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9일 일요일

그늘...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ps) 이 시는 안치환의 노래로 먼저 알게 되었다 ( 안치환 9.5집, '정호승을 노래하다', 2008). 뭐랄까... 좀 촌스러운 느낌? '서울의 예수'의 정호승과 '소금인형'의 안치환의 노래는 좋으나 21세기에 들어선지도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도 여전한, 아니, 예전보다 더 '통속적'이된 그 모습을 확인하는 일엔 반가움보단, 뭐랄까 안타까움이 앞선다. 그런데 이 촌스럽고 통속적인 노래가 오늘따라 생각났다. 그래... 촌스러움에 힘이 있는 것 아니겠어? 우연에 우연으로 점철되어 줄거리만 듣고선 도무지 볼 것 같지 않지 않은 드라마가 '국민 드라마'가 되는데 이유가 있지 않겠어? 이러다 어느날 '뽕짝' 가사가 절절하게 내 가슴 속을 파고드는 일이 생길지 누가 알랴...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삶의 그늘','우울' 이런 걸 연상하게되는데 - 나도 그랬다 - 그게 아니라 햇볕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 얘기다 (아, 이 무슨 '아낌없는 나무'같은 상상력이란 말인가...)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없다. 모든 속내를 다 뒤집어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이 있다? 모두 구라다. 아니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냥 들어만 주면 되는데... 그리고 표내지 않으면 되는데... 대개 그러질 못하니까 아애 말을 꺼내기 힘든 것 아닌가... (특히, '어른'들이 그냥 듣고만 있질 못한다. )
하고 싶은 말을 그냥 혼자 속으로 삭혀야할 일이 생겼는데, 그 상황에서 이 노래가 떠올랐고, 그래서 멀쩡한 안치환, 정호승 제씨가 불려나와 싫은 소릴 듣고 계시는 중...ㅠ ㅠ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上京 후기

최근 上京한 이후, 내가 좋아해서 오랫동안 휴대용컴 배경화면으로 띄워놓기까지 했던 뉴욕 중심가 정도로 화려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비교할' 정도는 되는 경치를 보여주는 잠실  오피스텔 15층에 살면서 새삼스럽게 발견한 점이지만 난 생각 이상 都會地 풍경 속에서 더 만족을 느끼는 족속의 일원이었다 (뉴욕 시간에 맞춰서 생활한다는 전설의 그 '된장남''된장녀'에 감히 비교할 바는 못되겠지만... ). 심지어 가끔씩 산책을 하는 집 앞 석촌호수와 그 주변 풍경의 '키치'성이 눈에 거슬려 정말이지 파리,  베를린, 뉴욕 정도엔 살아 '줘야' 만족할 것만 같은...
사실 내겐 좀 낯선 이런 생각을 하며 한 편으로는 짧지 않은 그 시간을 그 크지 않은 독일 도시에서 어떻게 '나름' 만족하면서 살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른 한 편 어쩌면 내가 새삼스럽게 발견한 이  '도회지성'을 끼워준 게 바로 그곳이었다는 생각도 했다. 한국의 풍경과 비교해서 생각하자면 빌레펠트만 하더라도 그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미적인 감수성의 수준은 정말 높은 편이었으니까... 
아니, 이게 반드시 되회지/비도회지 문제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게... 난 농촌(다운) 풍경을 볼 때나 최근에 걸었던 팔공산 파계사 가는 그 길 위에서도 속에서도 큰 만족감을 느끼는 편이다. 허나 파계사의 경우 보기 좋은 길을 걸어서 올라 가 보니 도무지 어떤 틀에 넣어서 이해해야 할 지 모를 국적, 역사 불명의 기괴한 콘크리트 새건물 앞에서 당혹감을 느꼈었다. 그런 경험을 염두에 둔다면, 내 미적 감수성은 아애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풍경 속에서나, 인간이 손이 닿았다면 자연의 시간,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다듬어져서 익은 냄새를 풍기는 그런 환경 속에서 채워지는 모양이다.
나무 무늬를 가진 콘크리트 장식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된 인공 조명,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끊이질 않는 '분칠'한 것 같은 석촌호수보다, 시간의 길이와 무게가 느껴지는 도시 뒷골목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빌레펠트는 어쩌면 그만한 규모의 도시가 풍길 수 있는 절제되면서 조화로운 모습과 결코 짧지 않은 역사가 자연스럽게게 녹아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범'도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서울이나 그 밖의 한구 도시의 경우 나이살은 많이 잡솼으나 끊임없는 성형수술과 분장, 치장으로 도무지 원숙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모양새다. 그 절정은 청계천이나 광화문 광장일 것이다 (아직 가 보지 못했다). 캬... 그 발상하며, 그 '안타까운' 미적 감수성이라니... 물론... 좋아지고는 있다.
그러면 나는? 세월에 맡겨두어 포기하던가, '눈'을 낮추던가, '다시' 이사를 가던가... 아니면 지금처럼 불평하면서 그것도  재미로 삼던가... 생각해 보니 선택의 폭이 의외로 넓다.

