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8일 일요일

게으름을 찬양하기 어려운 세상...

버트런드 러셀 (1872~1970)이 쓴 에세이 중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있다 (그것과 다른 에세이를 모아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이름으로 나온 책도 있다.) 그 에세이를 읽진 않았지만 출판사 서평 중 일부만 봐도 대략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러셀의 저작 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 책에서 러셀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오히려 여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러셀의 역설적인 주장이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이야기가 ‘우리의 어제’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말해 주기 때문이며 정신없이 지나치는 일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철학자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흔히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지라’는 처방을 내린다. 러셀은 현대의 기술 문명이 모두가 편안하고 안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는데도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현대인은 ‘과잉’노동과 ‘과잉’생산을 하고 있고, 과로와 굶주림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과거에 소수 특권층에게만 부여되었던 ‘게으름의 기회’가 구성원 모두에게 제공되고 개인들이 ‘근로의 미덕이 최고’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누구나 자유롭게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활동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김연아의 연기와 금메달 소식, 그리고 이어진 '연아 찬양 퍼레이드'를 보면서 난 러셀의 이 에세이를 기억해 냈다 (작가들이 '제목'을 다는 일에 공을 충분히 들일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 아닌가^^ 그 밖에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제목으로 박완서의 '나는 왜 작은 일에 분개하는가'를 꼽을 수 있다).
스케이팅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몸, 동작, 얼음, 감정, 음악 등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 그에게 감사한다.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하고 어려움을 극복해서 어떤 분야에서 정점에 이른 사람들은 우선 그 사실만으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허나... 그 이후 이어지는 일방적인 찬사가 귀에 거슬리는 것. (어쩌면 세상 일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7살에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해서 14년 동안 올인하다시피해서 결국 세계 정상에 섰으니 성공한 인생인가?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그 과정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건 인지상정이고, 더군다나 우리 한국사람들은 그 같은 성공신화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가...
수 년 전에, 아마 캐나다로 훈련지를 옮길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인터뷰에서 스케이트 타는 일이 그리 즐겁지 않다고 그가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오늘 본 티비 대담에서도 어린 시절 늘 엄마가 함께 해서 스케이트 타는 또래들과 제대로 얘기를 나눌 수조차 없어서 안타까웠다는 얘길 '스치듯' 했다. 물론 지금 분위기에서 그런 얘긴 부각되어서는 안된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 모녀의 '석세스 스토리'에선 말이다.
통속적으로 인정되는 성공의 기준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대개 '독한' 사람들이 성공한다. 아니, '스토리'는 늘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우리 황우석 형님이 "월화수목금금금"이란 복음을 설파하셨을 때 그 말씀은 온 중생에게 큰 감동이지 않았던가... 시간, 장소, 대상, 맥락만 다를 뿐, 사실 '황우석'과 '김연아'는 그 "내러티브"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일 권하는 사회... 놀고, 쉬는 걸 무척 불안해하는 시대. "노는만큼 성공한다"(김정운) 같은 책이 많이 팔리긴 했지만 그가 던지는 메세지는 여전히 불온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21세기에 불온한 사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놀자주의' 아닐까. "노는만큼 성공한다"는 얘기나 "게으름 찬양" 말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데는 남북이나 자본주의/공산주의 진영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우리 윗동네 사람들의 새벽별 보기 운동이나, 생산력 높이기에 재미를 붙였던 소비에트 등등.
여전히 휴가일수를 줄이거나, 아침 회의 시간을 당기는 부지런한 지도자들, 많은 것을 포기하고서도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을 찬양하는 한... 일중독 만큼은 관대하게 보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남에게서 빌려온 자본주의 정신을 지구 그 어디에서보다 더 철저하게 구현해내는 한민족!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 혹은 일본 제국주의자들 눈에 그토록 게을러 보였다는 우리 조상님들. 그 게으름 탓에 외세의 손에 놀아났고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는 처절한 인식 때문인지, 아직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더 놀자거나 게으르자, 혹은 느리게 살자 같은 얘기가 큰 공감을 얻기란 아직 힘든 것 같다.

2010년 2월 21일 일요일

숙제2

새것을 격하게 아끼는 한국 문화 (아래 '파란 스펀지' 사진 참조) 나름 계보가 있을 터인데, 언어 표현에서 추적해 보면...
- 서양...를 줄여서 '양'이라고 하던 전통: 양이(洋夷) 같은 부정적 표현도 있지만 양복, 양식 등 대개 긍정적 표현.
- '신'.. 혹은 '신식'...: 신여성, 신식 군대...
- 모던...: 모던 걸 --> 근대...: 근대화 --> 선진...: 선진화, 선진국
- 현대...:
- 최신...

