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30일 화요일
'친구' 의미론의 진화 혹은 우정의 불가능성
友情에 대해서는 동서고금 여러 사람들이 '논'하였다. 유명한 키케로의 우정론도 있고, 연암 박지원 선생도 우정에 대해 한 말씀 남기신 모양이다. "우정이 있는 게 아니라, 가끔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한 작가가 있다고도 하고, 그 얘기를 자신의 우정론 앞머리에 꺼낸 김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를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같이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의내린다. 우정에 대한 담론이 활발했던 시기는 분명히 친구 관계가 가져오는 영향이 컸고 관련된 문제도 많이 드러났던 시기였을거라고 추측해 본다 [기존 담론, 의미론 연구의 결과를 원용해 보자면 말이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親舊, 벗. 이런 단어들이 촌스럽게 들리기 시작한다. 왜 사람들은 특정한 유형의 관계를 친구, 우정이라는 의미론을 사용해서 기술하는가? 왜 친구 의미론은 달라지는가? 자, 우선 방법론에 대해 고찰을 해보자. 우리가 우정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경우 본질적인 그 무엇이 있어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탐구하고, 분석하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정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담론을 추적하고, 발굴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우정의 의미론이 문화권마다 다르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있다. 독일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이미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고, 한 번은 오해를 불러 일으켜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한국사람들은 독일인들에 비해서 대개 친구를 좀 더 폭 넓게 정의하는 것 같다. 어쩌면 개인주의가 훨씬 강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일대일 관계를 훨씬 더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또 친구는 철저하게 사적 관계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exklusive Semantik der Frendschaft).한국 사람들은 그 보다는 집단 속에서 개인이 규정되기가 쉽고, 사적관계가 공적관계로 쉽게 전환되는 편이다. 그래서 집단 혹은 연결망 속에서 알게 된 관계 - 일대일 관계가 매우 희박할지라도 - 도 친구관계로 묶어두는 게 유리할 때가 많은 것이다 (inklusive Semantik der Freundschaft). 이런 다른 의미론은 실제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Diskursive Praxis. 담론과 프락시스는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대개 한국사람이 그런 것처럼 친구관계를 넓게 정의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구분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진정한 친구, 참친구 등등 친구를 수식하는 말이 필요하다. 그렇담 진정한 친구, 참친구가 구분의 한 면이라면 다른 면은? 진정하지 않은 거짓 친구? 흠. 그건 좀 그렇고... 덜 진정한 친구 정도 되지 않을까? 어쨌든 내 경우에는 서로 비밀을 나누거나 약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좀 '진한' 친구관계라고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천성적으로 자기 얘기를 잘 하는 경우가 있긴하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나중에 뒤통수 맞는 경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어떻게 이해될지 생각해봐야 하고, 나에 대해서 나중에 뭐라고 할 지 예지력까지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걸 친밀한 관계, 우정이라고 얘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 신뢰. 믿을만하다는 것, 그건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카니즘이다. 신뢰는 곧 예측가능성, 복잡성 감소의 메카니즘이기도 하다. 뒤통수 맞는 일은 바로 이 신뢰가 깨지는 것. 내가 무심코 드러낸 약점이 어느 순간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일. 이중, 삼중, 사중... 우연성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 너무 솔직해서는 곤란하다. 늘 여러 가면을 들고 다녀야 하는 것. 심지어 피곤할 때는 그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는 가면도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하고... 정도의 차이일 뿐,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맨얼굴을 보여주지 못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짐승이다. 여러 가면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맨얼굴 보는 일이 부담스러워진다. 가끔 맨얼굴 보였다가 그게 화근이 되는 경험이라도 몇 번하게 되면 이제 더 꼭꼭 숨긴다. 가면을 쓴 우리들에겐 가끔 '자유인'이라고 등장하는... 예를 들어 전인권 같은... 이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이다. 바로 이 가면을 벗지 못하는 한 우정은... 없다.
