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본 영화가 적지 않고 그 중에는 평을 써보려고 찜해둔 것들도 있었는데 게으름을 피우는 통에 그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아져 버렸다. 그래서 이번엔 영화를 몇 개씩 묶어서 짧게 기록으로 남겨 볼까 한다. 어쩌다보니 흔치 않은 독일영화들을 여러 편 보게 되어서 영화평 묶음 첫 순서로 그것들을 선택했다. (덧붙임 1: 따옴표 안은 남이 써 논 영화평에서 가져온 부분이다). (덧붙임 2: 최근 영화중 최악은 단연 한국 영화들이다. 불공평한 게임이긴 하다. 외국영화는 볼만한 영화를 골라서 보고, '방화'는 단지 '방화'라는 이유로 '묻지마 관람'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한국영화 만나기 쉽지 않음을 소름끼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확인시켜 준 다음 세 영화의 제작자, 투자자, 스탭, 배우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라듸오 데이즈', '대한이, 민국씨' '용의주도 미스 신'. [덧붙임 2': 그나마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이후에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경기 장면 재현이 너무 부실했는데 제작비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영화를 '스포츠 영화'로 보면 실망하게 되겠지만, 감독 임순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인식틀에 대한 정면도전, 배우들의 고른 연기 등을 고려하면 볼만하다. 한국 관객들이 전형적으로 갖는 기대를 친절하게 충족시켜준 탓에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 같지만, 그 덕에 임순례 감독의 장점은 많이 잃어버렸다. 마지막 영화의 모델들이었던 당사자들의 인터뷰 화면을 집어 넣었는데 그것도 관객배려용인 것 같다. 감독이 '이번에도 관객에게 외면받으면 영화 계속하기 힘들 것 같아서'라고 얘기한 인터뷰를 읽은 것 같은데, 그 때문인지... ]).
(1) Vier Minuten [2006] Chris Kraus

한국어 제목으로 '포미니츠'라고 해서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영어 'Four Minutes'를 소리나는대로 옮긴 것어었다. '사분' 혹은 '4분', 이랬더라도 의미전달이 어렵긴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난 김에, 난 외국 영화제목 엉뚱하게 옮기기 1위로 '죽은 시인의 사회'를 꼽는다. '영화는 보지도 않고 'Society=사회'라는 것밖에 모르는 이가 번역한 결과인데, 그이는 분명 'How are you?' 다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Fine, thank you. And you?'로 답해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일 것이다. 영화 속
"Dead Poets Society"는 '죽은 시인 클럽' 정도가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죽은
시인들이 정식 회원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정식회원이 될 수 있는 그런 요상한 단체... 어찌되었건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이젠 매우 그럴듯하게 들린다. 익숙함의 힘이라니...).
재소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할머니 트라우드 크뤼거(Monica Bleitreu 분) 이야기. 이 크뤼거가 실존인물이고, 지난 2004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실화라고 생각하면 항상 영화가 달리 보인단 말이야... 제목은 이 할머니의 망아지 같은 젊은 제자 제니 폰 뢰벤(Hannah Herzsprung 분)의 마지막 연주에 걸린 시간이다. 슈만을 연주하다 제니 스스로 만들었다는 자유분방한, 세상에 둘도 없을 피아노 연주로 넘어간다 (그 연주 장면 하나 만큼은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잘 만들었고 잘 찍었다). 농담처럼 들리는 '피아노의 타악기화'가 가능함을 보여 준다 ('August Rush'에서는 기타의 타악기화를 볼 수 있음). 크뤼거 할머니는 레즈비언 (그러고보니 노년에 접어든 레즈비언은 이전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듯 하다. 우리 상상력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 여성을ㅡ그 여성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ㅡ잊지 못하는 크뤼거가 제니에게 스파크를 느끼는 장면이 있다. 파티장에서 예쁜 드레스를 입은 제니가 싫다는 크뤼거를 억지로 붙들고 땐스를 한 바탕 추기 시작하자, 처음엔 머뭇머뭇하고 싫다고 떼쓰던, 한 60살은 언니인 크뤼거도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등에 마주 얹는(아앗!!), 긴장감이 깃돌던 바로 그 장면." 음. 그래도 여성 간의 사랑은 내겐 여전히 낯설다 ('Brokeback Mountain'에서 그 남성들의 사랑에 몰입되지 않아 '안타까워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크뤼거는 인종주의자에 완벽한 중산층인데다가 독일 전전(前) 세대의 무의식을 대표하는 트라우마를 가졌고, 제니는 독일 전후(後) 세대가 가질 수 있는 신경증/강박증과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어째 하나도 공유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의 경험의 진술도 흥미진진했다"라고 누가 썼다. 음. 그렇게 깊은 뜻이? 진지한 주제를 너무도 진지하게 담아내니 재미가 덜하다. 이 사람들은, 뭐냐 그, 은근한 걸 모른다니까.
