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30일 수요일

4월의 마지막 날

4월의 마지막 날이라는 핑계로 붓 아니 자판 가는 대로 뭔가 써서 남겨 보고 싶다. 루만이 (사회적) 행위나 개인이 아닌 커뮤니케이션을 사회의 기본단위로 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신한 - 얌전하게 표현하자면 - 아이디어다. 사회체계와 심리체계의 관계를 구조적 연동 (혹은 Interpenetration)으로 본 것 또한 설득력 있는 설정이다 (이는 이미 파슨즈가 도입한 개념이지만. 참, 오늘 장선생에게서 재미있는 비유를 하나 들었다. 아마 S.Fuchs가 미국의 사회학도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냈을. 파슨즈와 루만이 다른 것은 상징적상호작용론과 민속방법론이 다른 것과 비교할만한다는). 심리체계 없이 커뮤니케이션(사회체계)가 불가능한 것처럼, 심리체계 역시 사회체계 없이 지속되지 못한다는 얘기인 것이다 (심리체계를 사회의 환경에 위치시킨 사회학자 루만이 심리체계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허나 그것에 불만이 체계이론연구자들이 있어 사회학적 체계이론적 심리체계 연구도 발전시키고 있다. 대표적으로 P.Fuchs 2003, 2005 의 작업이 있다. 다른 학자도 있는데 생각나지 않는다). 심리체계가 어느 정도로 사회체계의 직접적 영향 아래에 있는지 우리는 매일 경험한다. 심지어 직접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우리의 심리체계는 타인 [Alter]를 상정하고 의미를 만들어 내는데 익숙하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대표적으로 '기도'를 꼽을 수 있다. 개인적 기도는 분명 심리체계의 작동이다. 하지만 대상을 상정하는 것이다. 인격적인 신. 고대 이스라엘 민족, 특히 그 지도자들은 야훼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지만, 도그마(교의)가 만들어지고 그런 신과의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대신하게 되면서 유대교, 기독교 전통에서 신과 직접 의사소통했다고 주장하는 일은 예외적인 일에 속하게 되었다. 기도는 포이어바흐식 유물론자들이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철저히 심리체계, 내 정신세계의 활동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나름대로 Alter인 신이 전달하는 정보를 이해하는 것이니까 신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다. 인격신이 전달하려는 정보가 무엇이냐가 관건인데, 내 생각에 바로 그것 때문에 교회에서 가르침/배움이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정보가 아닌가? 인간을 투영한 것 아닌가? 라는 질문에는 바로 창발적 질서(Emergenz)를 답으로 들려주고 싶다. 우리 심리체계가 그리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 출발이야 어떻게 되었건, 우리는 종교적인 가르침/배움의 과정을 거치고 종교적인 활동을 지속하면서 내가 전해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질서의 세계로 인도되어 가는 것이다. 나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변화한다. 진화한다. 이런 현상을 공진화라고 한다 (Coevolution). 심리체계와 사회체계는 바로 공진화라는 관계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내 심리체계를 관찰하면서 얼마나 사회체계 (특히, 상호작용)에 영향을 받는지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 진화는 중립적 개념이지만, 내 심리체계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갖는다. 환경의 Irritationen 을 '좋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심리체계가 좀 더 안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세우고 있어야 거기에 맞는 자극을 선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구조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구조가 언제나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시간에 쫓기고, 여러가지 이유로 내가 참여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항상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제한된 시간 내에 목표를 달성하려면 더 단단한 구조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시간 참... 빨리 간다.

Fuchs, Peter (2003), Der Eigen-Sinn des Bewußtseins. Die Person, die Psyche, die Signatur. Bielefeld:Transcript.

Fuchs, Peter (2005), Die Psyche. Studien zur Innenwelt der Außenwelt der Innenwelt. Velbrück.

2008년 4월 29일 화요일

초기 사회학 정체성 논의

[오래 전에 요약해 놓은 것인데 정리해서 올려본다. 'Erhard Stölting 2006'으로 되어있을 뿐 그 이상 서지정보를 써 놓지 않았다. 찾아보니 현재 포츠담 대학 교수인데 논문목록에서도 찾을 수 없고. ]

