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9일 월요일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축하 인사 이후 이름을 묻는 경우가 많다. "'로아'이므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흔히... "무슨 뜻?" 내 답은... "뜻이 없으므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바꿔야 할 것 같다. "뜻이 없는 게 뜻이므니다..." 무슨 얘기냐면... 자식의 이름에 특정한 의미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일이 바람직한지 생각해 보자는 '뜻'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지어줄지 오랫 동안 고민했다. 검색도 해보고 책도 찾아보고 자문도 구해보고... 이번에 발견한 놀라운 점 하나는 여전히 작명소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 작명소식 이름 풀이를 볼 것 같으면... 참 기가막힌다. 대부분 한자 풀이에 의존하는데... 획수 등... 사소해 보이는 요소에도 대단한 의미를 부여한다.
또 다른 경우는... 특정한 가치, 지향하는 바를 이름에 드러내는 경우다. '기쁨, '맑음' 등 순우리말식 이름들, "하영=하나님께 영광"처럼 어구 첫 낱말의 모음, '평화', '화평'처럼 한자 단어로 만들어진 이름 등. 이 경우에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자체로 충분히 값진 이름이다. 사실 우리 역시 이름을 이렇게 지으려다 결국 실패했다. 이름의 '뜻'과 함께 '개성''특별함'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 둘을 만족시키기 힘들었던 것. 차츰 '뜻'을 포기하고 '개성'있고, "어감" 좋은 이름 찾기로 바뀌었다. 어감이 좋은 낱말들을 적어 놓고 이런 저런 조합을 시도해 본 것. "로아"는 그러다가 툭 튀어나온 이름이다.
그러다보니... 뜻이 있을 수 없는데... 굳이 뜻을 찾자니... '뜻이 없는게 뜻이다', '아이는 부모의 뜻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로 논리가 비약한 것...

아니... 이름 짓기에 대해서 좀 다르게 접근하자는 생각이 아애 없진 않았다. 예를 들어 서양의 경우 이름을 훨씬 더 소박하게 짓는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 성경에서 나온 이름들, 성인의 이름들, 조상의 이름들... 이름의 다양성이 적은 편이다. 한국의 경우보다 "姓"이 더 다양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독일 영감님의 경우 첫 딸 이름을 "한나"(Hannah)로 지었는데 자신이 좋아했던 여성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이름에서 가져왔다고... 거기에 비해서 한국의 이름들이 갖는 의미는 거창한 편이다. 이름짓기의 사회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니 어느 쪽이 반드시 좋다 혹은 나쁘다라고 판단할 일만은 아니지만... 여하튼... 서양의 전통을 원용해서 두 할아버지나 할머니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와서 조합해 볼 생각까지 했으니, 이름짓기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했음은 분명하다.

이름짓기에도 유행이 있어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데, 그런 흐름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싶기도 했다. 독특하지만 알파벳으로 써도 쉽게 부를 수 있는...

'로아'로 마음이 기운 상태에서 끝까지 나를 고민하게 만든 건 이름 어두에 오는 '리을' 발음이었다. 현대 한국어에선 외래어나 북한말 표기 외에는 어두 리을을 인정하지 않는다. 두음법칙! 다행이 姓이 아니라 이름의 어두라 공식적으로 제한을 받진 않지만 이름만 부를 경우에 발음상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는 것. 어두 '리을' 발음에 약한 - 어저면 두음법칙 탓에  훈련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 한국인의 언어습관 탓에 '로아'가 '노아'로 들리기 십상이라는... 그런데 '반갑게도'^^ 'ㄹ'발음을 강화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는 글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었다. 심지어 이런 얘기까지...