답답함

흠... 기대치 않은 즐거운 소식을 듣고서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동안 쓰고 싶었던 얘길 잊어버렸다. 답답하다...

認定

사람을 바꾸는 가장 센 힘은 '인정'(認定)이다. 어쩌면 '사랑', '우정'은 '인정'이 표현되는 여러 모습을 구분하기 위한 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조금 더 건조하게 - 다르게 표현해서... '씁쓸하게' 혹은 껍질을 걷어내고서 - 얘기하자면,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 - 人間 -, 그 사람들의 관계는 결국 '인정'을 얻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한 '투쟁'일지도... Anerkennungskampf!

2009년 11월 15일 일요일

디어 클라우드


참 보기 좋은 풍경인데다
내가 좋아하는 디어 클라우드를 - 그렇다면 사진 속 여인은 보컬리스트 '나인'  - 
찍은 사진이래서
남의 '작품'을 그냥 가져왔다.
네이버 포토갤러리에 '별똥이'의 작품으로 '전시'되어 있는... (출처 여기).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연하는 있는 모습인 모양.

(수 개월 후... : 여전히 좋아하는가? 글쎄... 역시, 취향은 변덕스러운 것... 매력을 유지하기란 그만큼 어렵다) 

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한국 생명윤리

일본 생명윤리학자의 발표문을 읽다가 다음 구절에 눈이 갔다. "The Bioethics Movement in Japan around the beginning of 1980s can be understood as a 'Liberation Movement' from the dominant and paternalistic power of medical and techno-scientific professionalism."
일본은 올 해에 '비로소' 전후 첫 정권교체를 경험했고,  민주주의 역동성으로 따지자면 대개 한국보다 여러 급수 아래라고 평가한다/ 된다. 분단, 혁명(?), 독재, 민주화운동, 민주화, 여야 정권교체, 전직대통령의 자살 등 정치 관련해서라면 한국만큼 극적인 사건을 많이 경험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를 국가별로 조사, 비교해 본다면 한국은 분명히 최상위권에 있으리라.
시민권에는 여러 차원이 있고, 역사적으로 그 내용이 끊임없이 바뀌고 재규정되는데,  '정치적 시민권'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한국에선 지나치게 '정치적' 시민권에 집중하거나 - 정권/국민의 관계에서 - 그마저도 선거권 정도로 소극적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막상 정당이나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적다는 말씀. 한국 공중이 매우 정치적이란 얘기도 따져보면 사실 그 내용이 빈약하기 그지 없다. 그나마 덜 정치적인 쪽으로 가면 한국의 '시민권' 논의는 여전히 바닥이다. '생명윤리'의 경우 그 틀은 들어왔지만, 복제논쟁, 생명윤리법논쟁, 황우석논쟁에서 보여주듯이 여전히 그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논쟁은 오히려 대개 너무도 '정치적'으로 이해되어서 오히려 '의료적 시민권'이랄까, 그런 이해는 배제되었다.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도 그런 얘기 아닌가? '촛불시위'때 새로운가능성을 발견했건 처럼 호들갑을 떠들었고, 어떤 이는 마침내 '삶의 정치'(life politics)가 한국땅에 도래한양 감격하기도 했지만... 도대체 뭐가 남았는가? 한국인의 정치성 혹은 정치적 시민권에 대해서 아직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인은 자주 놀라고, 이웃을 잘 놀래킨다. IMF사태 도래에 놀랐다가 수년만에 쨉사게 '탈출'해서 놀랐고, '촛불시위에' 놀랐다가 그런 역동성이 잠복기에 들어가 흔적을 찾기도 힘든 현실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어쩌면 기존 정치이론, 민주주의이론, 시민권 논의, 사회이론 등을 모두 잊고서, 정말 '창의적인' 발상으로 한국을 뜯어볼 필요가 있을 지도...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라투르 책 번역 얘긴 이미 20세기말부터^^ 있었는데 마침내  첫 번역서가 나왔다. 국내에선 STS쪽에서만 알아주는 스타급 학자였는데 이번 번역서 출간을 계기로 인지도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STSer들 서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두 개를 연결시켜 놓는다: 김환석의 서평 (프레시안), 김종영의 서평 (교수신문). 아무래도 지면 제약이 없다시피한 프레시안에 실린 서평에선 책 내용이 좀 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고, 교수신문 서평은 그보다는 간략하지만 '촛불시위'에 대한 라투르적 해석가능성을 소개하는 등 책 바깥의 맥락까지 짚어주고 있다.
서평을 읽으면서 새삼 든 생각이지만 라투르만큼 창의적인 사회이론가도 드물다.
"라투르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공학을 넘나드는 탈경계적 분석방식과 사회/물질(자연)세계를 동시에 관계론적으로 분석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따라서 이 책의 부제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의 대칭적 인류학(상징적인 의미.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와 역동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학문)이란 인문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공학과 소통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학문적 체계를 의미한다." (김종영)