의학, 철학, 법학, 등 오래된 학문들도 그것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파고들면 불명확하기도 하지만 대개 자명한 것으로 이해됨. 신생학문은 사정이 다르다. 새로운 학문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시켜야 한다. 1. 실용성 (praktische Beduerfnisse). 2. 학문성 (Wissenschaftlichkeit). 사회학과 비슷한 시기 정립된 경영학 (Betriebswirtschaftslehre, BWL)의 경우 학문성은 의심 받고 있지만, 실용성 때문에 쉽게 자리를 잡은 경우에 속한다. 사회학은 두 가지 기준 모두에서 의심을 받고 있다.
19세기 말까지 활동했던 초기사회학자들은 사회학의 학문성에 확신을 가졌다. 자연과학 방법론을 적용했고, (진화론적) 역사철학 혹은, 사회진보적 프로그램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이들은 자연과학적 방식을 그대로 사회현상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법칙성, 실증주의). 프랑스의 Saint-Simon 과 Comte (역사철학에 가까움), 그리고 벨기에의 통계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Adophe Quetelet (Soziale Physik 이란 개념을 사용한 이), 그리고 영국의 H. Spencer (당대 생물학, 화학을 사회학에 원용함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고전 사회학자들은 역사철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금 더 분명한 사회학을 추구했다. 사회학의 대상, 즉 "das Soziale" 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실증주의 사회학 전통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회'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아끼는 '사회없는 사회학'이기도 하였다. 이런 전통은 미시사회학으로 이어진다.
독일에서는 이런 실증주의적 사회학, 역사철학에 모두 반기를 들었다 (자연과학/정신과학에 대한 논쟁이 대표적이다. Rickert, Dilthey 등 신칸트주의자들[서남학파]이 대표적. Weber, Simmel 등은 이들보다는 실증주의적 경향을 수용하는 편이기는 하였다. 독일에서는 이런 실증주의, 사회다윈주의와 같은 정치 프로그램, 운동에 연결된 사회학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독일에서도 신다윈주의에 경도된 우생학자들이 사회학계에 있었으나 그런 경향을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Sombart, Weber 등이 특히 반대입장을 견지하였다 (Sombart는 반유태주의 성향이 있었으나, 이 점에서는 Weber와 함께 하였다). Simmel은 사회학을 미학, 윤리학과 같은 철학의 한 분야로 보았다. Weber에게 사회학은 독자적 학문이라기 보다는 사회과학의 통칭(Sammelbezeichung)이었다.
학문으로서 정체성 확보를 위한 전략은 크게, 1. 연구대상을 달리하거나, 2. 접근 방식을 달리하는 것이다. 1은 뒤르케임이 시도한 것이다. 사회학은 "사회적 사실"을 다루는 학문으로, 특히 심리학과 구별하려고 하였다. 사회, 사회적인 것은 인간과 인간의 심리 바깥에 위치한 것을 본 것이다. 뒤르케임은 학파를 만들고, 학회지도 만들어 내었다. 2는 René Worms가 채택하였다 (프랑스. 변방에 있었지만, 국제적 영향력은 있었고 Institut International de Sociologie 창설).
초기, Weimar 공화국 시절 독일 사회학사가 주는 교훈: Weimar 공화국 시절 대다수 사회학자들은 공화국에 반대하였다. 사회학은 학문성에서 불충분하고, 민주주의적 정신도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베버 사후 독일사회학의 거두였던 Leopold von Weise가치중립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금욕적인 태도를 취함으로 정치적 이슈를 경제학자들이 다루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 편, 사회학이 정치 프로그램과 너무 가까이 있을 때 비록 사회적 효용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 수는 있을 지라도 학문성을 상실한다. 물론 그 둘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으나, 정치적인 효용과는 늘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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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은 학문성과 실용성 어느 한 쪽에 대해서도 시원하게 인정받지 못했으면서도 대학에 자리를 잡았고 나름대로 발전해 왔다. 사회학에 대한 분명한 수요가 있었던 탓이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숨어있는 시장 혹은 수요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여의치 않으면 만들어 내면 된다.

2008년 4월 27일 일요일

Von der Soziologie als Krisenwissenschaft zur Krise der Soziologie?

