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30일 월요일

촛불 이어가기

촛불집회, 혹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촛불시위의 양상과 환경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머지않아 그 뜨거웠던 열정만 기억에 남고 다 사그라들 것이다. 모두들 일상으로 돌아갔다가 또 다른 조건이 충족되면 새로운 판이 만들어질 것이다. 월드컵 응원이나 황우석 지지 시위가 그러했듯이... 어쩌면 좀 더 진화된 형태를 보여줄 수는 있겠지만, 그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집단행동의 원인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은 더욱 중요해진다. 강준만 교수 글이 던져주는 파급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나도 그를 특별히 주목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촛불집회에 대해 쓴 오늘 한겨레 칼럼은 읽을만하다. 아마 내 생각을 좀 더 정제된 문장으로 정리해 준 것이 고마왔는지도... 앞부분을 우선 옮겨 놓는다:
" '촛불집회가 이명박 정부를 좌초시킬지도 모른다는 보수적 관점이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진보적 관점 모두 수용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일 정년퇴임한 고려대 최장집 교수가 마지막 수업에서 한 말이다. 그는 “(집회 참가자들이) 직접민주주의적 요소 확대를 통해 이상적 민주주의에 대한 선망을 보이고 있지만 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최선의 체제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 강화, 이를 통한 운동의 역할을 축소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역시 최장집이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정부 여당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야당의 지지율은 10%대를 맴돌고 있는데다 촛불집회에서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배제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는 ‘반(反)정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정치의 무덤’ 위에 핀 꽃이다. 그간 정당들이 해온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지만, 이후 정치권이 더 큰 불신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그렇다고 ‘촛불정당’을 만들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 해야 정당정치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세 가지 의제를 던져보고자 한다."
바로 이거다: "촛불집회는 '반정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정치의 무덤' 위에 핀 꽃이다." 그는 또 이렇게도 쓰고 있다: "유권자들의 투표 행태는 ‘반감’(反感)과 ‘응징’을 두 축으로 삼고 있다. 정치가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투표 행태는 극단적인 쏠림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쪽을 죽였다가 저쪽을 죽이는 식으로 돌아가면서 죽인다. 그런 죽임의 부작용이 나타나면 그땐 직접행동으로 해결하려고 든다." 그렇지. 묻지마 지지를 하다가,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난 후 3,4개월만에 지지도가 10페선트 대로 떨어진다. 정상적인 정치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 대선 후 투표율이 역대 최저라는 게 대선 결과보다 더 의미심장한 사태라고 언급해 둔 적이 있는데, 사실 묻지마 지지, 대선, 촛불시위 모두 연속성을 갖는 일련의 사태인 것이다. 이명박은 대선 전 사실 '여의도식 정치'를 벗어나겠다는 얘기를 자신의 '실용주의'와 연결시키곤 했는데 그건 많은 이들에게 매우 통쾌한 발언으로 들렸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문제 중 하나는 체계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과학(학문)', '정치','경제', '예술', '언론' 등 주요 기능체계에 대한 자기관찰, Fremdbeobachtung (언론, 학문에 의한), 성찰, 성찰이론 등의 미발달이다. 그게 내 지론이기도 한데, 난 그런 관점에서 황우석 사태, 신정아 사건, 이번 촛불집회 등의 공통분모를 보려는 것이다. 다시 촛불집회로. '정당정치'를 살려야 한다는데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물론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으나 내 경험 혹은 기억으로 그런 상상력은 대개 상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세상이 어디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던가. 소위 우리가 혁명이란 부르는 사건들도 대개 前史나 後史가 알려진 것보다 길다. 칼럼에서 정당정치의 복원, 활성화를 위해 제시한 내용은 좀 부실하다. 그 중에 이런 발언엔 좀 상상력이 발휘된 듯하다: "의원에 대한 예우를 서민 수준으로 낮추면서 금배지를 ‘근로봉사’의 상징으로 여기게 만들 수는 없는가? ... 지금처럼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이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도 개인과 가문의 영예를 위해 금배지 한 번 달아보겠다고 목숨 걸고 발버둥 치는 풍토가 계속되는 한 정치개혁은 영영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정당개혁은 정당 내 개혁과 의회제도의 개혁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둘은 물론 연결되어 있다. 의원에 대한 예우를 낮추는 것,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의회의 기능을 축소하자는 얘기는 아닐 터이고 그렇담 의원이 갖는 특권을 제한하자는 것인가? 대개 의회기능 보장을 위해 갖는 권리들 아닌가? 그렇게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정치권 진입을 시도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인가? 흠. 그런 연구가 있어야겠다. 사회과학자들의 연구는 그동안 너무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에만 시각이 고정되었던 것 아닌가? 국회의원들의 보상메카니즘에 대한 미시적 연구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되려는 혹은 대통령을 배출하려는 정당, 아니 정치세력의 욕망은 너무도 잘 드러난다. '자리'아니던가... 전리품처럼 '공직' 나눠갖기. 그런 욕망을 조금도 감출 줄 모르는 이명박씨 덕에 우리가 더 분명하게 알게되었지만... 국회의원에 대한 예우, 특권이 많다지만 어떤 방식으로 그 자리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지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천국이다. 연구할 거리가 여기 저기 널려 있지 않은가.

