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31일 월요일

道可道 非常道

내가 대략 이해한 바로 이른 바 '언어학적 전회' 이후 인문학, 사회과학의 여러 학문에서 인간의 인간됨, 또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언어가 얼마나 한계를 지닌 매체인지를 알게 된다. 이런 포스트모던한 세계는 道可道 非常道로 표현되는 노자의 세계와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노자의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개인주의적이다. 사회적인 것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기 힘들다). 의사소통에 주목하는 사회학이 보여주는 세계는 언어의 세계보다 훨씬 넓은 것같다. 이중우연성으로 대표되는 의사소통의 난관을 극복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마련해 놓은 각양 각종 '비언어적' 의사소통매체에도 주목하기 때문이다 (경제의사소통을 위해 도입된 '화폐'가 가장 대표적인 비언어적 매체이다). 물론 언어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매체임에 틀림없다. 특히 대면해서 커뮤니케이션하는 '상호작용' 상황에서 특히 중요하다. 비언어적 요소들이 mitspielen 하지만 가격, 권력, 진리 등 상징적 매체를 이용하는 기능체계들에 비하면 더 그렇단 얘기다 (기능체계 중 정치가 특히 언어적이긴 하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상호작용? 상상하기 힘들다. 언어의 사용을 극도로 절제하는 경우는 '선문답'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망망한 우연성의 바다에서 의미가 만날 수 있다는 것, 불가사의한 일이다. 대화분석을 하는 사회학자들이 반드시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사례이리라 (아마 이런 경우에 대한 연구는 없지 않을까, oder?). 상호작용은 의사소통에 참여하도록 - mehr or weniger -강제받은 상황이다. 선문답이 아니라면 그 경우에 침묵을 지키며 오래 버틸 수 있기란 힘들다. 여러 불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Zwang zum Sprechen". Zwang은 자꾸만 달아나는 의미를 붙잡아서 연결 의미를 부여해주도록 애써야 하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Zwang을 피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효과적인 방식 중 하나는 내가 zwingen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의사소통의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정보가 전달된 이상 나는 그것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정보도 전달하지 않으려고 침묵하는 것 그 자체도 하나의 정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상호작용이 지속되도록 다양한 방식의 규칙을 개발해 오고 있다. 그건 그 상황에서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Vorrat는 역사적, 문화적, 국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부르드외가 잘 보여주는 대로 그건 계급적 습관이기도 있고 (Habitus), 개인적 역량(Leistung)이기도 하다. Interactor로서 어떤 능력이 더 높게 평가되는가, 그것은 당연히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좁은 의미로 '사회적'이란 것은 interaction 상황 자체를 의미한다). 홀로 자신과 대면하는 것조차 두려워 하는 현대인들에게 침묵은 매우 불편한 상태이다 (어짜피 인위적인 소음으로 둘러쌓여 있으니까, 그 소음이라도 내가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walkman, mp3 player 제조업자들을 먹여 살리는 것 아닐까?). 신과 대면할 때조차도 침묵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바로 통성기도로 타나는 것이다. 티비, 라디오, 최근에는 인터넷까지, 매체를 통해 그것이 비록 소음일지언정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놓치는 것은 道可道 非常道의 세계이다.

2008년 3월 24일 월요일

꿈 2

음. 꿈에 대해 쓰며 착한 잠을 잘 수 있기를 기대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왠걸 못지않게 끔찍한 꿈을 꾸고야 말았다. 굳이 장르를 부여하자면 호러액션무비쯤됨직한 꿈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것이다. 그것도 부활절을 맞이하는 날.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억누르지 않고 살아보려고 애쓰는데, 그것도 객관적인 조건을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더 마음을 비울 일이다. 더 버릴 일이다. 움켜잡고 있는 것들을 모두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아주 흔적도 없이 마음 속에서 모두 털어내야 할 것이다.

