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7일 목요일

벌써 한달이 지났다. 2011년 달력을 새로 걸고, 의미있게 살아보리라 새롭게 마음도 고쳐먹었지만, 벌써 한달이 지난 거다. 말도 안 된다. 깊은 한숨까지 나온다. 정말 시간이 미쳤다.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자꾸 빨리 가는 걸까? 심리학자들의 대답은 아주 단순명료하다. 기억할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 많으면, 그 시기가 길게 느껴지고, 전혀 기억할 게 없으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다. ‘회상효과’(Reminiscent Effect)다. 인생에서 어느 시절의 기억이 가장 뚜렷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학창시절을 언급한다. 노인들도 학창시절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가슴 설레는 기억이 많은 그 시절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모두가 새로운 경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시기부터 시간은 아주 미친 듯 날아가기 시작한다
.

내가 하고 싶은 얘길 그대로 대신 해 준 이는 명지대 김정운 교수. 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이라는 재미있는 직함도 갖고 있는...

시간이 빨리 지난다고 느낄수록 긴장해야 한다. 의미부여가 안 되니 쉽게 좌절하고, 자주 우울해지고, 사소한 일에 서운해진다. 이런 식이라면 ‘성격 고약한 노인네’가 되는 것은 아주 순식간이다.

아...

삶의 속도와 기억의 관계에 관한 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이 ‘미친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기억할 일들을 자꾸 만들면 된다. 평소에 빤하게 하던 반복되는 일들과는 다른 것들을 시도하라는 이야기다. 인생과 우주 전반에 관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계획은 아무 도움 안 된다.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들을 시도해야 한다.

글쎄... 난 뭘 할 수 있을까? 뭐가 되었건 지금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야 시도해 볼 수 있다. 아... 느느니 한숨이요... ㅠㅠ

2011년 1월 25일 화요일

타란티노 감독은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요즘 '재미를 위해서 한다' 혹은 '즐기면서 하라'는 얘길 자주 듣는다. 며칠 전 조광래 감독도 인터뷰에서 그런 얘기를 반복하더만... 결과나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즐기라는 얘기다. 허정무 감독도 그런 얘기를 여러 번 하긴 했지만 막상 그리 즐길만한 경기를 보여주진 못했다 (아마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
그런데 조광래 감독은 참 '난 사람'인 것 같다. 이란 전 직후 인터뷰에서 그 양반, 보통 '국민'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자리에 '팬'이란 표현을 썼다는 것 아닌가. '국민의 성원에 감사' 운운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의도한 바였든 평소 생각, 소신이 반영된 표현이었든 간에 참 신선했다. 반면에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젊디 젊은 아나운서 입에서는 '태극전사' 소리가 떠나질 않는다. 어제는 '한일전은 전쟁'이라는 한 젊은 선수의 발언까지... 과연 조광래 감독은 오늘 한일전 이후 인터뷰에서도 '국민' 대신 '팬'이라고 부를 것인가. 내겐 사뭇 중요한 관전포인트다.
아.... 원래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지금 해야 하는 일들을 즐기는 마음으로 하자는 다짐이었다. '즐기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좀 넓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시를 쓰는 경우! 써야겠다고 마음 먹어서 나오는 게 아니라 뭔가 하고 싶은 말이 흘러 넘치는데 그걸 산문이라는 그릇으로 담을 수가 없어서 시라는 형식을 택하는 뭐 그런 것 말이다. 비록 어쩔 수 없이 '논문'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중요하고 재미도 있는데 남이 하지 않는 얘기, 결국 내가 듣고 싶은 그런 얘기를 해 보자는 말이다.

