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1일 금요일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띄엄띄엄 읽고있다. 글쎄 썩 매력적인 책은 아니다. 원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쓰려고 했는데 출판시장의 반응을 고려해서 제목과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인지 죽음을 직접 다룬 부분도 적지 않다. 감정이 썩 풍부한 편은 아니지만, 매번 울컥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존엄사' 이야기다. 존엄하게 죽기로 결단하는 사람들 이야기.

"지금은 존언함 삶을 추구하는 것과 함께 존엄한 죽음을 준비해야 마땅한 세상이다"(128) "생명은 존엄하다. 그러나 죽음 역시 존엄해야 한다"(130) "원칙적으로 볼 때, 죽기 위해서 국가나 사회의 허락을 받을 이유는 없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본질적으로 나의 자유이며 권리이다. 국가는 나를 죽일 권한이 없으며 살라고 명령할 권한도 없다.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삶에 대해서든 죽음에 대해서든 국가나 사회가 나의 의사 결정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자기 방식대로 살고, 자기 방식대로 죽는 것은 만인에게 주어진 자연법적 권리이다.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법원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죽는다."(131)

"감각은 죽고 의식 혼자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적 자아는 감각과 정신, 욕망과 이성의 통일이다. 운동이 멈춘 후에 존재하는 의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130)

정신, 의지가 없는 육신...

분명 윤리(학)적 주제인데... 글쎄 연구 측면에서 파고 들고 싶은 영역,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존엄사. 흠. 많이 연구되지 않은 영역이긴 한데. 죽음 자체가 그렇지만.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사회학자들의 접근은 대개 그런 식인데...

죽음....

2014년 7월 10일 목요일



뻔한 구도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점을 찾자면... 높은 건물들 사이로 난 도로 위 차량들의 조명과 노을의 비교...  
카페에 나왔다. 자주 들르는 그... 저녁을 적지 않게 먹었는데 카페모카를 휘핑크림까지 얹어서 마셨더니 배가 더부룩하다. 불쾌하다. 그러던 중.... 일군의 아주머니들이 입장하셨다.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아. 이제 시끄러워지겠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차... 이게 웬일인가. 시끄럽지 않다.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 것 같은 아주머니 네 명이 모였는데도...
조지 오웰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에서 '나는 왜 쓰는가'도 물론 재미있었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더 도움이 되는 글은 '정치와 영어', 그리고 '과학이란 무엇인가'.

우선 '정치와 영어' 중에서..

"우리의 생각이 어리석어 영어가 고약하고 부정확해지지만, 언어가 단정하지 못해 생각이 더 어리석어지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건 이런 과정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 나쁜 습관... (...) 그런 습관을 제거한다면 생각을 보다 명료하게 할 수 있으며, 생각을 명료하게 한다는 건 정치적 개혁에 필요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256쪽)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유', '애국적인', '현실적인', '정의' 같은 단어는 각각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다른 뜻을 여러 개씩 가지고 있는 경우다.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경우, 합의된 정의란 게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정의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면 사방팔방에서 저항을 받게 된다. (...) 이런 유형의 단어들은 의식적으로 부정직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해 사용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나름의 정의는 있지만, 듣는 사람이 그와는 다른 무언가로 생각하더라도 묵인하는 것이다. (...) 그밖에도 여러 뜻을 갖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속임수에 가깝게 쓰는 단어로는 '계급', '전체주의', '과학', '진보적인', '반동적인', '부르주아', '평등' 같은 것이 있다."(264쪽)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의미가 단어를 선택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산문의 경우, 단어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단어에 굴복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생각할 경우 먼저 단어로 표현하지 말고 생각부터 해보자. 그런 다음 머릿속에 그려본 것을 묘사하고 싶다면, 거기에 맞을 듯한 정확한 단어를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추상적인 무언가를 생각할 경우엔 애초부터 단어를 선택하는 쪽에 끌리기가 더 쉽다.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기존의 표현법이 마구 밀려들어 대신 작업을 해버릴 것이다. (...) 그러니 가능한 한 단어 사용을 미루고서 심상이나 감각을 이용하여 전하고자 하는 뜻을 최대한 분명하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지 싶다. 그런 다음 뜻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표현을 택할 수 있을 것이고 (...)"(274쪽)

'과학이란 무엇인가'

길지 않은 글이다. 혹시라도 '과학과 사회' 같은 수업을 할 때 유용하게 읽힐 수 있겠다.
페친을 대폭 정리했다. 요즘 페북을 열면 밀린 정보, 소식이 너무 많아서 쭉 읽어내려가다보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오늘 짤린 페친들은 대부분 대부분 페북계의 명사들이다. 많은 페친을 거느리는... 그 중에서 특히 지금 내게 긴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주로' 들려주는 명사 페친들...

페북을 들낙날락하면서 페친 관계를 정리하기도 하고 (40여명?), follow를 하지 않도록 설정을 바꾸기도 한 (60여명?) 결과. 상당히 매우 무척 깨끗해졌다. 담백해졌다. 앎에 대한 욕구가 강할수록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기 십상인게 페북이다. 앞으로 쭉 이 기조를 유지! 지금은 넓힐 때가 아니라 오히려 좁힐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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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 황두진 선생의 이야기에 공감이 간다. 여러모로..