최근 여러 계기로 사회학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평생 사회학 언저리에 있게 될 사람으로써, 내 정체성을 이룰 중요한 근거인 사회학 자체가 태동 이후 지금까지도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음을 확인하는 건 매우 슬픈 일이다. 사회학은 사회의 위기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 학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다보니 그 사회학은 정체성의 위기를 한번도 시원하게 떨쳐버린 적이 없다 (cf. Papalekas 1974). (베버가 사회학을 'eine ewig junge Wissenschaft'라고했다는데 적절한 표현인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사회학자들 스스로 사회학의 대상, 정의, 역할 등에 대해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고, 위기를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학자들이 동의하는 유일한 정의는 사회학은 사회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밖에 없다는 주장은 내 생각엔 bittere Wahrheit에 가깝다. 흥미로은 점은 사회학 비판에 사회학자들이 동조하고 나선다는 점이다. 갈등적 사회학으로 사회학이론사를 장식하고 있는 다렌도르프 같은 이마저 - 좀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 사회학을 사회학자들이 하는 짓 정도로 깍아내리고 있다. 빌레펠트대학 초대 총장이며 한 때 잘 나가던 사회학자였던 쉘스키도 말년에 Anti-Soziologie These를 발표하기도 한다 (물론 이 때 사회학은 '계몽적 사회학'을 가리키는 제한된 의미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이후 사회학을 떠나 고향이던 법학으로 돌아간다. 쉘스키 이전에도 Anti-Soziologie의 역사를 독일어권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베버, 짐멜 등 신칸트주의자들이 대개 프랑스 전통에 잇닿아 있는 실증주의적 사회학이나 사회다위주의와 같은 정치 프로그램, 운동에 연결되어있던 사회학에 대한 비판이었지 사회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파기선언은 아니었다. 이런 전통을 텐부륵이 잇고 있다. 사회학이 아니라 문화(과)학을 제창하는 것이다. cf. Merz-Benz & Wagner 2001).
사회학 이해의 방식을 두 가지 이념형(Idealtyp)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규범적 사회학, 학문적 사회학. 대개 사회학자들은 그 중간쯤 어디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규범적 사회학 전통은 우선 프랑스쪽에서 강하게 만들어졌다. 사회학의 창시자 콩트, 뒤르케임등은 사회에 대한 엄밀과학, 실증과학을 주창하면서 (이런 전통이 미국식 경험주의 사회학의 토대가 된다) 동시에 사회의 도덕적 기초를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독일에선 르네 쾨니히가 대표적으로 그런 입장을 취했다. 맑스주의 사회학, 비판이론은 다른 전통에서 규범적 사회학을 지향한다. 학문을 위한 사회학의 전통은 독일버전, 미국버전이 있는 것 같다. 막스 베버, 짐멜 등은 경험적, 실증주의적 사회학을 거부하면서도 사회의 본질, 변동 등을 설명하려는 독특한 사회이론 전통을 세운다. 현대사회학에서 이런 전통은 파슨즈, 루만을 통해서 거시이론으로 꽃을 피우고, 미시이론적으로는 상징적 상호작용론, 민속방법론으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실증주의 사회학 전통은 미국의 경험적, 통계적 사회학으로 이어지면서 주류 사회학으로 자리 잡는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루만과 통계학적 사회학은 반규범주의라는 공통점을 갖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규범적 사회학, 학문적 사회학, 그 둘 모두 필요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평생 한 우물을 판 학자들도 있고, 규범/학문적을 넘나드는 학자들도 있고, 학문에서 규범 혹은 규범에서 학문으로 건너가기도 하는 등, 학자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다양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학은 우선적으로 학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두 개 중 하나를 포기하라면 나는 규범을 포기할 것이다. 사회를 개혁시키기 위해서는 굳이 사회학이라는 우회로를 택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효과적인 방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으로서 사회학이 살아남고, 궁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학문성을 높이는 일이다.

Papalekas, Johannes Chr (1974), Von der Soziologie als Krisenwissenschaft zur Krise der Soziologie, in: Staat 13 (2): 153-167

Merz-Benz, Peter-Ulrich/ Wagner, Gerhard (Hg.) (2001), Soziologie und Anti-Soziologie. Ein Diskurs und seine Rekonstruktion. Konstanz: UVK
[그 밖에 '사회학의 위기'에 대해서 꽤 많은 수의 논문을 모아서 가지고 있다. 언제 계기가 생기면 제대로 읽고 정리해 볼 생각이다.]

2008년 4월 25일 금요일

최근에 본 독일 영화 네 편


그 동안 본 영화가 적지 않고 그 중에는 평을 써보려고 찜해둔 것들도 있었는데 게으름을 피우는 통에 그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아져 버렸다. 그래서 이번엔 영화를 몇 개씩 묶어서 짧게 기록으로 남겨 볼까 한다. 어쩌다보니 흔치 않은 독일영화들을 여러 편 보게 되어서 영화평 묶음 첫 순서로 그것들을 선택했다. (덧붙임 1: 따옴표 안은 남이 써 논 영화평에서 가져온 부분이다). (덧붙임 2: 최근 영화중 최악은 단연 한국 영화들이다. 불공평한 게임이긴 하다. 외국영화는 볼만한 영화를 골라서 보고, '방화'는 단지 '방화'라는 이유로 '묻지마 관람'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한국영화 만나기 쉽지 않음을 소름끼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확인시켜 준 다음 세 영화의 제작자, 투자자, 스탭, 배우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라듸오 데이즈', '대한이, 민국씨' '용의주도 미스 신'. [덧붙임 2': 그나마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이후에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경기 장면 재현이 너무 부실했는데 제작비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영화를 '스포츠 영화'로 보면 실망하게 되겠지만, 감독 임순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인식틀에 대한 정면도전, 배우들의 고른 연기 등을 고려하면 볼만하다. 한국 관객들이 전형적으로 갖는 기대를 친절하게 충족시켜준 탓에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 같지만, 그 덕에 임순례 감독의 장점은 많이 잃어버렸다. 마지막 영화의 모델들이었던 당사자들의 인터뷰 화면을 집어 넣었는데 그것도 관객배려용인 것 같다. 감독이 '이번에도 관객에게 외면받으면 영화 계속하기 힘들 것 같아서'라고 얘기한 인터뷰를 읽은 것 같은데, 그 때문인지... ]).

