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이쾌대 1913∼65]


척 보니 화가의 자화상이다. 손에 들고 있는 도구들을 보라... 노골적이다. 그 화가는 그런데 인상이 참 강하다. 게다가 드러나 보이는 팔뚝도 굵다.
그런데 배경과 화가를 동시에 보면 왠지 어색하다. 어울리지 않는다. 저런 풍경이 보이는 곳에 화가가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물화의 풍경치곤 매우 현란하다. 풍경화와 자화상이 합쳐진 듯하다. 구도를 보면 모나리자가 연상되기도 한다.
내용적으로... 서양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부)조화가 보인다. 중절모와 팔레트가 '신식' 분위기라면 두루마기와 뒷배경은 전형적인 '구식'이다. 또 강한 남성미 풍기는 얼굴과 붓을 들고 있는 '시츄에이션'이 어울리지 않는다. 5일장에 나섰다 얼떨결에 화가용 소품을 들고 사진을 찍은 시골 청년 풍모 아닌가. 물론 주저함이라곤 모를 것 같은 듯한 단호한 표정이 그런 어색함을 덮어 주긴 하지만... 그러고보니 인물의 선을 굵고 진하게 표현한 것은 '약간' 프라다 칼로의 어떤 그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무리봐도 전체구도는 '모나리자'에서 빌려온 것 같다.



이름이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어울린다. 이쾌대. 호방하다. 이 그림은 1948, 1949 그 무렵에 그려졌다니 해방 후 미군정기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쏟아져 들어온 서구의 문물에 저항하려는 화가의 결기의 표현이리라. 좌파 미술인 단체에서 활동하는 등 당대 현실에 깊숙이 개입했다가 한국전쟁후 월북했고,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소외되었다 1988년에서야 해금되었다고 한다. 남한에 남겨 둔 그의 아내가 그림을 보관하고 있어서 해금 후에 이런 그림이 볼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하고... 언제 그렸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래 그림은 훨씬 더 '화가' 자화상 같다. 좀 더 우울해 보이고... '숱검댕이' 눈썹은 여전하지만... 옷도 역시 여전히 한복이네...

이 화가의 '존재'에 대해선... 덕수궁에서 열리는 전시회, "근대를 묻다 -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 를 알리는 기사에서 알게 되었다.



p.s.) 지난 10월 열린 '대구의 근대미술'전에서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실물을 볼 수 있었다. 역시 그림은 실물로 봐야 제 맛이다. 실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질량감, 터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를 극장의 큰 화면에서 볼 때 감흥이 다른 것처럼...

2008년 12월 26일 금요일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

'가깝고도 먼 나라'는 그 동안 일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주로 쓰였다. 허나 생각해보면 한국인 대부분은 일본보다 오히려 중국에 대해서 더 적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먼 과거 속의 중국이 아닌 '현대' 중국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해 말이다. 싸이버 공간에서는 중국을 희화하하는 이른 바 '대륙'의 엽기적 사진 혹은 사건들이 주의를 끌 뿐이고, 제도권 언론에서도 실체나 그 심각성을 확인하기 힘든 중국의 혐한증을 크게 보도하는 등, 현대 중국에 대한 우리의 담론은 그 깊이가 너무 얕은 것은 아닌지... 경제는 자본주의, 정치는 사회주의, 경제 발전 속도가 빠르지만 여전히 우리 70년대 수준의 '후진국', 그 정도 아닌가? 반면, 다른 극단도 있다. 중국이 좇아오고 있고, 우리를 곧 추월할 것이라는... 위기 없이는 굶어 죽는 정치 커뮤니케이션은 노무현 정부 때 바로 '우리 턱 밑까지 쫓아 온 중국'이라는 그림을 그리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이런 이중적인 시각은 중국에서 살면서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나 잠시 중국을 방문, '구경'하고 온 이들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대개 이미 알고 있는 것에 기초하여 낯선 것을 이해하게 되는데, 중국에 대한 국민적 프레이밍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최근에 한국을 방문했다는 왕후이(49) 중국 칭화대 교수(중문학)의 한겨례 인터뷰 내용을 일부 옮겨 둔다.

