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16일 월요일

<번역의 탄생>(이희재 지음, 교양인, 2009)

연히 발견한 내용이 있어서 몇 주 전에 올린 아래 글을 보충한다. 다름 아닌 '번역의 사회학...'

Wolf, Michaela/ Fukari, Alexandra (eds.) (2007), Constructing a Sociology of Translation, Amsterdam / Philadelphia: John Benjamins Publishing Company

그 중 Theo Hermans 란 학자는 루만에 기초해서 '번역 체계'란 개념을 만들었나 보다 ('Translation, irritation and resonance'). 기회가 되면 좀 더 꼼꼼하게 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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략 1970,80년대 이후의 사회이론이나 철학사조 발전을 좇아가려면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말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그런 변화를 흔히 '언어적 전회(轉回)' (linguistic turn)라고 부른다. 비서구 출신 학자들에겐 언어와 관련해서 '별도로' 논쟁해야 할 주제가 있으니 바로 '번역'이다. 현대 학문이나 인식체계가 몽땅 유럽 전통 위에서 세워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정도니까, '번역'이라는 문제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예를 들어 세계학문 시장 주류에서 그들의 언어로 함께 논의해야 한다면서 사회학이론서를 영어로 출간했던 모대학의 사회학자도 한국어 번역서를 따로 내는 그런 현실. 허나 그 책은 한국인 학자가 썼을 뿐 완벽한 '번역서'였다, 여러 의미에서... 씁쓸한 맛을 남기는 '식민지' 지식인의 초상... ). 물론 번역은 서구 지식과 인식틀을 수입하던 그 때부터 부닥쳤던 실제적 문제였지 않은가 (아니 사실 번역 문제의 굳이 서구문화와 관련해서 볼 일만은 아니다. 19세기 말까지 수 천년 동안 한국인들의 사고는 99%이상 한자로 기록되어 전해져 오고 있었다). 허나 최근에야 '번역학'이나 '번역의 의미론 연구'라고 부를 그런 성찰적 담론이 최근 부쩍 늘었다 (도올 선생의 선견지명은 정말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82년 귀국해서 최초로 발표한 논문이 번역의 문제를 다룬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던가). 아, 그러고보니 '번역비평'이라는 표현도 드물지 않게 접하게 되는 것 같다. 언어와 번역은 사실 '오래된' 내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오늘 '로쟈'씨가 <번역의 탄생>이라는 새책을 소개한 글을 확인하고선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그런 시원함을 맛보아서 그 내용을 일부를 옮겨 놓는다 (출처).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것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개인적인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애초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이나 이종인 외 <번역은 내 운명>(즐거운상상, 2006) 같은 책을 생각했지만 조금 읽은 느낌으로는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에 더 가깝다. 해서 '20여 년간 번역 현장을 지켜 온 최고의 번역가가 절실한 고민을 이론으로 갈무리한 독창적 번역론!'이란 광고문구에서 '최고의 번역가'와 '독창적 번역론'에 괄호를 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읽을 만한 책으로 남을 듯싶다.

어제 책을 구하고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건 직역/의역의 문제를 다룬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인데, 번역이론이나 독단적인 주장에 기대지 않고 번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접근한 것이 좋았다. "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는 진단에서부터 '조리법'이나 '요리법'이란 한국어 대신에 '레시피(recipe)'라고 읽는 것이나 '자유주의'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굳이 '자유주의(liberalism)'이라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 번역하는 것 등의 사례 제시도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그러니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민지 대접을 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통을 살리기보다는 앞섰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습니다."란 지적에도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론 직역이나 의역이나 일장일단이 있는 만큼('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라는 선택지에서처럼)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편들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직역 편향이 좀 교정될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래야 균형이 좀 맞겠기 때문이다. (...)
저자가 사례로 들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이나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일본도 이제는 외국어 원문을 자기 말로 길들이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일 본은 개항 이후 외국에서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면서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들어 일본 경제가 확실히 도약하고 자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번역자, 출판사, 독자가 모두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가독성을 높이는 번역을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것이 번역문이고 어느 것이 창작문인지 일반인이 구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란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직역/의역의 문제가 경제적/문화적 자신감과 연동돼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보라!). 한갓 취향이나 이론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
<번역의 탄생>의 저자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어는 동적인 언어라서 명사나 명사구보다는 동사구 표현을 선호한다. 해서 '명사가 한국어보다 훨씬 많은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글이 어려워'진다.
(...)
[비트겐슈타인의] 아래 문장을 순차적으로 좀더 우리말에 가깝게 바꾸어본다.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라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이영철)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진중권)
침대에서 일어나는 수의적 행위와 나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는 불수의적 행위는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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