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 그것이 바로 정체성이다. 굳이 짧은 표현으로 모임의 성격을 요약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모호하다는 것, 바로 그 점이 이 모임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특징이다. 열려있고 비어있다는 것! 일상에서 관련을 맺는 조직이나 모임은 대부분은 미리 정해진 내용으로 꽉 차 있으니 그렇지 않은 조직에 한 번 몸을 담는 것 흥미로은 일이다.
하지만 사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참가자들이다.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엘리트들을 한 자리에서 본다는 것만으로 이미 흥미로운 일이다. 구성원 서로에게 실제적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만한 사람들이다.
비어있다고 하지만 그들을 묶는 게 아애 없는 것도 아니다. '문화'가 아닐까?
실제로 문화 쪽에 직접 관련을 맺는 사람들이 많고. 디자인, 예술, 그런 쪽.
서로를 매개하는 무엇인가가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임에 나올 때엔 그래도 서로 공유하는 무엇, 수렴하는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문화"인 것 같다. 서로를 연결시키는 단어!
재미를 추구한다. 딱딱한 얘기, 지나치게 학술적이고 진지한 분위기, 그런 걸 싫어한다. 그렇지만 농담 따먹기만 하자고 있는 자리도 아니다. 그게 바로 매력의 핵심!
여하튼 속은 우선은 비어있지만 가벼운 접근, 굳이 표현하자면 정치, 경제가 아닌 문화적 접근을 취하면서 재미있는 내용으로 채워보고 싶으 그런 욕망을 자극하는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생명윤리 논쟁을 바라보면....
내용으로 꽉 차 있다. 각종 입장, 판단 근거, 사실로 꽉 차 있다. 그것들 사이에 간극이 거의 없다. 거의 일대일 대응하다시피 하는 대립되는 견해들이 있으니까. 그런 논쟁은 재미도 없을 뿐더러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모두에게 감정적, 정서적 상처를 남긴다.
미국 소고기 수입에 대한 논쟁도 결국 여유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상처만 남긴다.
어디 그것 뿐이랴 각종 논쟁들... 여유 공간을 내 주면 상대가 침식해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다. 최대한 상대의 영역에 침임해 들어가야 후퇴하더라도 최대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힘의 논리...
그 힘은 물리적 힘일 수도 있을 것이고 논리적 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빼어난 논리를 발전시켜서 실제로 자신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찾아올 수 있는 그런 논리의 경쟁! 빈 공간이 없다. 오히려 된통 겹치는 공간들...
체계이론은 빈공간을 많이 만들어 주는 이론이긴 하다. 사회적인 현상을 전부 설명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진 이론이니까.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영역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려 있다. Legitimaiton duch Verfahren... 같은 아이디어는 속을 좀 비우자는 얘기아닌가? Teubner도 그렇고... 인간 배아가 생명이나 아니야, 보편복지냐 아니냐... 그런 이야기들 한 줄 듣기만 해도 갑갑하다. "문화"라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모호한 개념인데 바로 그 때문에 자주 쓰이는 것이고, 실제로 문화라면 쉽게 떠 올리는 현상들, 예술, 문화산업 등등...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바로 '공간'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에 대한 반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듯. 전문가들의 담론적 권위, 사회적 권위...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 거기에 대한 반감인 것. 내용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태도에 대한 거부감이다.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내 사고를 지배하려는 그런 태도... 물론 거기에 대해서 다른 형태의 전문지식을 갖춘 대항전문가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 황우석 때도... - 문제의 원인을 전문가적 태도에 대한 반감으로 본다면 그건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거의 모든 전문지식에 대해서 우리는 반대 전문지식을 찾아낼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천안함 사태! 