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7일 금요일

'Hwaiting'?

Hwaiting이라... 낯설지만 왠지 친근하게 보이기도 하는 그런 단어 아닌가? 우연히 youtube에 달린 글 속에서 발견했다. 한국사람들이 영어로 쓴 것처럼 보이는 그런 글에서... 그렇다. '화이팅'이 한국어 단어로 거급 나서, 더 이상 어원 'fighting'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독특한 의미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린쥐'(organge)족들은 분명 아랫 입술을 윗 앞니 뒤에 살짝 가져다 붙이면서 발음해야 해야 '본토인'들이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어디 신성불가침 영어 단어에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느냐고 항변하겠지만, 자랑스런 대한 젊은이들은 이미 그런 강박에서 벗어난 듯 하다. 'Hwaiting'에 대해서 구글해 보니 적지 않은 수의 검색 결과가 나온다. Hwaiting의 어원에 대한 갑론을박까지.... (여기).

ps) 위에서 연결시켜 놓은 블로그에서도 발견되지만 'Hwaiting'의 경쟁상대가 원칙적으론 있다: 'Paiting' (화이팅 -> Hwaiting, 파이팅 -> Paiting). 하지만 '파이팅'의 영어화된 결과로서 'Paiting'이란 표현은 거의 쓰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파이팅/화이팅'의 경쟁에서 '파이팅'이 서서히 탈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런지...

2009년 2월 26일 목요일

남의 단상

"집회에 나가는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을 의심하는 것이 정치다."
"젊었을 때 쿨한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사소한 일에 흥분하면서 촌스럽게 살아라"

- 변영주 -

2009년 2월 19일 목요일

君子有三戒

"군자에게는 세 가지 경계해야 할 일이 있다. 젊을 때에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으므로 정욕[]을 경계해야 한다. 장년이 되어서는 혈기가 막 왕성해지므로 다툼[鬪]을 경계해야 한다. 노년이 되어서는 혈기가 이미 쇠약해졌으므로 탐욕[得]을 경계해야 한다."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

- <논어> 중 '계씨' 편 -

ps) 윗 문장 '君子有戒''나 君子有思 처럼, 숫자를 붙여서 덕목을 늘어 놓는 건 공자 생시엔 없던 풍조라고 한다 . 그렇다면 이런 문장은 후대에 덧붙인 것이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공자왈'의 공자는 많은 경우 그 역사적 인물 '공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예수 가라사대'의 그 '예수'가 그런 것처럼... 성경의 숫자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제자가 '열 둘'이라는 것, 또 복음서 처음에 나오는 예수님 족보와 거기에 등장하는 숫자는 후대에 덧붙여졌거나, 혹은 특정한 해석틀에 의해서 재구성된 것으로 보는 게 더 그럴 듯하다.

2009년 2월 18일 수요일

꼭 해야 할 일들들들...

(사진 위를 누른 후에라야 선명한 책 표지를 '감상'할 수 있다.)

'직업병'을 발동'시켜'보자. 자... 이런 류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사회학 운운할 필요도 없이 상식에 의존해서 보더라도 결론은 뻔하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해야 한다고 하는 일들, 그런 가능성이 너무 많아져서 방향감각을 잃기 쉬운 것이다. 다른 한 편, 예전에 나름대로 권위를 인정받던 정리기준, 분류기준이 더 이상 신뢰감을 못 주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각종 전집류, 백과서전: 세계문학전집, 세계사상전집, 아동문학전집, 가정대백과사전 등등. 이런 류의 두꺼운 책이나 전집이 여전히 나오고 있을 것 같지만, 분명히 예전의 그런 무게감은 더 이상 느끼기 힘들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추려주는 것은 나름 필요하고 고맙기도 한 일이지만, 위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 해야 할 일이 너무 분화되면서 그것 자체가 또 처리하기 힘든 복잡성을 만들어 낸다. 이 책들 중에서 어떤 책을 '꼭' 읽어야 할 지 골라주는 정보가 별도로 필요할 지도...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책들 중에서 꼭 읽어야 할 책들"

2009년 2월 16일 월요일

<번역의 탄생>(이희재 지음, 교양인, 2009)

연히 발견한 내용이 있어서 몇 주 전에 올린 아래 글을 보충한다. 다름 아닌 '번역의 사회학...'

