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2일 월요일

폭풍같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사무실 책상 앞으로 왔다. 모처럼 여유를 가지고 뒤를 돌아본다. 이런 글은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은 페이스북에는 적절치 않다. 정체모를 관찰자들이 많은 트위터도 적절치 않고, 컴퓨터로 접근할 수 없어서 긴 글 쓰기가 힘들고 일상 얘기, 단상에 어울리는 카카오스토리도 패스. 독자가 너무 적긴 하지만 그래도 이 공간이 가장 편하다.

1.

지난 주 발표한 짧은 논문에서... 루만을 소개하면서 '우연'이란 표현을 썼다. 사회과학 역시 과학인지라 (자연과학보다는 덜 강하지만 어쨌든) 인과적 설명을 요구 혹은 기대하기 때문이다. 루만에게서 인과성을 포기되는 것인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지? 좀 더 공부해 봐야겠다. "Funktion und Kausalität"이라는 초기 논문을 우선 봐야할 것 같고...

'우연'에 대해서 불편하게 느끼는 건 과학 커뮤니케이션 뿐 아니다. 종교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은 결과가 긍정적일 때 대개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한다.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을 때 역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응답'으로 설명한다. 누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그건 형식논리적 설명은 될지언정 실체적 설명은 못된다. 특히 부정적 결과가 이러질 때면 뭔가 더 센 설명을 찾게되는데 그럴 때 자주 동원되는 논리가 '죄'원인론이다. 내 죄, 네 죄, 부모의 죄 등등... 누구의 죄든 그 죄 때문에 이런 원치 않는 결과가 나왔다는 얘기... 훨씬 더 그럴듯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설명에 혹한다.

그 원인을 타인의 죄로 전가하는 습성이 집단적으로 적용되는 경우 '희생양'이라고 한다. 지금 닥친 불행한 현실의 원인을 누군가의 잘못으로 전가하는 습성 말이다.

모든 일에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할까? 이유모름 (원인불명)... 이 그렇게 불편한가?

2.

그 논문에서 한국어 제목을 달고서 그 제목을 영어로 한 번 표현해 봤다.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온 반응이 재미있다. 영어 제목을 한국어 제목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어로 쓴 논문이니 영어 제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도 될 법한데... 기준점이 영어가 되는 것. 사실 그 영어 제목이 영어 학술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자주 쓰이는 것이긴 하니까... 시선이 갈 수는 있었겠지만.... 어쩜 처음부터 영어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고 떠올린 한국어 제목의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았던지... 아님 내 영어 실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던지... 어쨌든, 한국어 논문에서 영어 제목을 바꾸라고 하지 않고 한국어 제목을 바꾸라는 반응이 좀 재미있었다.

3.
결혼 전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러려고 애쓰는 편이지만 예전의 자신만만함은 더 이상 없다.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그 시간이 다가올수록... 남편으로서 부족함을 느낄수록... 더 이상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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