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31일 화요일

뭔가에 애정을 갖는 건 좋은 일이나, 왜 모든 빛나는 것엔 그림자가 생기는 법 아니던가... 애정의 그림자는 미움, 증오... 애정이 있는 곳에 미움이 없을 수가 없다. 愛憎! Liebe und Hass!
프로야구 문자 중계를 하는 곳에 달려 있는 게시판은 그런 애증의 감정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경기를 잘못 했을 때 그 팀에 배설되는 미움과 증오의 언어들... 그 팀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그런 악감정을 배설할 자격이라도 얻은 양...
조병화 시인의 유명한 경구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는 물론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서 나온 건 아니다. 하지만 적용해 봄직하다.
신앙의 대상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타인의 생명과 평화를 하찮게 여기는 근본주의자들.
한 팀 혹은 특정 연예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그 팀이나 연예인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 각양 각종 욕설을 배설하는 소위 '팬'들.
過猶不及!

아니 인간은 원래 몰두하고, 애정을 표출할 대상과 쌓아 둔 분노를 배설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현대사회에 그건 우연히도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팀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저런 통로들이 많이 막혀있지 않은가. 타인종, 타민족, 타국가를 드러내놓고 미워하거나 전쟁을 할 수도 없고 - 물론 그런 길을 택하는 경우가 있지만 문명국에선 대개 기피되는 방식이다. 미국을 제외하고선... 기타 등등...

2011년 5월 30일 월요일

타블로, 송지선, 옥주현...
데자뷰인지... 비슷해 보이는 현상이 시차를 두고 관찰된다.

- 한 줌밖에 안되는 '넷'찌질이들의 배설 행위: 악플, 사이트 개설...
- 그걸 증폭시켜가면서 변냄새 나는 기사를 양산해대는 찌라시 언론들...
- 결론: 넷찌질이들과 찌질 언론들의 공생관계!!

그렇게 밀려드는 정보 쓰나미에서 그 정보 소비자들은 대부분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을 골라서 들을 뿐이다. 아니. 양산되는 정보는 대개 그렇게 소비될만한 내용들이다. 결국 이 죽음을 부르기 까지 하는 정보, 뉴스, 담론의 싸이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언젠가 이 블로그에 감상을 기록해 두었던 영화 '킬 위드 미' (원제: Untraceable, 2008)가 생각난다. 익명성은... 대중심리, 군중심리는... 그렇게 무섭다. 인터넷 대중 파시즘...

김대중, 노무현을 뽑은 바로 그 대중이 이명박을 뽑았고 박정희를 그리워한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 지...

한국에서만 관찰되는 현상은 아닐 텐데... 비교 연구가 있을 것도 같은데...
한국은 인구 수로 보면 결코 작은 나라는 아닌데 반도 (해방 이후 남한은 섬나라)이고 중국 중심 질서 속에서 나름 독자적 문화권을 유지해 온 탓인지 구성원들 사이에서 동질감, 공동체 의식이 유독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공동체 의식은 변형되긴 했지만 강력하게 살아 남았다. 아니 산업화가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 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공동체 의식을 또 한 번 변형시키고 있는 것 같다. 옛 시골마을에서 서로 숟가락 수까지 알던 그런 친밀한 관계가 넷 상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일방적이라는 점. 공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들은 - cerebrities - 한 번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면 거의 발가벗겨지다시피 까발겨진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장에서 그런 까발김을 걸러주는 장치들은 거의 없고 심지어 기성언론들은 짐짓 나무라는 척하면서 그 대열에 합류한다. 공공의 적 혹은 호기심의 대상을 앞에 두고 '호기심/관심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 (...)

2011년 5월 29일 일요일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도 없다. 그러니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알려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아는 수밖에 없다.

2011년 5월 18일 수요일

"어려운 것은 쉽게,
쉬운 것은 깊게,
깊은 것은 유쾌하게."

[출처: 8층 라디오국에서, 이동진]

적절한 표현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절박하게 느낀다는...

2011년 5월 15일 일요일

학부 시절 읽은 김우창 교수 글에서 구체적 내용은 다 빠져 나가고 인상만이 남아 있다. 전형적인 근대주의자, 하버마스 류 도덕 선생 같다는... 주장이 너무 무르고 싱거워서 화끈한 것 좋아하는 한국 풍토에서 그런 입장이 크게 주목받긴 힘들 것 같다는... 대략 그 정도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한계 때문에 그 분 인터뷰는 한겨레보다는 조선일보에서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긴 하다. 우연히 발견한 좀 묵은 인터뷰 (여기).

그 중에서 오늘 경험한 일과 관련해서 좀 남겨 두고 싶은 구절.