ps) 역시 즐기는 일도 잘 될 때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얘기다 (물론 '즐김'을 얘기하는 경우 잘된 '결과'보다는 잘된 '과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 어젠 선수들도 감독도 '팬'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경기였다. 게다가 결과까지... 그래서 조광래 감독의 경기 후 인터뷰는 차마 볼 수 없었다. '일본전은 전쟁'이라고 했던 그 젊은 친구는 골을 넣은 후 '원숭이 세레모니'를 펼쳤다. 전혀 재미있지도, 웃기지도, 시원하지도 않았다. 오늘 기사에서 확인한 바로는 가장 어린 친구는 "일본전에선 반드시 이기고 싶었는데..."라면서 펑펑 울었다고도 한다 (분명히 그 선수의 심리상태는 훨씬 더 복잡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에서 그런 식으로 해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많은 걸 얘기한다). 반면에 "일본이 강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제목을 단 기사가 '버젓이' 올라와 있고, 심지어 '원숭이 세레모니'를 비판하는 기사도 여럿 있었다. 그래. 그렇게 조금씩 변하는 거야.

이태리 부인의 사랑: 너무 친절하거나, 아니면 촌스럽거나 [아이 엠 러브 I am love (2009, Luca Guadagnino)]


거의 1년 만인가? 모처럼 영화 볼 기회를 얻었다 (이 표현에 유의하시길!ㅋ). 취향이 다른 탓에 몇몇 영화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I am love'로 합의를 보다. 이동진 씨의 극찬에다 좋은 평들이 많이 있어서 내심 기대를 하게 되었다. 상영하는 곳도 많이 없어서 광화문에까지 진출해야 했지만, 마침(!) 꽤 많은 눈이 내려서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풍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서 나쁘진 않았다. 소감은 한 마디로 '실망'. 흠... 취향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이동진 씨가 그 정도로 찬사를 날릴 작품은 정녕코 아니었다. 느낌, 분위기,'급'도 딱 '하녀' 정도 되는 작품. 너무 도식적이랄까, 주제의식이 너무 선명하달까?
이태리 명문 기업가 가문으로 시집 온 러시아 여인. 각종 파티, 모임을 세련되게 치뤄내며 잘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던 이 여인. 아들 친구인 요리사의 요리를 통해서 억눌렸던 자아를 발산하고 그로 인한 죽음, 갈등.. 그더가 갑자기 '엔딩'. 한편에 속물 같은 인물들, 다른 한편엔 원초적 감성을 자극하는 인물.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의 주인공'. 너무 신파적이지 않은가? (제대로 읽거나 보진 않았지만) 하인과 사랑에 빠지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나 '변강쇠'류에 등장하는 '마님 이야기'를 좀 고급스럽게 포장한 정도라고 얘기해도 좋을듯. 오랜 전통을 지닌 직물기업을 금융회사로 바꾸는 그런 설정도 너무 직설적이고, 그 와중에 등장하는 그 인도계 미국인 (미국 인디언이 아닌... 이 대화 장면에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었다)의 발언은 - 세계화 운운하는... - 무슨 우파 신문 사설 제목을 읽는 것 같았으니... '마님'과 요리사가 야외에서 원초적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햇볕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고, 그 '사랑' 장면과 교차되며 화면을 덮는 각종 풀과 곤충들은 또 얼마나 푸르던지... '하인'역 요리사는 시커먼 구렛나루를 하고 있고, 그 요리사는 우리 '마님'의 긴 머리를 햇볕 아래에서 시원하게 잘라낸다. 이런 직설적 메시지 투성이다. 물론 '이태리 장인' 솜씨가 어느 정도는 발휘가 되어서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는 아니었으나, 설정 자체는 무지막지하게 촌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부인' 씨리즈를 연상시키는 설정. 그리하여 난 이 영화 한국어 제목을 '이태리 부인의 사랑'이라고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그처럼 밝고 푸른 산 속의 풍광은 밀라노의 우충충함과 어찌나 노골적으로 대조가 되던지.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연되었다고 한다. 그 일로 한국을 방문했던 감독 인터뷰를 보니 '임권택' 감독을 존경하다던데 역시 그 영향인지 우리의 이태리 '마님', 밀라노 주요 관광명소에 꼭 들러주는 센스를 발휘하시고, 그 요리사가 산다는 밀라노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의 풍광을 그냥 대놓고 자랑하더만 (이태리 관광공사 협찬을 받았나..ㅋㅋ). 복합적이고, 층이 겹겹이 쌓인 영화를 좋아하는 터라 이런 도식적인 설정에다 노골적 주제 표출 방식은 매우 촌스럽게 보였다. 심지어 제목이 'I am love'다. 감독이 지나치게 친절한 편이거나, 아님 대놓고 촌스럽기도 작정했거나...
틸다 스윈튼 (Tilda Swinton)의 연기는 '물론' 기본 이상은 되지만, 시종일관 우울하고 진지해서 오히려 깊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평면적이다. 주제가 무거울 때 가볍게 풀어내거나 적어도 그런 장치들이 몇 군데 있어야 할텐데... 그런 면에선 별로 친절하지 않은 영화!
이동진 씨는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무조건' 이 배우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썼던데, 글쎄 지명도와 51세라는 나이를 무릎쓰고 과감한 노출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감투상' 정도를 줄 순 있겠지만 '여우주연상'이라... 물론 '작품상' 보다는 '여우주연상'에 더 가까운 영화라고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ps 1) 흥미로운 설정은 음식이 억눌려 있던 사랑, 욕망을 깨우는 '각성제' 혹은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매체'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식사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같은 음식이라도 얼마나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지.... '음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가 여럿 있다. '카모메 식당', '음식남녀', '처녀들의 저녁식사' 등등. 하지만 사랑의 매체, 본능을 깨우는 음식... 이런 설정은 글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오히려 '혀'라는 소설 '얘기'가 생각났다 (표절 논란이 있었던...). 먹는 혀, 사랑하는 혀...등등. '혀'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했다던...

