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1일 화요일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되지요"

담장 수리 (Mending Wall)

뭔지 담을 좋아하지 않는 게 있어,
그게 담 밑의 언 땅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담 위의 돌들을 밖으로 굴러내리게 하지요.
그래서 두 사람이 넉넉히 지나다닐 수 있는 틈을 만들거든요.
사냥꾼들이 하는 짓은 또 다른 문제예요.
그들이 담을 다 망가뜨리고 지나간 뒤
나는 그걸 수리한 일이 있지만
허나 그들은 토끼를 몰아
짖어대는 개들을 즐겁게 해주거든요.
내가 지금 말하는 틈은
누가 그랬든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는데
봄에 수리하다 보면 그렇게 돼 있단 말예요.
나는 언덕너머 사는 이웃집에 알리고,
날을 받아 만나서 두 집 경계선을 걸으며
두 집 사이에 다시 담을 쌓아 올리죠.
우리는 우리 사이에 담을 유지해요.
담 양쪽에 떨어진 돌들을 서로가 주워 올려야 하구요.
어떤 돌은 모가 나서 넓적하고 어떤 건 거의 공 같아서
우리는 그것들을 올려놓으며 주문을 다 외어야 해요.
“우리가 돌아설 때까지 제발 떨어지지 말아다오!”
돌을 만지느라고 손이 거칠어집니다.
뭐 그저 양쪽에 한 사람씩 서서 하는
좀 색다른 야외 놀이지요. 좀더 갑니다.
그러면 담이 소용없는 곳이 나오지요.
저쪽은 전부 소나무고 이쪽은 사과나무예요.
내 사과나무가 경계선을 넘어가
떨어진 솔방울을 먹지는 않겠지요, 하고 그에게 말합니다.
그는 단지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되지요”라고 말할 뿐이예요.
봄은 나에게는 재난의 계절, 그래서 나는 혹시
그를 깨우쳐 줄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지요.
“왜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들죠? 소를
기르는 곳에서나 그렇지 않나요? 여기는 소도 없는데요 뭐.
담을 쌓기 전에 알고 싶어요.
내가 도대체 담으로 무엇을 막으며
누구를 해롭게 하고 싶어 하느냐에 대해서 말이죠.
뭔가 담을 싫어하는 게 있어서
그게 담을 무너뜨리고 싶어합니다.”
나는 그에게 “요정이예요”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게 꼭 요정인지도 알 수 없고, 그래서 나는
그가 스스로 알게 되기를 바라지요.
나는 그가 구석기시대의 야만인처럼
양쪽 손에 돌을 잔뜩 거머쥐고 옮기는 걸 봅니다.
내가 보기엔 그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데요,
숲이나 나무 그늘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되풀이 합니다.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되지요.”