(1) Vier Minuten [2006] Chris Kraus
한국어 제목으로 '포미니츠'라고 해서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영어 'Four Minutes'를 소리나는대로 옮긴 것어었다. '사분' 혹은 '4분', 이랬더라도 의미전달이 어렵긴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난 김에, 난 외국 영화제목 엉뚱하게 옮기기 1위로 '죽은 시인의 사회'를 꼽는다. '영화는 보지도 않고 'Society=사회'라는 것밖에 모르는 이가 번역한 결과인데, 그이는 분명 'How are you?' 다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Fine, thank you. And you?'로 답해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일 것이다. 영화 속 "Dead Poets Society"는  '죽은 시인 클럽' 정도가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죽은 시인들이 정식 회원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정식회원이 될 수 있는 그런 요상한 단체... 어찌되었건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이젠 매우 그럴듯하게 들린다. 익숙함의 힘이라니...).
재소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할머니 트라우드 크뤼거(Monica Bleitreu 분) 이야기. 이 크뤼거가 실존인물이고, 지난 2004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실화라고 생각하면 항상 영화가 달리 보인단 말이야... 제목은 이 할머니의 망아지 같은 젊은 제자 제니 폰 뢰벤(Hannah Herzsprung 분)의 마지막 연주에 걸린 시간이다. 슈만을 연주하다 제니 스스로 만들었다는 자유분방한, 세상에 둘도 없을 피아노 연주로 넘어간다 (그 연주 장면 하나 만큼은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잘 만들었고 잘 찍었다). 농담처럼 들리는 '피아노의 타악기화'가 가능함을 보여 준다 ('August Rush'에서는 기타의 타악기화를 볼 수 있음). 크뤼거 할머니는 레즈비언 (그러고보니 노년에 접어든 레즈비언은 이전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듯 하다. 우리 상상력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 여성을ㅡ그 여성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ㅡ잊지 못하는 크뤼거가 제니에게 스파크를 느끼는 장면이 있다. 파티장에서 예쁜 드레스를 입은 제니가 싫다는 크뤼거를 억지로 붙들고 땐스를 한 바탕 추기 시작하자, 처음엔 머뭇머뭇하고 싫다고 떼쓰던, 한 60살은 언니인 크뤼거도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등에 마주 얹는(아앗!!), 긴장감이 깃돌던 바로 그 장면." 음. 그래도 여성 간의 사랑은 내겐 여전히 낯설다 ('Brokeback Mountain'에서 그 남성들의 사랑에 몰입되지 않아 '안타까워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크뤼거는 인종주의자에 완벽한 중산층인데다가 독일 전전(前) 세대의 무의식을 대표하는 트라우마를 가졌고, 제니는 독일 전후(後) 세대가 가질 수 있는 신경증/강박증과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어째 하나도 공유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의 경험의 진술도 흥미진진했다"라고 누가 썼다. 음. 그렇게 깊은 뜻이? 진지한 주제를 너무도 진지하게 담아내니 재미가 덜하다. 이 사람들은, 뭐냐 그, 은근한 걸 모른다니까.

(2) Emmas Glück [2006] Sven Taddicken
우리말 제목은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스벤 타딕켄 감독). "목장에서 평화롭게 동물들을 기르며 살고 있던 엠마는 우연히 막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막스는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친구의 돈을 훔쳐 멕시코로 가려고 도망가던 중 자동차 사고로 인해 엠마의 목장에 들어오게 된다. 정리할 줄 모르는 엠마와 결벽증이 있는 막스의 만남은 그야말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다른 세계의 만남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 둘이 사랑에 빠진다. 서로의 다름이 서로를 이끌었나보다. 죽음을 눈 앞에 둔 막스는 엠마를 만나 얼마 남지 않은 삶 속에서도 행복을 잃지 않고, 엠마 역시 그런 막스를 통해 잠시나마 행복을 느끼게 된다. 원래 영화의 제목은 '엠마의 행복'인데 한국 개봉명은 저렇게 긴 제목이 되었다. 저 긴 제목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한 엠마'와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사이의 쉼표가 아닐까 싶다. 행복한 엠마는 돼지와 남자에게도 특별한 '행복'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설정이나 분위기는 코미디에 가까울 것 같지만, 왠걸 진지하다. 삶과 사랑, 행복과 죽음이 무엇인지 시종일관 묻게 하는 것이다. 다른 세 영화에 비해서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어서 그나마 가장 재미있게 보았다. 인생은 장르로 따지자면 희비극 혹은 블랙코미디에 가장 가깝지 않은가.

(3) Gegen die Wand [2004] Fatih Akin
우리말 제목: '미치고 싶을 때' (파티 아킨 감독). 독일영화로 18년만에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작품. 제목 '벽을 향해 돌진한다'는 어떤 의미?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벽을 향해 돌진하는 인물들이고, 남주인공 차이트는 정말 자동차로 벽을 들이받기도 한다. 영어 제목 은 어느 곳으로 향해간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독일어 제목보다는 좀더 중의적이다."
"<미치고 싶을 때>는 보수적 가족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한 이슬람교도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그가 연기하는 여주인공 시벨은 터키계 독일인으로 보수적인 가족을 벗어나기 위해 마약중독자인 터키계 남성과 위장 결혼을 한다. ... 시벨 케킬리는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여주인공처럼 극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나타났다. 길거리에서 캐스팅돼 몇번의 오디션 끝에 <미치고 싶을 때>에 출연한 케킬리는 그 영화가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 현대적인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틀 뒤 독일 타블로이드 신문은 그녀가 몇편의 포르노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 그러나 강단진 이 여배우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포르노로 시작해서 오스카로 가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낫다'는 명언을 남기며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었던 스캔들을 곧바로 잠재우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 때문에 가족과의 연을 끊고 연락을 두절한 채 살고 있다고 하니 영화 속 내용의 리얼함을 삶으로 보여준 셈이다. 주인공을 비롯해 배우들 연기가 전반적으로 좋았다. 그밖에 별로 남은 인상이 없다. 독일 내 터어키인들의 삶을 터이키계 독일인 감독이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주목받을만 했을 것이다. 영화 시작에서부터 틈틈이 등장하는 7인조 악단. 이스탄불 배경과 이국적 음악, 가사가 과체중에 시달리는 영화의 무게를 줄여주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왠지 '볼거리' 서비스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임권택 영화에서 외국 관객을 위해 보여주는 한국 풍광같은.