우정의 의미론이 문화권마다 다르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있다. 독일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이미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고, 한 번은 오해를 불러 일으켜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한국사람들은 독일인들에 비해서 대개 친구를 좀 더 폭 넓게 정의하는 것 같다. 어쩌면 개인주의가 훨씬 강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일대일 관계를 훨씬 더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또 친구는 철저하게 사적 관계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exklusive Semantik der Frendschaft).한국 사람들은 그 보다는 집단 속에서 개인이 규정되기가 쉽고, 사적관계가 공적관계로 쉽게 전환되는 편이다. 그래서 집단 혹은 연결망 속에서 알게 된 관계 - 일대일 관계가 매우 희박할지라도 - 도 친구관계로 묶어두는 게 유리할 때가 많은 것이다 (inklusive Semantik der Freundschaft). 이런 다른 의미론은 실제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Diskursive Praxis. 담론과 프락시스는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대개 한국사람이 그런 것처럼 친구관계를 넓게 정의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구분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진정한 친구, 참친구 등등 친구를 수식하는 말이 필요하다. 그렇담 진정한 친구, 참친구가 구분의 한 면이라면 다른 면은? 진정하지 않은 거짓 친구? 흠. 그건 좀 그렇고... 덜 진정한 친구 정도 되지 않을까? 어쨌든 내 경우에는 서로 비밀을 나누거나 약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좀 '진한' 친구관계라고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천성적으로 자기 얘기를 잘 하는 경우가 있긴하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나중에 뒤통수 맞는 경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어떻게 이해될지 생각해봐야 하고, 나에 대해서 나중에 뭐라고 할 지 예지력까지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걸 친밀한 관계, 우정이라고 얘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 신뢰. 믿을만하다는 것, 그건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카니즘이다. 신뢰는 곧 예측가능성, 복잡성 감소의 메카니즘이기도 하다. 뒤통수 맞는 일은 바로 이 신뢰가 깨지는 것. 내가 무심코 드러낸 약점이 어느 순간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일. 이중, 삼중, 사중... 우연성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 너무 솔직해서는 곤란하다. 늘 여러 가면을 들고 다녀야 하는 것. 심지어 피곤할 때는 그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는 가면도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하고... 정도의 차이일 뿐,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맨얼굴을 보여주지 못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짐승이다. 여러 가면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맨얼굴 보는 일이 부담스러워진다. 가끔 맨얼굴 보였다가 그게 화근이 되는 경험이라도 몇 번하게 되면 이제 더 꼭꼭 숨긴다. 가면을 쓴 우리들에겐 가끔 '자유인'이라고 등장하는... 예를 들어 전인권 같은... 이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이다. 바로 이 가면을 벗지 못하는 한 우정은... 없다.
壁路, 월스트리트...
왜 미국이 요새 저토록 체면을 구기고 있나. 최종 책임은 금융자본에 물어야 하는 것 같다. 그 월가 사람들... [월가란 이름은 오래 전 뉴욕의 맨해턴 남부에 인디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높은 담을 쌓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맑스 형님 말씀처럼 자본주의의 진화의 종착지가 '금융자본주의'이고 경제공황은 불가피하다고 소비에트 경제학 원론에 나올 테제를 반복할 수 있겠으나, 너무 큰 얘기라 불만족스럽다. 미국 은행이나 금융시장 구조가 그렇게 부실했던가? 왜 이제서 이렇게 난리법석인가? 나름대로 한 경제학 하셨던 조순 형님이 한 말씀 거드셨다. 한겨레 신문을 통해...