ps 2) 국내에선 평이 칭찬 일색인 것 같은데 영어 리뷰를 찾아보니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다른 시각도 있어서 반가웠다. 이 영화가 평론가들에게 매력적일 법하긴 하다. 일반 관객들이라면 쉽게 알아채지 못할 장치들이 있어서 간만에 전문가다운 식견을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영화니까.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건 영화감상평 '시장'이 한 쪽으로만 치우쳤다는 점. 찬양 일색... 원래 한 쪽으로만 쏠리면 중심을 잡으려는 반발력이 발동하는 법 아니던가.

2011년 1월 16일 일요일

(1) 결국 융합, 통섭 2부를 쓰지 못하고 모임에 참석했다. 꽤 유익한 시간이었다. 여러 분야, 여러 세대 '전문가'들이 모이는 독특한 '포럼'. 교수, 예술가, 출판인, 변호사, CEO에 대학원생까지... 벗뜨... 너무 오래걸렸다. 셈에 밝은 사람이라면 - 전형적인 독일인들처럼... - 도저히 견뎌내지 못했을 정도로 얻은 것에 비해서 긴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어쩌랴. 그 모임 취지가 그런 계산을 하지 말자는 것인데... 이것 자체가 일종의 한국식 융합, 통섭 실험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사실 그날 모임의 커뮤니케이션 상황, 내용 자체가 한국의 현실의 어떤 측면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한 살아있는 재료였다.
(2) 어제 오늘 참 추웠다. 창문 사이에 낀 습기가 얼어 붙을 정도로. 재미있는 건 한반도의 이런 추위는 북극이 따뜻해졌기 때문이란다. 북극 온난화, 제트기류의 약화 등으로 북극 한기가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말씀. 사실 정확하게 그런 내용이 'the day after tomorrow'란 영화의 배경이었다. 온난화가 역설적으로 빙하기로 이어진다는... 그러니 예사롭게 볼 날씨가 아니다.
(3) 그도안 여기 저기 다니며 '교회 shopping' 중이었는데 마침내 찾은 것 같다 [아니,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듯]. 평범한, 그러니까 전형적인 한국 교회를 피하려고 하다보니 오래 걸린 셈이다. 부부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도 했고. 결국 내 관점에서 보면 전형성을 피하는 여러 가능성 중에서 내가 지향하던 극에서 정반대쪽 극으로 옮긴 셈이 되었다. 내 속에 두 극단을 지향하는 마음이 있는데 내가 세우지 않는한 그 둘을 지향하는 교회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포기를 하거나 타협을 해야하는데 과연 어떻게 될지...
(4) '시크릿 가든'이 끝났다. 중반 이후부터 보기 시작해서 지난 주에 내 관심도는 정점에 다다랐다. 그래서 남은 2회를 과연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는데 결론적으로 95% 실망, 5% 여운. 특히 오늘 일사천리 해피엔딩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기가 안타까울 정도였는데 - 시청자들의 과도한 개입 탓이라 여기며... - 마지막 장면 때문에 5점이라도 줄 수 있었다. 모든 게 '꿈'임을 암시하는 그 장면... 마지막 회는 해피엔딩을 원하는 시청자들에 대한 서비스였을텐데 그 자체로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 정도 수준이면 거의 공동제작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 참 열악하다.

