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言은 會意文字로 매울 신(辛)+입 구(口)의 조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서로 말로(口) 신랄(辛)하게 따지는 상황에서 나온 단어인 것. 말의 인간, 인생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를 커뮤니케이션이 재생산되는 체계로 본 루만의 견해가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가 다 있지 않겠는가. 물론 비언어적 의사소통도 포함하고 있지만, 오늘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에 한정한다. 갓난 얘기는 말을 익히게 되면서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격언, 속담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문자 커뮤니케이션이 인간사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일상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에도 여전히 언어 커뮤니케이션이 자리잡고 있다. 말은 어떻게 하느냐,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팔할은 되지 않을까? (cf.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서정주).
말이 너무 많아서도 곤란하고, 너무 적어서도 안된다. 특히,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쏟아붇는 말의 폭포수, 오, the worst of the worst다. 過猶不及! 그 다음 순위는 말이 많긴 하지만 상대방, 분위기를 고려하는 경우.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문제는 '참을 수 없는 입의 가벼움' 때문에 곧잘 '오버'하게 된다. 말이 너무 없어서 유사 '투명인간'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당연히 말이 많은 경우보다 말실수를 저지를 위험성은 급속히 줄어들겠지만, 수비만 잘 해선 잘해야 비기는 것 아닌가.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말 많음/적음이 아닐 것이다.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가, 그게 요점이지 않겠는가? 말을 '잘하기' 위한 어떤 원칙이 있을까? 우선 私心을 버리고 의사소통에 임하는 것 아닐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허나, 사심없음이 또 하나의 강한 원칙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상대방의 마음, 상황을 제대로 읽고, 그에 맞출줄 알아야 사심없음이 비로소 전정한 '배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심없는 유연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학문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는 서로 비슷한 모습, 겹치는 부분이 참 많다. 그런 교집합을 염두에 둔다면, 종교인들 혹은 학문의 세계에 투신한 이들과의 대화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아 할까? 쌍방에 기대되는 태도는 어떤 것일까? 사심 버리기, 속물근성 벗기, 내면의 본질을 좇기... 그런 태도로 임해야 그 대화는 좀 '고상한', 혹은 심지어 '영적인'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심, 사익, 사견에 치우친 대화의 경우 그 뒷끝이 씁쓸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로 사심, 사익, 사견의 경계는 정말 불분명하다. 이걸 가지고 무슨 학술논문을 써보려면 아마 시작도 하지 못할 그런 개념이고 주장이다. 최근에 떠오른 생각을 남겨 놓으려고 급하게 만들어 낸 개념일 뿐이고, 이 생각의 실마리를 좀 더 붙들고 있다보면 아마 더 그럴듯한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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