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8일 금요일

어제 저녁 창조성을 다룬 티비 프로그램에서 재즈 연주 이야기가 나왔다.  즉흥 재즈 연주를 하는 사람들의 뇌의 변화를 관찰했더니...

" 전두엽피질에서 변화가 관찰되었다. 이 영역은 의식적인 자기검열과 관련된 부분이다. 즉,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는지를 관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재즈 뮤지션의 전두엽피질은 그 기능을 멈추기 시작했다. 뭔가 실수할까봐 집중하는 것과 반대로,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 자기검열 기능을 끄는 것이다."

라이브 연주를 자주 접하진 못했고 재즈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매력을 느끼는 편이었는데... 매력을 갖게 하는 '비밀'을 알게 된 느낌이다. 반면에 내가 어떤 종류의 음악을 싫어하는 이유도 일부 설명할 수 있게 된...

재즈는 정형화되지 않고 자유롭고, 열린 음악이다. 무형식은 아니고... (음악이 되려면 그럴 수는 없지)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상당한 훈련을 거쳐서 내공을 쌓지 않으면 그 자유를 누리면서 들을만한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음악의 틀이 단단하면 상대적으로 쉽게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시 요약하자면 최소한의 틀, 그 틀 속에서 자유로움, 그 자유로움을 누리고 또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실력과 내공... 이런 것들을 갖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다. 재즈가 가장 자유로운 쪽이라면, 클래식 라이브 공연도 상당히 그런 편이다. 아니 일다는 음반보다는 라이브 공연이 더 그렇다. 가요나 팝 쪽에서도 애드립 구사능력이 필요한 알앤비 쪽도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발라드에서도 자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가수들이 있다. 성시경의 어떤 노래들은 상당히 좋다.

음악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학문이건 일상적 대화건... 재즈같은 학문, 재즈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재즈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뭐. 좋아하면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재즈를 좀 더 찾아 듣다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2014년 2월 27일 목요일

서양인의 관점에서 규범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니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한국 규제 정책이 불안정한가? 불확실한가? 확실한 것 아닌가? 예측가능한 것 아닌가? 정책과 실행 간에 간극이 있다는 것. 익히 알려져 있는 것 아닌가? 예측가능한 것 아닌가? 일탈도 반복되며는 일상인 것 아닌가? 예외도 자꾸 반복되면 그건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서양사람들은 일치하고 일관성있는 것에 익숙해서 한국의 정책/실행 분리를 보면 병리적, 예외적인 현상으로 판단하겠지만,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점들을 그네들은 이해하지 못하지.

그리고 "발전국가 --> 규제국가"라는 도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양의 경우 개입주의국가 혹은 복지국가에서 신자유주의적 규제국가로 전환을 이야기하지만, 발전국가 시절에도 규제가 적지 않았거든. 시장에 맡기고 질서유지를 유지하는 서구적 규제국가와 달리, 기업을 관리하기 위한 발전국가적 목적으로 규제를 양산.

“한국에서 정치는 경제의 담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국 같은 개발주의국가는 스스로 대기업과 영구적인 결속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기업이 정치 ·경제적으로 점점 강해짐에 따라, 정부는 규제수단을 통해 기업을 길들이려 했고, 그 결과 임의적인 규정들을 수없이 만들어냈다. 이 규정틀은 변덕스렵고 비합리적이고 비지속적이며, 그래서 쉽게 예측할 수 있듯이, 그 목적을 성취해내지 못하기 십상이다. 오히려 이러한 규정들로 인해, 한국에서 ‘게임의 법칙’은 얼마든지 교섭을 통해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겨났을 뿐이다."
"정부가 재벌을 통제하기 위해 시장수단을 선택하지 않고, 규제들만을 비대하게 양산할 뿐인 관료적 수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연고주의라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규율중심적이라기보다는 결과중심적인 후발 경제개발의 습성과 연관된다. 한국은 지난 40년간 매우 빠르게 성장했을지 모르나, 진정한 경쟁과 자유시쟁l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심지어 현재의 민주적인 개혁가들도 정부에 의한 임의적 조치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위기의 시기에 도처에 존재하는 정부구조를 이용해서 산업구조조정을 강행하고 싶은 유혹은 점점 더 강해진다." (우정은 1999,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기업부문개혁”, in: 창비 1999, 가을호: 308쪽 이하.)