p.s.) 영화 'the day after tomorrow'에서 그린 온난화 -> 빙하기 가설에 대한 '전문적' 해설 2종을 옮겨 놓는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과연 지구온난화가 새로운 빙하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영화의 기본 전제가 과학적으로 얼마나 신빙성있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부터 먼저 갖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빙하가 녹아 해수의 염도가 떨어짐으로써 밀도가 낮아진 물이 가라앉지 않게 돼 멕시코 만류(Gulf Stream)의 대순환이 중단되고 이로써 북반구의 기후 변화가 유발될 수 있다는 대전제는 이미 관련 연구들에 의해 뒷받침된 '훌륭한 과학'이다.(주3) 좀더 구체적으로는 현재로부터 13,000년 전쯤에 우리가 살고 있는 간빙기의 진전을 일시적으로 가로막았던 소빙하기인 영거 드라이아스(Younger Dryas)기가 이런 이유 때문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흔히 추측되고 있다.(주4) 그러나 그와 같은 북반구의 급격한 기후 변화가 지금 당장 시작될 수도 있고, 그것도 불과 6주만에 진행될 수 있다는 영화의 설정은 얼토당토않은 것이다(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아무리 '급격한' 기후 변화라 해도 진행되는 과정이 수십 년은 걸린다). 2004년 2월에 미 국방성의 연구자 두 명이 영화와 상당히 유사한 상황이 앞으로 15년 이내에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내놓았지만, 이들의 견해는 실현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문외한의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주5) (...)
반면 이 영화에 비판적인 과학자들은 <투모로우>에서 국지적 기상이변(폭설, 우박, 토네이도, 해일)과 지구온난화를 연결지어 묘사한 것은 전지구적 경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재의 지구온난화 모델을 잘못 이해한 소치이며, 이는 사람들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진짜 문제들(흉작에 따른 기아사태, 열대성 질병의 창궐,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안지대 침수)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만들어냄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더욱 꼬이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일간지의 과학전문 기자는 헐리웃 영화들의 과학 왜곡 실상에 분통을 터뜨리면서, "만약 헐리웃에서 당신네 실험실에 전화를 걸어오면 그대로 끊어버리라"고 일갈하기도 했다.(주7)

3. Kris Wilson, "Movie Review: The Day after Tomorrow," Science Communication, 26:2(2004), 227-229.
4. 김경렬, 「바다를 알면 기후가 보인다」, ≪주간동아≫ 441호(2004년 7월 1일자), 66-67.
5. Fred Pearce, "Scientists stirred to ridicule ice age claims," NewScientist.com news service (15 April 2004)
6. Stefan Rahmstorf, "Hooray for Hollywood," New Scientist, No. 2449 (29 May 2004): 18; J. Justin Gooding and Katharina Gaus, "Yet even flawed films raise interest in research," Nature, 431 (16 Sepember 2004): 244.
7. Kris Wilson, "Movie Review: The Day after Tomorrow," Science Communication, 26:2(2004), 227-229; Keay Davidson, "It's the science that's disaster in the movies," Nature, 431 (16 Sepember 2004): 244.