2008년 6월 27일 금요일

bittere Wahrheit

"(...)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선물’이란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선물이 보답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선물이 아니라 교환의 시작이며, 그것이 거저 주는 것이라면 그 또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가 거지에게 돈을 줄 때 선물을 준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주고받아온 것일까? (...)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애초에 선물이란 말 그대로 ‘논리적 모순’이지만,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시간’이라는 요소를 도입해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다. 선물 교환은 교환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시간 차이를 두고 교환을 하는 행위다. 그래서 베풂의 성격을 담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란 ‘비연속적인 베풂의 행위’인 셈이다. 어느 사회나 받은 선물에 대해 곧바로 답례하는 것은 ‘받은 선물을 거절하는 것과 다름없는 결례’라는 문화가 존재한다. 답례를 하지만 그 자리에서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간격을 두고 교환을 하는데, 그 시간 차이가 관계를 형성한다는 얘기다. (... )(정재승, "선물, 그 음험한 전략", 한겨레 21)

찔리지 않는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이런 '계산'을 하면서 살아간다. 내색을 안할 뿐이지... 이런 얘긴 그래서 bittere Wahrheit에 속한다.
사회이론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모든 사회관계로 확장한 것이 합리적선택이론, 교환이론 아닌가? 그런 접근의 설명력 자체를 부인하진 않지만, 그것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또 있는 것이고... 우리 삶을 '계산, '교환', '합리적 선택'으로 다 돌릴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런 주장은 bittere aber nur halbierte Wahrheit 아닌가 싶다, Gott sei dank... 좀 다른 맥락에서.... 언제 동료들과 얘기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 뇌물과 선물 그 구분도 애매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맙게도 우리에겐 우리 고민을 덜어주는 정의의 사도, 심판관, 기자들이 있다. 그들은 '뇌물'일 때만 알려준다 ('선물'은 뉴스가치가 없다). 그렇다. 그게 언론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거야 말로 bittere Wahrheit다.

그대는 왜 촛불을 켜셨나요?