Wolf, Michaela/ Fukari, Alexandra (eds.) (2007), Constructing a Sociology of Translation, Amsterdam / Philadelphia: John Benjamins Publishing Company

그 중 Theo Hermans 란 학자는 루만에 기초해서 '번역 체계'란 개념을 만들었나 보다 ('Translation, irritation and resonance'). 기회가 되면 좀 더 꼼꼼하게 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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략 1970,80년대 이후의 사회이론이나 철학사조 발전을 좇아가려면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말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그런 변화를 흔히 '언어적 전회(轉回)' (linguistic turn)라고 부른다. 비서구 출신 학자들에겐 언어와 관련해서 '별도로' 논쟁해야 할 주제가 있으니 바로 '번역'이다. 현대 학문이나 인식체계가 몽땅 유럽 전통 위에서 세워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정도니까, '번역'이라는 문제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예를 들어 세계학문 시장 주류에서 그들의 언어로 함께 논의해야 한다면서 사회학이론서를 영어로 출간했던 모대학의 사회학자도 한국어 번역서를 따로 내는 그런 현실. 허나 그 책은 한국인 학자가 썼을 뿐 완벽한 '번역서'였다, 여러 의미에서... 씁쓸한 맛을 남기는 '식민지' 지식인의 초상... ). 물론 번역은 서구 지식과 인식틀을 수입하던 그 때부터 부닥쳤던 실제적 문제였지 않은가 (아니 사실 번역 문제의 굳이 서구문화와 관련해서 볼 일만은 아니다. 19세기 말까지 수 천년 동안 한국인들의 사고는 99%이상 한자로 기록되어 전해져 오고 있었다). 허나 최근에야 '번역학'이나 '번역의 의미론 연구'라고 부를 그런 성찰적 담론이 최근 부쩍 늘었다 (도올 선생의 선견지명은 정말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82년 귀국해서 최초로 발표한 논문이 번역의 문제를 다룬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던가). 아, 그러고보니 '번역비평'이라는 표현도 드물지 않게 접하게 되는 것 같다. 언어와 번역은 사실 '오래된' 내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오늘 '로쟈'씨가 <번역의 탄생>이라는 새책을 소개한 글을 확인하고선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그런 시원함을 맛보아서 그 내용을 일부를 옮겨 놓는다 (출처).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것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개인적인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애초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이나 이종인 외 <번역은 내 운명>(즐거운상상, 2006) 같은 책을 생각했지만 조금 읽은 느낌으로는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에 더 가깝다. 해서 '20여 년간 번역 현장을 지켜 온 최고의 번역가가 절실한 고민을 이론으로 갈무리한 독창적 번역론!'이란 광고문구에서 '최고의 번역가'와 '독창적 번역론'에 괄호를 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읽을 만한 책으로 남을 듯싶다.

어제 책을 구하고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건 직역/의역의 문제를 다룬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인데, 번역이론이나 독단적인 주장에 기대지 않고 번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접근한 것이 좋았다. "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는 진단에서부터 '조리법'이나 '요리법'이란 한국어 대신에 '레시피(recipe)'라고 읽는 것이나 '자유주의'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굳이 '자유주의(liberalism)'이라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 번역하는 것 등의 사례 제시도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그러니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민지 대접을 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통을 살리기보다는 앞섰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습니다."란 지적에도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론 직역이나 의역이나 일장일단이 있는 만큼('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라는 선택지에서처럼)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편들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직역 편향이 좀 교정될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래야 균형이 좀 맞겠기 때문이다. (...)
저자가 사례로 들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이나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일본도 이제는 외국어 원문을 자기 말로 길들이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일 본은 개항 이후 외국에서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면서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들어 일본 경제가 확실히 도약하고 자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번역자, 출판사, 독자가 모두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가독성을 높이는 번역을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것이 번역문이고 어느 것이 창작문인지 일반인이 구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란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직역/의역의 문제가 경제적/문화적 자신감과 연동돼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보라!). 한갓 취향이나 이론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
<번역의 탄생>의 저자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어는 동적인 언어라서 명사나 명사구보다는 동사구 표현을 선호한다. 해서 '명사가 한국어보다 훨씬 많은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글이 어려워'진다.
(...)
[비트겐슈타인의] 아래 문장을 순차적으로 좀더 우리말에 가깝게 바꾸어본다.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라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이영철)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진중권)
침대에서 일어나는 수의적 행위와 나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는 불수의적 행위는 서로 다르다."

2009년 2월 15일 일요일

이명박과 오바마

이명박과 오바마의 공통점. 하나 있다. 둘 다,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거.