지구는 빙하기와 간빙기를 주기적으로 변화하여 왔다. 그런데 그 중간에 작은 미니 빙하기가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이다. 즉 지구의 기후 현상은 태양으로부터 전달되는 열의 양이 가장 중요하나, 그 밖에 혜성의 충돌, 화산이나, 해류의 영향도 받는다. (...)
최근 다시 조명을 받고 있는 중요한 것은 해류의 영향이다. 지구는 적도부근이 햇볓을 더 받고 그 열이 난류의 순환으로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전하여 진다. 그런데, 난류의 흐름은 위도가 높은 지역의 차가운 물이 무거워서 바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적도로 내려오는 한류의 순환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도가 높은 지역에 담수의 유입으로 염도가 낮아지면 물의 무게가 가벼워져서 적도로 내려가는 한류가 끊어지면서 적도에서 올라오는 난류의 순환도 같이 무녀져서 위도가 높은 지역이 소빙하기를 겪는다는 것이다. (...)
“영거 드라이아스” 현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 2004년에 나온 “투머로우(The day after tomorrow)”라는 영화였다. 2010년 들어와서 북반구 지역의 이상저온 현상으로 위 영화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조그만 늦게 나왔으면 허구를 묘사한 영화가 아니라 실제 상황을 찍은 다큐멘터리가 될 뻔 하였다는 반농담의 의견도 나오고 있다
.

하지만 지난 해와 올 해 추위는 해류의 영향이 아닌 북극 진동의 변화로 한기를 막아주던 제트 기류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모양이다. 북극 진동에 변화를 가져온 원인으로 해류를 언급하고 있긴 하다.

"이 모든 맹추위 원인이 북극 진동의 약화 때문이라는 게 기상청의 설명이다. 이로 인해 북극의 찬 공기가 북극에 머물지 않고 남하하고 제트기류까지 한반도 아래까지 밀려났다는 것이다. 편서풍인 북반구의 제트기류는 찬 공기의 남하를 막는 장벽. 평년이라면 이 시기 만주 쪽에 있어야 하는 데 제주도 남쪽까지 밀려나 있다고 한다.기상청 정준석 기후예측과장은 "최근 북극의 기온이 평년보다 10~15도 이상 높아지는 이상고온 현상으로 북극진동이 크게 약화했다"면서 "이 바람에 찬 공기를 막아주던 제트기류 곳곳이 끊어져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북극의 이상고온과 북극진동의 약화 원인으로 지구온난화나 동태평양 수온이 평소보다 낮아져 생기는 라니냐 현상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게 기상청의 설명이다. 지난해 초 북반구를 강타했던 폭설과 한파도 북극 진동의 약화가 원인으로 지목됐고 당시에는 동태평양 수온이 높아진 엘니뇨 현상이 일어났다.여기에다 몽골 전역이 눈에 뒤덮인 것도 올 겨울 한파의 주요인. 폭설을 맞은 몽골의 대평원이 햇빛을 반사해 찬 시베리아 고기압을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기상청 진기범 예보국장은 "평년 영하 20도를 기록했던 몽골 서부지역이 최근 영하 40도까지 떨어질 정도로 시베리아 고기압 세력이 매우 발달했다"며 "우리나라는 이 고기압에 직접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북극진동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북극 진동은 나비 효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1951년에 처음 알아낸 자연 현상이다. 북극 지역과 아열대 지역의 해수면 대기압의 계절에 따른 변화가 통계적으로 독특한 특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두 지역 안에서는 해수면 대기압의 변화가 대체로 같은 경향을 보이지만, 두 지역 사이에는 상반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래서 북극 지역의 대기압이 낮아지면 아열대 지역의 대기압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기상학자들이 해수면 대기압의 그런 상대적 변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8년 무렵부터였다. 두 지역의 상대적 대기압의 차이에 `북극 진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북극 진동이 북반부의 겨울 날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북극의 대기압이 낮을 경우에는 북극 지역 성층권의 공기는 매우 차가워진다. 그러나 중위도 지역을 순환하는 편서풍이 강화되어 북극의 차가운 공기가 남쪽으로 내려오기 어려운 상황이 되기 쉬워서 겨울이 대체로 온난하다. 반대로 북극의 대기압이 높아질 경우에는 북극 지역 성층권의 공기는 대기압이 낮을 경우보다 덜 차가워지지만 중위도 지역의 편서풍이 약화되기 때문에 북극 지역의 차가운 공기가 남쪽으로 쉽게 밀려내려 올 수 있게 된다.
"