'촛불집회'에 대해서 진중권씨같은 시사 평론가가 할 얘기들은 다 나온 것 같고, 이제 좀 더 전문적, 학술적 담론의 자리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허나 전문적 담론이란 걸 한 두 개념을 만들어 쓰거나 비트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겠다. 위험사회 개념 빌려다 한국을 '복합위험사회'라고 하거나, 2000년 이후 월드컵 이후 신공동체를 발견해냈던 맥락에서 촛불집회를, 예컨대 '미시적 생활정치'라고 부르는 것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 좋다. 허나 산뜻한 개념중심으로 뭔가를 정의할 때 한편으로 언론이나 대중이 사회전문가에 대해 갖는 기대, 혹은 일부, 혹은 대다수의 전문가들끼리 서로의 작업에 대해서 갖는 기대를 더 쉽게 충족시킬 수 있을 지는 모르나,계속 그런 식으로 즉흥적으로 일회성 개념들을 반복적으로 생산해 내는 것으로 만족하기엔 좀 아쉽지 않은가? 좀 큰 규모의 사건이 발생하면 매번 놀라고, 새로 발견하는 그런 역할은 언론이나 진중권씨에게 맡기고 사회전문가들은 좀 거시적, 역사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역사적이란 표현을 붙이기도 뭣하지만, 내가 보기에 황우석 사태와 촛불집회는 매우 유사한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예컨대 일부 사회평론가들에게 황우석 사태의 주역은 과학의 메카니즘을 잘 모르고 애국주의에 경도된 대중이었고 촛불집회의 주역은 미시적 관심과 이해도 표출할 줄 아는 정치의식 높은 시민들인 모양이다. 오해마시라. 그게 틀린 관찰이라는게 아니라, 그렇게만 볼 때 놓치는 것들이 많다는 걸 지적하는 거니까. 적어도 사회학자들은 좀 높은 데서 내려다 볼 필요가 있다 ("구름 위 비행").
그런 의미에서 오늘 확인한 한겨레 21 기사가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한겨레21>이 고려대 한국사회연구소(소장 박길성 사회학과 교수) 갈등연구센터와 함께 "촛불집회에 참여한 중고생 333명(중학생 33.8%, 고등학생 66.2%)을 대상으로" "최초의 체계적 면접조사를 벌였다"고 한다."진행한 설문조사는 6월1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실시됐다. 이번 조사연구의 책임을 맡은 김철규 갈등연구센터장(사회학과 교수)은 '촛불집회를 촉발한 10대 참여자의 특성과 의식에 대한 객관적인 측면들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촛불 소녀(여학생 70.6%)와 소년(남학생 29.4%)에게 43개 항목에 걸쳐 물었다. 그대는 왜 촛불을 켜셨나요? " 음.... 광장에 앉아 있는 333명의 중고생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구나. 답변을 보니까 설문문항은 5점 척도로 구성했고... 허나 처음에 반가운 마음으로 기사를 읽기 시작하다 서서히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설문결과가 별로 궁금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내가 원칙적으로 양적 조사, 통계학적 분석을 불신하는 건 아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의견, 태도를 묻는 설문조사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다. 물론 대통령 후보로 누굴 지지하는지 정도는 물을 수 있다. 또 참석자들에 대한 기본적 사실을 양적으로 조사하는 건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도 잘 모르고 있을 촛불 집회 참석 동기같은 걸 물어서 나온 결과가 과연 얼마나 의미있는 지식을 제공해 줄까? 본문 인용: "먼저 이들은 무엇 때문에 촛불을 들게 되었나. ‘처음 촛불집회에 나오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56.1%가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고 응답한 비율(14.0%)을 훨씬 상회했다." 이것도 분명히 제시된 답변 중 선택하는 방식으로 설문한 결과일텐데, 항목이 제시되지 않았다. 인간은 한 가지 분명한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는 그런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대개 정부 정책에 대한 부노,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 친구가 가니까, 그냥, 놀러, 심심해서, 뭐 하나 궁금해서, 대략 이런 여러 생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 중에서 그래도 어떤 게 가장 중요한 동기였는지를 끄집어 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런 설문에 대고 "그냥 왔어요"라고 대답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설문과정도 하나의 상호작용인데 특히 한국사람들은 설문자가 기대하는 대답을 하려고 한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아닌가. 재미있는 결과, "참석자 중 56.1% 촛불 든 후 61% 자기 만족도 높아져” 하하. 재미있지 않은가? '자기 만족도'라? ... 다시, 정리하자. 이런 설문조사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한겨레 21이 주관 혹은 참여한 건 벌써 문제의 소지가 있다. 또 설문항목 구성에 좀 아쉬움이 있고, 이런 복합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차라리 포커스그룹인터뷰를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또 이번 사건처럼 이슈변화나 참여자 구성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경우엔 몇 번에 걸쳐서 조사를 했을 때 훨씬 더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북한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노래, 그 때를 생각할 때... 어쩌면 이 노래는 들었던 것보다 더 자주 불렀을 수도... 그러고보니, 누가 정태춘 노래 다시 불렀다는 얘기는 못 들어본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너무 무거운가? 그렇지 않은 노래도 많이 있는데... 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쉽다.음반 사전검열철폐를 이루어낸 것만으로도 모든 가수들은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이도 이제 그만 투사의 persona를 벗어도 될텐데... 요샌 뭐하시나. [덧붙임: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촛불집회에서 참여하는 가수 목록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노래 배경이 좀 허접해도 이해하시라. 그래도 youtube에 올라와 있는 가수에 '집중'하게 하는 영상보다는 나으니까...]