(세계시인선 4 로버트 프로스트 시선 <불과 얼음>에서/ 번역 정현종 시인)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되지요(Good fences make good neighbours)”라는 말은 화자 (시인, 프로스트?)가 아니라 그 이웃 남자가 하고 있다. 시인은 그가 쌓는 것은 울타리(fence)가 아니라 벽(wall)이라고 보는 모양이다. 그래서 제목이 ‘담장 수리(Mending Wall)! (이런 설명은 여기에서 빌어옴). 사실 난 이런 배경 이야기가 아니라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된다는 얘기를 '액면가' 그대로 하고 싶었다. 담 혹은 경계, 그리고 그 담과 경계가 만들어 내는 '거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선 울타리를 세워서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행동은 자기 보호 본능 욕구의 소산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있던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이 타면 두 사람은 거의 자동적으로 다른 구석 쪽으로 이동한다. 그런 물리적 거리는 물론이고 심리적 거리는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이다. 특히, 연예에 있어서... 그 유명한 '밀고 당기기'! 결혼이 연애의 무덤이라는 얘기는 결혼과 더불어 이 거리조절을 노력을 더 이상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한다. 어느 정도 밀고 당기기는 결혼 이후에도 필요하다. 심리적 거리 조절은 남녀 친밀한 관계 뿐 아니라 모든 유형의 인간 관계 유지에서 중요하다(고 난 말하고 싶다.)
얼마 전까지 아주 무릎을 치면서 읽은 헨리 나우웬의 책 '영적 발돋움'(Reaching Out)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살아가면서 종종 나는 친구와 함께 있을 때보다 함께 있지 않을 때 그 친구와 더 가깝게 느껴졌던 이상야릇한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 잠깐 동안 떨어져 있음으로 생긴 거리감 덕분에 나는 그들의 품성 너머에 있는 것을 보게 되고 ...
칼릴 지브란은... '친구와 헤어질 때 슬퍼하지 말라. 그 친구의 가장 맘에 드는 점은 그 친구가 없을 때 더 분명하게 나타나, 마치 산을 오르는 이에게는 밑에서 볼 때 산이 더 분명하게 보이는 것과 같으리'.."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얘기에도 분명 수긍할 수 있지만 눈에서 가깝다고 반드시 마음이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눈과 마음의 거리는 비례하지도 반비례하지도 않는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밀고 당기고...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살아 가야 하는 것 같다. 적당한 거리와 긴장감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위선적이라거나 가면을 쓰는 행위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위선적이지 않기 위해서 지금 느끼는 감정, 생각을 모두 쏟아 내는 것 만큼 무책임한 행동도 없다. 지나치게 솔직한 태도와 위선적(위악적)인 태도의 뿌리는 같다.
거리와 긴장감 유지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 늘 신중하기만 한 태도와도 구분된다. 거리가 늘 같으면 긴장감이 유지되질 않는다. 그래서 '밀고 당기기'다.
어떤 면에서 건강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나 자신, 내 내면과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하지만 지지나치지 않도록 말이다. 자신을 타자로서 관찰할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귀국 후 학문 간 혹은 기술 간 융합하고 통섭해야 한다는 얘길 자주 듣고 보게 되었다. '통섭'은 E. 윌슨 책을 번역하면서 최재천 교수가 만들어 낸 (혹은 '원효'에게서 가져다 쓴) 단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융합은? 좀 찾아 보니 convergence 번역어로 '융합'을 쓰고 있었던 것. 융합이라면 fusion을 생각하게 되지만... 흑. 반전! converging technologies 나 결국 '통섭'이 주장하는 transdisciplinarity 는 전혀 새로운 논의가 아니잖은가? 전형적인 낡은 포도주 새 부대에 담기다. 좀 새로운 현상이라면 digital convergence인데 그런 새로운 내용에 편승해서 옛 이야기들을 버무려서 마구잡이로 내 놓는 모양이다 ("이정모 [2010]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본 학문의 융합"를 참고할 것). 관련된 논의를 좀 찾아보니 그야말로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심지어 '융합 사회'라는 표현을 쓰는 사회학자도 있었다. '인종용광로'를 연상시키는... 유행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학자들의 부화뇌동도 그 정도가 꽤 심하다.

거리 얘기하다가 통섭, 융합 얘길 꺼내는 이유는... 학문 간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학문 간의 담을 너무 높이 세워서 자기만 알 수 있는 얘길 하면서 제 밥그릇 챙기기 급급한 태도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라, 서로 들여다 보고 가끔씩 만나서 커피도 함께 마실 수 있는 정도로 적당한 높이, 적당한 거리를 갖는 게 오히려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동의 관심사나 문제가 있으면 함께 며칠간 여행을 떠날 수는 있겠지만 담을 허물어서 두 집 살림을 합친다?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아, 그렇다고 한 번 세운 담이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러면 긴장감이 떨어진다. 이사도 가고, 분가했다, 합치고 그러는 것처럼 학문의 경계, 담은 늘 변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근에 그 변화가 더 강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도 없이 이 살림 저 살림 합치고, 그 대상이 되지도 못하는 집들은 배제키시는 - 왜? 돈이 안되니까... - 그런 융합, 통섭, 통합, 수렴 논의는 사양하는 게 옳다는 얘기다. 최적의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으려면 적절한 거리와 긴장감이 필요하지만 도대체 '최적'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지, 그런 해석의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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