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6일 토요일

분노와 영성

'착하다'는 단어는 분명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 최근엔 더욱 더... '착한 가격' 같은 표현을 떠올려 보시라- 시종일관 착하기만한 경우라면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시종일관 따뜻하고, 착한 영화... 으- 얼마나 지루할까.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착하기만 한 사람? 그 경우는 대개 착하다는 게 순진, 순박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 그다지 긍정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면서 동시에 착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히 바람직한 성품으로 봐야 할 것이다. 착한 영화가 재미가 없는 건 인생의 깊은 차원을 건드리지 못하면서 한 두마디로 표현될 수 있는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 아니던가. 그런 깊이와 착함을 동시에 갖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착함의 다른 편엔 어떤 상태가 있을까? 화냄, 분노가 아닐까? 착하게만 살기 힘들기에 때로는 분노를 감추면서, 가끔씩은 그렇게 쌓아 놓은 분노를 표출하면서 살게 된다. 화를 너무 억누르면 화병이 된다고도 하면서 지나치지 않는다면 화를 내는 게 필요하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건 화를 내는 일이 반복되면 습관으로 자리잡는 것 같다. 습관성 화냄, 욱하기! 영성을 가꾸는 일에 가장 큰 적이 바로 이것들인 것 같다. 깊은 영성을 지닌 상태는 순진무구와 거리가 멀다. 순진무구, 착함, 분노, 화냄... 이런 감정들을 너머 선 차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영성을 추구한다면서 가끔씩 분노의 상태로 내려와 보는 일.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일이라 이해할 수는 있으나 피해야 할 모양이다. 화를 쌓아두는 것도, 또 가끔씩 표출하는 것도 모두 습관이 되니까. '거룩한 분노'라는 좀 어색한 표현을 쓰면서 명백히 잘못된 행동, 대상에 대해서 분출하는 분노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기도 하지만 습관이 되는 '분노'에는 그런 유형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 습관(화)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뭐 눈엔 뭐만 보인다', '프레이밍', '하비투스'(habitus) 등이다. 분노를 부르는 행동에 대해서 바로 내뱉는 말이나 글에선 좋은 기운, 착한 기운을 느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옳지 않은 권력에 대한 비판에서도... 그 대안을 굳이 표현하자면 영성에 기초한 비판, 착한 비판, 독기를 뺀 비판 정도가 되겠다. 그런 비판만이 모두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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