2008년 6월 26일 목요일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모처럼 식구들과 통화하던 중 대화 상대가 바뀌어 이제 조카들 차례가 되었다. 유치원생과 초등 2학년인... 그게 참 애매한 상황이다. 서로 공유하는 대화 주제를 그리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나와 어린 조카들... 몇 마디 나누다가보니 스스로에게 전형적인 한국 어른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나를 발견: 동생(형)하고 싸우지 마라, 엄마 아빠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참... 내가 그런 '관습적' 얘길 남발하는 '어른들' 중 일인이되다니....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른이 되면 잔소리가 많아진다? 한국 어른들 잔소리란.... 나도 어쩔 수 없이.... 뭐 그런 걸까? 그보다는 조카들도 이해할만한 방식으로 대화 상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택한 주제 아니었을까? 그 상황은 정색을 하고 내 인생관을 들려주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예컨대, 얘들아, 공부만 하지 말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렴.... 그리고 자주 보는 사이라면 또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주로 그런 어른스런 멘트를 날리는 한국 어른들은 대개 명절 때나 가끔씩 보던 친척들이었던 것 같다. 대개 그 자리엔 그 멘트를 들어야 할 아이들 뿐 아니라 아이 부모 등, 다른 어른들도 함께 있다. 얘들은 물론 어른들이 들어도 수용할만한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이끌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communicator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제 1 덕목, "분위기 파악"! 허나 '분위기 파악'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눈치보기'다. 그 경계? 매우 모호하다. 자, 난 어느 쪽인가? 분위기 파악할 줄 아는 센스있는 사람과, 대화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치보는 비굴한 인간. 분위기 파악할 줄 모르는 센스 꽝인 사회부적응형 고집쟁이와, 어떤 굴복에도 자신의 신념, 소신을 굽히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 세상 일이란게 다 이런 식으로 구분되고, 어느 한 쪽에 서도록 요구받는다. 이런 구분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또 그에 걸맞는 구분이 주어진다: 한 편으로 '경계인' 혹은 '회색인', '성찰할 줄 아는...', '고뇌하는...', 다른 한 편으론 '회색분자', '박쥐', '절충주의자', '수정주의자' 가 된다.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차이, 구분, 경계... 그것 없이 세상을 볼 수조차 없지만, 그 구분은 또 그것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결론은? 그러니 자-ㄹ 살자!