아무리 허섭쓰레기 같은 주장이더라도 전문지식 딱지를 붙일 수 있고, 그 형식적 틀을 과학 논쟁, 전문지식 논쟁으로 만들 수 있다. 더 엄밀한 전문지식을 가져온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어제 EBS에서 본 남여 차이에 대한 심리학적, 생물학적 설명. 그런 방식의 설명은 쉽게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덜 논쟁적인 주제라서 그런가? 쉽게 수긍할 수 있고 따라갈만한 내용이라서 그런가? 친밀한 주제라서 그런가? 전문지식, 전문가가 그 어느 때보다 대접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분야에서 비어있는 공간이 있는가? 어떤 여지가 있는가? 왜 전문가들에게 쉽게 해석의 공간을 내어 주는가? '위대한 탄생'이나 '디 워 논쟁' '황우석 논쟁' '미국 소고기 수입' '천암함 사태' 등과 다르게? 우선 (1) 정치적인 주제가 아니다. (2) 대중들은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설명방식이다 (아, 그리고 설명의 대상으로 삼는 출발점 자체는 대부분 동의하는 내용이다. 다만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 아마 대중들이 기대하는 바일 것이다. 관찰되는 현상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
(1) 정치적이라는 것은 결론, 더 자세히 말하면 지향하거나 선호하는 결론이 있다는 것이고 과학은 그럴 경우 대개 어느 한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 어떤 과학적 설명도 양쪽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고 (아무리 객관적 입장을 띤 진술이라고 하더라도 정치 논쟁에서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것으로 쉽게둔갑한다)...
(2) 대중들도 적극적으로 해석에 참여할 수 있는 사건의 경우, 전문가들의 진술이 논쟁적이지 않긴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전문가들의 진술 내용이 아닌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대중 영화나 대중 가요에 대한 평가는 누구가 달리 내릴 수 있다. 그럴 경우 전문가들의 견해를 관철시키긴 어렵다. 그 자체가 어려워보이는 고급예술, 고전음악이나 미술, 혹은 예술 영화 등등. 그런 분야에선 전문가들의 권위가 훨씬 더 쉽게 인정받는다.
Legitimation durch Verfahren은 어쩌면 탈정치화 전략이다.
하아... 좋은 이야기인데... 세상이 정치적인데 탈정치화를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처음에 언급한 그 모임의 경우, 하나쯤 그런 모임에 소속되는 것도 좋다는 것이지 일상이 전부 그런 모임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건 사회는 굴러갈 수가 없다.
탈정치화 전략은 대개 힘 있는 이들 - 어떤 형태의 권력이건...- 이해관계 관철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여유, 비어있는 공간은 하나쯤 있어야 한다. 한국 전통 건축의 특징이기도 한 열린 공간, 안과 밖을 연결시켜주는 마루, 대청마루의 존재는 닫힌 방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청마루로만 구성된 집은 집기능을 할 수가 없다.
Legitimation durch Verfahren은 이상이다, 이상! 물론 루만 스스로도 "내용"을 포기한 적이 없다. 과학의 과학성, 정치의 정치성, 그런 내용 밝히는 게 그의 작업이었으니... 기능적 분화 유지가 그의 이론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고... 물론 그것이 절대 진리라고 주장한 것 아니고, 학문 커뮤니케이션의 절차에 맡긴 셈이긴 하지만...
결국 우린 어쩔 수 없이 내용으로 꽉 찬 일상과 숨 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함께 가져야 한다. 도시를 전부 비워 둘 수는 없지만 드문 드문 빈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사회에서 정치 논쟁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논쟁을 비워두고 그 때 그 때 채워나갈 수 없다. 그렇지만 정치 커뮤니케이셔에서도 드문 드문 빈 공간, 광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명윤리 논쟁은 발전으로 꽌 찬 한국 정치에서 좀 다르게 생각할 여유를 확보하려는 안타까운 몸짓일 수도 있겠다. 그게 정치논쟁인 이상 윤리가 또 다른 입장을 차지하는내용이 되면서, 보는 사람들은 갑갑한 정치논쟁이 되고, 결국 재미없는 주제가 되어 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