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0일 금요일

한결 같은 사람

동서고금, 사람의 정신세계, 의식체계를 헤아리기 어렵다는 인식은 늘 있었을 터이다. 몇 가지 경구만 기억하더라도...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인간은 소우주다”라고 했고, 우리 조상들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였다(여기서 '길'은 어른 키에 해당하는 길이라고...).오죽 설명하기가 궁색했으면 프로이트 형님이 '무의식'론을 들고 나왔으며, 바로 같은 이유로 루만 선생은 인간과 의식체계를 사회 밖으로 나가 주십시요 하고 밀어내지 않았던가. 의사소통은 그런 복잡한 의식체계 혹은 소우주가 최소 두 개 이상이 만나는 상황이다. 그러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건 신비로운 현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터.
학술서나 매스미디어를 통한 관찰이긴 하지만 근대로 넘어오면서 의사소통의 복잡성은 더 어려워졌다 (인류 역사는 복잡성 증가의 역사다. 열역학 제2법칙을 원용하면 사회적 엔트로피의 증가....). 신분사회에선 복잡성을 줄여주는 장치들이 좀 더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옷 - 옷감, 색깔, 장신구 - 등으로 신분이나 지위가 외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었고 [Kleidung als Medium der Kommunikation?],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곧 의사소통의 내용도 각본처럼 짜여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신분제 사회의 잔재라고 강하게 얘기하긴 힘들겠으나, 의사소통에서 기대하는 바가 분명했던 상황이 내 어릴 적 기억으로 남아았는데... 어른들이 묻는다. 네 아버지 성함/존함이 어떻게 되시는고? 내가 '네, 정 0자 0자 쓰십니다'라고 대답하면, '고놈 가정교육 잘 받았네'라고 평가를 내리시던... 오랫동안 그런 신분적, 위계적 방식을 통해서 복잡성을 줄이려 했다면, 근대는 바로 그 복잡성의 신분적 제한을 풀어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의사소통의 복잡성은 이제 개인화나 정보 전달 매체의 발달 과 더불어 이제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물론 - ethnomethodologists나 대화분석가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밝혀내었듯이 - 제한된 복잡성만을 감내할 수 있는 상호작용 체계는 후속 의사소통의 연결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을 구조화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나 그 구조란 것도 '예전'과 비교할때 훨씬 더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해서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근대 이후 인간관계의 맨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개,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키우는 심리나 갓난아이를 좋아하는 심리 뒷켠엔 어쩌면 그런 경우 의사소통의 진행을 - 그렇다 의사소통 -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을 것이다. 애완동물과 아기의 공통점은? 그들이 전달하는 정보를 내가 취사선택해서 의사소통에 이용할 수 있다는 점. 일상적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 그러니 아이들이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예전의 그 사랑스럽기만 하던 존재로 볼 수 없게 되는 것. 그러니 평생 나를 '배반'하지 않는 건 동물 밖에 없다, 愛玩동물로 분류되는... (cf. 푸코가 '말과 사물' 서문에 인용한 그 고대 중국의 동물분류법).
아기나 애완동물과의 커뮤니케이션만큼은 아니더라도 의사소통 상황을 통제하려는 건 인지상정의 영역에 속한다. 대화상대가 내가 예측 가능한 범위에 있을 때 그 통제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아니, 예측가능성이 너무 높으면 금새 지루해지는 단점도 있으니 - 곧, 권태(倦怠), 권태기로 가는 지름길 - 바람직한 경우는 어쩌면 예측가능/예측불가능 그 경계 위에서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아닐지.
내가 주로 놀라는 경우는 내 예측이 배신당할 때. 예컨대 상대방이 내가 한 말이나 내가 빚어낸 상황에 대해서 '엽기적'인 해석을 내 놓거나 네기 상대의 행동의 의미와 이유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경우. 이해의 지평을 수평선으로 상정한다면 서로 다른 두 지평이 만나는 접점은 아애 없거나, 기껏해야 하나밖에 생기지 않는다. 서로 이해한다는 건 순간 순간 서로 이해의 지평을 이동해서 접점을 만들어 내는 행위다. 내가 원하지 않는 위치에서 그 접점이 만들어지는 경우를 우린 '오해'라고 표현한다.
'한결 같은 사람'은 대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예측가능해서 지루한 사람'이나 '버려도 좋을 나쁜 품성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이란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같진 않다는 말씀.복잡성은 높아지고 그만큼 예측가능성이 떨어지며, 견고한 모든 것이 녹아 내리는 근대적 조건에서 '한결 같은 사람'은 참 고마운 존재다. '결'이라... 참 느낌이 좋은 우리말 아닌가? 그 결이 하나라는 것...
끝으로... 내가 한결 같을 수 있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한결같지 않은 타인의 반응에 대해서 일희일비하지 않기'다. '타인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을 최대한 관대하게 해석하기'를 포함해서... 상대는 나름대로 스스로를 일관성있게,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편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반대로 내 나름의 일관성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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