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30일 토요일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조용필 1990)



최근 "1박2일"에 소개되어서 큰 방향을 일으키고 있는 옛노래. 박주연 작사, 조용필 작곡. 1990년에 발매된 12집에 실렸단다. 용필 형님 노래만 잘 하시는 게 아니라 작곡 실력도 상당하심. 여러 버전이 이미 유툽에 올라와 있으나 윗 라이브 영상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영심 누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언제적 영상일까...

다중 근대성, 중층 근대성 논의의 한계

多重 근대성, 重層 근대성 (역사적..) 논의가 갖는 장점이자 약점은 비교문명사적, 비교역사사회학적 접근이라는 점. 역사적으로 충실한 접근일 수 있겠으나 근대성/근대화가 가지고 있는 국제성, 세계성, 세계사회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근대성 기원에 "집착"하기 때문에 빚어진 사태가 아닌가 싶다. 근대성이 서구에서 기원했다는 서구중심주의자들, 유럽중심주의자들, 베버의 후예들에게 어떻게든 보기좋게 한 방 먹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문명, 종교, 국가 등 지역을 그 비교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 서구만이 근대성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깨고 싶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서구/비서구라는 도식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후기 혹은 2차 근대, 혹은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러도 좋을 당대를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학자라면 그런 접근이 불만족스러울 수 밖에 없다. 물론 '비서구인'으로 자긍심은 일부 회복할 수 있겠지만... 물론 근대성의 기원에 대한 비교역사적 접근은 그 나름대로 큰 가치를 지닌 분야이나, 당대와 앞으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런 기원에 대한 집착은 버릴 필요가 있다. 역사적 결정론, 경로의존적 사고 말이다. 근대화의 특징은 바로 세계적 차원으로 확산되었던 것이고 그런 변화는 과거와 질적으로 단절되는 혁명적 변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세계가 근대성의 틀로서 완전히 새롭게 재편되었고, 그 이전 역사는 그 구도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English/ modernity/ globalization

Egnlish/ Englishes 그리고 modernity/ modernities (multiple modernity[modernities] 혹은 varieties of modernity) 논의 구도와 또 비슷한 건 globalization과 world society 논의.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세계화'는 대개 일방향적, 서구화, 미국화 등으로 이해되고, 국가의 역할 축소 등등, 세계사회는 세계적 수렴과 분산 혹은 다양성의 혼재로 정의된다. 세계적 거버넌스가 증가하지만 그렇다고 국가 역할이 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국가가 세계화를 이끌어가는 주체 역할을 하기도 한다 등등. 세계화를 근대화론과 비교한다면 세계사회 논의는 신근대화론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큰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있지만, 다양성, 혼재라는 양상에 대한 기술만 놓고 보면 신근대화론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사이의 거리를 그리 멀지 않다. 그 중에서도 죤 마이어는 좀 보수적인 것 같고, 루만은 그보다는 좀 더 래디컬한 것 같고, 몇몇 체계이론가들은 그보다 한 발 더 나간 것 같고... (슈텔리를 그 대표주자로 본다). (...)

내용이나 표현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런 얘기들을 그냥 쏟아내는 일은 좀 무책임한 짓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중에라도 고쳐 볼 마음으로 당장 떠 오르는 생각을 쏟아놓는 것이다. 뭐, '인적드문' '블로그'가 갖는 장점이라고 보면 마음 편하겠다.

"아시안 잉글리시" (리처드 파월, 푸른숲, 2010)

"원어민 영어에서 벗어나라"는 제목으로 한겨레에 서평이 실렸다 (여기). 내 평소 지론이기도 해서 반갑게 읽었다. 길지 않으니 원문을 그냥 옮겨 놓는다.

"지은이는 영국 출신의 법학자 겸 언어학자다. <아시안 잉글리시>는 25년째 아시아에 살면서 이 지역을 구석구석 다닌 그의 눈에 비친 ‘영어 풍경’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은(아시아인들) 왜 그렇게 영어에 집착하지요?”라고 묻는 한 서양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침투한 영어는 싱글리시, 타이글리시, 콩글리시 같은 현지 영어를 만들어 냈다. 이런 영어는 문법과 어순이 어긋나고, 근거 없는 단어의 조합도 많지만 현지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의 한 대출회사는 ‘貸(대) me more’란 이상한 광고를 냈는데, 데미 무어를 연상한 중국인들에겐 그만한 광고가 없다. 자동차 핸들(handle)이란 표현을 영어권(steering wheel)에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국에선 일상용어다. ‘Let’to go for steamboat’(증기선 타러 가자)는 말레이시아에서 생선스튜 먹으러 가자는 표현이다. 그 나라 문화를 수혈받아 적응하고 변형된 ‘다른 영어’를 ‘틀린 영어’로 부를 수 없다는 게 지은이의 견해다. 한국에서 핸들이란 단어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원어민’의 문제이지, 한국 사람들 탓은 아니다. 영어권에선 거꾸로 아시아와 소통하기 위해 아시아 영어를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그러니 근거도 없는 원어민 영어나 표준 영어에서 해방될 것을 주문한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에 있지, 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익숙한 명제와 함께
."