오늘날 중국 정부가 펼치는 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사회주의가 국가·사회의 운영원리가 아니라, 국가 이데올로기가 됐다는 지적은 타당하지요.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오늘날의 중국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의 유산이 현실을 규정하는 힘으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중국 사회에 작용하는 사회주의의 유산으로 △세계 경제로부터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경제 시스템 △국제관계의 대외적 자주성 △제3세계와의 우호·선린 관계 △평등·자율성에 대한 인민의 강한 요구 등을 꼽았다. 이 가운데 인민들 사이에 깊게 뿌리내린 평등에 대한 감수성은 급격한 시장개혁을 통해 양산된 부패와 불평등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왕 교수는 진단했다
."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불확실성의 확실성: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시대

두바이에 실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이명박 정부도 출범 초에 그랬지만 지난 수 년동안 언론들, 정치인들이 두바이 찬가를 얼마나 불러댔던가. 아무리 불확실성, 위험, 무지가 근대사회의 본원적 특징이라고 치더라도 요즘은 그 정도가 너무도 심해서 도대체 전문가들이 내리는 어떤 진단, 전망도 믿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원유값이 급등했을때 CNN은 이 급등세가 조만간에 진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내용을 보도했으나 현실은 정확히 그 반대로 진행되었다. 불과 수 주 후에 유가가 급락했던 것. 최근 온세계를 흔들고 있던 미국발 금융위기의 규모를 제대로 예측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고... '미네르바'의 비관적 예언에 찬사를 보낸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외환 유동성 위기는 지나간 듯한 분위기다.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마샬 버만이 책 제목으로 써서 유명해진 '공산당 선언'의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우리말로 그 책 제목은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굳어진 것은 모두 사라진다' 정도로 번역되는 모양인데, 독일어 원문은 덜 재미있다. "Alles Ständische und Stehende verdampft" "Ständische und Stehende"를 동어반복처럼 이해했나 보다. 사실 ständisch 는 사전에 따르면 '신분제적'이란 뜻 밖에 없는데... 실제로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독일어 원문에서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엔 대개 "모든 신분적인 것과 정지해 있는 것은 사라지고" "신분적인 요소와 정체된 것은 모두 사라지고" 등으로, 영어에서 번역할 경우엔 "딱딱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정도로 옮기는 것 같다.

'공산당 선언' 해당 부분을 독문과 영문으로 옮겨 놓는다.

"Alles Ständische und Stehende verdampft, alles Heilige wird entweiht, und die Menschen sind endlich gezwungen, ihre Lebensstellung, ihre gegenseitigen Beziehungen mit nüchternen Augen anzusehe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all that is holy is profaned, and man is at last compelled to face with sober senses his real condition of life and his relations with his kind."

反美食 同志

정윤수씨 블로그에 이어 내가 거의 매일 들르다시피하는 블로그가 생겼는데 그 이름이 '로쟈의 저공비행'. 주인장은 러시아문학전공자인 듯하지만, 주로 한국에서 새로 출간되는 인문학, 문학 쪽 서적에 대한 정보와 소감을 열심히 올리고 있다. 물론 개인 블로그인만큼 그런 무거운 얘기만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 올라온 글에서 주인장의 美食에 대한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게 바로 내 얘기인듯한 구절을 발견하고선 반가운 마음에 일부 옮겨 놓는다.

"먹성이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특별한 미식가도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식단은 저렴하면서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느껴지는 식당의 음식들이다. 20년이 넘게 먹어온 대학 식당에서도 가끔 '감동'하며 밥을 먹을 때가 있고, 5000원짜리 칼국수나 김치찌개, 청국장, 곱창전골 등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맛보기도 한다(값비싼 음식들도 더러 먹어보았지만 그저 '호사로군!' 할 따름이다). 파리가 들어간 수프도 후루룩 먹어치우는 고골 소설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먹는 일에 목숨 걸지는 않는 편이다('다 먹자고 하는 일이지!'란 말을 나도 덩달아 내뱉곤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몸에 해롭지 않고 특별히 불편하지 않은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이며 가끔씩 누리는 호사에 감사할 따름이다(비록 정신의 양식에 관해서라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말하기의 원칙: 私心없는 유연성

