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가? (긴장감과 스트레스, '거의' 동의어 아닌가?). 어떤 일이 일상의 영역, 다른 표현으로 내 (일상적) 예측의 범위 (나와바리)를 넘어서서 일어났을 때... 일상이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다. 긴장감은 익숙하지 않은 일, 특히 내 통제권을 넘어서는 일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을 인식시키기 위한, 그리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심적 기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생리학적 설명 방식도 있을 테지만... 그건 원인이라기 보단 현상기술에 가까울테니까). 긴장감은 양면성 혹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과해도 또 너무 없어도 좋지 않은... 일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너무 좁으면 늘 긴장감, 스트레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고, 그렇다고 실제로 통제할 수도 없으면서 위기의식도 느끼지 않는 천하태평형도 凡人의 눈엔 문제인으로 보이는 것. 凡人들은 대개 일상의 영역 안에서 잘 살다가 가끔씩 위기의식을 느낀다. 외국에서 살면 우선 관청이나 행정적인 일이 생기면 긴장감을 느낀다. 체류연장 허가... 혹은 기숙사 연장, 기숙사 관리인의 트집, 학교에서 처리해야 할 행정적인 일들, 지도교수와의 만남... 그리곤 또 인간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이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나는 일이 생길 때. 그런 긴장감은 어떻게 해소될까? 한편으로 원인 자체가 없어지면 해결된다. 단순한 일일수록... 좀 복잡한 일들은 어떨까?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일들을 처리하는 대표적인 방식은 내 인식의 영역 밖으로 밀려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는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프레이밍, 혹은 재구성시키는 것.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부정적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를 들어 스스로를 문책하기, "그래, 내가 원래 그렇지 뭐...", 혹은 상대방 문책하기 "걔는 원래 그런 얘야". 그 반대로 원래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데서 안정감을 느끼는 심성을 가졌다면, 예기치 않은 사건에서도 밝은 발견하려 애쓰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기. 혹은 사건에 대한 해석을 '유리한' 쪽으로 바꾸기. 내 본업이 아닌 곳에서 일어난 일의 경우, '여긴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겐 주변적인 일일 뿐이야...'. 하지만 많은 경우엔 원인 자체를 해결해야 비로소 긴장감도 사라진다. 또 이런 긴장감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다. 긴장감/스트레스는 위기 상황을 알리는 구실도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여러 번 울궈먹는) 도서관 연체료 대박 글에서 쓴 것처럼 난 이미 일어난 일, 특히, 내가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은, 때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 심리적으로 - 잘 처리하는 편이다. 원인, 결과가 단순할 수록 사건 처리 속도는 빨리진다. 원인, 결과에 대한 진단이 불명확할수록, 긴장감은 오래 지속된다.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러도록 애를 써야 한다. 중요한 사람(^^)에게 보내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빨리 보내야만 한다. 그걸 처리하지 못해 지난 며칠간 긴장감에 눌려 있다. 하지만 그런 긴장감은 '집중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아, 그 놈의 집중력... 큰 변화 없는 생활을 오래할수록 (다시 말해, 평소에 긴장할 일이 적을 수록) 긴장해야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있지 않은가. 必要惡. 긴장감은 정말이지 필요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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