가족의 기능 변화.
다른 사회체계에 기능을 넘긴 이후 - 대표적으로, 경제, 교육 - '가족'의 의미는 축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기능은 오히려 더 강화되는 것 같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친밀함, 정서적 공감을 나누는 기능. '2세'는 기능성 추구하는 세상에서 '인간미'를 드러내는 매체이기도... ex. 헐리웃 배우들이 경쟁적으로 얘를 가지려는 현상...

'나이 따지기'의 기능
방송매체를 통해서 '아이돌'들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이 나누는 얘길 듣거나 볼 기회가 가끔씩 있는데 유난히 나이 따지기려 든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몇 개월까지 따져서 형/동생 관계를 분명히 해두려는 것이다. 그네들보다 나이들 더 먹은 사람 시각엔선 그 상황 자체가 우습지만 - 어린 것들이 ...^^ - 사회학도의 시각에선 그런 상황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아이돌들'은 워낙 조직속에서 키워진, 제작된 산물이기 때문에 그런 조직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위계질서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리더'가 있고...). [그 아이돌은 지독히도 소비용이다. 수명도 그리 길지 않은... 새로운, 당연히 더 젊은 아이돌로 쉽게 '대체'된다. 불쌍한... 광대짓... 지들이 광대인줄도 모르는... 아니, 소비되는 것 자체를 즐기는... ]
선배에게 깍뜩한 아이돌을 대견해 하는 선배 연예인들의 모습, 노골적으로 아이돌을 소비하는 모습... 욕망을 좀 더 쉽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건 좀 진보한 면인 것 같으나, 하나 그렇게 드러나는 욕망이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것을 보면 그건 '남이 만들어준 욕망'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싶다. 여하튼 그런 기제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돌의 문화가 오히려 더 고리타분한 건 참 씁쓸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허나 가만히 보면 아이돌 뿐 아니라 보아하니 10대 후반, 20대 초반 한국 젊은이들은 대개 나이를 즐겨 따지는 것 같다. 어리다는 것만 빼면 요즘 젊은 세대 문화가 지독히도, 어쩌면 더 보수적이라는 건 좀 생각해 볼 일이다.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The Blower's Daughter (Damien Rice, 2003)



이 노래를 부른 데미안 라이스는 1973년 아일랜드생. 이 노래는 Mike Nichols 감독의 영화 'Closer' (2005)에서 사용되어서 유명해졌다. 나도 영화에서 인상깊게 들었다가 나중에 누가 부른 노래인지를 찾게 된 경우. 내가 이런 풍을 좋아하나보다. Jeff Buckley나 요즘엔 Jason Mraz 같은...
사랑에 대한 노래인 건 알겠는데, 제목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이번 기회에' 찾아보았다. 이 양반이 클라리넷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 선생, 그러니까 클라리넷주자 (the blower)의 딸을 짝사랑하게 되었다고... 그 선생은 반대를 했고 - 가사 중에 the pupil in denial이란 구절... - 이 노래를 불러주며 그 딸에게 사랑을 고백했는데 관계가 거기에서 끝났다고... 그녀를 무척 좋아했는지 너무도 애절하게 부른다. 어쨌든 음악과 영화와 매우 잘 어울리는 사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영화는 남녀 관계를 매우 '쿨'하게 다루어서, 라이스의 그런 지고지순한 사랑과는 '크게' 비교된다.
이 음악에 대한 영상으로는 흐린 해변에서 분위기 잡고 있는 Damien과 영화 장면이 교차되는 비디오가 유명하나,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을 주는 이 버전을 골라봤다.

침묵

침묵도 해석되어야 한다. 당연히...
나중에 이 블로그의 빈 시간 그리고 빈 공간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까?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숙제

좀 더 여유가 있었더려면 글로 만들었을 이야기거리를 짧게라도 기록해 두려 한다. 숙제하는 마음으로..

- 오늘 미장원 다녀왔는데 결과가 아주 불만족스러웠다. 알아서 해 주도록 맡겨둔 탓이다. 그러고 보니 머리형에 대한 내 취향은 그리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다른 분야 취향에 비교할 때...). 그 동안 헤스타일의 선택을 주로 남에게 미루는 편이었다. 귀국한 이후에 '타의'로 헤어스타일에 대해서 그 동안 해 보지 않았던 실험을 해 보았는데, 오늘 경험한 바까지 고려하니 이제 - 적어도 당분간 - 추구해야 할 '스타일'이 마침내 그려진다. 기대하시라...