2008년 6월 25일 수요일

벡 선생 한국에 훈수두다

울리히 벡 선생이 현 한국 시국에 대해 한 말씀하셨다. 한겨례 특별기고 형식으로. 허나 '특별기고'라는 표현이 무색하리만큼 분량도 적고 내용도 빈약하기 그지 없다. 그래도 어딘가, "위르겐 하버마스, 앤서니 기든스 등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께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인가? (톤이 좀 시니컬해도 이해하시라. 그 양반 지명도에 거품이 많이 꼈다고 생각하는 쪽이니까...). 왜 '특별'히 '기고'할 생각을 했을까? 본인의 표현을 빌면 "한국의 현 갈등 상황은 내가 쓴 책 <글로벌 위험사회>(Weltrisikogesellschaft)에서 묘사한 체계의 모든 특징을 빼닮았"다는게 신기했나보다. 그 양반 테제는 대개 매우 추상적이어서 한국 아니라 지구 그 어디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도 한 두마디 거들 수 있을 터이니 그것 자체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 딱히 그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Beck 교수의 기본 테제는 내가 이미 읽은 다른 책을 통해서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이런 내 추측이 틀리지 않음은 본문에서 입증된다. "재난이 아니라 재난에 대한 예견이" 문제이고 "이 모든 것은 초국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게 이 짧은 '기고'에서 그가 "묘사한 체계의 특징"으로 제시된다. 제목도 좀 자극적이다: “이명박 정부, 시장·미국에 충성…절대적 국민 건강권 내버렸다”. 한겨레신문 편집자가 달았겠지만 마음에 안 든다. 아닌게 아니라 한겨레도 그렇지, 벡 교수가 예를 들어 New York Times나 Sueddeusche Zeitung에 기고할 때 이렇게 무성의하게 썼을까, 그걸 덮썩 받아가지고선...특별기고 운운... (나만 그렇게 보는건가? 세상을 너무 어둡게 보나?)
사실 내용의 핵심은 (워낙 글이 짧아서 핵심이란 표현도 우습지만) - 어쩌면 이것도Weltrisikogesellschaft 테제에 포함되는 내용일 수도 있겠다 - 신자유주의 국가 비판이다. 인용: "신자유주의적 국가는 글로벌 위험사회 문제에 직면해 실패의 위협을 받고 있는가? 국가는 이런 갈등을 통해 국민이 점점 거세게 요구하는 안전에 대한 기본권을 보장하는 국가적 책임을 떠맡는 방향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이로써 전통적 좌우 대립이 새로운 양상을 띨 것인가?" 이런 질문은 이명박 정부 뿐 아니라 메르켈 정권, 부시 정권은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권 모두에게 던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구상에서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부는 글쎄 차베스나 카스트로, 김정일 정도? 그러니까 벡 선생은 노무현 정권의 특정 정책에 대해서도 똑 같은 얘기를 했을 거란 말이지. 한국학자도 아닌 이에게 더 정확한 분석, 해설을 요구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건 완전히 '하버마스에게 남북관계에 대해 묻기'-식 아닌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서 이런 내용을 인터넷 토론장에 올렸다고 생각해보라. 아니면 내가 한 번 실험해볼까?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이러지 않을까? 그런 하나 마나한 소리 집어치워, 어이 초딩, 방학 언제하니..., 아, 괜히 아침부터...
[p.s. 좀 부연하면, 벡 교수가 한국 전문가가 아니니 침묵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특히 그로서는 (세계)위험사회라는 자신의 평소 주장에 맞아떨어지는 듯한 사례를 발견했으니 이런 저런 얘기 할 수 있다. 다만 그게 대한민국 한겨레 신문에 특별기고라는 형태로 실릴려면 어느 정도 질은 담보해야 하지 않냐는 거다. 점심식사 후 커피마시면서 한 두마디 언급한 것 같은 내용을 세계적 석학의'고견'인양 실어주고 수용하는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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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새 덧글이 44개 달려있다. 그 중 몇 개를 골라 옮겨놓는다.

silver8203(211.XXX.35.203)
2008/06/26 13:16:24
저분이 저런말 할 정도면..... mb는 저분이 누군지는 알까?? 왜 독일인이 선동한다고 그러겠지?? 저런분의 말을 알아먹을리가 없지~ㅉ ㅉ

11215(210.XXX.80.241)
2008/06/25 10:08:17

울리히 백 같은 유명 사회학자의 한국문제 언급을 환영한다.녹색당이 강한 독일의 입장에서 전 세계적 자본주의 물결에 대한 광범위한 발언은 상당히 고민해봐야할 틀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위기와 폭력의 정치성과 재난과 재난의 예고에 대한 역학적 생각은 좋은 사회학적 모델로 보여진다..

11215(210.XXX.80.241)
2008/06/25 10:09:19

그러나 아직 이번 촛불 시위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 경향에 대한 정확한 숙고가 모자란 듯이 보인다.. 즉 서구 사회가 제시한 민주주의 틀안에서 한국을 대상화해서 바라보고 있는 측면으로 , 이 운동의 내막은 이미 자신이 제단한 미래상의 일부로서 묘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덜 착한 시위를 기대하며...

