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전쟁에 굶주린 개들

"미국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최근 한국의 신용등급을 A2에서 A1으로 높인 데는 한반도에 전쟁 같은 극단적 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판단도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쟁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응이 지나치게 미온적이면 훨씬 큰 안보비용을 치를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대응 능력이 세계의 주시 속에 시험대에 올랐다."

오늘자 동아일보 "실효성 있는 ‘단호한 대응’이어야 한다"라는 제목의 사설 중 일부다. 달리 '조중동'이겠는가마는 요즘 동네 방네 짖어대는 이 개들 소리가 매우 시끄럽다. 뭐 방송도 다를 바 없고. 그런데 요새 그 개 무리의 '어르신들'이 왜 안 보이는지 궁금하다. 무슨 전우회, 반공연합, 어버이연합 등등... 저런 노골적인 발언은 원래 그 분들 몫이고 그래야 언론이라는 조중동은 좀 화장을 하고 나섰던 것 같은데... 그 분들이 나서지 않으니 오늘의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가카'께서 - '가카'는 '각하'를 잘못 쓴 단어가 아니라 고유명사다. 지네들끼린 vip라고도 하던데... 어찌그리 '시종일관' 촌스러운지... 또, 국민을 섬긴대매..말이나 못하면.... - 옥좌에 오르신 이후에야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얼마나 배부른 고민을 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10년 동안 꼬리를 내리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개들이 - 그 때도 말 못한 건 아니지만 - 마침내 몸을 일으켜 이젠 백주대낮에 두 눈 뻔히 떠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전쟁을 선동한다. 아... 대한민국... 아직 멀었다...

ps) 모처럼 글을 올리게 됐다. 모두 '동견'(東犬, 똥견/개?) 덕분이다. 내용은 좀 그렇지만,... ^^
다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한 사람들일텐데...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고도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드시겠지... 개밥...

2010년 4월 9일 금요일

"하드코어 인생아" (옥상달빛, 2010)



좀 청승맞지만 중독성 있어서 자꾸 듣게 되는 노래. 방금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듣다가 여기에 소개해 둘 마음을 먹게 되어서 찾아보았더니, 역시...
요새 여기 저기에서 듣고 보게 되는 그놈의 '아이돌'들 때문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라 얼마전 이 여성 듀오의 노래와 얘기를 라디오에서 듣고선 마음을 얼른 내 줘 버렸다. 아, 아쿠스틱의 위대함이여... 물론 이런 류의 노래를 두고 두고 듣긴 힘들다 (예를 들어 한 때 열심히 들었던 영화 'once'의 노래들을 앞으로 찾아서 듣게될 지 의심스러우니까...).
고만고만한 걸그룹, 그 girl들의 화학조미료 맛 나는 노래와 스타일이 역겨워지는 터라 오늘 이 영상에서 처음 본 저들의 모습마저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다만 '싸게' 만든 영상이라 노래 '품질'이 좀 떨어지는 건 아쉽지만...
음, 그리고 가사가 시종일관 '착하지' 않은 것도 '무척' 마음에 든다. Weiter so...!!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잠못드는 밤

졸린 눈으로 침대에 들어가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늘 저녁도 지금까지 애써 '그 분'을 청했으나 오실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컴 앞에 앉았다. 흠. 요즘 내 심리체계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길래 내게서 잠의 즐거움을 빼앗아 갔는가. 여하튼 이 틈을 이용해서 뭔가 끄적거려보기로 한다.
... 여러 번 시도했는데 신통찮은 문장이 나오질 않는다. 메모를 해 둔 생각거리들도 적지 않은데... 왜? 흐름, 리듬이 끊겼나?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이럴 땐 그냥 사라지는 게 낫다.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전국민의 가족화", 혹은 "가족 호칭의 일반화" 현상

도서관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 우연히 엿듣게 된 대화 상황이다. 아마 취업을 위한 ‘스터디’ 모임에 한 남자가 새로 참여하게 되었나 보다. 3인(남 1, 2와 여)의 대화는 대략 이렇게 진행되었다.

여: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남1: 스물 아홉이요.

여: 와, 좋아라. 나보다 나이가 많으시네…

남2: 저와는 동갑이시네요…

남1: (여자에게) 몇 살이세요?

