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3일 월요일

북유럽 급진적 개인주의

"급진적 개인주의가 필요하다" (박이은실 한겨레 칼럼) 중

"북유럽식 개인주의는 불평등한 권력관계 안에 있는 개인들이 저마다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개인 편에 서서 최대한의 지원을 해준다는 것을 국가의 존재 이유로 생각한다. 모든 개인은 자율성을 보장받고 가족을 통하지 않고 국가와 직접 관계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시민 개인을 모든 형태의 종속과 의존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의무를 갖는다. 빈민을 자선단체로부터, 노동자를 고용주로부터, 아내를 남편으로부터, 어린이를 부모로부터, 노인을 자식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의무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북유럽식 개인주의’이고 이는 ‘철저한 개인주의’ 혹은 ‘급진적 개인주의’라 불린다. 급진적 개인주의란 다름 아닌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개인이고 개개인이 안녕하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사회도 안녕할 수 있다고 본다. 가족이 아니라 개개인의 복지에 초점을 두는 가치관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세제와 가족법 개정을 통해 개인이 가족에 가장 덜 의존하는 사회, 즉 가장 개인화된 사회를 만들어왔다. 북유럽 사람들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의존하지 않는 관계, 서로 평등한 권력관계에 있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진정한 사랑과 우정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상적인 가족도 누가 누구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 일하고 각자 경제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다."

1. 하나님의 뜻, 마음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니 쉽다면 또 쉬운 일인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적인 방법으로 알 수 있을 뿐인가? 나무 뿌리가 뽑힐 정도로 눈물 철철 흘리면서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겨우 알 수 있던가? 하나님은 이성도 주셨으니, 동서고금 각양각종 학문적 지식으로 무장하고서 성경을 분해, 분석, 해석해 내면 알 수 있을까?

2. 일반은총이라고 하던가? 세속적 질서도 하나님 소관이다. 선과 악이 모두. 선에 대해서는... 인류가 그동안 이룬 긍정적 성취들, 그것들은 명시적으로 하나님과 관련 짓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것인가? 신에 대한 믿음 없이 인간들끼리 잘 먹고 잘 사는 근대적 질서, 특히 선진국. 그 "근대인들"은 비록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덕에 그런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악, 불행은 어떤가?  악, 불행, 사고도 하나님 소관 아니던가? 그러니 하나님이지. 불행에도 뜻이 있다? 악이니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다만 하나님은 악을 만들지는 않으시지만 허용은 하신다?

3. 인본주의에 기초한 근대적 질서는 장점도 많이 있고 한계도 분명하다. 장점은 하나님 뜻의 실현이고, 단점과 한계는 하나님을 떠난 죄값인가?

4. 장점에 초점을 맞추면... 인류는 정말 많은 것을 이뤘다. 하나님의 뜻이 잘 실현되고 있는가?

5. 단점에 초점을 맞추면... 인류는 더 불행하고, 더 많은 죄악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런 무리들이 많다. 타락이 정점을 이루면 새하늘 새땅이 이루어 질 것이다.

6. 후발국의 관점에서 보면... (1) 하나님을 잘 믿어서 축복받은 선진국 모델을 따라 가자. 세속적 질서도 배울 점들이 많고, 그들 모델, 체제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자. (2) 선진국은 동시에 더 타락한 모습도 보인다. 하나님 믿음을 포기하는 인본주의가 지배적이다. 동성애를 인정하고,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등등. 그러니 차라리 세속적 질서의 긍정적인 점을 포기하고 신정으로 가겠다. "신정" 좋아하는 사람들은 IS를 보면된다. 이슬람 국가들...

7. 기독교의 관점에서도 문제는 "근대성"이다. "근대의 성취"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좋은 열매만을 따 먹을 것인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만? 인권, 부유함 등등? 서구 복지국가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문제 삼을 수 있을까? 지금처럼 잘 실현된 복지국가에서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물론 종교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세속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하잖은가? 그렇다. 세속화. 한국의 경우는... 세속화된 서양 사회가 만들어 낸 긍정적 성취들, 그것을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이유가 충분하잖은가? 서양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고민을 하겠지. 서양 선진국이 갖는 부정적인 측면들. 그런 점들을 경고할 필요도 물론 있을 것이다. 서양 선진국, 근대성에 대한 평가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서양이 겪은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고통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하튼 특히 서양은 20세기에도 엄청난 규모의 피해를 낳은 전쟁을 두 번이나 치르고, 그 전후로 이념 갈등 등을 겪으면서 그들 사회의 체제를 정비했다. 그 방향이 곧 정의로운 복지국가 아니던가. 복지만 이야기 할 게 아니다. 사실은 "정의" "공정"이 먼저다. 지킬만한 "게임의 룰"을 만들고, 그것을 제대로 지키게 하는 것. 그렇다. 체계통합 등 논의에서 내가 하는 얘기도 곧 "정의"다. "공정"이라는 가치. 공정, 정의에 대한 신뢰. 개인주의 따위가 아닌 것이다. 아니 서양의 개인주의의는 정의, 복지를 모두 전제로 삼고 있는 개념이다.  
오늘 새벽기도회를 다녀오면서 느낀 바.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 전하는 논문을 써야겠다는... 물론 이전에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건 아니지만... 막힌 길을 돌아도 또 막히고, 그렇게 막힌 길을 돌아나와 다른 길로 접어들어도 또 막히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이제 내게 남은 출구는 오직 하나라는 고백을 최근에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오늘 깨달음은 그랬다. 하나님의 마음이라... 얼마나 어려운가. 아니 또 따지고 보면 얼마나 쉬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게 하는 것 아닌가? 내려놓고, 포기만 하면... 그렇다. 내려 놓을 수 있고, 포기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쉽고 편한 방법은 또 없으리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새삼스럽게 확인하지 않아도 될 지 모른다. 하나님의 뜻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