2008년 3월 22일 토요일

Falling Slowly (from 'Once')



I don't know you
But I want you
All the more for that
Words fall through me
And always fool me
And I can't react
And games that never amount
To more than they're meant
Will play themselves out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We've still got time
Raise your hopeful voice you have a choice
You've made it now

Falling slowly, eyes that know me
And I can't go back
Moods that take me and erase me
And I'm painted black
You have suffered enough
And warred with yourself
It's time that you won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We've still got time
Raise your hopeful voice you had a choice
You've made it now
Falling slowly sing your melody
I'll sing along

2008년 3월 18일 화요일

'예배와 제사' (정용섭)

아래는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인 정용섭 목사의 글이다. 매우 압축적으로 써서 잘라내기가 마땅찮은 탓에 좀 길지만 전문을 옮겨 놓는다. 예배의 본질을 이 정도로 시원하게 정리한 글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예배가 인간의 종교적 감수성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 부분엔 큰 박수를 보낸다. 전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데 다만 '예전'에 대한 강조와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이른 바 '열린 예배'에 대한 부정적 시각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한국 예배형식의 변화는 한국 기독교 신앙행태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전에는 건조한 주일예배가 한 편에 있고, '은혜체험'을 제공하는 수련회, 부흥회, 기도회 등 이른 바 '집회'가 다른 한 편에 있어서, 그 둘이 분업하는 형태였다. 모던한 한국 교인들은 그 분리를 '열린 예배' '찬양예배' 같은 형식으로 지양하는 것 같다. 예배의 행위자인 인간의 정신세계는 知情意 등 여러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서 신앙형태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이 전통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도 기독교인들은 情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전통을 만들어 왔으리라 (수도원 전통?). 그런 점을 모른척하며 예전예배만 강조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좀 떨어진다. 예배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한 형식의 문제에 대해서는 좀 관대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 인용 중 강조는 내가 첨가한 것).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아마 예배가 자주 드려진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이기에 힘쓰라는 가르침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며, 신앙적 열정의 발로이기도 하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보다야 자주 드리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도 예배가 바르게 드려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조금 비판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너무 많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는데서 오는 역작용인지 모르겠다. 주일에 진정한 마음으로 한번 예배를 드렸다면 사실 더 이상의 예배는 필요하지 않다. 군것질을 많이 하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줄 모르고,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하니까 결국 자주 군것질을 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지나치게 자주 드리는 예배행위와 잘못된 예배는 일종의 악순환인 것 같다.이런 악순환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예배 개념의 왜곡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참된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에서 신자들의 종교적 욕구인 은혜가 더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말이 “은혜를 받으러 간다.”는 말과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건 분명히 예배에 대한 몰이해이며, 변질에 이르는 첩경이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지평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면 당연히 은혜를 경험하겠지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예배에서 은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은혜는 예배에서 결코 주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일 뿐이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한민족의 전통적 전례인 제사행위를 예로 들겠다. 우리의 전통적 제사행위가 조상신에 대한 숭배이며, 신약의 예배 및 구약의 제사가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배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형태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양측 모두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모든 걸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사행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조상에게 집중한다. 그들은 제사행위에서 어떤 반대급부를 원하지 않고 최선으로 그 행위에 천착할 뿐이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요구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만 집중해야 한다.제사는 엄격한 절차와 의식에 따라서 진행된다. 제상에 음식을 올리는 방법이나 술 따르는 방법도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 제사의 방식이 이렇게 일정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조상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드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배도 역시 그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예전이라고 한다. 그 예전은 지난 2천년동안 교회가 하나님에게 최대한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선택한 종교적 의식이다. 기도, 찬송, 말씀봉독, 교독, 성찬, 설교 등등,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순서는 오직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에게 맞춰져 있다. 그런 모든 예전도 역시 역사 과정에서 사람들이 결정한 것이니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그래서 그 시대에 맞도록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전통적 예전 예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완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쉽게 상대화하지도 말아야한다. 오늘 소위 <열린 예배>라는 방식의 예배는 이런 전통적 예전을 상대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하다. 이런 예배의 무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은혜에 놓인다. 예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적 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은혜 지상주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의 근본을 허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은혜까지도 세속화한다. 은혜의 주체인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은혜에 종속되어야 할 인간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해서, 은혜를 인간의 종교 심리적 차원으로 끌어내릴 위험성마저 보이고 있으니, 은혜의 세속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우리가 지금 로마 가톨릭의 미사가 빠지기 쉬운 형식주의나 엄숙주의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예배의 주체를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단순히 청중들의 종교적 친교 모임인지, 아니면 참되게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doxology)인지 조금만 세심하게 살펴보라. 모든 실상이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

