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30일 목요일

역시 정책의 핵심은 "법"과 "돈"이다. 법을 통과시키느냐 못시키느냐, 예산이 늘었느냐 줄었느냐... 많은 정책 관련 정치적 논쟁, 공공 논쟁은 이 두 질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정책에 대한 학문적 논의 역시 그런 질문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즉, 법 혹은 법 규정이 있는지의 여부나 예산의 증가, 감소 추세가 정책의 현실, 상황을 기술, 설명하는 결정적인 지표로 '애용'된다. 이명박 정부의 복지정책을 예로 들어보면... 예산이 늘었네, 줄었네... 그게 핵심적인 논쟁점이다. 한 쪽에선 줄어든 예산을 거론하면서 복지정책의 후퇴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선 복지예산 총액이 최고치라고 얘기한다. 아마 둘 다 옳을 것이다. 그러면 논의는 이제 예산의 증가의 성격, 내용을 따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거기에서도 갑론을박하며 결론이 어느 한 쪽으로 내려지진 않을 것이다. 그런 비슷한 논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있었고, 앞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반복될 것이다. 그런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그저 모든 게 MB탓... 삽질하기 위해 여기 저기 돈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물론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삽질 - 정말.. 삽질도 저런 삽질이 없을... - 하는 정권을 비판하기 위한 중요한 논리로 사용되면서, 우린 정권만 바뀌면 금새 복지예산이 늘어 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번 정권 들어서 복지예산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정권비판을 그저 예산의 증액 가지고 설명하는 건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손쉬운 만큼 헛점도 많고... 그렇다고 달리 표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책의 해석적, 문화적 측면을 중심으로 정책을 설명하는 방식이 있기도 한대... 그것도 명확한 그림을 보여주긴 힘들다.
결론은... 이런 저런 설명, 분석을 종합하는 수 밖에 없는 듯

2011년 6월 29일 수요일

하고 싶은 얘길 다 쏟아 놓지 말아야 한다
다 쏟아내면 순간 그 희열을 느낄진 모르겠지만 (분노도 일종의 희열, 카타르시스에 속한다)
그러면 사람이... (이 부분에서 표현하고 싶은대로 다 표현하지 않으련다)

젊은 시절 - 그러니까 '더' 젊은 시절 - 절제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절제'와 '눈치보기'를 구분하지 못한 탓이다

절제는 '배려'에 가깝다
상대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혼자 있을 때 절제의 끈을 더 쉽게 놓는게 인지상정이지만
'가능한' 오래 잡고 있어야 한다
그게 자기를 살리는 길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을
우린 '聖人' 혹은 '偉人'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절제'가 또 다른 강박이 되어선 안된다
'강박' 혹은 '순결주의'는 너무도 예민해서 쉽게 무너지고 깨지기 때문이다
'강박', '결백', '순결주의'와 '분노'는 너무도 친하다

유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유연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모순처럼 들리지만
모순으로 가득 찬 인생, 세상, 역사에서 잘 살기 위해선
모순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쉽게 분노하지 마라
세상을 그리고 인간을 그렇게 쉽게 단정짓지 마라

운전 중에 갑자기 끼어 드는 사람들
길에서 침 뱉는 사람들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
너무 쉽게 단죄하지 마라

내가 쏟아 낸 말들은
돌고 돌아
결국 죄다 내게 돌아온다

(...)