말[言] 그리고 글
말[言]. 참 다스리기 어려운 '놈'이다. 말 자체는 의사소통 수단일 따름이니까 사실 어려운 것은 말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대화라고 해야 옳겠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대화 상황에서 적절하게 말하는 것,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화법(話法), 화술(話術)이라는 표현이 있을까. 현대의 그 복잡다난한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마스터하면서 큰 무리없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 그것만으로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들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여러 가면(persona)을 가지고 다니며 상황에 맞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친밀도를 상중하로 나눌 때 가장 대화에 신경쓰이는 경우는 중급일 것이다. 친밀도가 낮은 경우야 매우 의례적인 대화상황으로 끝날 때가 많고, 친밀도가 높은 경우 비대화상황이 대화상황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화상황 자체의 중요도는 떨어진다. 친밀도가 중간 정도일 경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숙련된 의사소통 기술을 갖추어야 한다. 인간관계나 화법에 대한 책자들이 대부분 권고하는대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진심으로 대하는 것.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 호감을 그대로 확장시켜나가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 어떻게든 장점, 좋은 점들을 찾으려고 해야 할 것이고, 그것도 힘들 때는 오히려 접촉 기회를 줄이는게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호감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대화 상황에 억지로 참여하게 될 때는 자주 탈이 난다. 서로 공감하는 영역이 적을수록 그럴 위험이 더 커지는 것같다. 특히 외국인들과 관계에서. 친밀도가 낮은 경우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인사하고 안부 묻는 일 정도는 쉽게 마스터할 수 있지 않은가. 조금 더 친밀한 단계를 향해 갈 때, 자, 이제 길 곳곳에 장애물들이 놓여있다. 공유하는 지식의 범위가 다르고, 제2 혹은 심지어 제3 외국어를 가지고 의사소통 할 때 오해의 가능성, 의사소통이 실패할 가능성은 급격히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 탓, 서로 다른 문화 탓을 해보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결론은 마음에 있는 것 같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대와는 어찌되었건 대화가 잘 되지 않는가. 국적을 불문하고 말이다. 당연히 긍정적인 얘기를 나누려고 할 것이며,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도 더 좋은 해석을 취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호감과는 거리가 먼 상대와 대화를 하거나,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닐 경우, 그런 대화 상황은 가능한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피할 수 없다면 대화에 참여하더라도 아애 말수를 줄이던지. 물론 궁극적인 해결책은 好感에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일 터.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까다롭거나, 비판적이지 않도록 애쓸 일이다.
대화상황에서 화를 내야 할 시점을 잘 놓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 혼자서 씩씩거리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그 때 했어야 할 말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를 때 참 괴롭고, 어떻게 풀어야 할 지 얼마나 난감한지 알 사람은 안다. 허나 할 말 다하는 것 보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더 나은 것 같다. 화가 났을 때 나오는 말이 얼마나 날카롭겠는가. 물론 매번 타이밍을 놓치고서 답답함을 풀지 못한 채 쌓아둬야 한다면 속병이 되겠지만... 역시 음식이건 말이건 잘 소화해야 뒤탈이 없다.
말의 어려움을 경험한 뒤에야 글의 힘, 그리고 글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의 장점을 새삼 인정하게 된다. 말이 주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되는 상황이 대표적으로 대면의사소통, interaction인데 그 상황에서는 말을 통한 정보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비언어적 정보들이 주어진다. 물론 글에 대해서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해석해야 할 정보의 복잡성은 급속도로 줄어든다. 말로 쌓인 문제를 굳이 말로 풀 필요는 전혀 없다. 글이 갖는 독특한 효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과제....
대화상황에서 화를 내야 할 시점을 잘 놓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 혼자서 씩씩거리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그 때 했어야 할 말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를 때 참 괴롭고, 어떻게 풀어야 할 지 얼마나 난감한지 알 사람은 안다. 허나 할 말 다하는 것 보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더 나은 것 같다. 화가 났을 때 나오는 말이 얼마나 날카롭겠는가. 물론 매번 타이밍을 놓치고서 답답함을 풀지 못한 채 쌓아둬야 한다면 속병이 되겠지만... 역시 음식이건 말이건 잘 소화해야 뒤탈이 없다.
말의 어려움을 경험한 뒤에야 글의 힘, 그리고 글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의 장점을 새삼 인정하게 된다. 말이 주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되는 상황이 대표적으로 대면의사소통, interaction인데 그 상황에서는 말을 통한 정보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비언어적 정보들이 주어진다. 물론 글에 대해서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해석해야 할 정보의 복잡성은 급속도로 줄어든다. 말로 쌓인 문제를 굳이 말로 풀 필요는 전혀 없다. 글이 갖는 독특한 효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과제....