p.s. 1) 당연히 번역서일 거라는 생각에 원전을 찾으려 '구글'해보았더니 왠걸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준다. 저작 소개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 "2009 (forthcoming): English in Asia, Asia in English. Seoul: Prounsoop" 물론 번역을 하긴 했겠지만 '푸른숲'이 기획해서 한글로 처음 출간된 책인 듯하다. 한국 출판계가 이런 '짓'도 하다니. 사실이라면 참 기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옆에 있다면 머릴 쓰다듬어 주고 싶다. ㅎㅎ

p.s. 2) 오래 전 IHT 기사에서 이젠 "English"가 아니라 "Englishes"라고 불러야 한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다. 재미있게도 English를 modernity로 바꾸면 기가막히게 비슷한 논의를 펼칠 수 있다. "modernity"와 "modernities" 사이의 논쟁 말이다. 흠. 이 얘긴 길어질 테니까 새로운 글에서...

2010년 10월 29일 금요일

운동의 2원칙: 힘 빼기, 핵심 동작 발견하기

귀국 후 주중엔 거의 매일 수영을 하고 있다. '출근'하는 공공도서관 바로 옆에 수영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수영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는데...

수영을 처음 배울 땐 물과 싸우려 든다. 빠져 죽지 않으려고... 물은 내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움의 대상이다. 겨우 뜨는 법을 배운 이후에도 물은 내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이겨내야 하는 대상이다. '선배들'이 몸에 힘을 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머리로만 이해할 뿐 체현해 내긴 쉽지 않다. 물이 극복하거나 이겨야 할 대상이 되지 않아야 비로소 몸에서 힘을 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큰 힘 들이지 않고 긴 시간 수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지'에 이르면 지상에서 이런 저런 무게에 짓눌린 내 몸이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물 속에서의 그 상황이 무척이나 반갑다.

물 속에서 속도를 내어 실제로 수영 실력을 쌓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인간의 몸은 물속에서 이동하기 위해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상태가 최적일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몸의 중심축을 몸의 진행방향에 맞추는 일이고 그 축이 좌우나 상하로 움직이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물이 내 몸을 타고서 흐를 때 편안하도록 내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머리다. 크롤영법('자유형')의 경우 고개를 최대한 안쪽으로 당겨서 시선이 바닥 정면이나 다리 쪽을 볼 수 있는 상태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머리와 고개를 잇는 축이 직선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또,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선 몸을 최대한 수면 가까이 그리고 수평으로 유지하는 게 낫다..

요약하자면 (1) 힘빼기 (2) 물 속에서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원칙을 발견할 것!

이런 기본적인 원리(?)는 다른 운동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특히, 힘 빼기! 투수들의 경우에도 몸상태가 '약간' 좋지 않을 때 오히려 투구내용이 오히려 더 좋다고 자주 얘기한다. 몸 상태가 너무 좋으면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씀!

어쩌면 이런 원리(라면 원리)는 운동 바깥 세상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도 기본적으로 유연할 필요가 있지만,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어디 학문이라고 다르겠는가. 평생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엄숙하게 대해서는 재미도 없고 또 잘 부러진다.

global (universal)/ local (specific)

근대 이후 역사에선 보편성을 지향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문명/ 야만 도식을 넘어서, 온인류, 인간에게 적용되는... (cf. '자연법' 논의). 보편성에 대한 각양각종 담론은 비록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최근 버전 중 하나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개인주의'는 근대 담론의 精髓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인주의에 대척하는 표현은 '집단주의'인가? collectivism? 낯설다). 개인주의는 대항해야 했던 집단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가족, 가문, 신분...), 그 관철 과정에서 개인주의는 또 다른 집단주의를 만들어 낸다. 대표적으로 내셔널리즘 (nationalism, 국가주의 혹 민족주의)! 국가의 이해과 글러벌 문화 관계에서 보면, 국가이익을 지향하는 담론이 글로벌 문화를 수용하기도 하고 (아니, 그런 과정에서 글로벌 문화는 비로소 형성되고)... 결과적으로 개인주의와 (새로운) 집단주의는 함께 성장한다. 그러 과정에서 개인주의, 집단주의 모두 진화한다. 2010년 대한민국의 국가주의는 박정희 시대의 그 민족주의와 같을 수 없는 것.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긴장관계는 아마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될 것인데, 그 양상 변화를 추적하는 일이 매우 흥미로울 것 같다. 1960, 70년대에 한국 정부가 '발주'했던 출산조절 '프로젝트'는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단지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는 인구증가 억제라는 정부 홍보가 먹혀들어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당시 출산을 계획했던 개인들의 이해관계, 판단, 결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국 정부는 최근엔 오히려 출산장려 정책을 펴고 있는데, 아직 그 '성과'가 신통찮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공존하면서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생명공학정책의 형성과정을 보면 그런 갈등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to be continued...