2008년 3월 17일 월요일

이중우연성의 해소는 우연?

사회적 행위 혹은 커뮤니케이션은 이중우연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중우연성은 각각 우연성을 가지고 있는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 SZ 152) 타자와 자아가 서로의 우연성을 고려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중우연성은 만약 자아가 타자의 행동의 결과에 자신 행동의 가능성을 종속시키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각각 자기준거적 심리체계인 자아, 타자 사이에서 이중우연성은 피할 수 없다 (가장 단순한 사회형태라고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대화상황에서조차도). 그것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모델을 제시한다 (파슨즈, 하버마스, 루만). 파슨즈의 경우 상호작용에서 이중우연성을 해결하는 방식을 특정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있는 가치, 문화에서 찾았고, 그것에 하나의 독립적 체계의 위치를 부여했다 ("shared symbolic system") (파슨즈가 루만과 달리 현대사회를 단수가 아닌 복수로 본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루만은 이중의 우연성의 해소를 진화론적 선택으로 본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이중우연성은 커뮤니케이션의 비선형적 동학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환경과 구분되는 체계가 '우연히' 생성되고 체계의 지속성, 즉 커뮤니케이션의 연결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구조가 형성된다. 하지만 루만도 그 구조를 '사회구조'와 '의미론'(적 구조)로 크게 구분하면서 구조 안에 매우 다양한 메카니즘을 수용할 이론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문화, 개념, 상징, 기억 등등은 의미론으로 포함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파슨즈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갈리는 부부은 구조가 먼저냐 체계가 먼저냐 하는 질문이다. 그에 대한 답은... 파슨즈는 구조기능주의, 루만은 기능구조주의.

사회는 창발적 질서

'Soziale Systeme' 국역본이 나온 이후 루만이 좀 더 활발하게 소개되는 것 같다. 연세대 대학원 신문에 루만의 사회론을 간략하게 소개한 글이 실렸는데 (필자: 정성훈), 그 중 일부를 옮겨 놓는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의식적 내지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사물적 내지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는 창발적(emergent) 질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과 객관적 사회학을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하버마스처럼 주체 개념을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체계들은 어떤 공동의 실재 차원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가능한 것은 ‘기대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우연성, 즉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이다.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계들이 각각의 의도를 억제하여 기대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 구조화된 우연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통지, 이해라는 3중의 선택 과정인 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은 의식체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실재의 차원, 즉 사회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인간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보며, 인간은 사회적 체계와 상호침투할 수는 있지만 환경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다루어온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루만의 전환 지점, 즉 사회적 체계를 창발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