2014년 11월 2일 일요일

"1950년대의 개인주의"


"전쟁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 한국인들은 국가나 정부, 그리고 사회 역시 개인의 생활을 안전하게 보장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나 집단의 이익보다는 개인에게 중요한 의의를 두는 개인주의 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 인주의는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에서 더 강화되 었으나 그 뿌리는 전후의 개 인주의에 있으며 현대 한국인들의 개인주의는 일종의 무규범 상태에서의 방어 기제와 같은 성격의 것이 다. 즉 법과 규범 및 인간 관계에 대한 불신과 불안정 속에서 자기와 자기 이익을 지키고 추구하려는 이기적 성격의 개인주의가 광범하게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 한국개인주의의 역사" 중에서)
페친 장대익 선생 이야기. 서울대 이태수 교수 인터뷰 발언에 대한 소감.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한...

"인문학의 정체성에 관한 이태수선생님의 탁월한 인터뷰라고 생각합니다. 깊은 성찰이 느껴지고 많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뒷부분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세련된 언어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결국 과학을 팩트의 세계에 가두고 있네요. 이런 분리론으로는 '사상으로서의 과학', '가치로서의 과학'의 모습을 포착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과학은 인문학과 함께 가치, 실존,의미의 자유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고 생가합니다."

인터뷰 중 이런 구절을 염두에 둔 것 같다.(인터뷰 링크)

"인문학은 사실 인식을 목표로 해서 성립된 학문이 아니다. 사실 인식은 과학의 고유한 임무다. 과학과는 달리 인문학은 인식된 사실의 의미 연관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인식된 내용을 인간의 삶과 연결시켜 거기에 부여된 기왕의 의미를 캐내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면서 그것들을 좋음, 나쁨, 옳음, 그름의 가치평가가 이루는 격자망 안에 엮어 넣는 것이 인문학이 하는 일이다."

"과학은 사실 인식을 넘어, 그 사실을 받아들인 뒤 인간이 삶의 스토리를 어떻게 꾸며야겠는가 하는 질문까지 맡아서 답을 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이 한때 교황청이 했던 것처럼 연구에 개입해서 천체 운동에 대한 사실 인식을 왜곡시키려 들 권한은 없다. 인문학은 과학의 사실 인식 성과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면 인문학은 비이성적인 푸닥거리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인문학과 과학의 임무 차이는 오늘날까지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간 개량을 하는 것이 좋은 일일까? 정말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다. 그게 바로 인문학이 할 일이다. 인문학은 진정 좋은 것이 무엇인지 미리부터 답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 아니다.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내용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인문학이다. 좋은 것, 우리가 실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는 것이 인문학의 일이다. 그것은 뇌과학이나 유전공학이 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분야의 지식을 기술로 연결시키고 기술을 활용할 방향을 결정하려면 인문학적 성찰을 건너 뛸 수 없다. 인문학적 성찰 없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장님에게 좋은 지팡이를 장만해주면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다."

혼란스럽다. 인문학과 과학을 구별하는 방식이.. 사실과 가치의 차이. 과학의 Funktion과 Leistung 구분이 매우 유용하리라. 인문학 하는 양반들은 죄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고대철학자들을 21세기에 구현하려나보다. 과학, 학문의 자기지시적 성격, Funktion은 자연과학에나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고....
한국에서 학자들이 "학술지"를 "잡지"라고 부르는 경우들 흔치 않게 보게 된다. 아무리 "학술지"알기를 우습게 알아도 그렇지 "잡지"라니. "잡지"라는 표현이 주는 "잡스러움"이 별로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제 얼굴에 침을 뱉는...
1. 박학다식하고 매사에 합리적인데다 유머도 많은 선배가 그네씨의 천박한 행태를 옹호하는 입장임을 페북에서 확인했다. 지난 번 대선 때도 그녀를 지지하긴 했지만... 내 생각보다 더 적극적인 지지자인 모양이다. 실망했다기 보다는 어리둥절하다. 연결시키기가 힘들다. 사람이 달리 보인다. 어떻게 그럴수가...

