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같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사무실 책상 앞으로 왔다. 모처럼 여유를 가지고 뒤를 돌아본다. 이런 글은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은 페이스북에는 적절치 않다. 정체모를 관찰자들이 많은 트위터도 적절치 않고, 컴퓨터로 접근할 수 없어서 긴 글 쓰기가 힘들고 일상 얘기, 단상에 어울리는 카카오스토리도 패스. 독자가 너무 적긴 하지만 그래도 이 공간이 가장 편하다.
1.
지난 주 발표한 짧은 논문에서... 루만을 소개하면서 '우연'이란 표현을 썼다. 사회과학 역시 과학인지라 (자연과학보다는 덜 강하지만 어쨌든) 인과적 설명을 요구 혹은 기대하기 때문이다. 루만에게서 인과성을 포기되는 것인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지? 좀 더 공부해 봐야겠다. "Funktion und Kausalität"이라는 초기 논문을 우선 봐야할 것 같고...
'우연'에 대해서 불편하게 느끼는 건 과학 커뮤니케이션 뿐 아니다. 종교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은 결과가 긍정적일 때 대개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한다.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을 때 역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응답'으로 설명한다. 누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그건 형식논리적 설명은 될지언정 실체적 설명은 못된다. 특히 부정적 결과가 이러질 때면 뭔가 더 센 설명을 찾게되는데 그럴 때 자주 동원되는 논리가 '죄'원인론이다. 내 죄, 네 죄, 부모의 죄 등등... 누구의 죄든 그 죄 때문에 이런 원치 않는 결과가 나왔다는 얘기... 훨씬 더 그럴듯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설명에 혹한다.
그 원인을 타인의 죄로 전가하는 습성이 집단적으로 적용되는 경우 '희생양'이라고 한다. 지금 닥친 불행한 현실의 원인을 누군가의 잘못으로 전가하는 습성 말이다.
모든 일에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할까? 이유모름 (원인불명)... 이 그렇게 불편한가?
2.
그 논문에서 한국어 제목을 달고서 그 제목을 영어로 한 번 표현해 봤다.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온 반응이 재미있다. 영어 제목을 한국어 제목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어로 쓴 논문이니 영어 제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도 될 법한데... 기준점이 영어가 되는 것. 사실 그 영어 제목이 영어 학술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자주 쓰이는 것이긴 하니까... 시선이 갈 수는 있었겠지만.... 어쩜 처음부터 영어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고 떠올린 한국어 제목의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았던지... 아님 내 영어 실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던지... 어쨌든, 한국어 논문에서 영어 제목을 바꾸라고 하지 않고 한국어 제목을 바꾸라는 반응이 좀 재미있었다.
3.
결혼 전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러려고 애쓰는 편이지만 예전의 자신만만함은 더 이상 없다.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그 시간이 다가올수록... 남편으로서 부족함을 느낄수록... 더 이상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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