(2) Emmas Glück [2006] Sven Taddicken

우리말 제목은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스벤 타딕켄 감독). "목장에서 평화롭게 동물들을 기르며 살고 있던 엠마는 우연히 막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막스는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친구의 돈을 훔쳐 멕시코로 가려고 도망가던 중 자동차 사고로 인해 엠마의 목장에 들어오게 된다. 정리할 줄 모르는 엠마와 결벽증이 있는 막스의 만남은 그야말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다른 세계의 만남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 둘이 사랑에 빠진다. 서로의 다름이 서로를 이끌었나보다. 죽음을 눈 앞에 둔 막스는 엠마를 만나 얼마 남지 않은 삶 속에서도 행복을 잃지 않고, 엠마 역시 그런 막스를 통해 잠시나마 행복을 느끼게 된다. 원래 영화의 제목은 '엠마의 행복'인데 한국 개봉명은 저렇게 긴 제목이 되었다. 저 긴 제목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한 엠마'와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사이의 쉼표가 아닐까 싶다. 행복한 엠마는 돼지와 남자에게도 특별한 '행복'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설정이나 분위기는 코미디에 가까울 것 같지만, 왠걸 진지하다. 삶과 사랑, 행복과 죽음이 무엇인지 시종일관 묻게 하는 것이다. 다른 세 영화에 비해서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어서 그나마 가장 재미있게 보았다. 인생은 장르로 따지자면 희비극 혹은 블랙코미디에 가장 가깝지 않은가.
(3) Gegen die Wand [2004] Fatih Akin

우리말 제목: '미치고 싶을 때' (파티 아킨 감독). 독일영화로 18년만에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작품. 제목 '벽을 향해 돌진한다'는 어떤 의미?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벽을 향해 돌진하는 인물들이고, 남주인공 차이트는 정말 자동차로 벽을 들이받기도 한다. 영어 제목
은 어느 곳으로 향해간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독일어 제목보다는 좀더 중의적이다."
"<미치고 싶을 때>는 보수적 가족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한 이슬람교도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그가 연기하는 여주인공 시벨은 터키계 독일인으로 보수적인 가족을 벗어나기 위해 마약중독자인 터키계 남성과 위장 결혼을 한다. ... 시벨 케킬리는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여주인공처럼 극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나타났다. 길거리에서 캐스팅돼 몇번의 오디션 끝에 <미치고 싶을 때>에 출연한 케킬리는 그 영화가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 현대적인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틀 뒤 독일 타블로이드 신문은 그녀가 몇편의 포르노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 그러나 강단진 이 여배우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포르노로 시작해서 오스카로 가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낫다'는 명언을 남기며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었던 스캔들을 곧바로 잠재우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 때문에 가족과의 연을 끊고 연락을 두절한 채 살고 있다고 하니 영화 속 내용의 리얼함을 삶으로 보여준 셈이다. 주인공을 비롯해 배우들 연기가 전반적으로 좋았다. 그밖에 별로 남은 인상이 없다. 독일 내 터어키인들의 삶을 터이키계 독일인 감독이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주목받을만 했을 것이다. 영화 시작에서부터 틈틈이 등장하는 7인조 악단. 이스탄불 배경과 이국적 음악, 가사가 과체중에 시달리는 영화의 무게를 줄여주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왠지 '볼거리' 서비스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임권택 영화에서 외국 관객을 위해 보여주는 한국 풍광같은.