한자 言은 會意文字로 매울 신(辛)+입 구(口)의 조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서로 말로(口) 신랄(辛)하게 따지는 상황에서 나온 단어인 것. 말의 인간, 인생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를 커뮤니케이션이 재생산되는 체계로 본 루만의 견해가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가 다 있지 않겠는가. 물론 비언어적 의사소통도 포함하고 있지만, 오늘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에 한정한다. 갓난 얘기는 말을 익히게 되면서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격언, 속담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문자 커뮤니케이션이 인간사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일상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에도 여전히 언어 커뮤니케이션이 자리잡고 있다. 말은 어떻게 하느냐,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팔할은 되지 않을까? (cf.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서정주).
말이 너무 많아서도 곤란하고, 너무 적어서도 안된다. 특히,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쏟아붇는 말의 폭포수, 오, the worst of the worst다. 過猶不及! 그 다음 순위는 말이 많긴 하지만 상대방, 분위기를 고려하는 경우.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문제는 '참을 수 없는 입의 가벼움' 때문에 곧잘 '오버'하게 된다. 말이 너무 없어서 유사 '투명인간'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당연히 말이 많은 경우보다 말실수를 저지를 위험성은 급속히 줄어들겠지만, 수비만 잘 해선 잘해야 비기는 것 아닌가.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말 많음/적음이 아닐 것이다.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가, 그게 요점이지 않겠는가? 말을 '잘하기' 위한 어떤 원칙이 있을까? 우선 私心을 버리고 의사소통에 임하는 것 아닐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허나, 사심없음이 또 하나의 강한 원칙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상대방의 마음, 상황을 제대로 읽고, 그에 맞출줄 알아야 사심없음이 비로소 전정한 '배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심없는 유연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학문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는 서로 비슷한 모습, 겹치는 부분이 참 많다. 그런 교집합을 염두에 둔다면, 종교인들 혹은 학문의 세계에 투신한 이들과의 대화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아 할까? 쌍방에 기대되는 태도는 어떤 것일까? 사심 버리기, 속물근성 벗기, 내면의 본질을 좇기... 그런 태도로 임해야 그 대화는 좀 '고상한', 혹은 심지어 '영적인'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심, 사익, 사견에 치우친 대화의 경우 그 뒷끝이 씁쓸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로 사심, 사익, 사견의 경계는 정말 불분명하다. 이걸 가지고 무슨 학술논문을 써보려면 아마 시작도 하지 못할 그런 개념이고 주장이다. 최근에 떠오른 생각을 남겨 놓으려고 급하게 만들어 낸 개념일 뿐이고, 이 생각의 실마리를 좀 더 붙들고 있다보면 아마 더 그럴듯한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12월 20일 토요일