(4) Auf der anderen Seite [2007] Fatih Akin
우리말 제목: <천국의 가장자리>. 'Gegen die Wand' 만든 감독. 본 영화로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단다. 상복이 있네. 터어키계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 소재주의. 어떤 의미에서 서구적 기대, 입맛에 맞춰주는... 김기덕 감독이 떠오른다. 영화제에서 상 잘 받는 것까지 닮았다. 너무 박한 평인가?
"터키 출신인 독문학과 교수 네잣은 아버지인 알리가 터키인 매춘 여성인 이테와 관계를 맺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리가 심장 마비로 쓰러진다. 퇴원 후 이테가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우연히 죽음을 당하자 아들인 네잣은 죄책감으로 인해 그녀의 딸인 아이텐을 찾으려고 터키 이스탄불을 방문하게 된다. 한편 터키 반정부 사회주의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이텐은 정부의 감시를 벗어나서 독일로 도망가고 그 곳에서 대학에서 우연히 만난 독일 여성인 로테와 연인 관계가 된다. 로테의 어머니인 수잔느는 이런 딸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아이텐은 결국 독일에서 체포가 되어 본국으로 송환되고 그런 아이텐의 석방을 위해서 로테는 이스탄불까지 쫓아간다." Gegen die Wand 에서 많이 나간 것 같지 않다. 배우들 연기 수준은 오히려 떨어졌는데, 아니 그렇게 보이는데, 그건 아마 이야기의 복잡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복잡하다는 것, 서로 다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들이 결국 맞아 떨어진다는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Crash'나 'Babel' 같은 영화에 비하자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영 떨어지는 것이다. 좀 우왕좌왕한다는 느낌. 허나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니 내 안목을 탓해야 할 일일까? 이 양반 영화는 소재, 주제가 전면에 너무도 뚜렷이 드러나니, 영화보는 재미를 많이 깍아 먹는다. 부담스럽다. 좀 더 평범한 주제로도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1973년 생이라니까, 좀 더 지켜보기로 한다. 그런데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미안....

영화에서 국적을 따지는 일이 점점 더 우스워지는 세상을 살고 있지만, 이 네 영화를 보니 확실히 독일적인 게 있긴 하다. 단지 언어의 문제나, 영화의 완성도 문제로 돌리기 힘든 '거시기'한 게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투박함'이 아닐까. 미국 영화의 그런 매끈함이 없는 것이다. 우선 우락부락하게 생겨먹은 언어 탓일 것이다. 왠지 연기나 화면마저 거칠게 느껴진다 (몇년 전 주로 개봉관에서 영화보던 시절에 본 Till Schweiger가 감독, 주연한 Barfuss (2005)란 영화는 헐리웃 스타일을 의도적으로 지향한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또 대개 리얼하다. 독일 배우들 중에서 잘 생기고, 예쁜 배우들 찾기가 힘들다. 네 영화 모두 그렇지만,그 중 하이라이트는 엠마와 막스의 베드신. 베드신에 대한 선입견을 깨주는 신영상의 탄생이라고 할 것이다. 알게 모르게 헐리웃스타일 영화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게, 범스페인어문화권 영화들 (스페인, 라틴 아메리카)을 보면 독일 영화들보다 훨씬 매끈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 쪽의 특징은 드라마 같은 영화라고나 할까. 아기자기하고 가벼우면서 깊이도 있는 그런 영화들이 많이 있다. 프랑스 영화들도 무겁지만 너무 폼을 잡는 것 같고, 한국 영화는 대개 치밀하지 못하다 (이야기, 연기, 연출, 효과 모두), 내가 본 일본 영화들은 대부분 너무 소박하고, 표면적이다. 기모노입고 게다를 신은 잰걸음의 여인네를 연상시킨다 (일본의 예술적 감수성은 다른 데서 더 뛰어나게 드러나는 건 아닌지. 음식, 그림, 건축 등. 그럼 한국은? 드라마?). 자, 다시 독일로. 독일영화들은 투박, 소박하고, 무거우면서, 너무 꾸미지 않아서 영화보는 재미는 좀 덜하고 대신 깊이는 있는 게, 딱 독일사람들 닮았다.