2008년 9월 25일 목요일
自淨능력
自淨능력이란 표현은 '하천의 자정능력'처럼 주로 자연현상과 관련된 상황을 설명할 때 자주 접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한 기술에서도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개인에 대해서는 쓰지 않고 자정능력을 갖추도록 기대되는 단위는 조직이나 종교, 과학 등 기능체계인 것 같다. 황우석 사태가 마무리된 후 '우리 과학계'가 자정능력을 갖춘 탓이라며 뿌듯해 하는 목소리를 듣기도 했고, 벌써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아 그렇지, 김용철 변호사가 로비 비리를 폭로했을 때 우린 삼성엔 자정능력이 없다고 얘기했다. 오늘 확인한 뉴스앤조이 기사는 교회의 자정능력을 얘기한다. "김국도 낙마, 교회 자정능력 현주소"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선거를 앞두고 후보였던 김국도 목사를 두고 다른 후보 3명이 ‘김국도 목사 후보등록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으며 서울중앙지법이 ‘교단이 후보 자격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는 것이다. 감리회의 교회법은 후보 자격을 ‘교회재판법이나 사회재판법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실이 없는 이’로 정하고 있는데, 김 목사는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으로 1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은 전력이 있으므로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것. 허나 감리회 현집행부는 막강파워 '도'자 돌림 형제의 일원인 김목사에게 교회법을 무시하고 후보자격을 부여했다가 결국 법원 판결로 얼굴 구기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법'의 기능이 얼마나 화려한지, 다시 한 번 경탄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어쨌든 '자정능력', 그리고 마찬가지 맥락에서 '윤리' 같은 의미론의 활발한 사용은 -윤리경영, 연구윤리, 국회 윤리위원회 등등 - 내가 보기에는 분명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기능적 분화에 대한 의미론의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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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자 보도를 보니 선거는 끝났는데 두 명의 감독회장 후보가 서로 당선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혼란 중에 선거위원장이 바뀌었는데 신구 선거위원장이 다른 두 목사에게 당선증을 주었다는 것. 참으로 可觀이고 漸入佳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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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자 보도를 보니 선거는 끝났는데 두 명의 감독회장 후보가 서로 당선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혼란 중에 선거위원장이 바뀌었는데 신구 선거위원장이 다른 두 목사에게 당선증을 주었다는 것. 참으로 可觀이고 漸入佳境이다.
2008년 9월 24일 수요일
MB 앨범 발매!! (2008, blue house production) ^^
■이명박 Vol. 1. 거짓말
01. 시대 유감 (feat. 어청수)
02. 거짓말 (feat. 강만수)
03. 날 닮은 너 (feat. 전두환, 김영삼)
04. 거꾸로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두환처럼
05. 너에게 속았다 (feat. 대한민국 국민)
06. 제리제리고고
07.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feat. 노태우)
08. 탓 (to 노무현)
09. 이중인격자 (feat. 한나라당 알바)
10. 세월이 가면
11. 잘못된 만남 (feat. 대한민국 국민)
12. 슬퍼지려 하기 전에
13. 너이길 원했던 이유 (feat. 경제 박사)
14. 우리 사랑 이대로 (feat. 노노데모)
스페셜 트랙
1. 가스펠 서울봉헌가
2. 오해야~(feat. 어린쥐)
■이명박 Single: 지역 감정
01. 화개장터
02. 화개장터 Remix ver.