언제부터인가 조금이라도 진지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그것을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고 설명하려는 습관이 생긴 걸 알게되었다. 최근 수년간 '상태'가 심각해고 있는 걸 봐서 직업병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다면 'born to be sociologist'라고 주장하기가 어렵다. Rather 'sociologist in making'?). 하지만 심리적 현상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다보면 이 오지랖 넢은 사회학의 설명틀도 한계에 부딪힌다. '심리체계'라고 부르기도 하니까 분명히 그 나름 어떤 작동방식이 있을텐데 사회학도들에게 그건 열어볼 수 없는 블랙박스와 같은 것이다 (인간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사회학적 시각 혹은 사회적 요인을 고려하는 접근이 중요하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기는 하다). 그런 현상 중 하나가 '꿈'이 아닌가 생각한다. '꿈'의 사회학? 음... 워낙 'xx 사회학'이란 표현에 익숙해서인지 어색하진 않으나 진지한 사회학적 성찰이 가능할까? 의심스럽다. 이런 영역 정도는 심리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남겨둬도 될 것 같다. 사실 '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공통적으로 경험해오고 있는 매우 친근한 현상이라서 시대에 따라 다양한 해석틀, 설명방식이 있었다. 좀 모던한 버전으로 프로이트가 있고, 사실 더 가깝기로는 우리 어머니'들'의 해몽을 꼽을 수 있다 (Alltagstheorie 혹은 ethnotheory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그러나 나는 내 나름의 꿈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 내가 특별히 집중해서 고민하고 있거나 특히 잠들기 전에 읽거나 생각한 것이 모티프가 되는 경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가끔씩 전혀 예기치 않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건 도대체 왜 그런지 설명할 길이 없다. 내가 무의식 쪽으로 밀쳐 놓은 그 어떤 생각들이 의식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서 삐져나오는 것인가? 이런 우리 프로이트 형님식 버전은 요새 심리학 본류에서는 토정비결 급으로 치부되는 모양인데 그보다 더 나은 혹은 더 '설득력있는' 설명방식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사실 지난 밤 꿈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어서 기록으로 남겨 보려고 컴앞에 앉은 것인데 어쩌다보니 사뭇 진지한 글이 되고 있는 중... (다시 '직업병' 테제?). 세 테마가 기억에 남는다. (1) 논문 (2) Mitbewohner (3) 모모 씨. (1)은 쉽게 설명 가능. 주말에 많이 놀았다는 자책감에 체계이론에 대한 논문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에 대한 여러 아이디어들이 등장했다.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이디어들만 떠올렸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경우는 '꿈'이라기 보다는 非夢似夢 상태로 보아야 할까? 원래 잠의 중요한 기능은 뇌를 쉬게하고 임시저장장치를 비우는 거라는데... 앞으로는 침대에 누워서 논문을 읽는 그런 '뇌 unfriendly'한 행동은 삼갈 필요가 있겠다). (2) Mitbewohner도 이해할 수 있다. 현실 연관성을 찾을 수 있으니까. (3)이 불가사의다. 지금 한국에 있는 모모씨. 가깝다면 가까운 관계이긴 하나 최근 내 인식의 범위에 들어온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뜬금없이 그것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매우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을까? 바쁘실텐데... 혹 내가 그 사람의 그런 모습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일까? 이럴 때 이럴 때 우리가 가져다 쓰는 설명틀이 있긴하다. '개꿈'. 더 생각해본들 별 유익이 없을 경우 사건을 처리하는 '신포도 기제'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꿈' 자체를 사회학적으로 해석한다는 건 좀 우스운 일이지만 '꿈 해석'의 사회학은 가능할 뿐 아니라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시대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다를 테니 말이다. 어쩌면 이미 나와 있을 지도...). 여하튼 잠들기 전에는 최대한 좋은 일을 떠올리거나, 예를 들어 보고 싶은 사람을 떠 올린다든지, 그게 힘들면 적어도 백지상태에 가까운 마음을 갖도록 애쓸 필요가 있겠다.