"지난 12년간 사무실을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다양성 보다는 응집력이 작은 조직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독특한 하부문화(subculture)가 필요한데, 상식과 합리를 벗어나는 것만 아니면 무엇이건 좋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직원 인터뷰에 악기 오디션이 필수라던가, 사무실 어느 곳에도 파란색은 없어야 한다거나 하는 건 아주 유쾌하면서도 장기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하부문화다. (잘 생각해 보면 그런 회사들이 고만고만한 일이나 하다가 끝날 것 같지는 않다.) 바로 그런 편협성에서 관점도 나오고 개성도 나오는 것이다. 특히나 갈수록 세분화되는 현재의 시장 상황은 무딘 장검 보다는 예리한 단검으로 무장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리할 것이다. 어차피 시장 점유율 같은 것에 신경 쓸 일 없는 작은 조직이라면 (즉, 아주 작은 파이 조각만 먹고 살면 되는) 이렇게 좁고 예리하게 파고드는 것이 오히려 생존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위대한 선언의 시대는 갔다. 건축으로 이야기를 끌고 오자면 '인간을 위한 건축을 하겠다'거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싶다'보다는 '모든 건물을 100% barrier-free로 설계하겠다'거나 '비 오는 날 모든 창과 문을 열어 놓을 수 있는 건물을 설계하겠다'가 훨씬 더 우리를 효과적인 존재로 만든다. 유럽에는 아직도 100% 손도면만 고집하는 건축가도 있다고 들었는데, 유명하진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세계는 풍성할 것이다.

하부문화는 대표자에게서 먼저 뿜어져 나와야 한다. 민주적 토론 같은 것은 나중 일이다. 그래서 대표자는 주저 없이 자기 하부문화를 밝히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회사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일이 잘 될 때나 못 될 때 구별 없이 적어도 자기들의 세계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며 살고 있다는 재미라도 느낄 수 있다. 한 마디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내가 어디가서 너 같은 사람을 만나겠어'가 되는 거다. 사무실을 오래 하다 보면 일이 잘 될 때 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많기 때문에,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 보다는 함께 rock밴드를 하거나 rock클라이밍이라도 하며 놀 수 있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전략인 셈이다. (*직원이 많은 회사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일 수 있으니 거품 물지 맙시다.)

역설적이지만 사람을 구하기 어려우면 오히려 이렇게 나가는 것이 어딘가 방 구석에 박혀 있던 사회부적응자/또라이/오덕/제갈량들이 몸을 일으켜 나에게 오게 되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난 지금까지 매사에 주저주저함이 많았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 명령한다: '더 늦기 전에 생긴대로 살아라'."
유명한 김승옥 단편들을 몇 읽었다. 문학동네가 최근에 펴낸 중단편선집 "생명연습"에서. '생명연습'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김현이 극찬을 했던 소설(가)... 주로 1960,70년대 활동을 해서 아주 옛 사람인줄알았는데 1941년 생이다. 울 아버지보다 조금 더 많을 뿐... 그의 소설은 자기 스타일이 강하다. 만연체거나 세밀한 묘사가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랬다면 아마 아무리 단편이더라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 줄거리는 분명한데 줄거리가 생생한 기억을 남기지 않는다. 문체, 스타일에 대한 어떤 인상만 남길 뿐... 실제로 안개가 중요한 모티프인 '무진기행'처럼... 문체는 매우 모던하다. 최근에 씌여진 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스타일이 강하다는 점에서 김훈이 잠깐 연상되었지만 그보다 더 흐릿하다. 내 관점에서 볼 땐 좀 아쉽다.

2014년 7월 9일 수요일

손봉호, “내세가 없는 종교는 윤리에 치명적이다”(12년 2월 1일)


"내세가 있으면 혹은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마지막 심판이 있으면 악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고,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 상을 주고 벌을 주는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볼테르 같은 프랑스 철학자는 반기독교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은 만약에 하나님이 안 계시면 하나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윤리에 있어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내세가 기본적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에는 신도 없고, 내세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국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철저히 현세 중심적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이 세상에서 출세해야 합니다. 입신양명, 출세해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경쟁심은 엄청나게 높아졌지만, 도덕성은 엄청나게 낮아졌습니다. 이런 문화가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외식의 문제, 겉만 번지르르하면 됩니다. 마음 속에 경찰이 없어요.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안 계시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속에 경찰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속일 수가 있는 거지요. 마음을 들여다보는 그런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식하고, 거짓말하고, 그걸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문화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종교가 중요한 요인임을 주장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 같지만도 않다. 한국에선 내세를 강조하는 불교나 기독교도 무속신앙화되고 있음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무속신앙'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셈이다. 무속신앙이 다른 종교를 압도하는.... 내세가 없는 무속신앙이 내세가 있는 불교와 기독교를 압도하는 현상! 종교라는 요인, 내세 유무... 그런 것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무속신앙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 

2014년 7월 7일 월요일

페북을 통해 어찌어찌 연결되어서 한국 교회 성가대가 부른 전형적인 '성가' 한 곡을 들었다. 그 전형적인 '가운', 곡 분위기... 중고등부 시절 성가대에서 노래하던 기억을 잠시 소환했다. 지금도 생생하다. 무엇보다 그 복합적 감정이... 중고등부 성가대는 주일 저녁예배를 주로 맡았는데...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던... 남여학생들 간에 오가는 묘한 감정... 자리배치부터... 밤... 귀가... 아쉬움... 허탈함... 다음날이면 다시 시작되는 학교생활... 긴장... 그 당시 참 재미있는 성가들을 많이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