2011년 6월 28일 화요일

"‘개념 사전’ 집필을 시작했다. 조중사가 보조필자로 참여하고 편집자들과 매주 만나며 진행하니 반년이면 꼴이 나올 듯. '개념없는 놈'이라는 말도 있지만 세상이 뒤틀리고 나빠질 때는 반드시 개념이 먼저 뒤틀리는 법이다. 이를테면 오늘 한국의 교육이 무너진 건 교육이 아닌 걸 교육이라 하기 때문이며 교회가 무너진 건 교회가 아닌 걸 교회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자는 이른바 정명(正名)론을 통해 이름이 흐트러져 세상이 흐트러진다, 모든 사람이 제 이름을 분명히 함으로서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이야말로 正名이 필요한 사회다. 보수를 보수라 하고 개혁을 개혁이라 하고 진보를 진보라 하는 게 그리 어려울까? 개념을 바로 세운 다음에야, 의견 교환을 하든가 토론을 하든가 할 수 있는데 이놈의 사회는 제 이해관계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개념을 뒤트는 게 오히려 일반적이다. 박정희가 제 군사독재를 ‘한국적 민주주의’라 부른 걸 시작으로, 근래 좌파 출신 386 기득권세력이 스스로를 ‘한국적 좌파’ 혹은 '현실적 진보'라 부르기 까지, 한국에서 개념 왜곡의 역사는 매우 뿌리 깊고 또 사회적 해악 또한 크다. 치우침 없이 엄정하고 간명한, 그러나 고등학생(중학생이면 더욱 좋고)이면 읽을 수 있는 개념 사전이 목표." (김규항 블로그에서)

특히, 공감 가는 부분... "오늘 한국의 교육이 무너진 건 교육이 아닌 걸 교육이라 하기 때문이며 교회가 무너진 건 교회가 아닌 걸 교회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디 교육, 교회 뿐이랴. 저들이 그토록 지겹게 들먹이는 '국민', '국민의 뜻', '선진국', '발전', '환경', '녹색 성장'... 虛名이다...

2011년 6월 27일 월요일

한국 문화, 그 독특함에 대한 이야기 나누다. 언제가 이곳에도 기록해두었던 나이 따지는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자 모두 공감. 시간이 지나도 전혀 쇠퇴하지 않는 나이 따지는 문화... 끈질긴 생명력...쌍둥이들 까지 따져서 형, 동생을 정해야 하는... 얘긴 그 정도에서 끝났지만 그렇게 마무리하기엔 석연치 않다. 반대 경우도 있으니까. 가족들 사이에서 존대법은 분명히 훨씬 덜 지켜지고 있으니까. 비록 형, 동생 서열은 분명하게 해 두지만 실제 대화를 보면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부모와 자식의 대화의 경우에도... 내 관찰에 따르면 위, 아래를 따지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분화되고 있는 것이다. 또래들 사이에선 몇 개월 나이를 따지는 10대, 20대의 경우에도 집에선 그렇게 하지 않는... 그러니 존대법, 위 아래 분명하게 따지는 문화는 이전 문화의 유산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새롭게 형성, 구성된 문화로 봐야 할 것이다. (...)
"스스로 사유하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기보다, 보증된 이론 또는 이론가에게 기대기 위해 공부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어요. 그런데 학문은 보증을 해 주는 안전장치가 아니거든요. 특히 인문학은요. 가령 철학은 언제나, 익숙한 방식으로 굳어져버린 믿음들을 전복하여 이미 있었던 개념들을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어요. 우리가 푸코, 들뢰즈, 랑시에르에게 열광한다면 그것 또한 그들에게 안주하기 위해서는 아니거든요. 그들의 권위에 의존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이율배반적이고요" (홍서연, 인류학자)
우리가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게 결국 어떤 의미일까.

세상이 복잡하다... 중심, 머리가 없이 그저 '고만고만한' 다양한 체계들, 조직들이 서로 얽혀 있고 각자 정체성을 찾고 유지하려고 한다... 그 복잡함 속에서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 다양한 메카니즘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겨우 유지되는 질서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고... 어쨌든 유지되는 것 자체가 개연성이 낮은, 그러니까 신기한 일이고...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사회가 진화되면서 인간이 얻은 건 인권, 개인의 권리, '법 앞의' 평등.... 아니,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진화의 요건에 가깝다. 기능체계가 수평적으로 분화되기 위해서 인간은 일단 사회 바깥으로 나가 줘야 하고 특정한 체계의 상황, 세팅에 따라 특정한 역할, 인격으로 호명되는데 체계가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 참여 가능성은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니까... 물론 인권 같은 평등 뿐 아니라 각종 근본주의, 집단주의적 정체성, 성별 차이, 경제적 능력에 따른 차이 (계급) 등 각종 차이 역시 근대적 조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동등한 주권을 갖는 주권 국가 중심 근대 정치 체계의 형성은 '내셔널리즘'의 형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데 사실 '내셜널리즘' (민족주의, 국가주의)는 인권, 개인주의와 친할래야 친할 수 없는 이념이니...
다시 말해 현대사회는 사회구조적으로 복잡할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더 할 나위 없이 복잡하고 산만하다. 서로 다른 정체성, 문화, 이념, 사상들이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다. 애써서 어느 한 쪽으로 통합하려고 하면 할수록 부작용들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현대적 사회구조, 문화를 잘 달래가면서 써야 한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그 때 그 때 '스마트'하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파국을 면할 수 있다. 어느 한 체계, 한 문화를 강조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삼는 순간 이 위태로운 질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게 경제가 되었건, 국가가 되었건.... 종교 근본주의던, 국가주의던 간에...