- '세종시' 문제가 요즘 가장 시끄러운 주제인데, 사실 핵심은 행정수도 이전을 통한 수도권 집중 해소아니었던가. 결국 행정중심도시가 되었다가, 이제 그마저 지지부진해질 것 같지만... 이런 구체적인 정책이슈를 체계이론으로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 '공간'(Raum, space)문제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체계이론에서 공간의 2차적 중요성을 갖을 뿐이고, 체계이론의 핵심 테제인 기능적 분화, 그 기능체계들은 철저히 '시간화'(Verzeitlichung) 속에서 이해된다. 공간은 그러니까 기능적 분화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2차적 구분이라는 것. 사실 커뮤니케이션에서 공간의 중요성은 가면 갈수록 줄어든다고 다들 강조한다 (특히, 세계화 논의에서). 공간의 중요성은 기능체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수도권 문제" "행정도시 건설" "국토균형" 같은 주제는 는기능체계에 따라 달리 이해될 것이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유비쿼터스" 운운하면서 탈공간화를 얘기하면서, 동시에 물리적 '공간'이 그토록 중요한 것처럼 커뮤니케이션 되기도 하고... 기능적 분화된 사회, 공간이 2차적인 의미를 갖는 현대사회, 그 중에서 한국이라는 지역적 경계 속에서 이루오지는 커뮤니케이션에서 '공간'이 공공의제로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짬짬이 체계이론을 파고 있는데, 여러 가지로 놀란다. 특히 최근에 루만의 GdG 중 Selbstbeschreibungen 부분을 감탄하면서 읽었다. 루만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발전시킬 방향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사회를 커뮤니케이션으로만 보는 한계. 라투어 등을 원용해서 커뮤니케이션 이전에 collective 를 상정하자는 주장. 루만과 탈구조주의자들과의 관계, 차이. Gesellschaft를 커뮤니케이션 합이 아니라, 커뮤이케이션의 구조 중 하나로 보자는.. .그러면 Weltgesellschaft도 새롭게 정의해야하고, Welt와 Gesellschaft의 동어반복이라는 비판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체계이론은 루만에 의해서 완성된 게 아니라 여전히 진화 중이다.

- 영작에 대한 책을 최근 집중적으로 읽었는데, 영어 문장은 참 깔끔하고 세련되게 쓰기 쉽다는 느낌을 갖게된다. 독일어 문장을 읽으면서 갖지 못했던...

- 변산에 내려가서 공동체를 일구고 있는 윤구병 선생 이야기를 읽었다. 어릴 때 놀던 때를 제외하고 가장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도시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 (나도 거기에 일조했지만...),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주려 아직 어린아이들을 다그치는 어머니들... 그 흐름을 거스르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 3권을 속독했다. 많이 놀랐다. 특히 2권 이야기는 매우 '체계이론적'이어서... 반갑기도 했고. 물론 루만은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에셔, 마그리트 등 현대미술은 물론 정보이론, 싸이버네틱스, 언어철학등등.. 어쩌면 그런 언급 속에서 루만을 떠올린 건 바로 그게 시대정신이어서 그럴 수도... 여하튼 다시 한 번더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책의 성격은 매우 애매하다. 에세이라고 보는 게 나을 듯. 출발점으로 삼아야하지만, 인용할만한 그런 책이 아니라는 말씀. 뭐, 대중들엔 그런 책이 '어필'하겠지만. 김용옥의 책처럼...

- 그 동안 루만에게 영향을 주었던 여러 학자들, 특히 사회학 외부에서 루만이 취했던 학문 흐름을 적극적으로 좇아가지 않았었는데, 진중권 책에서 '영감'을 받아서 좀 찾아보았다. 본격적으로 루만, 체계이론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해야 할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면 '미학 오디세이'의 세계와도 만나게 될 것이고... 내가 꿈에 그리던 그런 작업 아닌가.

- 결국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세 축은 체계이론, 세계화/세계사회, bio로 압축되는 것 같다. 내가 가장 많이 공을 들인 분야 아니던가. 돌고 돌아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 '아바타'를 봤다. 3D가 아닌 큼지막한 티비로... 줄거리는 너무도 뻔하고 익숙한 것들의 짜집기였다. 오히려 유치할 정도로... 그나마 CG, 테크닉이 볼만한데... 전세계적으로 수조원을 벌어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흥행몰이를 하는 이유는? 누구나 봐야 할 영화로 프레이밍해내는 마케팅 기술의 승리?

