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endship is one of the greatest gifts a human being can receive. (...) It is a bond stronger than sexual union can create; deeper than a shared fate can solidify, and it can be even more intimate than the bonds of marriage or community." (H. Nouwen)
오늘 아침 이 구절을 읽고서 우정과 사랑이 구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물론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었고, 또 구분되거나 구분되지 않거나 했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이 주제에 대해 쓴 매우 흥미로운 글을 찾았다 (출처). 이송희일이라는 독립영화계에서는 꽤 유명한 감독이 쓴 글인 것 같다. 잠시 찾아보니 전북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고 알려주네. 감독의 비주류 성적 지향성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그가 감독을 참여했던 영화 9편이 있(다고하)는데 그 중 유일하게 '탈주' (2009)를 (대략이지만) 봤다. 강한 인상을 남기진 않았다. 여하튼 이 얘기를 페북에 올릴까 하다가, 아주 어린 페북 '친구들'이 있다는 떠 올리고선 여길 선택했다.
요지는... 性化된 사랑 이해, 강제적인 이성애 사회, '성욕'을 기준으로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는 경향에 반대, 우정을 키울 수 있는 사회를 향하여... 정도 되겠다. 물론... 사랑과 우정을 말끔하게 정의하거나 구분하지는 않는다.
물론 (지금은 이 땅에 계시지 않는) 나우엔 선생은 내가 본인 얘기를 이런 주제로 연결시켰다는 데 대해서 분개할 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만 가져 오면..
"<수상록>을 집필한 16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몽떼뉴. 그와 그의 친구 라 보에시와의 깊은 우정 관계는 지금까지도 이상적 모델로써 누누이 언급되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로 단단히 뭉쳐 있고, 너무나 열렬한 애정으로 각자의 오장육부까지 서로 드러내놓고, 똑같은 애정으로 서로 살펴주고……."
라 보에시에 대한 돈독한 애정을 자신의 <수상록> 지면을 빌려 허심탄회 펼쳐 보이는 우리의 몽떼뉴. 그러나 세간에서 들려올지도 모르는 이상야릇한 괴담들을 지레 입막음하기 위해 그는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자신들의 우정관계는 그리스식 동성애와는 하등 상관이 없거니와, 더 나아가 그러한 '방종한 사랑'은 실컷 욕을 얻어 먹어도 싸다는 것이 바로 몽떼뉴가 내세운 방어책이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그리스식 동성애와 자신의 지고지순한 우정을 가름하는 기준은 '성욕'이었다. (...)
동성애 관계까지도 측정했던 몽떼뉴의 잣대는 우리에게 우정의 모델을 제시해주고 있다. 진정한 우정 = 타인에 대한 극진한 사랑에서 '성욕'을 뺀 나머지. 상대방이 친구이냐 연인이냐를 판가름하는 것은 바로 '성욕'의 여부인 셈이다."
"필립 아리에스와 같은 현대의 명망있는 역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과거에 비해 우정이 쇠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성애자의 등장을 이 우정의 쇠퇴와 결부짓는다. 사람들이 과거에 타인들과 나누었던 그 결속력있던 친밀 관계가 무너지고 성적인 관계만이 중요시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미국의 살아있는 전설 이반 일리치는 중세 시대에 친구들이 서로 교환했던 서신 내용을 호모들의 구애로 왜곡 해석하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며 '우정의 사회'를 복원시켜야 된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핵심적인 것들을 빠뜨리고 있다. 우정의 쇠퇴는 사회 구조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공장과 가정, 자본주의 출현 이래 획일적으로 분리된 이 두 개의 축 사이에 우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낮에는 밥값을 벌기 위해 일하러 가야 하고 밤에는 노곤한 육체를 쉬기 위해 처자식이 있는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단조롭기 짝이 없는 생활 속에서 과연 우정이 꽃피워질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돈과 결혼을 두 축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 획일적 사회에서 친구의 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퓨필라는커녕, '집과 직장 사이에는 카스 맥주가 있다'라는 지하철 광고판 따위나 지겹게 들여다 봐야 하는 처지일 뿐이다.
강제적인 이성애 사회는 분명 우정에 적대적인 시스템이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이 사회 시스템은 친구와 한담을 나누거나 편지를 쓸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몇몇 공간을 제외하고 가정 외에 정서적 친밀감을 쏟을 수 있는 장소를 할애하는 것도 아니다. 기껏 한 걸음 더 돈을 벌기 위해 각종 스포츠 동우회나 알량한 반상회 따위의 모임들을 조직할 따름이다.
동성애자의 등장을 우정의 쇠퇴와 연관짓는 것은 너무도 섣부른 판단이다. 19세기부터 등장한 동성애 공동체는 이성애 사회에서 잃어버린 우정을 구걸하기 위해, 혹은 성적 관계만을 우선시하여 모인 집합체가 아니다. 끝에 가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도리어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우정의 형태를 제시해주고 있다."
"사랑과 우정은 다르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결혼-가족 제도가 공고화되는 15세기부터 결혼의 순수성을 보증받기 위해 복잡다양한 사귐의 표현인 '우정'보다 남녀 합일의 '사랑'을 우위에 둔 영향 속에 놓여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둘의 감정이 마치 칼로 날카롭게 베어지듯 분리될 수 있다고 믿는다.
동성애자들 역시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성애자와는 단지 성적 대상이 다를 뿐이라고 자주 말하곤 한다. '그대를 정열적으로 소유하고 싶다'. 이 정열적 소유에 성적 관계가 포함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들에게 사랑의 대상은 오로지 단수單數이어야 하지 복수複數이어선 안 된다. 그만큼 사랑의 개념은 성화性化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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