현재 한국 언론의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사실성이 부족한 것이다. 상투화가 너무 심하다. 신춘문예 심사 때, 심사위원들이 원고를 들춰보는 사진을 연출한다.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심사위원들은 이미 원고를 다 검토하고 왔어야 한다. 그 자리에 와서야 원고를 들여다볼 리 있는가. 기사가 상투적이 되면, 사실을 정확하게 보는 것을 방해한다. 예를 들면, 한국을 처음 찾은 서양인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서양인이 한국 문화에 푹 빠졌다고 쓰는 것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그래... 그런 상투성... 언론 뿐 아니라 여기 저기에서 여전히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선 자주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언론의 상투성 사례는 무척 많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 배달되는 스포츠 신문이 셋인데, 연재만화를 챙겨보지 않은 이상 내용만으로 그 세 신문을 구별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다음 미디어, 네이버 뉴스, 야후 뉴스도 내용은 대동소이하고.... 일간지 쪽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여긴 두 집단으로 나뉘긴 한다. 한쪽에 한겨례, 경향이 있고 다른 쪽에 그 나머지들이 있고...

기자들의 상상력, 창의력 빈곤, 결핍을 원인으로 꼽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들 언론 '고시'를 치루고 들어간 수재들, 선택된 엘리트들 아닌가. 아 물론 커뮤니케이션에서 상투화, 관례화, 제도화, habitus building, routinize... 등은 필수적이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정도'다.
내게 그럴 듯한 직함을 준 '조직'(?)의 성격, 정체성,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그 생각이 가지쳐 나가면서 떠 오른 다른 생각까지 자판가는대로 기록해 놓으려고 한다. 읽힐 목적으로 쓰는 게 아님을 분명히 (x 100000...^^) 밝혀 둔다.