2008년 3월 14일 금요일

고난

다음 주가 고난주간이다. 예배에 쓸 고난 주간 동영상을 찾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룬 영화 장면으로 짜여져 있다. 멜 깁슨이 만든 "The Passion of the Christ"(2004)가 그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 때까지 만들어진 어떤 영화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받는 장면을 잔인하게 혹은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십자가에 달려 있던 예수의 몸에선 채찍 자국 때문에 맨살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모든 살이 짓이겨졌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과연 그런 영화 장면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기에 적절한 재료일까? 예전에 그 영화를 보면서 불편해 했던 기억이 있다. 왜 그렇게까지 적나라하게 표현해야 했을까? 육체에 가해진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는 건 오히려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는 것은 아닌가? 그 당시 멜 깁슨이 기독교에 귀의한 이야기, 제작팀이 기도하며 제작한다느니, '성화'라고 한국에서 교인들이 단체관람한다는 이야기 등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오히려 그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 포르노그라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풀어가기위한 수단으로 성애 장면을 사용하지 않고, 성애장면 표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를 보통 포르노라고 부른다. 멜 깁슨은 어쩌면 적나라한 고통, 상처 표현을 위해 그리스도 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아닌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2006년작 'Apocalypto'에도 잔인한 장면이 역시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런 혐의는 더 짙어졌다. 깁슨씨 속마음이나 신앙심을 내가 알 수는 없는 일이나 -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건을 통해 추측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음주 난동(운전?), 반유대주의 발언 등등 - 난 그리스도 고난의 진정한 뿌리는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의 전부였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그 현실인식, 소통의 단절이 제일 큰 아픔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어야 한다는 절망감이 육체의 고통보다 더 크지 않았을까? (cf.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고 섬긴 무리들이 자기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그런 광경을 봐야하는게 더 마음아픈 일 아니었을까? 고통의 무게만 가지고 비교하려 든다면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보다 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이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은 육체적 고통의 무게라기보다는 관계의 단절이나 미래에 대한 소망없음, 절망이 아닐까?

언어에 앞서는 의미, 언어에 의해서 비로소 드러나는 의미

"하버마스와 루만의 차이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언어의 의미와 기능을 서로 상이하게 평가한다는 데 있다. 우선 루만에게 있어서 의미는 언어에 기초하는 언어 이전의 범주이다. 반면 하버마스에게 의미는 원칙적으로 언어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상호 주관적 타당성과 일상 언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없이는 결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W. Reese-Schäfer, 국역본 152쪽)

루만이 의미를 작동의 기초로 삼는 체계로 사회체계 (커뮤니케이션 체계)이외에 심리체계 (의식체계)도 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벌써 분명해진다.