2011년 1월 13일 목요일

융합, 통섭

학계, 경제계, 예술계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과 융합, 통섭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다 (어쩌면 발표 형식으로...). 그 자리에서 하고 싶은 얘기 요지를 한 번 적어본다.
융합, 통섭 얘기를 많이 하는데 - 심지어 실체는 없어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심광현) - 그 개념의 족보와 근본을 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융합'은 미국, EU 등에서 기술정책 차원에서 'converging technologies'의 중요성을 언급하던 얘기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런 식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것 같다. '수렴 기술' 혹은 '통합 기술' 정도 되는 개념이다. 융합 개념 사용의 또 다른 계기는 '디지털 컨버저스'다. 방송과 통신이 수렴, 통합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표현인데 그것을 디지털 '융합'으로 이해한 것. 이 경우는 수렴 현상이 실제로 두 요소의 '융합'을 가져오기 때문에 '융합'이라는 표현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통섭'(統攝)은 미국 생물학자 Edward Wilson의 저서 Consilience를 번역하면서 역자 최재천 교수가 원효 사상에서 가져다 쓴 말이다 (큰 줄기를 잡다는 뜻). Wilson은 생물학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학문을 제창하는데, '통섭' 개념을 쓰는 사람들은 그저 '학문간의 소통' 정도로 이해하고 쓰는 것 같다. 사실 그런 뜻이라면 이전부터 쓰던 '학제간 연구'와 다르지 않은데도 아마 새롭게 들려서 선호하는 모양이다. 더군다나 '융합'과 만나면서 '통섭'은 더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융합' '통섭'은 원래 맥락과는 다르게 해석되면서 유행을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다.
융합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 학문/과학/기술/대학과 경제, 예술 등 사회와의 융합이다. 상아탑적 과학이 아닌 사회적 가치를 적극저극으로 수용하는 학문 활동.
기술 수렴, 학제간 연구, 학문과 사회의 관계가 밀접해지는 것. 이 모두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80년대 이후 계속 관찰되던 현상이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에서 '융합' '통섭' 같은 새로운 '개념'을 중심으로 그런 논의가 새로운 것처럼 등장하고 있을까?
(to be continued)

2011년 1월 11일 화요일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되지요"

담장 수리 (Mending Wall)