중국, 한국

요즘 중국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덕분에 중국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이 좀 넓어진 것 같다. 물론 아직까진 매우 단편적인 지식 혹은 인상에 불과하겠지만, 누가 알랴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뤄 볼 일이 생길 지... 생각나는 대로 그런 지식, 인상 모아 놓을 생각이다.
우선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지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수십편의 한국 드라마를 섭렵한 Ting은 최진실을 가장 좋아하는 배우였다고 꼽았는데 자살했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심지어 옷도 한국에 직접 주문해서 입는다고 하고, 옷을 주문하는 그 한국 사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울까 생각중이라고 할 정도... 남녀를 불문하고 '김치'를 상당히 좋아한다. 만들어 먹는다는 학생들도 있으니.. 참고로 이들 출신은 상하이, 텐진, 난징, 우한 등 다양한 편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김치가 중국에 이 정도로 확산되었는지 참 신기한 따름이다.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Xin이 전언에 따르면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에 대해서는 불만족도는 대체로 높은 편인 것 같다. 그렇다고 당장 서구적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또 꺼리는 편이다. 어떤 대안이 있을지, 적어도 그 친구는 많이 생각해 본 것 같진 않다. 공산당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직접투표가 아애 없는 것도 아니란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직접선거로 뽑는 모양. 또, 1989년 6.4. 천안문사건 때 죽은 학생 수가 만명 가까이 된다는 얘기도 있는 모양이다. 영문, 한글 위키피디아를 보니 사망자 수에 대한 주장은 2,3백명에서 5천명까지 그 편차가 매우 크다. 여하튼 대륙인들 스케일은 어디로보나 크다. 티벳사태 같은 등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독일 등 서구 언론들이 너무 편중된 시각으로 보도한다며 불만이 많았다. 한국에서도 그렇단 얘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허나 중국에 '혐한'감정이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라고.
한 친구는 중국에 민주주의는 시기 상조라고 대놓고 얘기한다. 인구 80%가 세상사에 무지한 농민이라는게 그 이유. 80년대 이후 자본주의를 도입하고서도 일당지배체제를 유지한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고 얘기한다. 물론 부패등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지만... 천안문사건이 처음에 부정, 부패에 대한 저항이어서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나중에 변질된 측면이 있다는 얘길를 들을 땐, 왠지 묘한 기분. 많이 듣던 논리 아닌가? 그리고 오히려 천안문 사건이 그 이후 사회를 더 움추르게 만들었다는 비판까지 덧붙이는 걸 보면... 우리 독재시대와 다른 점은 어쩌면 젊은이들, 나름 지식인들이 반정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싶다.
남녀간 양성 평등은 훨씬 강력하게 자리잡힌 것 같다. 남편이 요리를 전담하다시피하는 경우가, 심지어 아버지 세대에서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여학생들이 술은 거의 즐기지 않는다고 한다. 남녀평등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할 지... 한국 여성들이 성차별받는 부분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야 대개 인정하지만, 많은 경우 지구 어느 곳에서보다 더 씩씩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cf. '엽기적인 그녀').
그 친구에겐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때리는 장면이 눈에 띄나보다.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 경찰서에서... 어디에서나 때리는 장면이 등장한다고. 비록 많은 경우 장난스러운 설정이지만... 흠. 가벼운 폭력은 용인하는 그런 사회인가? 폭력으로 치면 미국영화도 만만치 않은데, 그런 영화에선 오히려 총질처럼 폭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cf. 'no country of old man'). 일상생활에 스며든 미시폭력,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이 우리 사회엔 정말 있나?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Beck, Simmel 그리고 사회학의 경계

최근에 좀 다른 맥락에서 겪은 몇 가지 일을 종합하면 이런 내용이다: "사회학은 언제 사회학인가? 사회학/비사회학의 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빌레펠트대 Japp교수가 Beck의 "Weltrisikogesellschaft"라는 책을 신랄(辛辣)하게 깐 '서평'을 오늘 읽었다. 그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벡의 이 책은 참 서평쓰기 곤란한 책이다. 사회학 저널, 특히 서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저널에 사회학자로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사회학 저서가 아니다. 이걸 사회학 신간 서평이라는 틀 안에서 쓰려고 하니 곤혹스럽다." 뭐, 대략 그런 내용... (벡의 일련의 작업이 과연 사회학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Bora 선생도 지나가면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Bielefelder들에게 사회학이란 과연...? Luhmann이 사회학인가? 라는 질문도 여기 저기서 하고 있을 것 아닌가... 도대체 사회학의 경계는 어디에?). 벡의 이 책은 박미애 박사의 번역으로 곧 한국판이 나올 모양인데, 우연히 본 소개 기사를 보니 찬사 일색이다. 그렇다. 그 정도만 해도 사회학으로선 충분한 것이다. 특히, 한국적 맥락에선...
좀 다른 맥락에서... 며칠 전에 만난 Simmel 전공 선배는 짐멜의 에세이식 글쓰기에 대해 찬사를 날린다. 사실 짐멜의 에세이를 하나도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사실 이러쿵 저러쿵 하기가 좀 '거시기'하지만, 에세이란게 그냥 근거를 대기 힘드니 상상의 나래를 펴서 한 번 써보자꾸나, 하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횔더린의 시를 극찬했다고 하던가... (잘 모르는 얘긴 꺼내면 안되는데, 그냥 내 블로그니까...) 때로는 학술적 언어의 세계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답답함이 문학의 세계, 혹은 종교적 세계로 인도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 그러니까, 쌓이고 쌓인 것들이 시의 세계, 혹은 탄식으로 터져 나오는 건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불충분한 지식, 정보에 근거한 개똥철학, 역사소설을 학술적 글쓰기랍시고 내세워서는 안되겠다. 반드시 벡, 짐멜이 그렇단 얘긴 아니고...

