지 않게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전부지요. 맘몬이 우상인 천민자본주의와 하나님 나라는 상극입니다. 이런 대립은 역사 속에 찾기 힘듭니다. 제가 굳이 ":따듯한 자본주의"까지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한 복음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은 지금 어느 때보다 더합니다."
"안일한 믿음주의는 미국의 경제성장주의와 함께 지난 수십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 신앙이 한국에 수입된 것도 대략 빌리그래험 시절인 70년대 이후입니다.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보편적으로 믿던 신앙아 이니고요."
페친 홍익희 님의 제언 (단, 전기세 --> 전기요금)
"이제 우리는 두 가지를 바꾸어야 한다.(제언 1)
대한민국 경제는 수출지상주의를 위해 그간 많은 것을 희생해 왔다. 그 중에서도 원화의 저평가 정책은 국민의 장바구니 물가를 희생시켜 왔다. 또 대기업의 전기료를 지원하기 위해 국민들이 비싼 전기세를 물고 있다.
이제는 시정해야 한다.
1. 삼성그룹 등 대기업(중소기업 제외)의 전기세는 올리고 가정용 전기세는 낮추어 형평성을 맞추길 바란다. 이제 더 이상 대기업을 위해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
2. 외환시장 개입을 위한 외평채 발행을 즉각 중지하라. 원화의 저평가는 수출기업에게는 유리하나 원유 등 수입가격을 올려 물가는 비싸진다. 그나마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채권을 발행해 외환을 보유해야 한다. 그 이자가 모두 국민의 혈세로 지불되는 것이다.
----------------------------------------------
외평채란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의 약칭이다. 환율 안정(?)을 목적으로 ‘외국환 평형기금’ 조달을 위해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이다.
만기가 도래하는 외평채는 이제 외환보유고로 갚아라. 기준금리가 0% 수준인 미국에서 4%가 넘는 외평채 발행이 어떻게 자랑거리냐? 이 바보 같은 눔들아!!"
"이제 우리는 두 가지를 바꾸어야 한다.(제언 1)
대한민국 경제는 수출지상주의를 위해 그간 많은 것을 희생해 왔다. 그 중에서도 원화의 저평가 정책은 국민의 장바구니 물가를 희생시켜 왔다. 또 대기업의 전기료를 지원하기 위해 국민들이 비싼 전기세를 물고 있다.
이제는 시정해야 한다.
1. 삼성그룹 등 대기업(중소기업 제외)의 전기세는 올리고 가정용 전기세는 낮추어 형평성을 맞추길 바란다. 이제 더 이상 대기업을 위해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
2. 외환시장 개입을 위한 외평채 발행을 즉각 중지하라. 원화의 저평가는 수출기업에게는 유리하나 원유 등 수입가격을 올려 물가는 비싸진다. 그나마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채권을 발행해 외환을 보유해야 한다. 그 이자가 모두 국민의 혈세로 지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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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평채란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의 약칭이다. 환율 안정(?)을 목적으로 ‘외국환 평형기금’ 조달을 위해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이다.
만기가 도래하는 외평채는 이제 외환보유고로 갚아라. 기준금리가 0% 수준인 미국에서 4%가 넘는 외평채 발행이 어떻게 자랑거리냐? 이 바보 같은 눔들아!!"
2014년 6월 3일 화요일
한국 교회는 대형교회 비중이 크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개신교 신자는 약 1억 7천만 명으로 인구의 55%. 성인교인 2천 명 이상을 가리키는 대형교회(mega-church)의 수는 1200-1500개로 추산됨.. 한국의 개신교 신자 비율은 인구대비 18.3%로 약 8백 6십만명. 대형교회의 수는 거의 1천 개에 육박. 성인 출석교인 1만명 이상 되는 교회는 미국 70개, 한국은 13 - 14개. 2만명 이상되는 교회는 미국에선 7개 한국은 7-8개 (김진호, 탈성장주의 시대 '작은교회'에 대해 말하다).
이처럼 "대형으로 쏠리는 구도는 사회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대기업, 재벌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랄지, 서울집중현상이랄지....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대형교회가 추동한 현상... 경제에 있어서는 대기업이...
대기업, 대형교회, 서울과 수도권 중심은... 초기 발전 단계에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전체 파이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누구나 그 혜택을 얻을 수 있어서 양극화가 감춰지는 착시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오히려 발전, 성장을 방해한다. 이런 논의는 노무현 정부에서 아주 집중적으로 강조했다. 분권화를 이야기하면서... 반면에 양극화 현상은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서양에서 "성장주의""발전/개발주의"가 시들한 것은 실제로 경제 성장의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실업률을 줄이겠다" 정도가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인 것. 자연스럽게 사회통합을 성장이 아닌 다른 쪽에서 모색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실제로 탈성장,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지만, 여전히 "성장 신화" "성공 신화"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고. 물론 예전같지 않다는 점, 더이상 개천에서 용나지 않는다는건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럼에도 그 좁은 문을 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자식을 뚫을 수 있을거라, 적어도 그 대열에서 애초에 낙오되지는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생명과학은 한 때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서 기대를 모았다. 생명윤리에 기초한 규제는 어렵지 않게 도입될 수 있었다. 왜? 그것이 생명과학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발전주의와 생명윤리의 어색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동거가 가능해진 것이다. 생명윤리가 문화를 바꿀 것인가? 글쎄... 특별히 그럴것 같진 않다.