"1980년대 경제자유화 및 안정화 정책을 실행한 이후 한국의 국가는 서서히 발전국가에서 규제국가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등장하고 있는 규제국가는 미주 및 유럽에서 복지국가가 퇴조하면서 등장한 규제국가와는 속성상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규제국가는 발전국가적 속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 (이연호 외 2002, 한국에서 규제국가의 등장과 정부-기업관계, 요약 중)
"새누리 '통일대박론에 이어 경제대박 청사진 제시'"

대통령이란 작자 입에서 '통일대박'이라는 믿기 힘든 표현이 등장하더니, 이젠 '경제대박'이란다. 이 글을 쓰는 순간 '욱'했다. 너희들 때문에 내 수명이 또 단축된 것이야. 천박한 것들 같으니라구.

그런데 취임 1주년을 맞는 박씨 국정 지지율이 62퍼센트란다. 믿고 싶진 않지만,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다. 중권 형님 표현대로 주름 없이 매끈한 뇌를 장착하신 분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페친 박동서 님의 글.

그렇지 남한 거주민들의 행태에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건 단견이다. 합리적인, 너무도 합리적인...

"‘유럽에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나온다‘ 라고 말한 것은 마르크스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어떤 요괴가 여기 저기 출몰하고 있다. 이 요괴는 서양에서 태어났음에도 이미 한국인의 신체에 육화(肉化)되어 있다. 그 이름은 ’합리성‘.
이 요괴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하나는 목적합리성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걸 하는 건 무엇 때문에?” 즉 목적이 확실하게 될 때 까지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 면.
또 하나는 경제합리성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것을 하면 나한테 어떤 이득이 있는 거야?” 즉 노력(勞力)에 상응하는 대가가 현금자동인출기의 현금처럼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 면.
정치철학자인 테일러(C. Taylor)에 의하면 이러한 합리성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도구적 이성’이다. ‘도구적 이성’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소여의 목적에 대한 가장 경제효율이 높은 수단이 무엇인가 그 적용을 계산할 때 이용하는 유형의 합리성을 가리킨다. 그 경우 성공의 잣대는 최대효율 즉 비용 대 효과의 최적비율에 다르지 않다.
‘최대효율’과 ‘비용 대 효과의 최적비율’이라는 것은 노동이든 화폐든 투자한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최대로 한 비율이다. 내 주위에도 그 예는 넘쳐난다. ‘상담교사 자격을 따면 취직에 유리하다’라고 믿고 있는 학생들. ‘교사가 되면 이상적인 결혼 상대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학생들.
즉 도구적 이성이라는 것은 가장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수단을 사용해서 목적을 가능한 한 빨리 달성하는 효율주의에 묶여 버리는 사고의 전형적인 예이다."

2014년 2월 26일 수요일

UCLA 한국학 교수 Duncan의 글로 유교근대성에 대한 고민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It seems to me that the best way to establish the possibility of some sort of Korean equivalent to “civil society” or the “public sphere” is to demonstrate that there was in the Chosŏn some process of social differentiation analogous to that which took place with the rise of the market economy in Western Europe, a process that both leveled status differences and provided individuals with independent livelihoods that were not dependent on political power and patronage. The arguments advanced by South Korean internal development theorists regarding the “dissolution of the feudal system” and the “sprouts of capitalism”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notwithstanding, I am not sure that any such process began in Korea until after the opening of the country to the outside world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o the contrary, as James Palais has argued, the Chosŏn appears to have been a state and society dominated by an aristocratic landlord class, the central yangban or pŏryŏl, until after Korea was forced open in 1876."