권력과 지식

„Auc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 (Leviathan, ch. 26)
홉스 형님께서 남긴 말씀이란다. 번역하자면... Autorität, nicht Wahrheit schafft das Recht 혹은 Authority, not truth, makes the law. 매우 현실적인 관찰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푸코 형님을 만난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단순한 도식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권력은 지식을 통해서, 지식은 권력을 통해서.... 규율하는 힘은 그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루만, 체계간의 관계, 개입...

루만은 한 체계가 다른 체계의 작동에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런 개입으로 인한 변화 가능성을 별로 높게 보지 않고, 또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체계외부의 영향이란 환경에서 찔러 보는 정도일 뿐이고 (irritieren), 체계의 경계를 유지시키는 작동은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명쾌하다. 과학의 경우 정치, 경제 등 외부 체계들이 각종 정책이나 자금지원 등을 통해서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주제 선정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지속은 결국 과학 내적 코드, 즉 진술의 참/거짓이란 코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이를 Willke 같은 학자는 정치체계의 다른 체계에 대한 (대표적으로 경제) 조정과 개입 가능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컨텍스트조정' (Kontextsteuerung) 같은 개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루만도 옳고, 빌케도 옳고, 케인즈주의자들도 옳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부 개입을 반대하는 이들의 유사과학적 진술을 배제하고, 실제 정치와 다른 체계의 관계에 대한 경험적 연구들은 대개 개입의 현실을 인정한다. 몇 년 전부터 배회하던 미국발 세계경제위기가 여러 학자들이 경고했던 것처럼 제2의 Black Friday 사태로 이어지지 않은 건 각국 정부들이 '적절히'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제는 "개입이냐 방임이냐"가 아니라,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 일 것이다. 그런 결정은 대개 정치, 행정에서 내려지고 학자들은 그 결정 전후에서 이러쿵 저러쿵할 뿐이다.
경제 못지 않게 체계의 자율성과 개입의 갈등이 문제가 되는 영역이 과학이다. 과학의 자율성, 연구와 학문의 자유는 절대적일 수 없다. 특히, 20세기 이후 과학이 가져 오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물론 이 같은 과학의 힘 증대는 과학 스스로 해낸 게 아니다. 국가, 자본이 없었다면?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젠 과학을 좀 그냥 내 버려두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도 있다 (U. Beck). 그런 대안은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 영역에 대한 사회적 (과학의 사회적 환경의) 개입은 불가피한 것 같다. 역시 문제는 어느 정도, 어떻게...
이 같은 근대화의 상태는 근대성에 대한 이상적, 규범적 담론이 설 자리를 크게 좁혔고, 마찬가지로 '다양한 근대성들' 같은 낭만적 주장 역시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세계사회의 내적 수렴이 대세인 것 같고, 국가간 지역간 차이는 단일한 근대성의 변이 정도로 이해되는 게 옳을 것 같다.
문제가 복잡해지고, 내 놓을 대안도 변변치 않으니, 그저 우리 시대는 복잡하고, 다양하고.. .등을 얘기하는 사회이론은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게 바로 우리 시대, 우리의 현실인데도...
사회이론, 거시 사회이론의 분화가 사회학의 대세인 것처럼 얘기하나, 내가 보기엔 '큰' 사회이론들은 대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런 현상은 세계사회, 세계화라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망함도 힘이 되나?

슬픔이 힘이 되고 분도도 힘이 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민망함, 자괴감도 혹 힘이 될까? 답은 "어느 정도..."에 있을 것이다.
바닥까지 떨어져야 비로소 딛고 올라 설 수 있으니, 어설픈 민망한, 자괴감은 물론 어설픈 슬픔, 분노로는 힘을 낼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아직 멀었다.

다시, 디지털도서관

앉아서 뚫어져라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직원들. 흠. 무얼 그리도 열심히들 보시는지. 그리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지켜보고만 있는 - 기도' 혹은 '어깨'들을 연상시키는 - '양복'입은 남성직원들. 공공기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하나 너무 노골적이라 보는 내가 당황스럽다.