루만의 보수성


고전의 반열에 오른 학자들의 글에선 입맛에 맞는 구절들을 찾아내기가 어렵지 않다. 대개 많은 글을 남기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높은 추상성을 가진 글들을 생산해 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고전이 오래된 것일수록 더 쉬워진다. 수 백, 수 천년동안 읽혀지는 고전들은 대개 알 듯 말 듯한 문구들로 이루어져서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 해석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그래야만 고전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성경, 불경, 노자, 장자, 그리고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까지. 최근 예로는 맑시즘. 참 많은 사람들이 맑스를 가져다가 필요한 대로 잘 써 먹었다. 가장 최신 버전은 포스트맑시즘. 혹 내가 관심을 갖지 않은 사이 다른 버전이 나왔을 지도). 이는 루만의 저작에 대해서도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 신보수주자들이 써 먹기 좋은 아이디어들도 많고, 동시에 포스트모던한 구석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입장만을 놓고 보자면 루만은 흔히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치이슈에 대해서 실제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개입했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정치 현안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학문을 위한 학문'을 지향한다는 점 때문에 우선 그렇다 (허나 그것 자체가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불문가지. 루만 직계 제자들도 대개 그런 경향을 보이지만, 좌파일간지인 TAZ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P. Fuchs등 루만 좌파라고 할만한 이들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각 개별 체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그의 입장이 작은 국가를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실제로 저작에서 보수적으로 읽힐 수 있는 발언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를 두고 학문적인 진술만을 하는 것 같으면서 은근히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하버마스 혹은 하버마스 학파와 비교된다. 하지만 루만은 하버마스에 비해 이론적으로 더 급진적임을 강조했고, 다른 맥락에서 좌파의 보수성을 직간접 언급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루만의 이론은 급진적인 편이다. 그 급진성을 좀 다른 맥락에서 찾아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어쩌면 모든 사회현상을 꿰뚫는 사회이론을 세우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 가장 도전적인 부분 아닐까? 현실 사회의 복잡성을 맑시즘이나 파슨즈의 구조기능주의보다 더 복잡한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했기 때문에 이론 구성이 매우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이론 내적인 급진성이라면 사회 구성의 단위로 커뮤니케이션으로 상정하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 심리체계를 사회 밖으로 내 쫓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이 정도로 급격하게 사회이론의 방향을 바꿀 학자는 나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학문으로서 사회학의 남은 생명이 그리 길 것 같지도 않지만). 루만의 이론에서 우리는 거시, 미시를 연결하는 드문 사회이론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고, 또 루만의 급진성, 천재성까지 찾아볼 수 있지만, 막상 좀 더 경험적으로 접근가능한 현상에 대해서 설명할 때면 - 기능체계, 조직 등 - 그 설명방식이나 함의가 너무 일반적이라는 데서 실망감을 느낄 때도 있다. 정치에 대한 설명방식을 보면 일반적인 것에서 더 나아가 오히려 너무 보수적이라는 느낌을 갖게된다. 루만이 그리는 이상적 민주주의 정치체계는 보수, 진보로 나눌 수 있는 양당 중에서 유권자가 어느 한 정당에 표를 몰아주면 그 당이 행정부를 구성하는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SPD, CDU가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런 모습을 그림을 그리면 되겠다). 아주 나이브한, 현실에서조차 잘 발견되기 힘든 (특정 시기 독일에서 혹은 전반적으로 드물게 관찰되는), 루만답지 않은 이상적인 입장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대개 의원내각제에서는 다당제로 가기 쉽고 - 독일이 그나마 덜 그런 편이었는데, 요새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 , 양당제는 오히려 대통령 중심제에서 더 자주 관찰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녹색당은 여도 야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책임한 정당이고, 사회운동은 기생적이거나, 책임을 지지도 않으니까 뭐든 정치화시키려고 하는 그런 세력 정도로 폄하된다. 그런 틀을 일종의 이상형으로 삼아 현실 분석에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어투를 가만히 살펴보면 철부지들에게 야단치는 노인네 모습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정치에 대한 말년 저작에서는 신사회운동에 '신주변부'라는 자리를 마지못해 내주기는 한다. 물론 루만이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정치가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슈들이 정치화되고 (정치의 확대), 실제로 조정할수 있는 수단은 제한되어 있으면서 할 수 있을 것처럼 큰 소리치는 정치, 국가가 심히 눈에 거슬리는 현상인 것이다. 기능적 분화가 복합성을 축소하기 위해 진화적으로 선택된 결과임을 신봉하는 학자의 눈에는 말이다. 루만의 이런 입장은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나 요즘 유행하는 거버넌스 이론에 훨씬 친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기능적 분화의 장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치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만이 최선일까라는 데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체계이론의 입장에서 복지국가에 관련해서 쓴 최근에 논문이 있는데, 거기에서 나름 신선한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루만은 복지국가의 역할을 각종 체계에서 '배제'된 이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제한적으로 생각했는데, 사실 국가, 특히 복지국가의 역할은 바로 각 가능체계들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경제의 식민화 경향에서 방패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만의 역할이 아니라 사실 비정부기구를 포함해서 정치체계에 주어진 역할로 볼 수 있다. 집합적으로 구속력있는 결정을 내린다는 정치체계의 기능이야 크게 바뀔리가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이 언제, 무엇을 위해서 사용되냐 하는 것이다. 지나친 정치화 경향도 물론 문제다. 루만은 그 점을 우려한 것이지만, 하지만 왜 정치화가 되는지 그 매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건 현대사회의 변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적 분화의 결과에 대한 성찰일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 서면 '성찰적 근대화'론은 그리 다른 얘기 아니다. 그 경향이란 것이 근(현)대의 발달 경향이 빚어낸 결과인지 아니면 근(현)대성 자체에 내포된 것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체계이론 내에서도 입장이 다르다. 루만과 오토독스 루만너들은 대개 후자를 지지하는 것 같다.) '정치화'라는 것은 어쩌면 제도화된 정치가 다루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음 알려주는 일종의 현대사회의 생존 자체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이슈들은 다른 이념을 지향하는 정당의 프로그램으로 다뤄지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 면에서 루만의 정치 구조에 대한 설명을 기계적으로 정치현상 분석에 적용하는 일은 매우 재미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루만에게서 가장 큰 장점은 체계는 그 경계를 스스로 관찰해 나가면서 유지된다는 시각과, 정치나 기타 어떤 기능체계의 문제를 다루든지 그것을 사회의 일부의 문제로 볼 수 있게 하는 포괄성에 있으니, 논문에서도 그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할 것이다. 보수적인 루만은 살짝 한 켠으로 제껴 놓아도 될 듯 싶다.