- 이번에 눈에 띈 풍경 하나. 파란 스펀지를 달고 다니는 차들이 많다. 새차 출고시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붙여 놓은 거라고 하는데, 색깔도 촌스러워서 당연 떼야 할텐데, 그걸 그냥 붙이고 달리는 차들이 의외로 많은 것. 심지어 그걸 별도로 팔기까지... 엽기적이다. 새차임을 티내고 싶어하는 심리라고 해석할 수 있을텐데, 그런 욕망이 상식적인 미적 감각까지 마비시키나 보다.
그 밖에 새 것을 '격하게' 존중하는 문화의 사례는 많다. 주로 가전 제품이나 컴퓨터를 출고하기 전 보호하거나 설명하기 위해서 붙여진 각종 스티터가 오랫 동안 붙어있는 경우.

- 시내 풍경을 촌스럽게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들은 뭐니 뭐니 해도 간판들이다. 글씨가 크지만, 따로 만들어서 다는 간판 자체가 너무 크기도 하고, 무엇보다 색깔이 너무 화려한다. 원색에 가까워서 너무 자극적이다. 한국미를 '여백의 미'라고 하는 얘긴 교과서에서 배우는 얘기고, 도대체 채우고, 드러내지 못해서 야단들이다.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광화문 광장이라는데도 참 가관인 모양이다. 시내 자체가 현란해서 눈이 어지러운데 광장이라고 만들어 채우더니, 그것도 모자라 각종 이벤트를 여는 모양이다. 시장의 수준이라기 보다는 평균 시민의 수준이 그 정도라고 믿고 싶다. 여백 없는 삶, 도시... 불안해서 못 노는... 일상화된 위기, 쫓김... 모두 연결되어 있다.

-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다들 '비판'에 너무 민감하다. 정치권은 불문가지고, 인터넷 댓글 커뮤니케이션도 그렇고... 문제는 좀 배운 이들도 그렇다는 것. 초딩적 댓글은 차라리 문제가 되지 않으나, 민족주의 등 민감한 이슈를 건드리는 기사 아래를 보면 먹물깨나 잡순 티가 나는 댓글들에도 가시들이 들어있다 (최근 동계올림픽 싹쓸이 못한 쇼트렉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프레시안에 동아대 정? 교수가 쓴 글, 개콘 '남보원'에 대한 김종엽 교수의 까칠한 칼럼 in 한겨레 등등). 매사를 비판적으로만 봐서도 곤란하겠지만 - 너무 까칠하면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 일리있는 문제제기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

2010년 2월 5일 금요일

드문드문 들르는 대구성서아카데미에서 오늘 읽은 정병선의 칼럼 내용 일부를 가져왔다.

가수 조영남씨가 “너무 큰 꿈은 인생을 재미없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다들 ‘큰 꿈을 가지라’고 외치는 시대에 ‘너무 큰 꿈은 인생을 재미없게 만든다’는 말은 시대의 맹점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생을 깊이 통찰한데서 나오는 삶의 진실이 배어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너무 큰 꿈은 인생을 펼쳐가기보다는 인생을 삼켜버리기 쉽습니다. 너무 큰 꿈은 인생의 다양한 멋과 깊은 맛을 즐길 여유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너무 큰 꿈은 꿈의 성취라는 결과에만 집착하게 하기 때문에 인생길을 여행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축복들을 놓치게 합니다.

세상 일엔 대개 다중적 의미가 있는데 꿈, 비전, 성공 등도 역시 그럴 것이다. 사실 우리 윗 세대들이 가졌던 생존 그리고 발전에 대한 지향, 집착, 강박이 낳은 열매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집착을 경계하고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음도 지적해야 할 것이고... "노는만큼 성공한다"라는 책이 시의적절하게 나왔다고 느껴질 정도로, 운전으로 치면 "전방주시형" 초보운전자가 지배적인 사회 아닌가. 이제 좀 옆, 뒤를 보면서 운전을 즐길 법도 한데, 여전히 '놀지' 못하고, '위기다' '힘들다' '죽겠다' 를 입에 달고 있는...

ps) 앞만 바라보고 어디로 달려 가고 있는 중인가? 발전, 선진국, 성장... 한 마디로 '돈'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얘기하는 성공, 꿈, 비전... 역시 다르지 않다. 권력, 사회적 지위, 명예... 그것을 얻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 역시 '돈'이다. 경제활동에 오직 소비자로 참여할 뿐인 1인으로서는 참 민망한 상황인 것이다. 루만의 표현처럼 한 체계에서 배제되면 다른 체계에서도 쉽게 배제된다. Exklusion의 상승효과라고 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