촛불 시위 원인, 대안, 효과 등에 대한 여러 해석, 견해가 드러나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해야 할 것이다. 학자들도 칼럼만 쓸 게 아니라 연구해서 논문을 내야 할 것이다. 오늘 본 하승우 한양대 연구교수라는 분 인터뷰도 나름 신선한 시각을 담고 있다. 읽으면서 얻은 '영감'으로 나도 지금 이 글을 쓰고 것이고... (프레시안 기사). 먼저 기사 일부 인용: "모두가 촛불집회의 '새로움'에 주목했지만 하승우 한양대 연구교수는 촛불집회의 '연속성'을 얘기한다. '촛불소녀들과 유모차 부대가 촛불집회를 통해 거리로 나온 게 아니다. 학교(어린이집) 급식 문제나 두발자유화, 아르바이트생 착취 등 문제와 관련해 이미 그들은 저항의 주체였다'는 것이다. 다만 '국가적 의제는 성인 남성들의 몫'이라는 기존의 '남성 정치'의 시각으로 봤기 때문에 여성과 청소년이 처음 눈에 보였을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관점이 잘못된 것 아닐까. 왜 자꾸 누군가를 대신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성인이 청소년을 대신하고, 남성이 여성을 대신하고, 정당이 대중을 대신하고." "학생들은 학교, 노동자들은 공장, 여성들은 가정, 각자의 공간에서 싸울 수 있는 틀을 만들어 주는 게 정당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싸우는 게 정말 어려운 문제고 누군가 지원해줘야 하는 문제다. 이번 촛불집회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있는데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싸우다 잘린다. 이럴 경우 정말 정당과 시민단체의 그러면 정말 정당과 단체의 힘이 필요하다. 제도정치로 흡수하려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공간에서 풀 수 있도록 지원해줘야 한다." 구구절절 - 대부분 - 맞는 "말씀"이다. 이런 발상은 내가 보기엔 최장집 교수의 "그래도, 제도화된 정당으로 돌아가야-론"보다 한 걸음 나간 것 같다. 참, 갈 길이 멀고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루만의 처방처럼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알아서 작동하고, 결정할 수 있는 단위들로 자꾸 분화되는 게 맞다. 물론 그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생태문제, 탈통합 혹은 배제, 여러 유형의 위험처리, 무책임 등등. 그렇다고 특정한 체계나 조직, 세력이 다른 영역에 과도하게 개입, 조정하려드는 건, 참 시대착오적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촛불시위의 핵심은 사실 그런 시대착오적 개입, 조정에 대한 거부의 몸부림 아닌가? (그런 면에서 하교수의 분석도 왠지 초점을 겨냥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도대체 2MB 세력들의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까? 진짜, 밥은 먹고다니는지 묻고 싶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그런데 우익이나 검찰, 조중동 찌라시들이 하는 '짓'을 보면 그'것'들이 아주 근거없이 나대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 세력'들의 뿌리가 그렇게 깊이 뻗어 있는 것이다. 민주화 후 20년으로도 씻어내지 못한 그런 '몰상식'의 세력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하교수가 내린 처방은 신선하긴 한데 어째 유토피아 쪽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뭐,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라고 하니... 그런 김에 나도 한 번 '상상력'을 발휘해 보련다. 무슨 '주의'로 스스로를 얽어매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치이데올로기 중 내가 지향하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게 자유주의라고 생각한다. FDP 처럼 배부른 자들의 정치클럽 같은 느낌을 풍기는 자유주의자들 집단도 있지만, 아직 상식이 통하는 사회까지 갈 길이 멀수록 자유주의는 '보수화된 진보'보다 차라리 더 진보적일 때가 많다. 그런 자유주의는 어쩌면 자율주의, 아나키즘 쪽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지... (더 이상 묻지 마시라, 사실 이 쪽 공부 많이 하지 않았다). 어쨌든 한국 사회가 당분간은 2MB 세력처럼 시대착오적 발상을 하는 무리들을 몰아내고 상식, 기본이 통하도록 하는 일에 집중해야겠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은 하교수 지적처럼 좀 다양한 견해들이 일상 공간, 공적, 사적 여러 공간에서 드러나고 그것을 잘 조정해나가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난 촛불시위가 더 과격해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파리나 LA에서처럼 폭동을 일으키라는 게 아니라, 좀 더 '덜 착한' 주장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따옴표에 유의할 것!). 하교수의 상상력은 '고작' "학교(어린이집) 급식 문제나 두발자유화, 아르바이트생 착취 등 문제" 였지만, 예를 들어 이런 건 어떤가, 병역의무철폐, 대학공립화 혹은 평준화, 性적 자기 결정의 자유, 존대말 폐지 같은... 허나 현실 속은 청소년, 청년들은 집회 끝나고나서도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치우도록 '사육되고' 있다. 너무도 착한 우리 젊은이들... 이번 미쇠고기 협상 건은 비록 일부 박해를 받더라도 뚜렷한 명분도 있고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착한' 이슈에 속한다. 좀 '덜 착한' '미시적' 주장을 더 많이 듣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머잖아서 요즘의 이 '착한' 시위의 시대를 그리워할 날이 닥칠지도... Wer weiss... 상상력이 필요하대잖아....