2008년 3월 3일 월요일

소통의 기술

소통의 단절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 중 하나가 '바벨'이다. 한 번 헝크러지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악화되는 관계, 같은 공간에 있지만 (手話를 포함해서) 공통 언어를 소유하지 못해 넘을 수 없는 벽. 하지만 그 보다 더 안타까운 경우는 드러난 조건만으로는 소통의 문제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문을 닫아 걸어서 생기는 부녀 간 소통의 단절. 그러나 영화를 이루는 세 에피소드 중 그 이야기의 결말이 가장 밝고, 또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감독은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라는 메세지(정보)전달하고 싶었을까? 적어도 난 그렇게 이해한다. 독일에 살면서 언어, 경험, 문화가 달라서 오해하고 얼굴 붉힌 적도 적지 않지만, 그 보다 더한 아픔을 경험할 때는 같은 말을 쓰면서도 소통의 통로에 놓여있는 장벽을 확인하는 경우다. 루만은 의사소통을 '정보', '전달', '이해' 이 세 요소가 합작해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차원의 질서로 설명하며, '이해'는 발신자가 보낸 정보가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해'도 '이해'인 것이다. 루만은 '이해'는 커녕 심지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 자체가 얼마나 '신비로운'(내 표현) 현상이냐고 얘기한다. 그렇다. 어찌보면 우리는 '이해'보다는 오히려 '오해'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는 지도 모르고, '오해'라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 지도 모른다. 루만은 소통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 온 여러 장치들, 매체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언어, 문자 같은 확산매체는 물론인고 돈, 권력, 진리 같은 상징적 매체도 포함된다. 청춘남녀가 소통할 때 사용하는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매체도 포함해서). 그런 거창한 매체들 말고 나도 내 나름 소통의 기술을 '啓發'해야 할 것 같다. 평생의 숙제로 남겠지만... (The Art of Communicating/ Die Kust des Kommunizierens adapted from E.F.)

2008년 3월 2일 일요일

역사에 대한 문서적, 기념비적 모델 (푸코)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역사 연구에서 문서적 모델과 기념비적 모델을 구분한다. 문서적 방법은 담론적 사건을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역사의 문서로 사용한다. 담론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담론을 '기념비'적인 것으로 다루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담론적 사건의 발발과 그 관계 자체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 방법을 통해 더 깊은 의미를 찾지 않고 담론 차원 자체에 대한 연구가 가능하다. 두 말 할 것 없이 푸코는 기념비적 방법에 관심이 있다. 반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문서적 방식을 취한다. 역사학에서 언어적 측면에 대한 대표적 연구가 코젤렉의 개념사 연구인데, 그것은 사회사를 보완하는 의미를 지닌다 (코젤렉은 '역사'와 '언어'를 분명히 구분한다). 담론이전의 실제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담론은 그것에 복속되어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Foucault 1973: 13ff. (한글판 25ff)