敎理

"교리는 진리가 아니라 지도다" (Alister E. McGrath, 옥스포드대 신학부 교수)

흠. 어디에서 어떤 맥락에서 나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008년 12월 9일 화요일

푸코: 고고학자, 족보학자

"푸코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푸코가 이론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던 것은 현재, 즉 현재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였다. 이것을 분석하기 위해 역사라는 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고학의 시기. 유럽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다. 서구만큼 이성이 지배적인 규준이 되는 사회는 없다. 푸코는 유럽의 이성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사유했다. 푸코가 보기에 이성은 정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것은 비이성이고 광기이다. 이성이 내부라면 비이성은 외부이다. 이성 외부에 있는 자들은 타자이고, 내부에 있는 자들은 동일자(同一者, the same)이다. 이런 식으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유럽 자본주의는 이 경계선을 가지고 작동한다. 그런데 이 경계선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타당한 것인가? 푸코는 경계선을 허물려는 혹은 경계선의 역사를 추적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러한 푸코의 작업을 왜 고고학이라 하는가? 경계선 밖에서 ‘침묵’을 강제 당해왔던, 역사 속에 매몰되어 있던 타자들의 목소리를 발굴하려 했기 때문이다. (...) 고고학 작업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광기의 역사』...
계보학 시기의 대표적인 책이『감시와 처벌』... 계보학은 권력이 어떤 성격을 가지면서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작동하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계보학이란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권력의 존재 형태를 분석하는 것, 혹은 그 권력 행사의 효과들을 분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강의 내용을 정리한 내용인 것 같은데 그 이상 출처에 대한 정보는 없다. 푸코의 고고학적, 족보학적 (계보학적) 관심을 잘 요약해 놓은 것 같아 여기에 옮겨 놓는다.

2008년 12월 8일 월요일

슬픈 예감...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멋진 노랫말이다. 오석준과 함께 만들었던 '이오공감'이라는 앨범에서 이승환이 부른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라는 노래의 한 대목이다. 내가 입대하던 그 무렵에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난다. 듣기는 좋은데 따라부르기는 힘든 그런 노래였고. 이 노래야 이별에 대한 예감을 얘기하고 있지만, 틀린 적이 없는 슬프예감의 적용 범위는 매우 넓어서 보편적 진실, 쓰린 진실 (bittere Wahrheit)에 가깝다. 아무리 부인하려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그 틈을 비집고 기어코 파고들고야마는 그 슬픈 예감이 있다면 대부분 그 예감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최근에 경험한 슬픈 예감 중 하나는... 매우 불편한 자리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다. 피하려고 했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정말 편치 않았고 심지어 그 여파로 악몽을 꾸기까지 했다. 왜 있잖은가,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이상하게 어떤 자리에선 불편한 그런... 다시 한 번 얻은 교훈: 슬픈 예감이 든다면 무릎쓰고, 마인드 콘트롤해서 긍정적으로 해보려고 애쓸 일이 아니다. 아애 처음부터 슬픈 예감이 들지 않도록 사전 작업을 잘해야 한다. 한 번 '슬픈 예감'이 찾아오면 극복하기 힘들다. 차라리 그런 자리는 처음부터 피할 일이다. '슬픈 예감'은 어떤 경우에도 반갑지 않다. 걔네들이 친한 척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준비시키고 훈련시킬 것. 아애 원천봉쇄할 것.