2008년 6월 24일 화요일

'생명윤리' 개념사

생명윤리, 아니 정확히 'bioethics'란 단어는 미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완전히 새로운 단어는 아니고, 'bio'와 'ethics'의 조합어다 . 누가 이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는지도 이미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그 '영예'는 위스콘신대 종양학(oncologist) 교수인 Van Rensselaer Potter에게 주어진다. 1970년에 발표한 논문 "Bioethics, the science of survival"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이어 1971년에 ' Bioethics: The Bridge to the Future'라는 이름의 책을 냈음). 이 논문제목이의미심장하다. 생존의 과학이라... 그는 여기에서 bioethics를 “생물학의 지식과 인간의 가치체계에 관한 지식을 결합하는 새로운 학문분야”로 정의했다. bio"는 생물학적 지식, 즉 생물체에 대한 과학을 나타내고, "ethics"는 "인간 가치 체계에 대한 지식"을 대표한다는 의미로서 말이다. 진화론적, 생리학적, 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생명계(biosphere)를 유지하기 위한 ‘생존의 학문’이었다. 요즘 개념으론 환경윤리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의미로는 그 이후 널리 사용되지 않아서 요즘 시각으로 보면 낯선 발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개념 창시자로서 그에게 주어진 영예는 반쪽짜리인 셈.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생명윤리', 즉 '생명과학 혹은 생의학의 윤리'라는 개념으로 'bioethics'를 처음 사용한 이는 조지타운대 Andre Hellegers 교수라고 한다 (the Dutch obstetrician/fetal physiologist/ demographer, 무슨 전공이지 도대체??). 1971년 그가 조지타운 대학에 "The Joseph and Rose Kennedy Center for the Study of Human Reproduction and Bioethics"을 세우면서 (사실은 70년에 세운 "the Kennedy Center for the Study of Human Reproduction and Development"의 개칭) 그 이름에 'bioethics'를 집어 넣은 것. 연구소 하나 생겼다고 당시에는 낯설었을 그 단어가 널리 퍼졌을 리는 없고, 그 전후 사정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여러 연구들이 있다. 여하튼 매우 '미국적인' 상황에서 '미국적인' 이해를 반영한 개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생명윤리'라는 새로운 개념, 루만식으로는 표현하면 이 새로운 의미론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은 사회학적 설명을 요하는 사태다. 물론 의미론의 세계화는 개념의 확산 뿐 아니라 같은 개념이 다른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다른 의미가 부여되는 현상도 포함한다. 실제로 국가 혹은 지역마다 '생명윤리'란 의미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또 사용되는 있다. 그러고보니 '이 쪽', '생명...; 언저리엔 신조어들이 꽤 있다. biomedicine, biotechnology 등등. 생명윤리의 개념사는 이런 '생명...'을 접두사로 삼는 개념들의 개념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유전공학 (genetic geneering, Gentechnik)이 언제부터인가 생명공학 (biotechnology, Biotechnologie)가 되었다. 개념사연구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독일에서는 Gentechnik/Biotechnologie (Gentechnologie는 Biotechnologie가 널리사용된 후에 Gentechnik을 지칭하면서 등장한 것 같다, 내 관찰에 따르면, 독일어 Biotechnologie는 biotechnology의 번역어겠지. genetic engeneering을 Gentechnik이라고 나름대로 줏대있게 번역해 놓고선... ), 영어권에서는 genetic engeering/biotechnology. 생물을 다루는데 "engeneering"을 붙이다니, 아마 그 때는 좀 더 공학적으로 보이고 싶었나보다. bioengineering? 이게 시도되기나 했을까? 글쎄... 한국에서는 영어단어를 좇아 유전공학/생명공학.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독일과는 반대로 biotechnology의 번역어로 직역 '생명기술'이 아닌 '생명공학'이 된 것. 어떤 이들은 biotechnolgoy를 '생물기술'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하나, 널리 쓰이는 것 같지 않다. 아마 익숙해진 유전공학과 '운'을 맞추기 위해서겠지만, 미국에서는 빠진 engeneering이 한국에서는 살아남아있다. '공학'이라는 수식어가 '그냥 기술'보다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나 보다. 하긴 '생물기술'보단 '생명공학'이 더 듣기에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익숙한 탓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engeneering 과 '공학'은 모국어 화자들에게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상식이지만.