■이명박 Vol. 2. 핑계
01. 주님은 천원을 원하지 않죠 (feat. 소망교회 어린이 합창단)
02. 커플 (feat. 강만수)
03. 아름다운 구속 (feat. 어청수)
04. 제자리 걸음 (feat. 강만수)
05. 변명
06. 체념 (feat. 대한민국 국민)
07. 머니 (feat. 강부자)
08. 내가 쓰는 기록 (feat. 이신바예바)
09. 나는 문제 없어 (feat. 미국소)
10. 포기하지마 (feat. 정대만)
11. 핑계
12. Get Show (feat. 자전거)
13. 대화가 필요해
14. 날 닮은 너 Remix ver. (feat. 김정일. 허정무)
15. 내게 남은 사랑을 다 줄게 (feat. 조지 W 부시)
(source 생략)
01. 시대 유감 (feat. 어청수)
02. 거짓말 (feat. 강만수)
03. 날 닮은 너 (feat. 전두환, 김영삼)
04. 거꾸로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두환처럼
05. 너에게 속았다 (feat. 대한민국 국민)
06. 제리제리고고
07.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feat. 노태우)
08. 탓 (to 노무현)
09. 이중인격자 (feat. 한나라당 알바)
10. 세월이 가면
11. 잘못된 만남 (feat. 대한민국 국민)
12. 슬퍼지려 하기 전에
13. 너이길 원했던 이유 (feat. 경제 박사)
14. 우리 사랑 이대로 (feat. 노노데모)
스페셜 트랙
1. 가스펠 서울봉헌가
2. 오해야~(feat. 어린쥐)
■이명박 Single: 지역 감정
01. 화개장터
02. 화개장터 Remix ver.
■이명박 Vol. 2. 핑계
01. 주님은 천원을 원하지 않죠 (feat. 소망교회 어린이 합창단)
02. 커플 (feat. 강만수)
03. 아름다운 구속 (feat. 어청수)
04. 제자리 걸음 (feat. 강만수)
05. 변명
06. 체념 (feat. 대한민국 국민)
07. 머니 (feat. 강부자)
08. 내가 쓰는 기록 (feat. 이신바예바)
09. 나는 문제 없어 (feat. 미국소)
10. 포기하지마 (feat. 정대만)
11. 핑계
12. Get Show (feat. 자전거)
13. 대화가 필요해
14. 날 닮은 너 Remix ver. (feat. 김정일. 허정무)
15. 내게 남은 사랑을 다 줄게 (feat. 조지 W 부시)
(source 생략)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한국에 시민사회는 있는가?
시민사회라...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진 이후 국내 (진보?) 사회과학계는 맑시즘이 빠져나간 그 빈자리를 이 '시민사회론'에 내주었다. '민중' 혹은 '노동자계급'이 '시민'/ '시민사회'라는 좀 덜 부담스러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시민사회'는 있어줘야될 것 같은 사회과학적 카데고리에서 꽤나 설득력있는 설명변수로 자리잡았다. 그래도 한국에 시민사회가 있으냐 없으냐는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물론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시민사회를 얘기하는 것인가? 시민사회가 잃어버린 멘자카드 찾듯이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시민사회라는 담론이 시민사회를 만들어 내는 측면도 분명히 얘기할 수 있다. 사회과학자들이 한국에 시민사회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주제로 견해가 갈린다고 할 때, 우리는 대개 주로 잘 알려지고 정식화된 어떤 '시민사회' 모델을 상정하고 그런 시민사회 모델의 특징을 한국에서도 발견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논쟁한다고 봐주면 된다. 오늘 한겨레를 거쳐 박노자씨 글방에 들어가 보게 되었다. 난 박노자씨를 기본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편이다. 정통 맑시스트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서 공감하지 못할 때가 종종있긴 하지만, 그렇게 분명한 태도를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것,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이라고 높이 사려는 편이기도 하고. 허나 오늘 읽은 글에 나오는 한국 시민사회에 대해서 언급하는 구절은 영 불편하다:
"필자에게 송두율 교수가 프라하의 한 학회에서 1995년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이란 "시민사회"라기보다는 각종 유사 가족적 연고집단의 결합체입니다. 그 중에서는 제일 큰 것은 "단군의 후손들'이라는 "민족적 대가족"이지만, 또 그 안에서는 동문 집단마다, 지역마다, 하다 못해 대기업의 중년 남성 정규직 노동자의 집단마다 다 그 강력한 집단적 정체성과 이해관계 의식이 형성돼 있지요. 그리고 그 연고적 소집단의 단결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시자면 "이명박 동문"을 찍어주는 "진보적" 고대 출신들의 행태 정도를 관찰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공동체는 이 땅에서 수천년 존재해왔지만 "계급'이라는 일본식 번역어가 수입된 지 100년 정도 된 것입니다. 그것도 학교 교과서에서 아직까지도 - "민족"과 달리 - 많이 안나오는 단어인지라 뭇 인간들의 머리 속에서 뿌리 내리기 힘들죠."