2010년 10월 16일 토요일

Across The Universe (Rufus Wainwright)



오늘 '무한도전'을 재미있게 봤다. 녹화분량 걱정 탓인지 '오버'하는 모습이 가끔씩 걸리긴 했지만, 역시 '무도' '김태호'라는 얘길 할 수 있을... 'across universe'가 배경음악 중 하나로 들렸는데 낯선 목소리였다. 인터넷의 힘은 대단해서 마우스 몇 번 누르지 않고서 찾아낼 수 있었다. 원곡의 분위기를 모던한 방식으로 잘 살렸다 (2010년에 듣기에 원곡은 사실 좀 촌스럽거든). 가수는 낯설지만 이 영상은 이 음악이 OST였던 영화 'I am Sam'(2001)이다. 영화는 매우 재미있게 봤었는데 이런 음악이 깔렸던가, 새삼스럽다. Dakota Fanning의 야무진 모습도 기억에 남지만 Sean Penn의 연기력에 한 번 더 놀란 영화... ('Forrest Gump'[1994]의 더스틴 호프만 연기와 비교할 만한...).

ps) '텔레파시' 2편도 대부분 볼 수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속편 재미있기 어렵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음. 함께 보던 이들에게 '무도'를 과도하게 '찬양'한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2010년 10월 15일 금요일

본격문학/ 대중문학

충남대 오길영 교수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 중 일부를 옮겨 놓는다. 내가 생각하던 바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출처)

"(...) 대중 문학과 본격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놓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그 중 하나. 대중 문학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감수성에 호소하고 영합한다. 그러나 본격 문학은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불편하게 만든다.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대중의 감수성에 영합할 때, 그래서 얄팍한 인기를 얻고 책이 많이 팔리는 것에 만족할 때 작가는 통속 작가가 된다.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작가가 항상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를 나누는 근거가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근거 중 하나는, 역시 애매한 말이지만, 현실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냉정함, 무자비함, 냉철함이다. 내가 이해하는 글쓰기의 '유물론'이다.

작가가 견지하는 시선의 냉철함은 <엄마>나 <전화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신경숙 소설의 전매특허인 아름답게 포장된 미문의 '감상성'과는 거리가 멀다. 문체는 곧 사유의 표현이다. 신경숙 문체에서 때때로 느낄 수 있는 느끼할 정도의 아름다움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신경숙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사표'이다. 생활인으로서 작가가 '천사'인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정신'이 천사의 시각에 머문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작가들은 적어도 그들의 작품에서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일이지만, 인간의 삶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삶은 때로 아름답지만, 훨씬 더 자주 추하고, 혐오스럽고, 잔인하고, 역겹고, 위선적이고, 동물적이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의 그런 악마적 심성, 마성에 친숙해야 한다. 그걸 모르고서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런 판단은 생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작품에 드러난 작가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작가 개인의 성품이 천사표인지 악마표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신경숙 소설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악한'이 없다. 모두가 선하다. 이것은 비단 신경숙 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읽은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나는 제대로 된 악한을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최근 한국 영화에서 그나마 '악한'들을 만난다.)

나는 이 점이 한국 소설이 처한 곤경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라고 판단한다. 되풀이 말하지만 인간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깝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균열적이고, 위선적이다.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악마가 살고 있고, 아무리 악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한줌의 선함이 존재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애초에 '선'과 '악'의 구분조차 그렇게 손쉽게 나뉘지 않는다. 일급의 작가들은 주어진 '선'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선'이라고 주어진 것들이 과연 선한 것인지를 좋은 작가들은 따지고 묻는다. (...)"

2010년 10월 7일 목요일

호감, 친구, 소셜 네트워트...

"깊이 있는 사적인 교류는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많은 만남이 인터넷이나 문자 메시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글로 쓰면 인간성을 위장하기 쉽다. (…) 호감의 신호가 전해지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시선을 마주해야 한다. 개인적인 만남이 드물수록 우리의 자존심도 확신을 얻기 어렵다. (…) … 에서 벌인 설문조사를 보면, 95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친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에 비해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율은 88퍼센트이다. 친구가 가족을 앞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친구들은 서로 확실하게 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 사이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 프랑크 나우만, 호감의 법칙. (그책, 2009) [원제, Frank Naumann, Die Kunst der Sympathie, 2007]


소셜 네트워크라고 불리는 공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분명히 오프라인의 경우에 비해서 친절한 내용으로 채워지는 편이다. 친절하게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선 뭔가 모를 조급증, 불안함 같은 게 느껴진다. 그 친절함을 통해서 주고 받으려는 호감, 그리고 보장받으려는 자존감의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일 거다. 나우만씨 '말씀'처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시선을 교환할 때 비로소 그 호감의 '질'이 드러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난 트위터, 페이스북 따위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2010년 10월 4일 월요일

철학사는 철학자의 역사가 아니라 철학적 질문의 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학사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