여: 스물 여덟이에요. 그런데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귀국 후 낯선 상황이 적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게 바로 이런 "나이 따지는 청년 문화"다. 아주 엽기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나이’가 확인되어야 비로소 대화가 진행되는 건 사실 오래된 "한국 문화"이긴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10대, 20대들까지 그 대열에 동참하다니...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선 30만 넘겨도 아주 '왕' 늙은이 취급을 받고, 어린 '아이돌' 좋아하는 소위 '로리타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10대 '아이돌'이 라디오 방송에서 나이 따지고... 그런 맥락에서 또 눈에 띄는 현상은 가족을 지칭하던 호칭의 보편화다. 아저씨, 아줌마가 그 원조격이었고, 젊은 여인을 '언니' 라고 부르는 것 까진 경험했었는데, 이젠 어지간하면 형, 누나, 오빠, 아버지, 어머니 관계를 맺는다. 특히, 나이드신 어르신들에겐 아버지, 어머니. 연예이들끼리도... 2시의 데이트 박명수에게 전화를 거는 젊은 남자들은 대뜸 '명수 형님'이다. 만약 이런 호칭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면, 영어의 경우 '(elder) brother'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hyung"인 거지. ['화이팅'이 'fighting'이 아니라 'whaiting/ hwaiting' 인 것처럼...]어찌보면 "근대화=개인화"라는 사회이론이 공유하는 전제를 깨부수는 (듯한) 이런 "전국민의 가족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경향이 지속되면 실제 가족들을 가리키기 위한 새로운 호칭이 필요할 것도 같다.

호칭 의미론의 변화를 추척해서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을 내가 하진 않겠지만, 적어도이건 '기생적 현상' 혹은 '반작용'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나이 서열이 불분명한 상태, 평등한 관계에선 어떻게 행동해할 줄 모르는 위기 상황? 합리적, 평등한, 혹은 추상화된 매체를 통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 ....

어찌되었건 10대, 20대 청년들이 '쫀쫀하게' 한 두 살 나이 따지는 모습에서 긍정적인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2010년 3월 7일 일요일

타인의 기대 (Die Erwartung der Anderen, Fremderwartung)

이러 저러하게 살고 싶다! 이런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나 그런 기대를 갖고 살지 않겠는가? 중고등학교 시절 인생상담 상황에서 자주 등장하던 '자아실현'이 문구는 대개 두 눈 부릅뜨고 애를 쓰면 대개 삶은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설령 그렇지 못해도 그건 네 탓이다! 이런 인상을 적어도 내겐 낢겼다. 열심히 자아를 '계발啓發'(not 개발開發^^) 하면 - 그게 어떤 것이건... - 뭔가가 이루일 것 같은 희망 혹은 환상을 품고 사는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를 부르지 못하던' 홍길동 같은 '전근대인'의 눈엔 '완전' 환상적인 시츄에이션 아닌가?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삶이라!
허나 '자아실현' 같은 담론은, 좀 낡은 언어로 표현하자면 근대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다. 전적으로 개인에게 책임묻기! ('개인'個人이란 번역어는 물론이고 individuum 이란 단어도 중세에야 등장했고, 근대적 주체를 지칭하는 말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남탓을 하면 'loser' 취급을 받는... 그래서 남탓하기는 '빨갱이'나 '노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거나, 혹은 '술자리'에서나 허용된 주제가 되어 주류 담론에서 배제된다 (왜 있잖은가? 다양하게 변주되는 "모든 게 xx 탓!").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남의 기대에 맞춰서 살아주거나, 커뮤니케이션 해야 하는 상황이 많고, 아니 더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사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대개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알게 되니까 "자아의 기대" 같은 건 허구에 가까운 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에서 형성되었건 '자아의 기대'에서 출발을 하자면,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은 게 인지상적인데, 그 과정에서 타인의 기대와 충돌하는 경우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커뮤니케이션 상황이 복잡해지고, 내가 그 참여자들과 맺는 관계가 친밀할수록 그런 충돌이 가져오는 '데미지'는 클 수밖에 없다. 그 '데미지'를 줄이려면? 자아의 기대와 타인의 기대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자아의 기대를 바꿀 수도 있고, 타인의 기대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런 기대 조정법 익히는 과정을 '어른화'라고 불러도 좋겠다. 어른isierung]. 혹은 그냥 그대로 살기, 익숙해지길 기대하면서... 혹은 그런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최대한 피하기... '팔자려니' 생각하며 그런 상황과 더불어 그럭저럭 살아가기 (독일어로 '둘러가기'... umgehen).
루만은 심지어 얼굴을 맞대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상황에서도 개별 인간, 즉 심리체계는 환경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심리체계를 사회에서 쫓아냈다기 보다는, 그를 통해서만 그 독자성, 개별성이 보호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을지... (negative anthropology). 정말 심리체계를 보호하려면, 그건 영원히 사회의 '환경'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한 번씩 '사회' 속으로 '출장' 나올 때마다 기대를 조정하는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소우주라고도 얘기하는 그 심리체계들, 복잡한 기대구조를 가지고 있는 그 심리체계들이 모여서 의사소통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참 신기한 일이다 [이중 우연성 double contingency]. [부록: '일본인'들은 - 그런 대상이 있다치고 - 본론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면서도 의사소통을 한다는데, 그런 쪽에선 아마 압도적인 차이로 Weltmeister일 것 ].