박노자씨의 글 밑에 historian이란 이가 달아 놓은 글에 공감이 가 일부 인용한다.
"일단 "필자에게 송두율 교수가 프라하의 한 학회에서 1995년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이란 "시민사회"라기보다는 각종 유사 가족적 연고집단의 결합체입니다."라고 쓰신 부분은 좀 딴지를 달고 싶습니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가 독일에 있을때 송두율 교수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 중 '시민사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송두율 교수가 당장 말을 끊으면서 "아니 우리나라에 무슨 시민사회가 있다고 시민사회 이야기를 하십니까?"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진중권 교수가 "아! 이 양반이 한국을 오랫동안 떠나 있어 한국실정을 전혀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했답니다.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계 좌파지식인과 북미에 거주하는 자영업자 교포들의 보수우파적 성향은 물과 기름처럼 확연히 다르지만 '한국비하'내지는 '무지'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송두율 교수의 저 발언은 "한국같이 가난한 나라에 베스킨라빈스 같은 고급(?) 아이스크림 가게가 다 있느냐?"고 물었다는 어느 재미교포의 무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정말 송두율 교수와 박노자 선생의 견해가 옳다면 지난 촛불집회는 뭐고 참여연대는 뭐고 경실련은 뭡니까? 이것도 유사 가족적 연고단체란 말인지요? "
송두율 교수야 한국에 대해 쌓인 게 많고 당한 게 많아서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한국에서 떨어져 산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던가. 외부에서 오히려 한국을 더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적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현실감을 잃게 되는데 아무래도 후자 쪽이 아닌가 싶다. 독일에서 산 지 수십년된 교민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아무리 자주 한국에 다녀도 아주 독특한 한국관을 가지고 계시지 않은가. 송두율, 박노자 교수의 입장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럼 독일 혹은 노르웨이에는 시민사회가 있는가? 도대체 독일 어디에서 한국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시민사회를 찾을 수 있는가? 오히려 나는 독일이건 한국이건 시민사회란 개념 자체가 낡은 유럽적 의미론에 불과하다고 보는 루만의 관찰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대한 애증, 자부심과 비하 사이에서 겪는 혼란을 외국에서 오래 산 [누구 표현대로 '장기수' '반열'에 오른] 이들이라면 드물지 않게 경험한다. 열심히 한국 [어떤 한국?] 욕을 하다가도, 누가 맞장구치면 다시 한국 편을 들기도 하는... 외부 관찰자의 시각은 왠지 다를 수 밖에 없다. 한국에 돌아가서 내부자가된 독일 유학 선배들을 만날 때 느끼는 은근한 이질감의 근원도 거기에서 찾아야 할 듯.
[p.s.] 박노자 교수가 시민사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조금 더 분명하게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다 (여기).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글과 이전 글에 달린 논평을 읽어보니, 박교수와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시민사회에 대한 대단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을 "defekte Demokratie"라고 분류하던 학자들이 있는데 (Croissant et al.) 박교수, 송교수 입장이 바로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독일, 미국엔 시민사회가 발달해서 'defekt' 되지 않은 'ordenltich'한 민주주의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가? 과도한 자부심, 민족주의도 문제지만, 겸손이 지나쳐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도 없다.
"필자에게 송두율 교수가 프라하의 한 학회에서 1995년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이란 "시민사회"라기보다는 각종 유사 가족적 연고집단의 결합체입니다. 그 중에서는 제일 큰 것은 "단군의 후손들'이라는 "민족적 대가족"이지만, 또 그 안에서는 동문 집단마다, 지역마다, 하다 못해 대기업의 중년 남성 정규직 노동자의 집단마다 다 그 강력한 집단적 정체성과 이해관계 의식이 형성돼 있지요. 그리고 그 연고적 소집단의 단결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시자면 "이명박 동문"을 찍어주는 "진보적" 고대 출신들의 행태 정도를 관찰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공동체는 이 땅에서 수천년 존재해왔지만 "계급'이라는 일본식 번역어가 수입된 지 100년 정도 된 것입니다. 그것도 학교 교과서에서 아직까지도 - "민족"과 달리 - 많이 안나오는 단어인지라 뭇 인간들의 머리 속에서 뿌리 내리기 힘들죠."