기능적 분화 이론이 다른 이론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결정론'을 배격한다는 데 있다. 경제 결정론 (계급, 양극화 강조하는...)은 물론이고 문화 결정론도 배격한다 (언어학적 전회, 문화적 전회 이후로... ). 주체, 인간 중심주의는 물론이고 구조 결정론과도 거리를 둔다. 어떤 종류 어떤 이름이건 '결정론'은 배척의 대상이다. 구성주의! 물론 구성주의 안에도 여러 입장이 있지만 여하튼 구성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구성주의적 조건 위에서 구체적으로 구조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급진적 구성주의와도 구분이 되고...

그렇다면 다른 입장은? 구성주의가 득세를 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구체적 사회 분석에선 여전히 실재론, 결정론이 주류다. 경제 중심 설명 (계급, 양극화,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이고 - 흥미롭게 그런 입장엔 좌우가 모두 공감한다. 신자유주의를 옹호하거나 비판하거나.. - 혹은 세대 중심 설명도 큰 고민없이 쉽게 수용되는 것 같다 (아래 경제학과 학부생들 발표에 대해서 언급한 것 참고).
재미있는 건 근대적 조건, 즉 사회가 복잡하고 혼란스럽다는 그 조건이 오히려 결정론, 결정론적인 설명을 선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세상이 이미 복잡한대 - 사실 누구나 체감하고 있는 사실! - 거기에다 사회학자라는 사람들이, 네 맞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복잡하고 어디로 튈 지, 어느 방향으로 진화할 지 알 수 없습니다 - 라고 얘기한대서 누가 좋아하겠는가.... 결과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걸 다 알면서도 경제학자들의 예측이 환영받는 사실! 경제학자들, 혹은 통계적, 수리적 설명을 지향하는 학문들이 환영을 받는 현실... 기능 분화 이론의 논의를 빌면 기능 분화 이론이 각광 받지 못하는 이런 현실까지 설명할 수 있다.