어쨌든 생명윤리, bioethics의 의미론적 성공은 두말할 필요 없이 biomedicine, biotechnolgy의 의미론적 성공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biomedicine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분야가 생겨나고, 첨단 연구, 기술이 바로 적용되던 그 분야 윤리적인 문제를 기존의 의료 윤리와 구분해서 보고자 생명윤리가 환영받았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반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bioethics란 의미론이 등장, 확산되면서 그 동안 관련 없이 떨어져서 '잘' 진행되던 연구들 어느 순간 함게 묶이기 시작한다. 사실 인간 배아를 사용하는 연구는 불임치료연구의 일환으로 별 사회적 저항없이 80년대 이후 쭉 있었던 현상인데, 복제가 문제된 이후 이제 그것마저 규제논쟁의 대상이 된 것이고, 생명윤리라는 의미론이 확산되면서 배아연구 뿐 아니라, 낙태, 안락사, DNA정보 이용 같은 이슈들까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것. 좀 극단적 예를 든다면, 낙태운동하던 인사들이 생명윤리학자가 되고, 생명윤리학자로서 그들은 이제 낙태 뿐 아니라 '생명윤리'가 적용되는 여러 이슈들을 개척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나는 구조의 변화를 의미론이 좇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새로운 의미론이 기존 communicaiton process를 새롭게 구조하는 작용도 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의미론과 구조의 관계는 참으로 '친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covariation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bioethics가 1990년대 후반에야 알려지고, 생명윤리학회는 1998년 8월에야 결성되지만, 새로운 의미론임에도 대중 논쟁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biotechnology란 의미론의 대중화와 맞물려 있다. biotechnology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잘 어울리지 않는가: 생명공학 vs. 생명윤리. 생명윤리논쟁의 동인이었던 복제 기술이 생명공학의 하나로 히해되고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에 대한 댓구로서 생명윤리가 도입되면서 (대표적으로 NGO들) 이제 생명윤리란 의미론이 윤리적 문제가 될만한 대상을 선택해 가기 시작한다. 본인들 입장에서는 '돌리'때문에 뜬금없이 불려나가서 함께 야단 맞는 그런 기술, 연구분야들이 선별되는 것이다. '모든 건 MB탓'이 아니라 '돌리' 탓이다. 사실 생명윤리의 구성적인 측면은 약간 과장된 것이기도 하다. 복제기술 뿐 아니라, 그 무렵 이 bio쪽이 북적북적 시끄러웠던 건 사실이니까. 인간유전체 프로젝트가 그랬고, 줄기세포가 그랬고... 그런 와중에 bioethics란 의미론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얼떨결에 불려나온 건 '낙태', '뇌사' 정도가 될 것이다.
라익이 재미있는 얘기를 남겼다. "나는 생명윤리라는 분야는 생명윤리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신조어는 많은 것을 내포하며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신조어가 논의에 새로운 초점을 제공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다양한 분과학문들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모으면서, 결국 윤리라는 단어에서 풍겨나는 이데올로기적 냄새를 제거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I think that the field of bioethics started with the word bioethics because the word is so suggestive and so powerful; it suggests a new focus, a new bringing together of disciplines in a new way with a new forum that tended to neutralize the ideologic slant that people associated with the word ethics) (Reich 1993: S7).
개념사, 혹은 사회학적 의미론 연구의 입장에서는 바로 Reich의 견해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개 생명윤리학자들은 이제는 널리 사용되는 '생명윤리'라는 개념을 가지고서 동서고금 역사를 들추면서 '생명윤리'를 찾아낸다. 전통적 생명윤리, 이슬람, 유교적 생명윤리... 등등. 물론 그런 작업 자체가 의미있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마는, 앞뒤를 분명히 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명윤리란 한국 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당연히 있었던 것이라는 전제는 좀, 아니 많이 재미가 없다. 왜 그동안 '생명윤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개념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현상, 현실을 표현하는 이름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개념의 구성적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푸코, 데리다 등 바로 언어의 이런 측면에 주목했던 것 아닌가).

Reich, Warren Thomas (1993), How bioethics got its name. Hastings Cent Rep. Nov-Dec;23(6):S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