"Finally, let me note that one of the underlying issues that has motivated my argumentation throughout this chapter is a concern with the use of historically specific and highly idealized Western models to interpret Korea’s past. It is not that I consider the Western experience to be somehow inherently superior to the East Asian or Korean experience, or that Western models represent an advanced level of social and political development to which non-Western societies simply cannot aspire. To the contrary, it is because I feel that the unconditioned, nonreflexive use of Western models privileges the modern Western experience and relegates countries like Korea to a kind of enduring subalternation, not only for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when Western powers dominated the world, but also (as applied to earlier centuries) retrospectively for an historical era when countries like Korea and China were arguably more “advanced” in many ways than countries of the West"

출처: Duncan Duncan, John (2002), The problematic modernity of Confucianism: the question of “civil society” in Chosŏn dynasty Korea, in: Armstrong, Charles K. (ed.) (2002, 2nd ed.), Korean Society. Civil society, democracy and the state. London et al.: Routledge, 48쪽 이하.
미야지마, 김상준... 등등. 유교근대(성) 접근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고대-중세-근대"의 서양사에 기초한 역사관으로 세계사를 재단하려는 서양중심주의의 편협함과 오만함을 통쾌하게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짜릿할 정도로 반갑다. 하지만 지구근대성과의 관계를 더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지 않으면 자칫 "정신승리"로 끝나버리기 쉽다. 필요한 접근은... 유교근대성의 어떤 점이 서양에서 시작된 지구근대성의 수용과 적응을 용이하게 했다거나, 반대로 유교근대성의 어떤 점때문에 지구근대성의 어떤 측면은 여전히 수용하기 어렵다.... 같은 식의...구체적 사안으로 들어가서 유교근대성과 서양근대성의 상호관계를 분석해보는 연구는 아주 흥미롭겠다. 미야지마 교수 연구에 그런 점들이 들어 있는 것 같다(일제시대때 토지조사사업?), 그리고 Woodside (2006)의 Lost Modernities - China, Vietnam, Korea, and the Hazards of World History 같은 국가, 관료제 연구도. 과학/기술 분야에 대해서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 유교근대성의 어떤 점들은 근대 과학과 기술 문명의 어떤 점들은 쉽게 수용하게 했고, 어떤 점들은 과학과 기술 문명의 어떤 점들은 여전히 수용하기 어렵게 하고 있고... 같은 식으로... "어떤"을 밝혀내기가 쉽진 않겠지만.
'아무도 부유해지려 하지 않으면 모두 부유해질 것이고, 모두가 가난해지려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는다.' 

- 이원석, 인문학으로 자기 계발서 읽기, 258쪽

참 쉬운데. 이게 정답인데. 그런데... 그게 또... 어렵네. 참...
김상준 "맹자의 땀, 성왕의 피"(2011)는 한국사회학 역사에서 보기 드문 참신한 시도임에 틀림없다. 이 책의 내용을 대략 파악하고 있을 뿐이지만, 특히 결론 부분이나 이 시대에 대한 함의에 대해서 동의하기 힘들다. "한국사회학"에 실린 "중층 근대성"논문 역시 그런 것 같다. 한국 현실을 설명하는 좋은 틀인데, '그래서 어쨌다고?'를 질문에 답하려면 힘이 뚝 떨어지는...  대부분의 서평이 찬사 일색인데 비해서 창비에 실린 백민정의 서평은 그런 점들을 똑부러지게 잘 지적하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옮겨 놓는다.

"하지만 서구가부흥하면 유학을 맹공하고 서구가 몰락하면 유학을 부흥시키려는 이같은 지적 관행은 더이상 되풀이되어 선 안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는 서구학술사에 대한 어떤 열등감도 없이 , 그간의 지적 풍토와 경향, 무의식적 욕망을 비판적 으로 반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강대국의 사상에 부응하여 또 다른 지적 패권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치기보다 오래된 관 행에서 거리둘수 있는희소한기회가찾아온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