2008년 12월 7일 일요일

겨울 새벽





기숙사 창문 밖 풍경

훔쳐 본 사랑


며칠 전 학교에 디카를 들고 갔다가 '그림 좋은' 장면을 목격하고선 쨉싸게 찍었다. 다른 쪽 찍는 척하면서 몰래... 줌으로 '땡겨서'... 이쁜 것들. 요즘 싸이버공간에서 이런 말을 많이 쓰더구만, "부러우면 지는 거다"ㅎㅎ 이로써 내가 실정법 위반한 사례가 하나 더 늘었다. 이번 죄목은: '초상권 침해'. 얼굴은 거의 나오지 않으니 봐주지 않을까 ㅎㅎ

Luhmann als Medium


지금 학교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이다. 위는 사회학, 정치학 학생들이 여는 파티를 알리는 내용이고, 아래는 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루만과 예술'에 대한 전시회 안내다. 바햐흐로 우리 루만 선생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빌레펠트 대학에선]. 하나의 icon이 된 것. 체계이론 개념을 쓰자면 하나의 Medium이 된 것. 도대체 루만이 누구인지, 무슨 얘길 했는지 묻지 않고서도 '루만'이 의사소통을 연결하는, 혹은 가능케 하는 매체가 된 것이다. 아래 사진은 또 어떤가... Soziologie Fanshop에서 파는 '루만티셔츠'다 (비싸다. 21유로, 18유로씩이나 한다).

시의적절한 낙서

학교 '모처'(^^)에 있는 낙서다. 흘려써서 여러 번 봐야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있는데... 옮겨적으면 이렇다. "Gewinn wird privatisiert und Schulden vergesellschaftet. Die Krise ist der Normalfall." 캬! 두 문장으로 엄청나게 많은 메세지를 전달한다. "이익은 몇몇 개인이 챙겨가고, 손해가 생기면 사회가 나서서 메꿔준다. 위기는 이젠 일상적인 일이다". 사르코지가 했다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 위기의 책임은 잘 나갈때 그 이익을 챙겨가던 사람들에게 물어야 한다'. 이런 비슷한 말이었다. 최근 경제 위기에 직면해서 주요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투자금액을 올리고 경기부양 계획을 쏟아내고 있다. 국가최소개입주의를 신봉하고, 그 원칙을 세계에 전도하던 미국마저도. 국가중심적 발전의 모범적 사례인 한국인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나, 지금 상황은 발전국가의 그런 모습과도 많이 다르다. 발전국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가 주도하는 모습이라면, 최근 모습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도록 방기하다 위기가 발생하자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자해서 기업들의 살려주는 것 아닌가. 이러다가 경기가 다시 좋아지면 그 기업들을 혹독하게 다그쳐서 더 많이 받아낼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그건 복지국가 모델인데, 신자유주의 국가모델이 그리 쉽게 자리를 내줄 것 같지 않다. 결과는 딱 위에서 언급한 대로다. 경제를 잘 나갈 때는 규제를 풀고, 세금깍아주고 [똘아이 정권의 부유세 축소처럼], 이익을 큰손들이 나눠먹게 하다가, 어려워지면 세금으로 그들 빈주머니를 채워주는 것. 2mb 무리들은 그 교과서적인 인물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더 적은 규제가 아니라 더 많은, 아니 더 효과적인 규제다. 망나니처럼 혹은 깡패처럼 거칠 것 없이 세계를 흔드는 그런 자본의 흐름, 투기세력들을 최대한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 금융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허깨비를 치우고 거품을 과감히 걷어내야한다. 냉전이후 지금까지 약 30여년 세계를 지배하던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과연 역사가 될 것인가...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신자유주의자들, 그의 표현으로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입장변화가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 케인즈주의로 돌아서는 것인지, 아니면 구제금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겉만 바꾼, 즉 위장한 '케인즈주의자' 들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어쨌든 더 지켜볼 일이다.