구조와 체계

루만이 구조기능주의의 파슨즈의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의 이론을 기능구조주의라고 명명한 것은 유명하다. 물론 루만에게서 구조 개념이 핵심적인 위치를 잃기는 했지만 여전히 필수적인 개념이다. "어떤 체계이론가도 복잡한 체계들이 구조를 이루고, 구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p. 382). 루만은 구조주의와 구조기능주의에서 구조를 실제와의 연관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본다고 정리한다. '인식론적 존재론' 혹은 '분석적 실재론'이라고 그 입장을 요약한다. 이들의 체계, 텍스트, 언어게임 등에 대한 분석은 실제와 연관을 갖는 것으로 제시되고, 그 실제연관을 구조개념으로 보장하려 한다는 것이다 (p.379). (푸코의 문서/기념물 구분을 연상시킴). 그와는 다르게 자기준거적 체계에 대한 이론은 인식론에서 출발하지 않고, 대상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한다 (380f) (사실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인식론적 입장). 그렇다면 루만에게서 구조는 어떤 의미인가? 구조는 자기준거적 체계 이후의 사건이다. 안정적인 구조는 기능체계 자가생산성의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p, 381). 구조는 커뮤니케이션을 커뮤니케이션과 연결시키는 역할이 주어진다 (ibid.). 가능성을 제한해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조는 '기대구조'이다 (p. 397). 구조는 체계 안에서 (sic!) 체계에 관련있게 될 모든 것을 잡아챈다. 그 과정에서 두 가지 구조를 구분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보존할만한 것으로 될 의미형태(Sinnformen)을 제공하는 구조를 '의미론'이라고 부르고, 체계의 행위를 조절하는 구조, 즉 체계 자체의 구조를 '사회구조'라고 부른다 (p.382). 하지만 바로 '사회구조'에 적용된 이 구조 개념은 사실 세계 구조, 언어, 의미론에도 적용될 수 있다.


Luhmann 1984: 377ff. (en. 278ff), Struktur und Zeit.

2008년 3월 1일 토요일

Policy for Science, Science for Policy

과학정책에서 대개 policy for science와 science for policy를 구분한다. 전자는 정부가 연구, 기술 개발 등이 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직간접 정책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재원 분배, 연구 우선순위 선정 등). 후자는 여러 정책 영역에 과학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후발국일수록 policy for science가 중요하고 선진국일수록 science for policy가 중요하다 (에너지, 환경, 교육, 국방, 경제, 과학, 기술). 선진국의 경우 policy for science를 위한 제도가 이미 자리잡혔기 때문이고, 또 많은 부분 National Science Foundation, DFG 자율적통제 메카니즘에 위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정확히 정책의 중점이 policy for science 에서 science for policy 로 이행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까지는 분명히 policy for science에 방점을 찍었었다. 이번 정부는 자율을 명목으로 연구개발 투자를 줄일 생각을 하기 전에, 과학의 자율적 통제 메카니즘이 더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science for policy는 사실 이전 정부에서 '과학기술중심사회'라고 부른던 것과 내용이 비슷할 수 있는데, 그건 위계적으로 조정하기 어렵다. 시간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 Think Tank, 각종 정책자문 등이 더 늘어나고 전문화될 필요가 있다 (expert good, cf. search good; expirience good). 경향상 그쪽으로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매우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전문지식을 정부연구기관들이 제공하기에 힘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한반도운하 찬성 쪽 전문가들 의견을 들으면 갈 길이 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금강산댐 만들 때 논의를 생각해보라. 이 정도만 하더라도 엄청난 발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