"리을 발음은 생기운과 멸기운을 아우르는 소리이므로 세상과 공감하고 이웃과 연대하는 소리입니다.현재의 한국인은 건강을 위해서라도 초성 ‘R’과 ‘L’을 배워서 발음할 필요가 있습니다.한국인의 상호 연대하고 남 생각하는 마음은 초성 리을 발음을 발성하는데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건 분명 오버지만... 어두 '리을' 발음을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용하게 만든 1930년대에 정립되어 이후 남한에서만 관철된 '두음법칙'에 문제가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어두 리을 발음을 차츰 포기하면서 실제로 그 발음 훈련이  덜 되고, 덜 민감하게 되면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 생긴다. 우선 외국어 학습시에... 대표적으로 'R'과 'L'. 사실 우리말에서도 'ㄹ'발음이 어두, 어미에 있을 때 다르게 발음된다고 한다 (어두 R, 어미 L). 그런 미묘한 차이를 어두 'ㄹ'을 적게 사용하면서 놓치게 된다는 것.  두번째 문제는 노래할 때... 장르를 불문하고 한국어로 부르는 노래에서 리을 발음이 잘 안들리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그래서인지 성악가들 중에선 語頭 리을을 과장해서 발음하는 경우들도 있고... 어찌되었건 '로아'처럼 이름에 어두 'ㄹ'을 사용면서 한국어 발음과 발음표기의 현실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로아를 로마자로 표기하면 'Loa'보다는 'Roa'가 더 정확할 것이다. 'L'은 한국어 어미 발음에 더 어울린다고 하니... 예를 들어 '할'은 'hal'이지만 '라'는 'ra'로 표기하는게 더 어울린다는... 이런 견해에 따르면 '랄'은 'ral'되겠다. 오늘 검색하니 '로아'란 한국 여가수가 있었네. 헐!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로마자 이름을 'Loa"로 표기하고 있다. 또 '로아'는 국내 여성브랜드명이기도 하고,  흔하진 않지만 사람, 반려동물 이름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정로아'라는 이름이 '정로환'을 연상시킬 수 있음을, 그래서 놀림을 받을 수 있음을 지적한 지인들도 있다. 한 친구는 처음 듣는 '정로환' 역사까지 곁들여서... 일본군이 러시아와 전쟁 때 물갈이로 인한 배탈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든 환약이라나 뭐라나...  또 이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 사례를 언급하면서 '정로아'라는 이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쩌면 무난하고 평범하지 않은 이름을 지을 때 피할 수 없는 위험성이다. 하지만 좋다는 쪽이 수적으로는 훨씬 더 많고, 그 자체로서 해괴한 이름이 아니니 부모로서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려고 한다. 설령 특이한 이름이라 하더라도 자주 부르면 그 사람과 일치가 되면서 그 이름이 자연스럽게 들린다. 대표적인 예가 안성기. 한글 이름만을 생각하면 매우 튀지만 자주 접하니 '성기'라는 이름이 어색하거나 이상하게 들리지 않잖은가? 어쩌면 전국의 'O성기'들은 안성기 씨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을 지도... 물론 그럼에도 개명을 고려하고 있는 "성기"씨들도 많겠지만... 지인이 예로 든 경우는 '이세기'. '이새끼'로 놀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좀 윗 세대들에게 '이세기'라는 이름은 - 안성기 만큼은 아니지만 - 낯설지 않다. 국회의원, 체육부장관을 지닌 정치인 '이세기' 때문이다.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가장 먼저 드러내고 - 처음 만나자마자 서로 이름을 주고 받는다 -, 또  평생 그 사람을 따라다니기에 - 누구를 연상할 때 이름을 먼저 떠올린다 - 좀 보수적으로 결정하는게 원칙적으론 옳다. 이름으로 놀림을 받을 싹을 키우지 않는 게 백번 낫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정로아'면 충분히 보수적이다. 걱정 붙들어 매시라.

영어권에서 Roa 는 이상한(?) 축약어 외에 - "return on assets": 총자산 이익률,  "right occipitoanterior" 우후두전위, 우후두전위태위(右後頭前位胎位) - (라틴계?) 이름으로도 쓰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영문 예문을 보니 전부 남자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또 한 번 헐...  가까운 예로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으로 기아 타이거즈 투수였던 아킬리노 로페즈 두번째 이름이 '로아'였다. Aquilino Roa Lopez. ㅠㅠ

스페인인어로 roa란 단어는 '(배의 뱃머리를 이루는) 나무[쇠]로 만든 굵고 굽은 부분, 선수재'란 뜻을 가지고 있고, 칠레 도시 중에 'Hanga Roa'가 있다고 한다.

한자로 '로아'는 '露雅' (이슬 로, 맑을-고상할 아)를 쓸 생각인데, 재미있게도 露雅로 검색해 보니 주로 중국어권 웹사이트들이 결과로 나오는데 대개 여성스러운 만화 캐릭터나 화장품에 대한 것이다. 이건 나쁘지 않네.^^

너무 많은 걸 고려하다간 이름을 지을 수 없다. 그냥 밀어붙여야지... 누구보다 애기 엄마가 강력하게 원하니...

정로아, Jung Roa, 鄭露雅... 혹은, 정안 로아, Jung-An Roa, 鄭安 露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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