- 김어준 딴지 종신총수 -

2009년 2월 11일 수요일

욕망 - 문명

"동물의 자연상태는 오히려 욕망이 절제되어 있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아니라 문화적 경쟁의 산물이다"
- 도올 -

2MB 정권의 역사적 사명

지금까지 모든 정권은 나름대로 시대적, 역사적 소명을 잘 감당했다. '우리' 2MB정권은? 도대체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고 작심한, 천박, 철면피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들에게도 역사적 사명이 있을까? 굳이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의 자화상 보여주기' 정도?

- 권 교수와 나눈 대화 중에서

아, 생각해보니 예전에 2MB에 고마운 마음을 적어서 남기기까지 했다. 아마 역사의 발전에 대해서 가졌던 너무도 '나이브'한 내 낙관적 견해를 다시 돌아보게 해 준 데 대해서 감사했던듯...

蛇足

"흔히 '뱀에게는 다리가 없다' 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인간은 비늘이 없다' 고 말하지 않는다."

- 출처 미상 -

2009년 2월 9일 월요일

사진: 의외성 (3)




흑백사진은 단지 흑백이라는 이유만으로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그것만으로 익숙한 장면을 낯설게 하는 효과가 큰 탓이다. 윗 사진은 오늘 이른 아침 집 앞 풍경...

2009년 2월 2일 월요일

緊張感 - 必要惡

언제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가? (긴장감과 스트레스, '거의' 동의어 아닌가?). 어떤 일이 일상의 영역, 다른 표현으로 내 (일상적) 예측의 범위 (나와바리)를 넘어서서 일어났을 때... 일상이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다. 긴장감은 익숙하지 않은 일, 특히 내 통제권을 넘어서는 일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을 인식시키기 위한, 그리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심적 기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생리학적 설명 방식도 있을 테지만... 그건 원인이라기 보단 현상기술에 가까울테니까). 긴장감은 양면성 혹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과해도 또 너무 없어도 좋지 않은... 일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너무 좁으면 늘 긴장감, 스트레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고, 그렇다고 실제로 통제할 수도 없으면서 위기의식도 느끼지 않는 천하태평형도 凡人의 눈엔 문제인으로 보이는 것. 凡人들은 대개 일상의 영역 안에서 잘 살다가 가끔씩 위기의식을 느낀다. 외국에서 살면 우선 관청이나 행정적인 일이 생기면 긴장감을 느낀다. 체류연장 허가... 혹은 기숙사 연장, 기숙사 관리인의 트집, 학교에서 처리해야 할 행정적인 일들, 지도교수와의 만남... 그리곤 또 인간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이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나는 일이 생길 때. 그런 긴장감은 어떻게 해소될까? 한편으로 원인 자체가 없어지면 해결된다. 단순한 일일수록... 좀 복잡한 일들은 어떨까?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일들을 처리하는 대표적인 방식은 내 인식의 영역 밖으로 밀려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는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프레이밍, 혹은 재구성시키는 것.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부정적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를 들어 스스로를 문책하기, "그래, 내가 원래 그렇지 뭐...", 혹은 상대방 문책하기 "걔는 원래 그런 얘야". 그 반대로 원래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데서 안정감을 느끼는 심성을 가졌다면, 예기치 않은 사건에서도 밝은 발견하려 애쓰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기. 혹은 사건에 대한 해석을 '유리한' 쪽으로 바꾸기. 내 본업이 아닌 곳에서 일어난 일의 경우, '여긴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겐 주변적인 일일 뿐이야...'. 하지만 많은 경우엔 원인 자체를 해결해야 비로소 긴장감도 사라진다. 또 이런 긴장감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다. 긴장감/스트레스는 위기 상황을 알리는 구실도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여러 번 울궈먹는) 도서관 연체료 대박 글에서 쓴 것처럼 난 이미 일어난 일, 특히, 내가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은, 때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 심리적으로 - 잘 처리하는 편이다. 원인, 결과가 단순할 수록 사건 처리 속도는 빨리진다. 원인, 결과에 대한 진단이 불명확할수록, 긴장감은 오래 지속된다.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러도록 애를 써야 한다. 중요한 사람(^^)에게 보내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빨리 보내야만 한다. 그걸 처리하지 못해 지난 며칠간 긴장감에 눌려 있다. 하지만 그런 긴장감은 '집중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아, 그 놈의 집중력... 큰 변화 없는 생활을 오래할수록 (다시 말해, 평소에 긴장할 일이 적을 수록) 긴장해야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있지 않은가. 必要惡. 긴장감은 정말이지 필요악이다.