같은 서평을 또 일부 인용하자면...
"라투르의 야심은 근대에 대한 해석을 넘어 인문사회과학의 전면적인 혁신을 주장한다. 그가 비판하는 세 가지 학문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학자는 다음과 같다. 윌슨(자연화), 부르디외(사회화), 데리다(해체)이다. 윌슨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윌슨의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오직 한국에서만 ‘통섭’이라는 기괴한 괴물로 진화했다. 한국학계의 수준이 얼마나 얕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부르디외는 사회론적 환원주의, 데리다는 담론 환원주의(기존의 재현방식을 해체시키지만 여전히 세계의 물질성과 잡종의 정치를 보지 못하고 재현과 담론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방식. representational perspective (데리다) vs. performative perspective (라투르))로 비판받는다".

이 책 독일어 번역서를 사 두고 일부 읽어보긴 했지만 이런 내용이 있는 줄 몰랐다 (뭘 읽은 거지 ... ).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구분이다. 이에 따르면 루만은 부르디외와 데리다 중간 정도로 위치시킬 수 있겠다. 커뮤니케이션에서 출발하지만 (데리다) '사회적인 것'으로 사회를 설명하려는 이론이니까 (부르디외). 이 블로그 어디 쯤에 있을텐데, 루만과 라투르를 비교하는 논문들은 이미 적지 않게 나와있다. 라투르를 들어 루만을 치기는 쉬운 편이다. 루만을 전형적인 '사회학주의자'로 보면 되니까. 루만을 들어서 라투르를 칠 수 있을까?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라투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지? 음. 이 부분을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을 듯. 한국 STS 맥락에서 루만을 소개하려면... 루만 이론의 출발은 Sinn인데 철저하게 인간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라투르가 강조하는 비인간 행위자를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봉쇄되는 건데, 'Protosinn'이란 개념을 도입하자는 주장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좀 군색해 보이는 제안이다. 여하튼 라투르 이론을 좀 더 진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루만과 비교하는 일도 앞으로 본격적으로 해 봐야 할 듯 싶다. 어짜피 사회이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을 상태에서 연대해야 필요성이 커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재배치'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 창작, 표절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이 논문은 가위와 풀로 만들어졌다'느니,  'scissors and paste', 'copy and paste'  같은 표현이 학위논문이나 책 서문에 곧잘 등장한다. 그리 '창의적'이지 않다는 겸손을 드러내기 위해 굳어진 표현인데, 어짜피 해아래 새 것이 없고, 창의성의 본질이  '창작'이 아니라 '재배치'에 있다면, '창착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Ctr+C & Ctr+F'다. 오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Ctr+C' 와 'Ctr+F'를 누르면서 든 생각. 남의 쓴 문장, 표현을 몇 단어 이상(?) 그대로 가져다 쓰는 건 표절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막상 따져야 할 건 얼마나 '창의적으로' 표절했느냐 아닐까? 여기 저기 기운 자국 투성이인 내 논문을 이렇게라도 구원시켜주고 싶은 주인의 심정...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