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모임 게시판에 올린 글을 옮겨 놓는다. flower란 id를 쓰시는 분에게서 "무거워,,, 너무 무거워서 같이 들기도 힘들어영~"이란 반응을 이끌어 낸 무척이나 무거운 글이다. 그 글을 썼을 때 심리 상태를 반영한 탓일텐데, 참고로 지금은 훨씬 가벼워졌다. 다른 게 아닌 바로 묵상나눔의 결과로.좀 더 정리해서 쓸까 하다가 그랬다간 좀처럼 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붓, 아니 자판 가는대로 써 보려고 합니다. (...)
오늘은 지난 주 목사님과 '기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후 든 생각을 써 보려고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방식을 여러 가지 기준으로 구별해 볼 수 있을텐데, 그 중에 '성경신학'적 묵상과 '조직신학'적 묵상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신학적 묵상'이 성경 구절이나 성경 속 특정 사건에 대한 관심, 의문을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조직신학적 묵상'은 서 '기도' '선교' 처럼 좀 더 추상적인 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사실 출발점만 다를 뿐 두 방식 모두 결국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구절에서 시작을 하더라도, 결국 기존 기독교 신앙 이해와 연결되어야 하고, 주제에서 출발을 하더라도 특정 구절 묵상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니까요.
저는 사회학 중에서도 거시사회이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터라 기독교 신앙, 성경을 접근할 때도 비슷한 방식을 취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쓴 표현을 따르자면 '조직신학적 묵상'에 가깝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요. 돌이켜 보면 중고등시절부터 이미 그런 경향이 강했던 것 같아요. 사회학을 전공하고, 유학까지 올 마음먹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고, 니클라스 루만이나 김용옥 같은 학자에게 끌리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회 현상 (즉, 커뮤니케이션, 소통)을 관찰하더라도 거시 역사적 혹은 문명사적 관점에서 해석해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식론적으로는 상대주의, 혹은 구성주의 지향이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 두 가지,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경향을 띠기도 합니다. 절대적인 주장, 단순한 주장에 대한 부정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책에 씌여져있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지나친 단순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거시적 사고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지만, 도식화하기 쉽습니다. 어쨌든 제가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성경신학적 묵상'이든 '조직신학적 묵상'이든 '말씀 묵상'에 충실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 경우 성경묵상을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꾼은 - 어쩌면 '조직신학적' 관심 탓이기도 하겠지만 - 성경 텍스트를 떠나 컨텍스트로 쏠리는 관심입니다. 거시이론가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름을 남긴 대가들은 대개 매우 사소해 보이는 역사적 단서, 텍스트를 치밀하게 추적해 들어가면서 큰 진술을 만들어 냅니다. 대가를 어설프게 흉내내는 이들이 대개 '추상적이다', '근거가 빈약하다'라는 비판을 받지요. 그런 면에서 저는 '텍스트'를 좀 더 진지하게 대하고, 텍스트를 벗어나려는 유혹을 참을 필요가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지금 논문을 쓰면서 겪는 어려움이 바로 그런 류입니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엔 이런 내용이 나오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 역시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자기관찰 혹은 성찰의 내용이 나왔네요.
그리하야... 결론은... 글쎄요... 기도에 대한 제 관심은 한 마디로 '도대체 기도란 무엇인가'입니다. '도대체'가 붙는 까닭은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 본질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그런 관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도'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진술이 있으니 설령 그 모든 구절을 모두 묵상한다고 하더라도 '기도의 본질은 이것이다'라고 쉽게 얘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윗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단계를 거치고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얻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저는 출발점으로 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도에 대해서 언급된 구절을 찾아보았습니다. 창세기 20장,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허나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기도'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기도'로 이해될 수 있는 표현이 그 전에도 여러 번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창세기 20장을 전후로 해서 '기도'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창세기에서 '기도'는 무엇인가? 역시 큰 질문입니다만.... 어쩌면 "아브라함에게 기도란 무엇이었을까?" 정도로 좁혀도 좋겠네요. 네, 그게 좋겠습니다.
묵상시간을 내는지의 여부는 바람직한 영적/심적 상태와 공부 리듬을 찾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지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 또 다른 지표가 있네요. 새벽기도.... 그 '기도'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