뭔지 담을 좋아하지 않는 게 있어,
그게 담 밑의 언 땅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담 위의 돌들을 밖으로 굴러내리게 하지요.
그래서 두 사람이 넉넉히 지나다닐 수 있는 틈을 만들거든요.
사냥꾼들이 하는 짓은 또 다른 문제예요.
그들이 담을 다 망가뜨리고 지나간 뒤
나는 그걸 수리한 일이 있지만
허나 그들은 토끼를 몰아
짖어대는 개들을 즐겁게 해주거든요.
내가 지금 말하는 틈은
누가 그랬든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는데
봄에 수리하다 보면 그렇게 돼 있단 말예요.
나는 언덕너머 사는 이웃집에 알리고,
날을 받아 만나서 두 집 경계선을 걸으며
두 집 사이에 다시 담을 쌓아 올리죠.
우리는 우리 사이에 담을 유지해요.
담 양쪽에 떨어진 돌들을 서로가 주워 올려야 하구요.
어떤 돌은 모가 나서 넓적하고 어떤 건 거의 공 같아서
우리는 그것들을 올려놓으며 주문을 다 외어야 해요.
“우리가 돌아설 때까지 제발 떨어지지 말아다오!”
돌을 만지느라고 손이 거칠어집니다.
뭐 그저 양쪽에 한 사람씩 서서 하는
좀 색다른 야외 놀이지요. 좀더 갑니다.
그러면 담이 소용없는 곳이 나오지요.
저쪽은 전부 소나무고 이쪽은 사과나무예요.
내 사과나무가 경계선을 넘어가
떨어진 솔방울을 먹지는 않겠지요, 하고 그에게 말합니다.
그는 단지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되지요”라고 말할 뿐이예요.
봄은 나에게는 재난의 계절, 그래서 나는 혹시
그를 깨우쳐 줄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지요.
“왜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들죠? 소를
기르는 곳에서나 그렇지 않나요? 여기는 소도 없는데요 뭐.
담을 쌓기 전에 알고 싶어요.
내가 도대체 담으로 무엇을 막으며
누구를 해롭게 하고 싶어 하느냐에 대해서 말이죠.
뭔가 담을 싫어하는 게 있어서
그게 담을 무너뜨리고 싶어합니다.”
나는 그에게 “요정이예요”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게 꼭 요정인지도 알 수 없고, 그래서 나는
그가 스스로 알게 되기를 바라지요.
나는 그가 구석기시대의 야만인처럼
양쪽 손에 돌을 잔뜩 거머쥐고 옮기는 걸 봅니다.
내가 보기엔 그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데요,
숲이나 나무 그늘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되풀이 합니다.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되지요.”

(세계시인선 4 로버트 프로스트 시선 <불과 얼음>에서/ 번역 정현종 시인)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되지요(Good fences make good neighbours)”라는 말은 화자 (시인, 프로스트?)가 아니라 그 이웃 남자가 하고 있다. 시인은 그가 쌓는 것은 울타리(fence)가 아니라 벽(wall)이라고 보는 모양이다. 그래서 제목이 ‘담장 수리(Mending Wall)! (이런 설명은 여기에서 빌어옴). 사실 난 이런 배경 이야기가 아니라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된다는 얘기를 '액면가' 그대로 하고 싶었다. 담 혹은 경계, 그리고 그 담과 경계가 만들어 내는 '거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선 울타리를 세워서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행동은 자기 보호 본능 욕구의 소산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있던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이 타면 두 사람은 거의 자동적으로 다른 구석 쪽으로 이동한다. 그런 물리적 거리는 물론이고 심리적 거리는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이다. 특히, 연예에 있어서... 그 유명한 '밀고 당기기'! 결혼이 연애의 무덤이라는 얘기는 결혼과 더불어 이 거리조절을 노력을 더 이상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한다. 어느 정도 밀고 당기기는 결혼 이후에도 필요하다. 심리적 거리 조절은 남녀 친밀한 관계 뿐 아니라 모든 유형의 인간 관계 유지에서 중요하다(고 난 말하고 싶다.)
얼마 전까지 아주 무릎을 치면서 읽은 헨리 나우웬의 책 '영적 발돋움'(Reaching Out)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살아가면서 종종 나는 친구와 함께 있을 때보다 함께 있지 않을 때 그 친구와 더 가깝게 느껴졌던 이상야릇한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 잠깐 동안 떨어져 있음으로 생긴 거리감 덕분에 나는 그들의 품성 너머에 있는 것을 보게 되고 ...
칼릴 지브란은... '친구와 헤어질 때 슬퍼하지 말라. 그 친구의 가장 맘에 드는 점은 그 친구가 없을 때 더 분명하게 나타나, 마치 산을 오르는 이에게는 밑에서 볼 때 산이 더 분명하게 보이는 것과 같으리'.."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얘기에도 분명 수긍할 수 있지만 눈에서 가깝다고 반드시 마음이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눈과 마음의 거리는 비례하지도 반비례하지도 않는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밀고 당기고...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살아 가야 하는 것 같다. 적당한 거리와 긴장감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위선적이라거나 가면을 쓰는 행위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위선적이지 않기 위해서 지금 느끼는 감정, 생각을 모두 쏟아 내는 것 만큼 무책임한 행동도 없다. 지나치게 솔직한 태도와 위선적(위악적)인 태도의 뿌리는 같다.
거리와 긴장감 유지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 늘 신중하기만 한 태도와도 구분된다. 거리가 늘 같으면 긴장감이 유지되질 않는다. 그래서 '밀고 당기기'다.
어떤 면에서 건강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나 자신, 내 내면과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하지만 지지나치지 않도록 말이다. 자신을 타자로서 관찰할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귀국 후 학문 간 혹은 기술 간 융합하고 통섭해야 한다는 얘길 자주 듣고 보게 되었다. '통섭'은 E. 윌슨 책을 번역하면서 최재천 교수가 만들어 낸 (혹은 '원효'에게서 가져다 쓴) 단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융합은? 좀 찾아 보니 convergence 번역어로 '융합'을 쓰고 있었던 것. 융합이라면 fusion을 생각하게 되지만... 흑. 반전! converging technologies 나 결국 '통섭'이 주장하는 transdisciplinarity 는 전혀 새로운 논의가 아니잖은가? 전형적인 낡은 포도주 새 부대에 담기다. 좀 새로운 현상이라면 digital convergence인데 그런 새로운 내용에 편승해서 옛 이야기들을 버무려서 마구잡이로 내 놓는 모양이다 ("이정모 [2010]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본 학문의 융합"를 참고할 것). 관련된 논의를 좀 찾아보니 그야말로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심지어 '융합 사회'라는 표현을 쓰는 사회학자도 있었다. '인종용광로'를 연상시키는... 유행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학자들의 부화뇌동도 그 정도가 꽤 심하다.