(기능적 분화 이론을 기초로 삼는) 체계이론 연구자의 과제는 이처럼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는 - 구름 위 비행 같은 - 논지를 땅쪽으로 끌어 내리는 일이다. 기능 분화, 다양성의 공존, 패러독스, 딜레마, 구성, 공진화... 다 좋아. 근대 그래서 어쨌다구??!! ㅠㅠ 팔장끼고서 냉소적 시선으로 내려다 보며 이렇게 묻는 이에게 - 체계이론 논지에 대해서 '냉소', '반감'도 모자라서 '적의'(敵意)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있다 - 좀 더 손에 잡히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메조' (meso) 차원이라고 할까... 혹은 중범위 (middle range)...
국가론, 조정 (steering, Steuerung)논의가 활발 할 때 '조정 비관주의', 세계화 논의가 활발할 때 세계사회론이 괜찮았고, 그 이후 환경문제나 위험 관련 논의 시장에서 루만식 체계이론이 꽤 짤짤하게 팔렸었다. 수년 전부터 가장 각광을 받는 주제는 아마 복지, 정체성 논의와 관련하여서 '포함/배제 (inclusion/ exclusion)'가 아닌가 싶다. 물론 조정 논의는 거버넌스와 관련해서 계속 얘기할 수 있고, 세계화도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예전만큼 흥미롭지 않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 복지, 포함/배제 논의도 사실 그 정점을 지난 것 같고... (역시 지나가고 있는 주제인듯한) 지식사회 논의에 이르면 벌써 체계이론 담론의 핵심에서 많이 벗어나게 된다. 9.11. 이후에 반짝 근본주의 등을 '통합 의미론' 으로 풀어 보려는 시도가 있었고...
내 생각에 좀 더 '파먹을' 수 있는 여지가 남은 주제 중 하나는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체계이론적 설명이다. 신자유주의는 전형적인 경제 결정론적, 경제 중심적 설명 방식인데 거기에 대해서 꽤 그럴듯한 대안적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논의 맥락을 한국으로 가지고 오면...
한국을 기능적으로 분화된 세계사회라는 틀 속에서 이해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체계이론이 끼어 들어서 기여(?)할 수 있는 논쟁적 주제가 어떤 게 있을까?
시사성은 떨어지지만 예나 지금이나 의미있는 주제들로는...
- 한국의 민주화, 민주주의
- 시민사회, 사회운동, NGOs...
- 한국 근대화, 근대성, 근대의 다양성, 다중 근대성 논의와 연결해서....
좀 더 시사적인 주제들로는...
신자유주의? 거버넌스? 국가론? 인권? 개인화? 포함/배제? 복지국가? 국가 역할? 정의, 공정성, 신뢰?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다. 강당에서 '그런 식'의 집단 교육을 받은 건 예비군 훈련장 이후로 처음인 듯. 아니... 독일에서도 비슷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군. 요식업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받아야 하는 위생 교육... 그런 식의 '관(官)'에서 주관하는 교육은 어디에서나 분위기가 비슷하다. 군대에서 정기적으로 받아야 했던 '교육'도 그렇고... 학교 '교육'도 대개 그렇고. 대학에선 좀 달랐지만 그 중에서도 '교양필수' 과목 분위기는 '관(官)'주도 교육이 풍기던 그 냄새에 가까웠던듯. 의무, 필수... 모두 계몽을 목적으로 하며 정답이 있는 교육들이다. 생각해 보면 주일학교 교육에서도 그런 냄새가 난다. 대학부 시절 가졌던 성경공부는 토론식이서 나름 재미를 느꼈던 것 같은데, 그 이전엔 주입식에 가까웠으니까. 여하튼 입식 공부, 계몽을 목적으로 하며 정답을 듣길 원하는 교육에 대한 거부감은 뼛 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 같다.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카리스마 있는 선배, 어른을 좋아하며 나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여하튼...
그래도 오늘 교육에서 얻은 게 없진 않은데...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선녀와 나무꿋'에 대한 재해석. 사슴을 구해 준 나무꿋에게 사슴이 선녀 옷을 훔치라고 했고 그 일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런, 그렇고 그런 '스토리' 아니던가. 강사의 문제 제기. 선녀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는 것. 사슴은 왜 지가 입은 은혜를 당사자 의사도 묻지 않고서 선녀를 통해서 갚느냐는... 선녀의 인생(?)은 도대체 모냐고... 흠. 틀린 얘기가 아니다.

p.s.) 강사는... 흠... 크게 나쁘진 않았는데, 뒷줄부터 지목해서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별로'였다. 질문할 대목이 되면 긴장감이 도는 것도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런 지목질을 당해야 하나... 노인대학에서도 그럴까.... 더구나 오늘은 지목당하지 않아도 여기 저기에서 의견을 쉽게 꺼내는 분위기였기에 더 아쉽다. 기를 쓰고 말하지 않아도 인정해주는 한국의 문화가 편할 때도 있지만 (독일에선 찾아 볼 수 없는...), 그건 말을 쉽게 꺼내기 힘드는 문화라는 뜻이기도 하다. 역시 모든 걸 한꺼번에 가질 수는 없는 일인가...

2011년 6월 26일 일요일

소개글을 바꿨다. 하여 옛 소개글을 여기에 남겨둔다.

"긴 독일체류를 마치고 '遊牧'인지 '流浪'인지 모를 길에 나섰다. 아직도 '宿主' 곁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도 저도 아닌 '寄生'에 가깝다고 봐야겠지만... 벗뜨...내 羊을 칠 그 날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