사람: 깊음/깊지 않음

깊은 사람. 사고, 인격, 학식, 마음씀씀이... 의 깊이. 당연히 깊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 (왜 당연? 추구할만한 '좋은' 가치는 대개 minority에게 부여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참으로 깊은 사람에겐 깊음/깊지않음이라는 difference가 새로운 정보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Informaiton

' information is a difference that makes a difference' (G. Bateson). 루만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무엇이 정보가 되는지 그 대상의 속성에서 찾을 수 없다. 차이를 표시하지 못하는 순간 정보로서의 가치는 사라진다. 대략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겠다. 다음은 'difference'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mark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참고로 이런 '정보'이해는 Goffman의 frame 개념과 친화성을 보인다. Bateson도 frame 개념을 썼고, Goffman도 frame을 정의하며 Bateson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둘이 어떻게 다른 지, 그 차이는 아직 표시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모른다는 얘기.ㅎㅎ).

Anthropologist/social scientist Gregory Bateson once defined information as ''a difference that makes a difference,'' meaning that not all differences are useful in advancing understanding or insight. If I'm looking for a taxi, for example, and both a yellow one and a white one stop in front of me, their color is an obvious difference, but not necessarily a useful difference in making my choice. I would look for more useful differences (i.e., information) to decide which one to hop into (which one's closer, which has the lowest rate, which has the smartest-looking driver at the wheel). If I were really looking for the best travel choice, I wouldn't even limit my category to taxis, but might consider buses, cars, trains, subways, walking, or even convincing my next meeting to come to me.

2008년 4월 17일 목요일

실화

Ego: ... 김치가 참 맛있네요...
Alter: 아유, 그 동안 김치도 한 번 챙겨드리지 못하고...

대화하기 쉽지 않다는... ㅠ.ㅠ

2008년 4월 10일 목요일

4.9. 총선을 지켜보며

18대 국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어제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좋지 않은 일로 선거율이 역대 최저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46%란다. 이건 한 마디로 민주주의 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지금 당장은 선거결과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느라 바쁘겠지만, 앞으로 이 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 한국 정치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선거 때만 되면 국민의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이다가, 선거만 끝나면 다시 그들의 정치, 그들끼리의 싸움으로 회귀하는 데 있다. 일단 뽑힌 이상 "선거율 최저" 이거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을 것임에 분명하다. 이 사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한, 아무리 신당창당, 복당, 이합집산 등을 통해 정치권이 재편된들 그건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 발전과 상관없는 그들만의 게임일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것 같다. 나의 경우 슬픈 예감이 틀린 적이 별로 없다.
선거 결과과 놓고 보면 우선 최악의 결과는 피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나라 의석이 200석에 육박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153석으로 과반을 겨우 넘겼으니 말이다 (전체 의석수 299). 물론 세계정당사에 꼽힐 코미디로 남을 '친박연대'라는 이름으로 당선된 이들이나, 무소속 당선자들이 대겨 한나라당으로 복당할 것임에 분명하니까, 지금보다 더 몸집이 큰 공룡정당이 될 것이다. 민주당이 81석을 얻은 것 나름 선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국적으로 골고루 의석을 얻은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다만 서울 내 총 48개 선거구 가운데 한나라당 후보들이 40곳을 석권했고 민주당이 7석 밖에 얻지 못했다는 점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나머지 하나는 문국현씨에게 돌아감). 강남에서 시작된 서울의 보수화가 서울 전역에 확대된 것일까. 노무현 정권때 지방분권화, 수도이전에 대한 반사작용인지 서울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생겨나는 건 아닌가. 지난 대선 때 분명히 드러난 '서울 지역주의' 경향이 분명해 지고 있음을 이번 총선이 확인해주고 있다. 경상도/전라도 등 지역주의가 옅어져 가고, 민주화나 정권 심판과 같은 큰 이슈도 없고, 또 서울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많아지면서, 확실히 서울 민심이 예전과 다르다. 어쩌면 서울 전체가 하나의 기득집단화되는 건 아닌지. 뉴타운과 특목고 공약 '약발'이 먹혔다는 분석이 있다.
안타까운 일은 민노당의 약세, 진보정당의 증발로 표현되는 진보세력의 후퇴다 . 그나마 민노당은 최소한의 의석은 확보했으나 (5석), 진보신당의 두 스타, 노회찬, 심상정이 떨어진 것은 못내 아쉽다. 그 정도 인물은 당선되야 하는 것 아닌가? 정당지지율도 2.94%에 머물러 0.06% 차이로 비례대표도 확보하지 못하다니, 참 운도 없다. 노회찬이 대표적 '어륀지족' 홍정욱에게 떨어진 것, 그것도 이른 바 서민층이 이 산다는 노원구에서. 참, 씁씁할 일이다. 어제 잠시 인터뷰 하는 것 보니 한국말도 아주 매끄럽지 않더만. 이제 국회의원도 미국에서 수입해다 쓰게 되는 모양이니, 한국정치도 이제야 세계화의 물결에 몸소 동참하게 되는것 같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고무적인 일은 문국현이 이재오를 이긴 것 (강기갑이 이방호를 누른 것은 그보다는 덜 짜릿하다). 이재오는 이명박의 오른팔 아닌던가. 문국현씨가 지역구 의제가 아닌 한반도대운하 반대를 선거 핵심 이슈로 내건 건 아주 잘 한 일이었다. 정치는 프레이밍이다. 자기 중심으로 이슈를 프레이밍해서 끌고 가는 사람이 이긴다 (이명박씨 서울 시장선거에서 청계천 복원 공약한 일이 대표적). 프레이밍을 바꾸지 못하는 상대방은 그 프레이밍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지역 연고가 없는 문국현씨가 지역일꾼이 되겠다고 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경고는 해야한다는 여론을 잘 읽은 것. 문국현씨는 대통령감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은 할 수 있어야 그나마 한국에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 (허나 생각할수록 노회찬, 심상정 낙선은 아쉬운 일이다.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확실히 지역색이 옅어지긴 했다. 민주화 이후 여러 정권을 경험하면서 그만큼 진보한 것이겠지만, 보수 진영이 한나라당으로 똘똘 뭉치지 않고 분화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선진자유당의 충청당이 되었지만, 계속 유지된다면 내 생각에 전라도에서도 먹힐 수 있을 것 같다. 어짜피 넓은 의미의 진보 세력이 100석도 되지 않으니 (민주 83, 민노 5, 창조 3) 앞으로 한국정치의 방향은 보수세력이 어떻게 재편되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박근혜계가 그나마 이명박과 각을 세우게 있는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처럼 설쳐댈 수 없게 된 것이다. 여의도정치를 무시하던 이명박씨는, 내가 간절하게 충고하건대, 좀 겸허하게 정치에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두려운 상사 유형이 무식하고 혹은 능력없고 열심히 하는 형이라고 하지 않던가. 현장에 가서 열심히 독려해서 건설 공기를 단축시킬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정치와 국정을 할 수는 없다. 내 생각에 이명박씨는 평생 정치, 국정과 건설을 구분하지 못할 것 같다. 내 슬픈 예감은 틀린 일이 없다니까.

