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17일 월요일
이중우연성의 해소는 우연?
사회적 행위 혹은 커뮤니케이션은 이중우연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중우연성은 각각 우연성을 가지고 있는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 SZ 152) 타자와 자아가 서로의 우연성을 고려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중우연성은 만약 자아가 타자의 행동의 결과에 자신 행동의 가능성을 종속시키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각각 자기준거적 심리체계인 자아, 타자 사이에서 이중우연성은 피할 수 없다 (가장 단순한 사회형태라고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대화상황에서조차도). 그것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모델을 제시한다 (파슨즈, 하버마스, 루만). 파슨즈의 경우 상호작용에서 이중우연성을 해결하는 방식을 특정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있는 가치, 문화에서 찾았고, 그것에 하나의 독립적 체계의 위치를 부여했다 ("shared symbolic system") (파슨즈가 루만과 달리 현대사회를 단수가 아닌 복수로 본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루만은 이중의 우연성의 해소를 진화론적 선택으로 본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이중우연성은 커뮤니케이션의 비선형적 동학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환경과 구분되는 체계가 '우연히' 생성되고 체계의 지속성, 즉 커뮤니케이션의 연결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구조가 형성된다. 하지만 루만도 그 구조를 '사회구조'와 '의미론'(적 구조)로 크게 구분하면서 구조 안에 매우 다양한 메카니즘을 수용할 이론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문화, 개념, 상징, 기억 등등은 의미론으로 포함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파슨즈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갈리는 부부은 구조가 먼저냐 체계가 먼저냐 하는 질문이다. 그에 대한 답은... 파슨즈는 구조기능주의, 루만은 기능구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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