쉬운 얘길 참 열심히 돌려서 하셨다^^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게으름을 찬양하기 어려운 세상...

버트런드 러셀 (1872~1970)이 쓴 에세이 중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있다 (그것과 다른 에세이를 모아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이름으로 나온 책도 있다.) 그 에세이를 읽진 않았지만 출판사 서평 중 일부만 봐도 대략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러셀의 저작 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 책에서 러셀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오히려 여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러셀의 역설적인 주장이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이야기가 ‘우리의 어제’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말해 주기 때문이며 정신없이 지나치는 일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철학자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흔히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지라’는 처방을 내린다. 러셀은 현대의 기술 문명이 모두가 편안하고 안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는데도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현대인은 ‘과잉’노동과 ‘과잉’생산을 하고 있고, 과로와 굶주림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과거에 소수 특권층에게만 부여되었던 ‘게으름의 기회’가 구성원 모두에게 제공되고 개인들이 ‘근로의 미덕이 최고’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누구나 자유롭게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활동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김연아의 연기와 금메달 소식, 그리고 이어진 '연아 찬양 퍼레이드'를 보면서 난 러셀의 이 에세이를 기억해 냈다 (작가들이 '제목'을 다는 일에 공을 충분히 들일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 아닌가^^ 그 밖에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제목으로 박완서의 '나는 왜 작은 일에 분개하는가'를 꼽을 수 있다).
스케이팅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몸, 동작, 얼음, 감정, 음악 등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 그에게 감사한다.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하고 어려움을 극복해서 어떤 분야에서 정점에 이른 사람들은 우선 그 사실만으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허나... 그 이후 이어지는 일방적인 찬사가 귀에 거슬리는 것. (어쩌면 세상 일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7살에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해서 14년 동안 올인하다시피해서 결국 세계 정상에 섰으니 성공한 인생인가?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그 과정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건 인지상정이고, 더군다나 우리 한국사람들은 그 같은 성공신화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가...
수 년 전에, 아마 캐나다로 훈련지를 옮길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인터뷰에서 스케이트 타는 일이 그리 즐겁지 않다고 그가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오늘 본 티비 대담에서도 어린 시절 늘 엄마가 함께 해서 스케이트 타는 또래들과 제대로 얘기를 나눌 수조차 없어서 안타까웠다는 얘길 '스치듯' 했다. 물론 지금 분위기에서 그런 얘긴 부각되어서는 안된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 모녀의 '석세스 스토리'에선 말이다.
통속적으로 인정되는 성공의 기준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대개 '독한' 사람들이 성공한다. 아니, '스토리'는 늘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우리 황우석 형님이 "월화수목금금금"이란 복음을 설파하셨을 때 그 말씀은 온 중생에게 큰 감동이지 않았던가... 시간, 장소, 대상, 맥락만 다를 뿐, 사실 '황우석'과 '김연아'는 그 "내러티브"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일 권하는 사회... 놀고, 쉬는 걸 무척 불안해하는 시대. "노는만큼 성공한다"(김정운) 같은 책이 많이 팔리긴 했지만 그가 던지는 메세지는 여전히 불온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21세기에 불온한 사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놀자주의' 아닐까. "노는만큼 성공한다"는 얘기나 "게으름 찬양" 말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데는 남북이나 자본주의/공산주의 진영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우리 윗동네 사람들의 새벽별 보기 운동이나, 생산력 높이기에 재미를 붙였던 소비에트 등등.
여전히 휴가일수를 줄이거나, 아침 회의 시간을 당기는 부지런한 지도자들, 많은 것을 포기하고서도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을 찬양하는 한... 일중독 만큼은 관대하게 보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남에게서 빌려온 자본주의 정신을 지구 그 어디에서보다 더 철저하게 구현해내는 한민족!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 혹은 일본 제국주의자들 눈에 그토록 게을러 보였다는 우리 조상님들. 그 게으름 탓에 외세의 손에 놀아났고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는 처절한 인식 때문인지, 아직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더 놀자거나 게으르자, 혹은 느리게 살자 같은 얘기가 큰 공감을 얻기란 아직 힘든 것 같다.