"현재 우리는 모두 케인즈주의자들이 됐다. 미국의 우익진영조차 대거 케인즈주의 진영에 가담하고 있다. 지난 30년동안 외면받은 케인즈주의를 지지해온 사람들에게 이것은 승리의 순간이다.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이성과 증거의 승리가 도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규제받지 않는 시장은 자기교정 능력이 없으며,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경제이론은 오랫동안 설명해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금융시장 종사자들은 일종의 '시장 근본주의'를 밀어부쳤다. (...) 오늘날 특정 이익 세력를 위해 오용될 위험이 있는 것은 새로운 케인즈주의 노선이다. 지난 10년 동안 규제완화를 밀어부친 자들이 교훈을 얻었을까?아니면 그들은 수조 달러의 구제금융을 정당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명분을 얻기 위해 겉만 바꾸는 개혁을 추진할 뿐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전략의 변화만 있는 것인가?"

2008년 12월 5일 금요일

21세기에 믿는 기독교

내용은 다르겠지만 세계의 여러 종교는 세상사, 인생사를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주는 하나의 지식틀이다. 오랫 동안 가장 중요하고 권위있는 지식으로 그 위세를 떨치다가 소위 근대 이후 차츰 차츰 그 지위를 다른 지식체계에 내어 주고 있다. 과학이라는 지식 말이다. 기독교에 한정해 본다면 전지저능한 하나님 때문에 인간은 신의 뜻, 더 정확하게는 신의 뜻으로 표현되는 교회와 성직자의 해석을 좇아서 사는 수동적 존재였지만,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때문에 지구와 인간의 유일성 혹은 특별성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 기독교적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는 이런 지식틀에 근본적인 도전은 바로 근대과학인데, 대표적으로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의 주장을 들 수 있겠다.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다윈 이후로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는 의심 받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인간 사고의 공간적 영역을 확대했다면, 다윈은 시간적 영역을 확대했다. 중세 기독교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정도로... [신약성서가 씌여지던 시기로 돌아가면, 더 '안습'이다. 바울은 스페인을 땅끝으로 생각했었다니까.]

다음 사진은 탐사선 보이저 1호가 1990년 6월 명왕성 근처을 지나면서 찍은 지구의 모습이다. 사진의 별칭은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이 사진에 영감을 받아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고... 이 시점에 보이저호는 지구로부터 거리는 40억 마일, 약 64억 km 에 있었다고 하는데, 무척 멀다는 느낌만 줄 뿐 실제 내 수리능력으로 계산되지 않는 그런 거리다. 이런 내력을 알고서 저 사진을 보면 정말이지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히 QT용이라고 할만한 그런 사진이다.





















"보이저 2호는 1977년 8월 20일, 1호는 9월 5일 지구를 떠나 무려 30년 동안 우주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보이저 1호는 인류가 만든 물체 중 우주 밖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다. 태양으로부터 155억 km 거리를 날아간 것. 태양으로부터 약 125억 km 떨어진 지점에 보이저 2호가 있다." (2007년 8월 얘기인 것 같으니 지금은 훨씬 더 멀리 있겠다). 두 우주선은 하루에 160만 km를 이동한다고 하고, 지구로부터의 명령은 빛의 속도로 날아가지만, 보이저 1호에 도달하려면 14시간이 걸리고 보이저 2호의 경우 12시간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그렇게 빠를까 싶긴 한대...
이런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일까? 중세 시대 혹은 그 이전 사람들은 하나님 혹은 각종 신이 구름 위 어드메나 바다 깊숙한 곳에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나와바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뿐이고, 비록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세상의 중심은 아니지만 그걸 알고서 자란 우리들에겐 그리 큰 심리적 손상을 주지도 않는다. 리차드 도킨스처럼 과학으로 신앙을 미몽에서 깰 수 있다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최근 취침용으로 도킨스가 이야기를 이끄는 도큐를 '즐겨' 보고 있는데, 이 양반은 '과학교', 그 중에서도 '진화론교' 신자라 불러도 좋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서 종교적 주장을 강변하는 일부 '무식한' 창조론자들에 대해선 나도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종교, 특히 유신교의 유산과 의의를 그리 싸그리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인류가 사고하는한 21세기, 아니 그 어느 때에라도 종교, 유신교에 대한 수요는 있다는 것. 물론 계속 살아님을 종교는 매우 유연해야 한다. 새로 얻게 된 지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창조론자들, 창조과학자들이 지금 주장하는 바는 머지 않아 중세 기독교처럼 시대착오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