2008년 4월 9일 수요일

참을 수 없는 '첫 술'의 가벼움

어제 한국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씨가 러시아 우주인 2명과 함께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날아갔다. '우주사회학'(^^)을 하는 친구가 있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발사 2분부터 발사 후 약 9분까지 서울방송이 중계한 화면을 보게 되었다. 고작 9분 방송을 본 것 뿐이지만 그것으로 전체 방송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진행에 참여한 이들의 발언 내용의 빈약함에 놀랐다. 그 이후 NASA에서 중계한 화면을 잠깐 보았는데, 한국방송의 빈약함의 정도가 심각한 지경임을 확인하고서는 화가 치미는 것이다. 아무리 NASA가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명색이 한국에서 셋 중 하나로 꼽히는 방송사이지 않은가. 서울방송의 이번 중계는 뭐랄까 한국 방송인의 존재가 얼마나 가벼운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참기 힘들 정도의... 우주선 발사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멘트란 고작 '예상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흰 불꽃이 아직도 보인다' 수준. 전문가란 사람도 한 사람 앉아 있었는데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다른 것들은 표절도 잘 하더니만, 왜 이런 것은 꿋꿋하게 무식한 방송이기를 고집하느냔 말이다. 발사 전후에 한국 언론들이 보여준 보도란 것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우주에 처음으로 간다는 사실만으로 뉴스가치는 충분할 것이고, 고산, 이소연 개인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지만, 아이가 엄마 치마자락 놓기를 두려워하는양 거기에만 머무르려고 하는 그 초딩적 행태가 문제인 것이다. 내가 그 중 하이라이트로 꼽는 기사가 이소연씨를 표현하는 세 단어가 '크레이지·섹시·쿨'이라고 전하는 것이다. 특종감이다, 특종. 누렇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독일의 그 Bild지도 차마 그런 내용을 기사에 담기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이후 기사들에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주에서는 이소연이 얼큰이가 된다느니, S라인이 된다느니...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 아니면 인터넷으로 한국 언론을 관찰하기 때문에 그런 '선정적' 기사들(의 제목)이 더 눈에 쉽게 띄는 것일까? 4.11.). 열흘간 18가지 실험을 진행하는 등 '우주관광' 이 아님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그 실험이란 것도 좀 억지스러워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눈길을 끌게 할 아이템이 부족했을까?), NASA에서 이소연씨를 우주인이 아니라 참여자라고 했다는게 뉴스가 되는 등, 뭔가 방어하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주인'을 '우주에 가 본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 같고, '무한한 우주 시대가 열렸다', '우주강국이 될 것이다'(이명박)라는 수사를 넘어서지 못한다. 장기적인 우주계획(개발, 탐사, 연구?)이 없진 않겠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도무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우주인 발사 프로젝트 공식사이트의 영문 버전의 내용이 형편 없다는 얘기를 전해들으며 영어 잘하는 그 많은 '어륀지족'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한탄한 적이 있었는데, '언론고시'를 통과한 하늘(SKY)에서 떨어진 그 많은 수재들은 도대체 다 어디 갔고, 또 그 많은 전문가들은 또 어디에서 무엇하고 있느냔 말이다. '전국민의 초딩화'가 조중동문, SBS 등 언론들의 사훈이나, 정당, 행정부, 전문가 집단의 정강, 정책, 이념이라도 된단 말인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고 위로하고도 싶지만, 그 첫술이 너무도 가벼워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기 힘든 그 너절한 '그래도 이름은 기사'들 사이에서 나름 묵직한 목소리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건 기록해 두어야한다.] (이 목록을 계속 수정해야 했다.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보기에 그들 중 '항공우주 전문가'라고 할만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팔방미인들 뿐...]
- 우주 소동에는 우주가 없다/ 김동광 [한겨레 21] [08.4.10]
- 우주인 사업은 꿈의 실현? 잘못된 짓거리?/ 이종필 [오마이뉴스] [08.4.12]
- 우주인 보도’ 열정과 냉소 사이 / 오철우 [한겨레, 편집국에서] ‘ [08.04.13.]
그 중 백미는
- "차라리 '쇼'라고 말하지 그랬니!"/ 강양구 [프레시안] (역시, 강 기자) (08.04.21)
이제 좀 더 근원적인 성찰도 등장한다.
- ‘돈 먹는 하마’ 유인 우주비행/ 김명진 [한겨레 21] (08.04. 24.)