거리 얘기하다가 통섭, 융합 얘길 꺼내는 이유는... 학문 간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학문 간의 담을 너무 높이 세워서 자기만 알 수 있는 얘길 하면서 제 밥그릇 챙기기 급급한 태도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라, 서로 들여다 보고 가끔씩 만나서 커피도 함께 마실 수 있는 정도로 적당한 높이, 적당한 거리를 갖는 게 오히려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동의 관심사나 문제가 있으면 함께 며칠간 여행을 떠날 수는 있겠지만 담을 허물어서 두 집 살림을 합친다?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아, 그렇다고 한 번 세운 담이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러면 긴장감이 떨어진다. 이사도 가고, 분가했다, 합치고 그러는 것처럼 학문의 경계, 담은 늘 변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근에 그 변화가 더 강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도 없이 이 살림 저 살림 합치고, 그 대상이 되지도 못하는 집들은 배제키시는 - 왜? 돈이 안되니까... - 그런 융합, 통섭, 통합, 수렴 논의는 사양하는 게 옳다는 얘기다. 최적의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으려면 적절한 거리와 긴장감이 필요하지만 도대체 '최적'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지, 그런 해석의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2011년 1월 2일 일요일

19xx가 아닌 "2"로 시작되는 해가 낯설더니 벌써 열한번째 아니 열두번째다. 한 동안 0이 많아서 가벼운 느낌이었는데 2011이되니 이제 0도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의 무게감이 확 늘어났다.
독일의 그 왁자지껄한 연말 분위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다. 시국이 하수상해서일까 아님 '설날'을 기다려서 발산하려고 참고 있는 중일까...
새해를 맞아서 집앞 동산에라도 올라가 볼 생각을 했었는데 바깥 공기가 워낙 차서 포기했다. 대신 '방콕'하면서 '푸-욱-' 쉬었다. 어짜피 내일부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테니...
올해는 긴 '은둔 생활'을 청산하고 '세상 밖으로' 나서는 기점이 될 것이다. '전략'수정이다. '재야생활'에서 해야 할 노력 다 했으니 남은 숙제는 이제 바깥 활동을 서서히 늘려가면서 마저 해결할 생각이다. 위험부담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결정은 없다. 심지어 결정을 미루는 결정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