박노자씨의 글 밑에 historian이란 이가 달아 놓은 글에 공감이 가 일부 인용한다.
"일단 "필자에게 송두율 교수가 프라하의 한 학회에서 1995년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이란 "시민사회"라기보다는 각종 유사 가족적 연고집단의 결합체입니다."라고 쓰신 부분은 좀 딴지를 달고 싶습니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가 독일에 있을때 송두율 교수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 중 '시민사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송두율 교수가 당장 말을 끊으면서 "아니 우리나라에 무슨 시민사회가 있다고 시민사회 이야기를 하십니까?"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진중권 교수가 "아! 이 양반이 한국을 오랫동안 떠나 있어 한국실정을 전혀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했답니다.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계 좌파지식인과 북미에 거주하는 자영업자 교포들의 보수우파적 성향은 물과 기름처럼 확연히 다르지만 '한국비하'내지는 '무지'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송두율 교수의 저 발언은 "한국같이 가난한 나라에 베스킨라빈스 같은 고급(?) 아이스크림 가게가 다 있느냐?"고 물었다는 어느 재미교포의 무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정말 송두율 교수와 박노자 선생의 견해가 옳다면 지난 촛불집회는 뭐고 참여연대는 뭐고 경실련은 뭡니까? 이것도 유사 가족적 연고단체란 말인지요? "
송두율 교수야 한국에 대해 쌓인 게 많고 당한 게 많아서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한국에서 떨어져 산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던가. 외부에서 오히려 한국을 더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적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현실감을 잃게 되는데 아무래도 후자 쪽이 아닌가 싶다. 독일에서 산 지 수십년된 교민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아무리 자주 한국에 다녀도 아주 독특한 한국관을 가지고 계시지 않은가. 송두율, 박노자 교수의 입장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럼 독일 혹은 노르웨이에는 시민사회가 있는가? 도대체 독일 어디에서 한국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시민사회를 찾을 수 있는가? 오히려 나는 독일이건 한국이건 시민사회란 개념 자체가 낡은 유럽적 의미론에 불과하다고 보는 루만의 관찰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대한 애증, 자부심과 비하 사이에서 겪는 혼란을 외국에서 오래 산 [누구 표현대로 '장기수' '반열'에 오른] 이들이라면 드물지 않게 경험한다. 열심히 한국 [어떤 한국?] 욕을 하다가도, 누가 맞장구치면 다시 한국 편을 들기도 하는... 외부 관찰자의 시각은 왠지 다를 수 밖에 없다. 한국에 돌아가서 내부자가된 독일 유학 선배들을 만날 때 느끼는 은근한 이질감의 근원도 거기에서 찾아야 할 듯.
[p.s.] 박노자 교수가 시민사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조금 더 분명하게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다 (여기).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글과 이전 글에 달린 논평을 읽어보니, 박교수와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시민사회에 대한 대단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을 "defekte Demokratie"라고 분류하던 학자들이 있는데 (Croissant et al.) 박교수, 송교수 입장이 바로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독일, 미국엔 시민사회가 발달해서 'defekt' 되지 않은 'ordenltich'한 민주주의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가? 과도한 자부심, 민족주의도 문제지만, 겸손이 지나쳐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도 없다.
2008년 9월 18일 목요일
과학지식/ 일상지식
„Das wissenschaftliche Wissen ist weniger sicher als das Alltagswissen. In der Interpretation von Wahrnehmungen des Alltags entstehen normalerweise keine Zweifel.“ (Luhmann 1990 WissG: 325)
Jeff Buckley - hallelujah
서른 살이 되던 해 수영하다 익사한 제프 버클리 (1966 - 1997). 생전에 낸 유일한 앨범 'Grace' (1994)에 실린 노래. 원래 Leonard Cohen이 부른 노래이나 Cohen 스스로 자신의 노래보다 제프 버클리 버전이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리메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