2010년 2월 21일 일요일

숙제2

새것을 격하게 아끼는 한국 문화 (아래 '파란 스펀지' 사진 참조) 나름 계보가 있을 터인데, 언어 표현에서 추적해 보면...
- 서양...를 줄여서 '양'이라고 하던 전통: 양이(洋夷) 같은 부정적 표현도 있지만 양복, 양식 등 대개 긍정적 표현.
- '신'.. 혹은 '신식'...: 신여성, 신식 군대...
- 모던...: 모던 걸 --> 근대...: 근대화 --> 선진...: 선진화, 선진국
- 현대...:
- 최신...

가족의 기능 변화.
다른 사회체계에 기능을 넘긴 이후 - 대표적으로, 경제, 교육 - '가족'의 의미는 축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기능은 오히려 더 강화되는 것 같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친밀함, 정서적 공감을 나누는 기능. '2세'는 기능성 추구하는 세상에서 '인간미'를 드러내는 매체이기도... ex. 헐리웃 배우들이 경쟁적으로 얘를 가지려는 현상...

'나이 따지기'의 기능
방송매체를 통해서 '아이돌'들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이 나누는 얘길 듣거나 볼 기회가 가끔씩 있는데 유난히 나이 따지기려 든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몇 개월까지 따져서 형/동생 관계를 분명히 해두려는 것이다. 그네들보다 나이들 더 먹은 사람 시각엔선 그 상황 자체가 우습지만 - 어린 것들이 ...^^ - 사회학도의 시각에선 그런 상황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아이돌들'은 워낙 조직속에서 키워진, 제작된 산물이기 때문에 그런 조직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위계질서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리더'가 있고...). [그 아이돌은 지독히도 소비용이다. 수명도 그리 길지 않은... 새로운, 당연히 더 젊은 아이돌로 쉽게 '대체'된다. 불쌍한... 광대짓... 지들이 광대인줄도 모르는... 아니, 소비되는 것 자체를 즐기는... ]
선배에게 깍뜩한 아이돌을 대견해 하는 선배 연예인들의 모습, 노골적으로 아이돌을 소비하는 모습... 욕망을 좀 더 쉽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건 좀 진보한 면인 것 같으나, 하나 그렇게 드러나는 욕망이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것을 보면 그건 '남이 만들어준 욕망'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싶다. 여하튼 그런 기제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돌의 문화가 오히려 더 고리타분한 건 참 씁쓸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허나 가만히 보면 아이돌 뿐 아니라 보아하니 10대 후반, 20대 초반 한국 젊은이들은 대개 나이를 즐겨 따지는 것 같다. 어리다는 것만 빼면 요즘 젊은 세대 문화가 지독히도, 어쩌면 더 보수적이라는 건 좀 생각해 볼 일이다.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The Blower's Daughter (Damien Rice, 2003)



이 노래를 부른 데미안 라이스는 1973년 아일랜드생. 이 노래는 Mike Nichols 감독의 영화 'Closer' (2005)에서 사용되어서 유명해졌다. 나도 영화에서 인상깊게 들었다가 나중에 누가 부른 노래인지를 찾게 된 경우. 내가 이런 풍을 좋아하나보다. Jeff Buckley나 요즘엔 Jason Mraz 같은...
사랑에 대한 노래인 건 알겠는데, 제목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이번 기회에' 찾아보았다. 이 양반이 클라리넷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 선생, 그러니까 클라리넷주자 (the blower)의 딸을 짝사랑하게 되었다고... 그 선생은 반대를 했고 - 가사 중에 the pupil in denial이란 구절... - 이 노래를 불러주며 그 딸에게 사랑을 고백했는데 관계가 거기에서 끝났다고... 그녀를 무척 좋아했는지 너무도 애절하게 부른다. 어쨌든 음악과 영화와 매우 잘 어울리는 사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영화는 남녀 관계를 매우 '쿨'하게 다루어서, 라이스의 그런 지고지순한 사랑과는 '크게' 비교된다.
이 음악에 대한 영상으로는 흐린 해변에서 분위기 잡고 있는 Damien과 영화 장면이 교차되는 비디오가 유명하나,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을 주는 이 버전을 골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