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 (1872~1970)이 쓴 에세이 중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있다 (그것과 다른 에세이를 모아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이름으로 나온 책도 있다.) 그 에세이를 읽진 않았지만 출판사 서평 중 일부만 봐도 대략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러셀의 저작 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 책에서 러셀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오히려 여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러셀의 역설적인 주장이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이야기가 ‘우리의 어제’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말해 주기 때문이며 정신없이 지나치는 일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철학자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흔히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지라’는 처방을 내린다. 러셀은 현대의 기술 문명이 모두가 편안하고 안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는데도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현대인은 ‘과잉’노동과 ‘과잉’생산을 하고 있고, 과로와 굶주림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과거에 소수 특권층에게만 부여되었던 ‘게으름의 기회’가 구성원 모두에게 제공되고 개인들이 ‘근로의 미덕이 최고’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누구나 자유롭게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활동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김연아의 연기와 금메달 소식, 그리고 이어진 '연아 찬양 퍼레이드'를 보면서 난 러셀의 이 에세이를 기억해 냈다 (작가들이 '제목'을 다는 일에 공을 충분히 들일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 아닌가^^ 그 밖에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제목으로 박완서의 '나는 왜 작은 일에 분개하는가'를 꼽을 수 있다).
스케이팅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몸, 동작, 얼음, 감정, 음악 등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 그에게 감사한다.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하고 어려움을 극복해서 어떤 분야에서 정점에 이른 사람들은 우선 그 사실만으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허나... 그 이후 이어지는 일방적인 찬사가 귀에 거슬리는 것. (어쩌면 세상 일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7살에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해서 14년 동안 올인하다시피해서 결국 세계 정상에 섰으니 성공한 인생인가?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그 과정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건 인지상정이고, 더군다나 우리 한국사람들은 그 같은 성공신화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가...
수 년 전에, 아마 캐나다로 훈련지를 옮길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인터뷰에서 스케이트 타는 일이 그리 즐겁지 않다고 그가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오늘 본 티비 대담에서도 어린 시절 늘 엄마가 함께 해서 스케이트 타는 또래들과 제대로 얘기를 나눌 수조차 없어서 안타까웠다는 얘길 '스치듯' 했다. 물론 지금 분위기에서 그런 얘긴 부각되어서는 안된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 모녀의 '석세스 스토리'에선 말이다.
통속적으로 인정되는 성공의 기준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대개 '독한' 사람들이 성공한다. 아니, '스토리'는 늘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우리 황우석 형님이 "월화수목금금금"이란 복음을 설파하셨을 때 그 말씀은 온 중생에게 큰 감동이지 않았던가... 시간, 장소, 대상, 맥락만 다를 뿐, 사실 '황우석'과 '김연아'는 그 "내러티브"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일 권하는 사회... 놀고, 쉬는 걸 무척 불안해하는 시대. "노는만큼 성공한다"(김정운) 같은 책이 많이 팔리긴 했지만 그가 던지는 메세지는 여전히 불온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21세기에 불온한 사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놀자주의' 아닐까. "노는만큼 성공한다"는 얘기나 "게으름 찬양" 말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데는 남북이나 자본주의/공산주의 진영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우리 윗동네 사람들의 새벽별 보기 운동이나, 생산력 높이기에 재미를 붙였던 소비에트 등등.
여전히 휴가일수를 줄이거나, 아침 회의 시간을 당기는 부지런한 지도자들, 많은 것을 포기하고서도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을 찬양하는 한... 일중독 만큼은 관대하게 보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남에게서 빌려온 자본주의 정신을 지구 그 어디에서보다 더 철저하게 구현해내는 한민족!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 혹은 일본 제국주의자들 눈에 그토록 게을러 보였다는 우리 조상님들. 그 게으름 탓에 외세의 손에 놀아났고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는 처절한 인식 때문인지, 아직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더 놀자거나 게으르자, 혹은 느리게 살자 같은 얘기가 큰 공감을 얻기란 아직 힘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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