성격,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 그것이 바로 정체성이다. 굳이 짧은 표현으로 모임의 성격을 요약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모호하다는 것, 바로 그 점이 이 모임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특징이다. 열려있고 비어있다는 것! 일상에서 관련을 맺는 조직이나 모임은 대부분은 미리 정해진 내용으로 꽉 차 있으니 그렇지 않은 조직에 한 번 몸을 담는 것 흥미로은 일이다.
하지만 사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참가자들이다.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엘리트들을 한 자리에서 본다는 것만으로 이미 흥미로운 일이다. 구성원 서로에게 실제적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만한 사람들이다.
비어있다고 하지만 그들을 묶는 게 아애 없는 것도 아니다. '문화'가 아닐까?
실제로 문화 쪽에 직접 관련을 맺는 사람들이 많고. 디자인, 예술, 그런 쪽.
서로를 매개하는 무엇인가가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임에 나올 때엔 그래도 서로 공유하는 무엇, 수렴하는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문화"인 것 같다. 서로를 연결시키는 단어!
재미를 추구한다. 딱딱한 얘기, 지나치게 학술적이고 진지한 분위기, 그런 걸 싫어한다. 그렇지만 농담 따먹기만 하자고 있는 자리도 아니다. 그게 바로 매력의 핵심!
여하튼 속은 우선은 비어있지만 가벼운 접근, 굳이 표현하자면 정치, 경제가 아닌 문화적 접근을 취하면서 재미있는 내용으로 채워보고 싶으 그런 욕망을 자극하는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생명윤리 논쟁을 바라보면....
내용으로 꽉 차 있다. 각종 입장, 판단 근거, 사실로 꽉 차 있다. 그것들 사이에 간극이 거의 없다. 거의 일대일 대응하다시피 하는 대립되는 견해들이 있으니까. 그런 논쟁은 재미도 없을 뿐더러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모두에게 감정적, 정서적 상처를 남긴다.
미국 소고기 수입에 대한 논쟁도 결국 여유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상처만 남긴다.
어디 그것 뿐이랴 각종 논쟁들... 여유 공간을 내 주면 상대가 침식해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다. 최대한 상대의 영역에 침임해 들어가야 후퇴하더라도 최대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힘의 논리...
그 힘은 물리적 힘일 수도 있을 것이고 논리적 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빼어난 논리를 발전시켜서 실제로 자신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찾아올 수 있는 그런 논리의 경쟁! 빈 공간이 없다. 오히려 된통 겹치는 공간들...
체계이론은 빈공간을 많이 만들어 주는 이론이긴 하다. 사회적인 현상을 전부 설명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진 이론이니까.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영역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려 있다. Legitimaiton duch Verfahren... 같은 아이디어는 속을 좀 비우자는 얘기아닌가? Teubner도 그렇고... 인간 배아가 생명이나 아니야, 보편복지냐 아니냐... 그런 이야기들 한 줄 듣기만 해도 갑갑하다. "문화"라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모호한 개념인데 바로 그 때문에 자주 쓰이는 것이고, 실제로 문화라면 쉽게 떠 올리는 현상들, 예술, 문화산업 등등...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바로 '공간'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에 대한 반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듯. 전문가들의 담론적 권위, 사회적 권위...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 거기에 대한 반감인 것. 내용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태도에 대한 거부감이다.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내 사고를 지배하려는 그런 태도... 물론 거기에 대해서 다른 형태의 전문지식을 갖춘 대항전문가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 황우석 때도... - 문제의 원인을 전문가적 태도에 대한 반감으로 본다면 그건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거의 모든 전문지식에 대해서 우리는 반대 전문지식을 찾아낼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천안함 사태! 아무리 허섭쓰레기 같은 주장이더라도 전문지식 딱지를 붙일 수 있고, 그 형식적 틀을 과학 논쟁, 전문지식 논쟁으로 만들 수 있다. 더 엄밀한 전문지식을 가져온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어제 EBS에서 본 남여 차이에 대한 심리학적, 생물학적 설명. 그런 방식의 설명은 쉽게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덜 논쟁적인 주제라서 그런가? 쉽게 수긍할 수 있고 따라갈만한 내용이라서 그런가? 친밀한 주제라서 그런가? 전문지식, 전문가가 그 어느 때보다 대접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분야에서 비어있는 공간이 있는가? 어떤 여지가 있는가? 왜 전문가들에게 쉽게 해석의 공간을 내어 주는가? '위대한 탄생'이나 '디 워 논쟁' '황우석 논쟁' '미국 소고기 수입' '천암함 사태' 등과 다르게? 우선 (1) 정치적인 주제가 아니다. (2) 대중들은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설명방식이다 (아, 그리고 설명의 대상으로 삼는 출발점 자체는 대부분 동의하는 내용이다. 다만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 아마 대중들이 기대하는 바일 것이다. 관찰되는 현상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
(1) 정치적이라는 것은 결론, 더 자세히 말하면 지향하거나 선호하는 결론이 있다는 것이고 과학은 그럴 경우 대개 어느 한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 어떤 과학적 설명도 양쪽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고 (아무리 객관적 입장을 띤 진술이라고 하더라도 정치 논쟁에서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것으로 쉽게둔갑한다)...
(2) 대중들도 적극적으로 해석에 참여할 수 있는 사건의 경우, 전문가들의 진술이 논쟁적이지 않긴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전문가들의 진술 내용이 아닌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대중 영화나 대중 가요에 대한 평가는 누구가 달리 내릴 수 있다. 그럴 경우 전문가들의 견해를 관철시키긴 어렵다. 그 자체가 어려워보이는 고급예술, 고전음악이나 미술, 혹은 예술 영화 등등. 그런 분야에선 전문가들의 권위가 훨씬 더 쉽게 인정받는다.
Legitimation durch Verfahren은 어쩌면 탈정치화 전략이다.
하아... 좋은 이야기인데... 세상이 정치적인데 탈정치화를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처음에 언급한 그 모임의 경우, 하나쯤 그런 모임에 소속되는 것도 좋다는 것이지 일상이 전부 그런 모임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건 사회는 굴러갈 수가 없다.
탈정치화 전략은 대개 힘 있는 이들 - 어떤 형태의 권력이건...- 이해관계 관철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여유, 비어있는 공간은 하나쯤 있어야 한다. 한국 전통 건축의 특징이기도 한 열린 공간, 안과 밖을 연결시켜주는 마루, 대청마루의 존재는 닫힌 방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청마루로만 구성된 집은 집기능을 할 수가 없다.
Legitimation durch Verfahren은 이상이다, 이상! 물론 루만 스스로도 "내용"을 포기한 적이 없다. 과학의 과학성, 정치의 정치성, 그런 내용 밝히는 게 그의 작업이었으니... 기능적 분화 유지가 그의 이론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고... 물론 그것이 절대 진리라고 주장한 것 아니고, 학문 커뮤니케이션의 절차에 맡긴 셈이긴 하지만...
결국 우린 어쩔 수 없이 내용으로 꽉 찬 일상과 숨 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함께 가져야 한다. 도시를 전부 비워 둘 수는 없지만 드문 드문 빈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사회에서 정치 논쟁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논쟁을 비워두고 그 때 그 때 채워나갈 수 없다. 그렇지만 정치 커뮤니케이셔에서도 드문 드문 빈 공간, 광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명윤리 논쟁은 발전으로 꽌 찬 한국 정치에서 좀 다르게 생각할 여유를 확보하려는 안타까운 몸짓일 수도 있겠다. 그게 정치논쟁인 이상 윤리가 또 다른 입장을 차지하는내용이 되면서, 보는 사람들은 갑갑한 정치논쟁이 되고, 결국 재미없는 주제가 되어 버렸지만...