교회의 현상과 한국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현상과의 유사성, 친화성을 김진호 목사가 매우 잘 지적하고 있다.
"대성장 시대에 한국사회도 급속한 성장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성장의 주된 양식 또한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권력 자원을 독점한 상황에서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성장주의적 총동원체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 것이다. 또한 구기득권세력을 상당부분 대체하였고 일부 보완한 ‘신기득권체제’가 이 시기에 정착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교회는 이 시기에 서북지역 장로교, 혹은 월남한 서북 출신 장로교 중심체제의 응집력이 이완되고, 교파와 출신 지역을 망라한 대형교회들 중심의 체제로 재구축되었다. 한데 이 시기에 정착한 기득권 체제는 이후 대성장 시대가 지나고 저성장, 아니 탈성장 시대에 이르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지닌다.
이처럼 "대형으로 쏠리는 구도는 사회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대기업, 재벌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랄지, 서울집중현상이랄지....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대형교회가 추동한 현상... 경제에 있어서는 대기업이...
대기업, 대형교회, 서울과 수도권 중심은... 초기 발전 단계에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전체 파이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누구나 그 혜택을 얻을 수 있어서 양극화가 감춰지는 착시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오히려 발전, 성장을 방해한다. 이런 논의는 노무현 정부에서 아주 집중적으로 강조했다. 분권화를 이야기하면서... 반면에 양극화 현상은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서양에서 "성장주의""발전/개발주의"가 시들한 것은 실제로 경제 성장의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실업률을 줄이겠다" 정도가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인 것. 자연스럽게 사회통합을 성장이 아닌 다른 쪽에서 모색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실제로 탈성장,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지만, 여전히 "성장 신화" "성공 신화"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고. 물론 예전같지 않다는 점, 더이상 개천에서 용나지 않는다는건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럼에도 그 좁은 문을 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자식을 뚫을 수 있을거라, 적어도 그 대열에서 애초에 낙오되지는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생명과학은 한 때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서 기대를 모았다. 생명윤리에 기초한 규제는 어렵지 않게 도입될 수 있었다. 왜? 그것이 생명과학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발전주의와 생명윤리의 어색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동거가 가능해진 것이다. 생명윤리가 문화를 바꿀 것인가? 글쎄... 특별히 그럴것 같진 않다.
교회의 현상과 한국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현상과의 유사성, 친화성을 김진호 목사가 매우 잘 지적하고 있다.
"대성장 시대에 한국사회도 급속한 성장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성장의 주된 양식 또한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권력 자원을 독점한 상황에서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성장주의적 총동원체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 것이다. 또한 구기득권세력을 상당부분 대체하였고 일부 보완한 ‘신기득권체제’가 이 시기에 정착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교회는 이 시기에 서북지역 장로교, 혹은 월남한 서북 출신 장로교 중심체제의 응집력이 이완되고, 교파와 출신 지역을 망라한 대형교회들 중심의 체제로 재구축되었다. 한데 이 시기에 정착한 기득권 체제는 이후 대성장 시대가 지나고 저성장, 아니 탈성장 시대에 이르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지닌다.
이와 같이 대성장 시대 교회와 사회는 ‘성공지상주의적 총동원 체계’라는 유사성을 지니며, 이 유사성이 그 시대를 운용하는 주된 원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그 시대 사회와 서로 연동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교회의 빠른 변모는, 그 시대의 지배체제가 갖는 문제점 못지않게 심각한 많은 문제점들을 내장하고 있었음에도, 전체적으로 사회와 불화하기보다는 잘 통합되어 있었고, 또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보다는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령 농경사회에서 도시사회로의 이행이 급격하게 진행되던 시절에 아무런 보호망 없이 극한적 야만성의 도시공간으로 내던져진 이농자들의 대대적인 신자화는 그들이 사회적 불만세력 내지 전복세력이 되지 않고 이른바 산업역군으로 권위주의적 체제 속에 잘 흡수되는 과정과 병행했다. 또한 이 과정은 그이들 개개인이 성공한 이들에 대한 일탈자가 되기보다는 그들을 선망하며 열렬히 성공을 위해 매진하게 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이 시기 대형교회 현상을 대표하는 조용기의 3박자 구원론(풍요, 건강, 신앙의 동시적 실현으로서의 구원 담론)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통합요소로서의 신앙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부유함은 증오나 질시의 대상이 아니라 도달하려는 목표다. 3박자 구원론은 그 목표를 신앙의 목표와 동심원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사회통합적 담론의 특성을 지녔던 것이다.