사전 찾기 놀이

"Philosophy 이전에 philology가 있다." 도올 선생이 이런 논지로 얘길 했는데, 내 생각과 꼭 같아 기억해 두고 있다. 언어에 대한 이해는 철학 혹은 어떤 학문을 하든지 그것에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만과 도올을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데, 그들은 늘 언어, 표현, 단어, 개념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어쨌거나 어원이나 언어에 '나름' 민감한 내 '아비투스'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때도 사전 찾기를 놀이처럼 즐겼으니까. 요새 내 놀이기구가 된 사전은 Oxford Advanced Leaner's Dictionay 디지탈 버전이다. 모르는 단어 찾을 때 펼쳐보지만 그 옆에 자세하게 나와있는 '어원' 설명을 보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전 속을 찾아 다닐 때까 많다. 사실은 방금 찾은 단어에 대한 어원 설명이 놀라와서 적으려다 앞설명이 길어진 것인데...
그 단어는 다름 아닌 'enough'! 중학교용 단어이지만... 부사로 쓰이는 enoughly 같은 표현이 꼭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니 'enough'만으로 enough하다 (하지만 google해보니 enoughly 용례가 꽤 있다. 문법적으로 틀린 것인지...). 하려던 얘기는 사실 enough 어원에 대한 것이다. "Old English genōg, of Germanic origin; related to Dutch genoeg and German genug." 독일어 genug -> 영어 enough.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런 게 사전 찾기가 놀이가 가끔씩 선사해 주는 보너스다.

전화요금 이야기

언젠가 도서관 연체료 '대박' 맞은 일을 쓴 일이 있었는데, 이번엔 전화비 대박을 맞았다. 전체 액수가 감당치 못할 정도로 큰 건 아니지만,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나왔으니 '대박'이라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니리라. 그동안 대개 전체 전화비에서 기본요금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 할 정도로 통신회사들 살림에 큰 도움 못 주는 고객이었는데, 어쩌다가... 더군다나 요샌 '유로'화의 무게가 무척이나 무거운 '시국'아인가. 화들짝 놀라 고지서를 확인해 보니 주범은 해외통화료였다. 왜 그 한국에 전화걸때마다 앞에 누르는 그 긴 번호 있잖은가. 워낙 제공자들이 많이 있고 요금체계가 자주 바뀌어서 난 수년 째 비교할 생각도 하지 않고 01070만 줄곧 사용하고 있었는데, 걔네들한테 뒤통수를 맞은 것. 확인해 보니 아마 지난 달 부터 그 회사 정책이 바뀌었는지 기본요금이 터무니 없이 비싸다. 한국 핸디에 전화를 걸 경우 가장 싼 번호가 분당 요금이 3,65 센트인데, 01070은 무려 75,35 센트를 받아 잡수신다. 그나마 통화시간이 길지 않아서 이 정도였지, 한 시간 정도 통화했더라면 그것만 50유로 가까이 나올 뻔했다. 어떤 통신회사는 그래서 통화시작시 기준요금을 알려주는 모양이다.
언젠가 친구와 관련 주제로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나는데, 독일은 요금체계가 꽤 복잡한 편이다. 알뜰한 독일사람들 정서에 맞고, 그래서 마케팅에 도움이 되는 건지, 기차표를 하나 끊으려고 해도 고려해야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비록 내겐 해당사항이 없지만 핸드폰 요금, 인터넷 접속 서비스 요금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극장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난 아직도 헷갈리는 roge, paket 구분 등등. 대신 얘네들한텐 '할인권'이나 '포인트 모으는' 문화는 그리 발달되어 있지 않다. 내 경우payback 카드가 있고, 그러다 보니 Kaufhof 5% 세일 이런 할인권을 받기도 하지만, 한국에 비하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 한국에선 요금 체계 자체는 덜 복잡한 대신 각종 할인 메카니즘은 발달한 듯하다. 요금 계산할 때 주섬 주섬 지갑에서 꺼내는 것들이 많다. 외국에서 오래 있다 온 '어리버리한' 사람들이나 제가격 주고 영화를 볼 것이다. 이유가 있을까? 경제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좀 다른 것일까? 가격체계 자체가 복잡한 경우,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열심히 정보를 모으고 공부도 해야 한다. '주체'가 강조되는 것. 허나 할인권은 남이 내게 베풀어준 혜택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국 사람들이 특별히 '주체적 결정권'에 덜 민감하고, 혜택 받는 데 익숙한가? 그것도 아닐테데... 모르겠다.
어찌되었거나. 갈수록 손해보지 않으려면 신경써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 그 덕분에 알게 모르게 내게도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겠지만 여하튼 늘 반갑지만은 않은 변화다. 예전엔 시내에 나가 가게 몇 군데만 돌아다녔으면 될 일을, 언젠가부터 ebay를 먼저 거치면서 독일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장사치들이 제안하는 가격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몇 유로라도 싸게 살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투입해야 하는, 양화되기 힘든 '노력' '시간'도 같이 고려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좀 오버하자면 현대 소비자들은 그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 놓은 framing 혹은 '매트릭스' (cf. 영화 '매트릭스') 속에서 소비'되고' 있는 건 아닌지. 미로 속에 들어 있는 쥐처럼...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갖고서 스스로 뭔가를 찾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그 길이란 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그런...
자본주의의 반드시 그런 식으로 작동해야 하는 것일까? 요즘 경제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내 놓는 대책이란 걸 보면, 저기 저 앞이 절벽인게 보이는데도 당장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페달을 돌리고 있는 자전거 운전자가 연상된다.
대량소비, 풍요로움, 문화산업, 환경문제... 사실 이런 것 6,70년대 논의가 끝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데, 도대체 우리는 역사와 과거 논의에서 무엇을 배운 것일까? 배울 생각이나 있는 것인가?
전화비 대박 맞아서 화김에 떠들다 너무 오버했다. 온 세상 사람을 싸잡아서... typisch kj! ㅎㅎ