2. 아. 물론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그 선배 정도면 서로 다른 입장을 놓고서 충분히 유익한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유하는 근본적인 가치는 있을 테니까...

3. 따지고 보면 그 선배의 입장도 일리가 있다. 대개 자기 편에겐 관대하고 상대방에게 엄격하기 쉬운데... 그게 인지상정인데...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그 선배의 비판에도 일리가 있다. 싸움을 하지 않으려면 자신과 자기 편에게 조금 더 엄격해야하고, 상대방에겐 조금 더 관대해야 한다.
내게 신해철은 무한궤도, 솔로 가수 신해철, 초기 넥스트  정도로 각인되어 있다. 그가 마왕이라는 타이틀을 얻고서 사회적 발언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시기엔 한국에 없었으니... 귀국 후엔... 그에 대한 소식을 가끔씩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 솔로가수 시절 발표했던 발라드풍 노래들을 좋아했지만 그 노래들은 지금 듣기엔 너무 낡았다. 신해철은 내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신해철이 사람살이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입장은 - 아래 소개할 글의 해석이 맞다면 - 나와 아주 비슷하다.    이 글을 소개한 페친의 입장은 더 비슷하다. 어쩜 그리 놀랍지 않을 일일지도...

문유석 판사가 머니투데이 실은 칼럼 중...

"그가 가장 많이 반복해서 한 말은 의외로 소박한 것이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 사실 그의 청춘기에 ‘개인’은 희귀했다. ‘국민’, ‘민족’, ‘민중’은 넘쳐났지만 말이다. 그가 말하는 개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도, 역사의 필연인 혁명을 이뤄낼 계급의 일원으로 태어나지도, 신의 뜻을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해 창조되지도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개인은 ‘근대적 인간’이다. 그의 말을 빌면 ‘유전자 전달이라는 목적은 태어남 자체로 이루었으니 인생은 보너스 게임, 산책하러 나온 거다’. 이런 개인주의는 누군가에게는 ‘종북, 좌빨’보다 더 불온한 것일 게다. 이 사회를 지배해 온 것은 그 무엇보다 집단주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청년기, 독재에 대항한다는 학생운동의 주류 역시 ‘의장님을 목숨으로 보위하자’는 수준의 또 다른 전체주의였다. 그 투사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후배들에게 직장에의 헌신을 강요하는 꼰대로 변신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학교, 직업, 외모, 사는 동네, 차종, 모든 것이 서열화되어 있는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문화, 입신양명이 최고의 효도이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인생의 성공인 가치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남들과 다르게 비치는 것, 튀는 것에 대한 공포. 이 집단주의 문화로 인한 만성적인 긴장과 피로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않았다.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심리학계의 실증적 연구 결과 문화에 따른 국가별 행복도는 극심한 대조를 이룬다. 북유럽, 서유럽, 북미의 행복도가 높은 데 비하여 한국, 일본, 싱가포르의 행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낮게 나타나는데, 그 원인을 개인주의적 문화와 집단주의적 문화의 차이로 분석한다. 그는 공교롭게도 이 두 문화권을 비교하는 ‘비정상회담’에 출연하여 행복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게 그의 마지막 방송이 되었다.

만연한 개인주의로 인한 문제가 심각한데 무슨 헛소리냐고? 그건 각자도생의 이기주의겠지.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쉽게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 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 든다. 가진 것은 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반면 서구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똘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동성동본 금혼으로 고통받는 연인들을 노래하고(‘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간통죄 폐지, 학생 체벌 금지를 주장한 그의 행보는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다. 그의 주장 대부분은 최소한 유럽에서라면 하품이 나올 정도의 상식일 뿐이다. 그가 무슨 대단한 사상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가 뒤늦게 태동하던 민주화 이후 시대에 누구나 생각은 하면서도 튈까봐 하지 않는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거침 없이 내뱉는 솔직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기술적으로는 IT 강국이고 정치제도적인 민주화는 이루었으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근대 자유주의조차 체화하지 못한 문화 지체의 시대에 그 같은 사람은 끊임 없이 시대와의 불화를 낳는다."

이 칼럼을 소개하며 페친은 이런 글을 남겼다.

"문유석 판사의 글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내가 매혹되었던 것은 '서구적 의미의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 '공동체주의자'로서의 그의 모습이었다. 
정치적 의식으로는 좌파였지만, 
내가 대학 시절에 운동권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 될 수 없었던 것은,
운동권 집단에 이질감을 느낀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한국적인 집단주의'때문이었다.
아직 우리는 서구적 근대, 근대국가, 근대인에 이르려면 긴 시간과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진보든 보수든 모두 후진 이 나라에서 살아가면서
그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