2011년 5월 9일 월요일

오늘... 월요일... 머리 속이 좀 복잡하고, 최적 상태가 아니다. 몇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을텐데... 우선, 지난 며칠, 묵언수행하다시피하는 일상에서 많이 벗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많을 말을 하고 많은 말을 들었다. 평소와 다른 유형의 정보의 과도한 입력으로 두뇌에 약간 과부하에 걸린 상태.
그리고 알레르기 증상 때문에 몸 상태가 최선이 아니다. 감히 독일 체류 시절 봄마다 겪었던 그 상태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게다가 오늘 날씨가 아주 고약하다. 큰 비가 온다고 하더니 공기가 더할 나위 없이 꿉꿉하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냄새와 습기 많은 공기가 모여서 '씨너지'효과를 일으킨다.
이 밖에 몇 가지 긍정적인 경험, 기대까지 섞이니 머리 속이 더 혼란하다.
우선 지난 토요일 귀국 이후 처음으로 독일인을 만났고 독일어로 의사소통했다. 그 친구가 한국어를 무척 잘하고 동석한 사람들이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한 탓에 긴 얘길 독일어로 나눈 건 아니지만... 반가운 사실은 내 독일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 그 친구에게서 'fast perfekt'란 '칭찬'까지 들었으니 ㅋㅋ
정체성이 약간 불분명한 조직이지만, 그 구성원 대부분은 사회 여러 분야 전문가들인 조직에서, 실상이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듣기엔 매우 그럴듯한 직함을 하나 얻게 되었다.
그리고 해묵은 숙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변화는 아니지만 내 일상을 바꾸는 큰 변화가 생길 것도 같다.
여하튼 오늘은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좀 어수선한 하루를 보내게 될 듯. 아니 그러고 보니 벌써 하루 노동시간 절반은 지나가 버렸군.

2011년 5월 2일 월요일

땅투기, 돈놀이 -> '재테크' (financial technology)
사치품 -> 명품
"Disneyland exists in order to hide that it is the 'real' country, all of 'real' America that is Disneyland (a bit like prisons are there to hide that it is the social in its entirety, in its banal omnipresence, that is carceral). Disneyland is presented as imaginary in order to make us believe that the rest is real, whereas all of Los Angeles and the America that surrounds it are no longer real, but belong to the hyperreal order and to the order of simulation." (J. Baudrillard, Simulacra and Simulation)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거기 있다(마치 감옥이 사회 전체가 그 평범한 어디서고 감방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는 것과 약간은 유사하게). 디즈니랜드는 다른 세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상상적 세계로 제시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곳을 감싸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전체와 미국도 더 이상 실재가 아니며 파생 실재와 시뮬라시옹 질서에 속한다"

맛뵈기 혹은 쇼케이스를 드러내면서 정작 중요한 다른 것들을 은폐하는 경우가 있다. 때론 별 생각없이 그저 어떤 부분을 강조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은폐 공작에 참여한 셈이 되는 경우도 있고. 보드리야르가 언급한 '감옥', '디즈니랜드' 외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배아의 도덕적 지위를 가지고 싸우는 생명윤리 논쟁은 결국 다른 윤리적 논점을 은폐하게 되고, 다문화사회라면서 이주민의 사회통합을 강조하다보면 이주외국인만 아니면 한국은 단일문화라는 메시지 전파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고, 공정사회를 '원칙'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축소하면 규칙을 지키면서 행해지는 불평등 재생산에 대해선 할 말 없게 만드는 것이고, 윤리경영을 아동노동 금지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하면 그런 '비윤리적' 경영을 제외하면 나머진 모두 윤리적이라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고,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자본이동의 자유, 재산 증식의 자유인데 그렇게 축소된 의미로 '자유'를 독점해서 쓰면서 훨씬 더 절박한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러 경우를 다루지 못하게 한다.
지난 일주일 정도 인터넷 접속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물론 무척 불편했다. 세계 곳곳에서 중요한 일들이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고, 개인적으로 확인해야 할 긴급한 소식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학술적인 글을 읽다보면 꼭 찾아봐야 할 것 같은 논문이 언급되고 있는데도 그러지 못하는 답답함... 물론 실상은 전혀 다르다. 내가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고, 전자우편으로 전해지는 소식 역시 긴급함과는 거리가 멀다. 며칠만 지나면 내가 그 논문을 왜 찾으려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인터넷 덕에 예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손쉽게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어서 무척 고맙긴 하지만, 그 '호의'를 받아들여 주는 대로 받아 먹다보니 영양과잉 상태에 이른 것. 가끔씩 정보 단식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컴퓨터도 가끔씩 메모리를 비워주지 않고선 계속 쓸 수 없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