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6일 월요일

조선왕조 오백년, 그 끈질긴 생명력의 원천은?

왕조도 왕조 나름이겠으나 조선처럼 500여년이나 지속된 왕조는 분명히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 식자들이 대개 한 두마디씩 보태는 모양인데... 언젠가 도올 선생의 강의에 강사로 초청되었던 나름 유학에 일가견이 있다던 조순 선생은 대단한 원인이 있었다기 보단 그저 나라를 무너뜨릴만한 외부 침략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요약해 놓고 보니 빈약하기 그지 없는 논리지만, 그 강연 맥락에선 이해될만한 발언이었다. 어쨌든 그보다는 한국 유교문화, 특히 유교에 기초한 정치문화에서 원인을 찾는 학자들이 많이 있는 듯하다. 촛불시위 정국에서 언젠가 이 블로그에서 소개했던 일본 교토대학원 오구라 기조 교수의 발언을 다시 인용해 두자면...

'조선왕조에서 성균관이라는 국립중앙유교대학의 엘리트들은 왕에게 직소할 일이 있으면 광화문에 모여 데모를 해 잘못한 왕을 바로잡았으며, 그런 전통은 지금도 살아 있다'... '일본의 유교는 혁명사상이 없는 데 비해 한국의 유교 전통은 윗사람이 도덕성이 없을 때 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특징이 있다'... '한국인의 질서적인 세계관에서는 어떤 관계이든 윗사람에게 도덕성을 요구한다. 즉, 한국 사람에게 미국의 존재는 너무 크니까, 큰 영향력을 주는 존재이니까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 한겨레에서 확인한 기사에서 한홍구 교수는 이렇게 얘기한다.

"조선시대에는 사간원을 두어 왕의 잘못을 비판하게 했다. 꼭 사간원 소속이 아니라도 누구나 왕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었다. 혼자 짖다가는 ‘깨갱’할 수 있으니, 여럿이 짖고, 또 잘 짖는지 서로 감시하며 짖어대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국가기구 틀 내에서 정부에 대해 유일하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던 인권위원회를 마비시키려 한다. 사간원을 없애버린 연산군 죽고 처음 있는 일이다.

조선이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의 하나는 관료들이 사직소를 잘 썼던 데 있었던 것은 아닐까? 때로 그들은 지부상소라고 해서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가 상소를 올렸다. 내 말 듣지 않으려거든 이 도끼로 내 목을 치라는 뜻이다. 그러니 그 말이 개그콘서트의 ‘독한 놈들’보다 훨씬 더 독했다. 예컨대 남명 조식은 ‘단성소’에서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를 구중궁궐 속의 한낱 과부로, 명종을 유약한 고아라 부르며 준엄하게 비판했다. 최익현의 상소는 전권을 장악한 임금의 아비 대원군을 가차 없이 때려 그를 낙마시켰다. 최익현이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을 때 스승 이항로가 준 교훈은 “임금의 신하가 되어 마땅히 상소를 해야 할 사건이 있게 마련인데, 입을 꼭 다물고 묵살하며 그냥 국록이나 타 먹는 일은 매우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었다. 군왕과 그 부모까지 정조준하던 조선시대 보수주의자들의 높은 기개는 ‘형님’이 한마디만 하면 옴짝달싹 못하는 요즘 세태와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 이러니 이 땅에 보수가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문명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도올 선생도 조선 창건 이념을 정립한 정도전 등을 언급하면서 '유교적 합리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왕조 지속 뿐 아니라 현대 한국이 이룬 성취의 근본을 이루는 힘이었음을 강조한다. 조선시대 집권세력을 당쟁이나 일삼고, 중국을 섬기던 이들로, 그리고 백성들을 저항이라고 해볼 줄 몰랐던 순한 민족으로 봐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더 많다. 역사 해석에서 엄밀한 인과적 설명을 기대하긴 힘들지만 적어도 '더 그럴듯한/ 덜 그럴듯한' 해석을 구분할 수는 있지 않을까? 조선시대, 특히 유교문화, 유교적 세계관 공부에 도전해 볼 이유가 가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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