2008년 4월 4일 금요일

상호작용, 성공적 대화?

사회학에서 등장하는 '상호작용'이라는 우리말 단어는 interaction, Interaktion의 번역어이다 (사실 그 아이디어의 저작권자는 Simmel 이고 그는 'Wechselwirkung'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게 미국에 건너가서 interaction이 되었고, 그것이 독일에 수입되어 Interaktion이 되었다. cf. Jaworski 1995). 허나 '상호작용'이 너무 물리적 -혹은 비인간적인 - 느낌을 주기 때문에 '교섭'(交涉)이라는 대체어를 제시한 학자도 있었다 (박영신). 'action'을 '작용'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색하긴 한 것 같다. 허나 inteaction은 대면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가리키니 (이는 루만의 정의일 뿐이지만, 다른 정의는 잘 모르니 패스), 우리말로는 그냥 '대화'라고 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상호작용 혹은 대화 상황의 가장 큰 특징은 "Zwang zum Sprechen"이다 (Sprechen = 언어를 매개로 이용하는 커뮤니케이션). 성공적인 대화참여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Zwang을 잘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선문답이 이어지는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침묵은 피해야 할 최대의 적이다 (영어의 '얼음깨기'(ice breaking)란 표현이 바로 그런 상황을 가리킨다). 침묵을 피하는 혹은 말해야하는 Zwang을 처리하는 방식은 개인적으로 혹은 문화권에 따라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얼마나 믿을만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우리사회에서는 식사시간에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고 한다 (이 경우는 Zwang zum Schweigen 되겠지만). 화법, 화술, 대화법 등등 많은 책들이 많이 나와있다는 것은 그 Zwang을 처리하기가 만만치 않은 일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초면 혹은 참여자들끼리 서로 잘 모를 때 오히려 얘기가 쉽게 풀리기도 한다.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대화 주제가 적지 않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잘 아는 사이에서도 대화의 서두는 대개 매끄럽게 풀린다. 안부를 묻고 그 동안에 개인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을 확인하는 것도 routine에 가깝게 자리잡혀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어려움은 그 이후에 발생한다. 화제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한 주제가 선택되고 후속 커뮤니케이션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의 연쇄가 만들어진다. 교집합이 적을 때 interaction의 어려움이 극대화된다. 그 해결 방식은? 대화의 실마리는 대개 교집합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 싫은 참여자는 침묵함으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고, 적극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화제를 꺼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자신(ego)의 경험, 지식을 대화의 화제로 anbieten하는 것이다. 후속 커뮤니케이션이 매끄럽게 진행되는지는 타자(alter)의 반응에 달려있다. 대화가 종료되기 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커뮤니케이션이 재생산되기 때문에 사회체계로서 대화는 존속하거나 사라질 뿐이지만, 대화 참여자들은 곧잘 대화 상황을 성공적/만족 혹은 실패/불만족 등으로 관찰, 기술한다. 어떤 경우에 대화가 성공적이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 우리는 매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겠지만, 인격과 인격이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닐까? (인격은 보통 person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 경우 '심리체계'로 보면 좋겠다. 심리체계와의 구조적 연동은 커뮤니케이션으로 구성된 대화가 가능하게 위한 조건이기도 하지만 해서 이미 구조적으로 연동되어있지만, '인격이 만난다고 할 때'는 그 이상 심리체계의 학습 그리고 변화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대화가 겉돈다는 것은 인격이 서로 교류하면서 학습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성공적인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공감대를 찾거나/찾도록 도와주거나, 학습할 준비 태세를 갖추거나/ 갖추게 하거나... 이런 점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Jaworski, Gary D. (1995), Simmel in early American sociology: Translation as social action, in: International Journal of Politics, Culture, and Society 8(3): 389-417


Jaworski, Gary D. (1997), Georg Simmel and the American Prospect, New York: SUN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