ps) 내가 고려해야 할 전화요금 체계는 더 복잡했졌다. 공짜로 전화할 수 있는 사이트를 알게 된것. http://www.peterzahlt.de/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으나 그리 긴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오늘 우연히 다른 사람이 상기시켜 주었다. 그 홈페이지에서 전화 번호를 입력하면, 집전화로 얼마 동안 무료로 통화할 수 있다는... 그걸 가지고 좋아하는 건 어쩜 우리 속에서 던져주는 먹이 받아 먹으면서 만족해 하는 돼지나, 미로 속에서 내 갈 길은 내가 개척해 간다고 착각하는 쥐 같은 모양새는 아닌지...

2009년 2월 1일 일요일

사진: 의외성 (2)

자, 우선 사진 두 점을 감상해 보자 (출처는 여기)
김규식 Kim Gyoo Sik, “370gal. Fuel Tank”, 2007, Archival inkjet print


NOH Suntag, “좋은 살인 reallyGood, murder”, 2008, Lambda print

2008년 12월 6일 ~ 2009년 2월 15일까지 아트선재센터 열리는 '39(2)'라는 전시회에 나온 작품 중 일부다.

"전시제목인 “39조 2항”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명기한 헌법 제 2장 중에서 제 39조의 2항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조문에서 인용하였다. 헌법은 39조 1항에서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라고 명기하였고, 2항의 조문은 군복무에 대한 헌법상의 보상규정으로 원용되어 왔다. 이번 전시는 ‘헌법에 명시된 한 줄의 문장으로 개인의 불이익에 대한 통제가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의구심이 담겨있다. 5 명의 참여작가들도 한국의 군사문화와 전쟁의 이미지를 그들의 작업 안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아이러니와 수수께끼를 담아내고 있다. 이 전시가 한국 사회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하나로 군사문화와 전쟁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39조 2항”을 전시의 제목으로 인용하였다."

윗 사진은 나도 어릴 때 만들곤 하던 '조립 모델'의 일부를 크게 찍어 논 것이다 (사진 제목을 보니 전투기 연료통이다.) (아, 그리고 크다는 건 실제로 전시회로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 ). '사진'. (독일말로) harmlos해보이는 것들도 저렇게 과장해서 크게 보여주면 낯설게 느껴진다. 숨어있던 다른 의미가 쑥 올라오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미군부대 개방행사에 놀러온 아이와 최대한 친절하고 다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는 두 병사가 찍은 기념 사진인(것 같은)데 (나도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제1비행단 개방 행사에 참여), 이상하게 기괴스럽게 느껴지지 않은가? 어둑한 배경 때문일까? 저 아이에게 지금 자기가 앉아 있는 저 조종사 자리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살상무기인 '전투기', 그 조정석은 때로는 아이들도 앉아 볼 수 있는 그런 친근한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게 사진의 힘이라면 힘이겠다. 낯설게 하기. 그래서 평소에 감춰전 있던 의미를 드러내기.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