이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 교회가 보여준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보호망 없이 진행된 산업화로의 맹렬한 질주 속에 내던져진 도시 주변계층이 절망에 삐지지 않고 자기 발전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와 사회는 서로 연동되어 있었고, 기독교 편에서 그런 흐름을 주도한 것은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선망한 대다수 ‘짝퉁 대형교회’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동성은 사회통합에는 기여했지만, 그러한 교회들은 그 통합이 내포한 무수한 야만성과 폭력성을 방조했다."
문화...
'문화'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인터뷰. 구글의 첫 한국인 엔지니어로 최근에 ‘구글은 SKY를 모른다’(알투스)라는 책을 낸 이준영(43)씨의 조선일보 인터뷰 중에서.
-회사 관련 내용에 대한 제약은 없나. 애플이나 아마존 경우 보안이 철저한데.
“내부 지침도 있고 교육도 받는다. 하지만 구글은 모든 것이 ‘상식’ 선에서 진행된다. 구체적 상황에서 판단은 직원이 자율적으로 내린다. 회사 기밀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히 얘기 안 한다.”
-회사 관련 내용에 대한 제약은 없나. 애플이나 아마존 경우 보안이 철저한데.
“내부 지침도 있고 교육도 받는다. 하지만 구글은 모든 것이 ‘상식’ 선에서 진행된다. 구체적 상황에서 판단은 직원이 자율적으로 내린다. 회사 기밀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히 얘기 안 한다.”
◆‘상식’에 의해 움직이는 구글 문화
-많은 것이 회사 내 ‘상식’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 구글의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일일이 규정으로 만들 경우 그것이 비효율을 초래할 경우가 많다.
“그것은 큰 차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글 컬쳐’라 부르고 그것이 체화한 사람을 구글러라고 부르는 거다.”
-그런 문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2006년 내가 입사 3년차였을 때 한국엔지니어링팀을 만들기 위해 서울에 온 적이 있다. 사람을 뽑고 난 다음에 곧바로 마운틴뷰의 구글 본사로 보냈다. 업무보다 구글 문화 체득이 우선이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구글러’가 되지 않는다. ‘가서 구글 문화를 겪고 오라’고 했다. 거기 사람들과 밥도 같이 먹고 느끼라고 했다. 석 달 사이에 많은 게 바뀌어 왔다. 그 과정을 서울 지사 입사자 10명 때까지 반복했다. 자생적 문화가 자리잡을 때까지. 지금은 2주 정도 본사 교육을 거친다. 본사 구글러들과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한국 오피스로 전락하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 뽑는 것도 굉장히 힘을 들인다. 아무리 똑똑해도 팀웍에 문제가 있을 것 같으면 안 뽑는다. 연못에 작은 돌만 던져도 전체에 파문이 일듯이 조직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팀웍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많은 것이 회사 내 ‘상식’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 구글의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일일이 규정으로 만들 경우 그것이 비효율을 초래할 경우가 많다.
“그것은 큰 차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글 컬쳐’라 부르고 그것이 체화한 사람을 구글러라고 부르는 거다.”
-그런 문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2006년 내가 입사 3년차였을 때 한국엔지니어링팀을 만들기 위해 서울에 온 적이 있다. 사람을 뽑고 난 다음에 곧바로 마운틴뷰의 구글 본사로 보냈다. 업무보다 구글 문화 체득이 우선이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구글러’가 되지 않는다. ‘가서 구글 문화를 겪고 오라’고 했다. 거기 사람들과 밥도 같이 먹고 느끼라고 했다. 석 달 사이에 많은 게 바뀌어 왔다. 그 과정을 서울 지사 입사자 10명 때까지 반복했다. 자생적 문화가 자리잡을 때까지. 지금은 2주 정도 본사 교육을 거친다. 본사 구글러들과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한국 오피스로 전락하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 뽑는 것도 굉장히 힘을 들인다. 아무리 똑똑해도 팀웍에 문제가 있을 것 같으면 안 뽑는다. 연못에 작은 돌만 던져도 전체에 파문이 일듯이 조직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팀웍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잠언 1:7)
NRSV로는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영어로 읽으면서 'fear'라는 단어가 확 눈에 들어왔다. 한국어 '경외'로는 잘 와 닿지 않던 의미가...
여호와를 두려워한다... 무슨 뜻일까? 세계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식'으로 무장된 현대인들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여호와를 두려워할 수 있을까? 불치의 병이나 재난 등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겪을 때? 신비를 체험하기 힘든 현대인들... 행인지 불행인지...
NRSV로는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영어로 읽으면서 'fear'라는 단어가 확 눈에 들어왔다. 한국어 '경외'로는 잘 와 닿지 않던 의미가...
여호와를 두려워한다... 무슨 뜻일까? 세계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식'으로 무장된 현대인들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여호와를 두려워할 수 있을까? 불치의 병이나 재난 등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겪을 때? 신비를 체험하기 힘든 현대인들... 행인지 불행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