(4) Auf der anderen Seite [2007] Fatih Akin 
우리말 제목: <천국의 가장자리>. 'Gegen die Wand' 만든 감독. 본 영화로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단다. 상복이 있네. 터어키계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 소재주의. 어떤 의미에서 서구적 기대, 입맛에 맞춰주는... 김기덕 감독이 떠오른다. 영화제에서 상 잘 받는 것까지 닮았다. 너무 박한 평인가?
"터키 출신인 독문학과 교수 네잣은 아버지인 알리가 터키인 매춘 여성인 이테와 관계를 맺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리가 심장 마비로 쓰러진다. 퇴원 후 이테가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우연히 죽음을 당하자 아들인 네잣은 죄책감으로 인해 그녀의 딸인 아이텐을 찾으려고 터키 이스탄불을 방문하게 된다. 한편 터키 반정부 사회주의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이텐은 정부의 감시를 벗어나서 독일로 도망가고 그 곳에서 대학에서 우연히 만난 독일 여성인 로테와 연인 관계가 된다. 로테의 어머니인 수잔느는 이런 딸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아이텐은 결국 독일에서 체포가 되어 본국으로 송환되고 그런 아이텐의 석방을 위해서 로테는 이스탄불까지 쫓아간다." Gegen die Wand 에서 많이 나간 것 같지 않다. 배우들 연기 수준은 오히려 떨어졌는데, 아니 그렇게 보이는데, 그건 아마 이야기의 복잡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복잡하다는 것, 서로 다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들이 결국 맞아 떨어진다는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Crash'나 'Babel' 같은 영화에 비하자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영 떨어지는 것이다. 좀 우왕좌왕한다는 느낌. 허나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니 내 안목을 탓해야 할 일일까? 이 양반 영화는 소재, 주제가 전면에 너무도 뚜렷이 드러나니, 영화보는 재미를 많이 깍아 먹는다. 부담스럽다. 좀 더 평범한 주제로도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1973년 생이라니까, 좀 더 지켜보기로 한다. 그런데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미안....
영화에서 국적을 따지는 일이 점점 더 우스워지는 세상을 살고 있지만, 이 네 영화를 보니 확실히 독일적인 게 있긴 하다. 단지 언어의 문제나, 영화의 완성도 문제로 돌리기 힘든 '거시기'한 게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투박함'이 아닐까. 미국 영화의 그런 매끈함이 없는 것이다. 우선 우락부락하게 생겨먹은 언어 탓일 것이다. 왠지 연기나 화면마저 거칠게 느껴진다 (몇년 전 주로 개봉관에서 영화보던 시절에 본 Till Schweiger가 감독, 주연한 Barfuss (2005)란 영화는 헐리웃 스타일을 의도적으로 지향한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또 대개 리얼하다. 독일 배우들 중에서 잘 생기고, 예쁜 배우들 찾기가 힘들다. 네 영화 모두 그렇지만,그 중 하이라이트는 엠마와 막스의 베드신. 베드신에 대한 선입견을 깨주는 신영상의 탄생이라고 할 것이다. 알게 모르게 헐리웃스타일 영화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게, 범스페인어문화권 영화들 (스페인, 라틴 아메리카)을 보면 독일 영화들보다 훨씬 매끈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 쪽의 특징은 드라마 같은 영화라고나 할까. 아기자기하고 가벼우면서 깊이도 있는 그런 영화들이 많이 있다. 프랑스 영화들도 무겁지만 너무 폼을 잡는 것 같고, 한국 영화는 대개 치밀하지 못하다 (이야기, 연기, 연출, 효과 모두), 내가 본 일본 영화들은 대부분 너무 소박하고, 표면적이다. 기모노입고 게다를 신은 잰걸음의 여인네를 연상시킨다 (일본의 예술적 감수성은 다른 데서 더 뛰어나게 드러나는 건 아닌지. 음식, 그림, 건축 등. 그럼 한국은? 드라마?). 자, 다시 독일로. 독일영화들은 투박, 소박하고, 무거우면서, 너무 꾸미지 않아서 영화보는 재미는 좀 덜하고 대신 깊이는 있는 게, 딱 독일사람들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