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31일 월요일
道可道 非常道
내가 대략 이해한 바로 이른 바 '언어학적 전회' 이후 인문학, 사회과학의 여러 학문에서 인간의 인간됨, 또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언어가 얼마나 한계를 지닌 매체인지를 알게 된다. 이런 포스트모던한 세계는 道可道 非常道로 표현되는 노자의 세계와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노자의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개인주의적이다. 사회적인 것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기 힘들다). 의사소통에 주목하는 사회학이 보여주는 세계는 언어의 세계보다 훨씬 넓은 것같다. 이중우연성으로 대표되는 의사소통의 난관을 극복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마련해 놓은 각양 각종 '비언어적' 의사소통매체에도 주목하기 때문이다 (경제의사소통을 위해 도입된 '화폐'가 가장 대표적인 비언어적 매체이다). 물론 언어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매체임에 틀림없다. 특히 대면해서 커뮤니케이션하는 '상호작용' 상황에서 특히 중요하다. 비언어적 요소들이 mitspielen 하지만 가격, 권력, 진리 등 상징적 매체를 이용하는 기능체계들에 비하면 더 그렇단 얘기다 (기능체계 중 정치가 특히 언어적이긴 하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상호작용? 상상하기 힘들다. 언어의 사용을 극도로 절제하는 경우는 '선문답'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망망한 우연성의 바다에서 의미가 만날 수 있다는 것, 불가사의한 일이다. 대화분석을 하는 사회학자들이 반드시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사례이리라 (아마 이런 경우에 대한 연구는 없지 않을까, oder?). 상호작용은 의사소통에 참여하도록 - mehr or weniger -강제받은 상황이다. 선문답이 아니라면 그 경우에 침묵을 지키며 오래 버틸 수 있기란 힘들다. 여러 불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Zwang zum Sprechen". Zwang은 자꾸만 달아나는 의미를 붙잡아서 연결 의미를 부여해주도록 애써야 하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Zwang을 피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효과적인 방식 중 하나는 내가 zwingen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의사소통의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정보가 전달된 이상 나는 그것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정보도 전달하지 않으려고 침묵하는 것 그 자체도 하나의 정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상호작용이 지속되도록 다양한 방식의 규칙을 개발해 오고 있다. 그건 그 상황에서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Vorrat는 역사적, 문화적, 국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부르드외가 잘 보여주는 대로 그건 계급적 습관이기도 있고 (Habitus), 개인적 역량(Leistung)이기도 하다. Interactor로서 어떤 능력이 더 높게 평가되는가, 그것은 당연히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좁은 의미로 '사회적'이란 것은 interaction 상황 자체를 의미한다). 홀로 자신과 대면하는 것조차 두려워 하는 현대인들에게 침묵은 매우 불편한 상태이다 (어짜피 인위적인 소음으로 둘러쌓여 있으니까, 그 소음이라도 내가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walkman, mp3 player 제조업자들을 먹여 살리는 것 아닐까?). 신과 대면할 때조차도 침묵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바로 통성기도로 타나는 것이다. 티비, 라디오, 최근에는 인터넷까지, 매체를 통해 그것이 비록 소음일지언정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놓치는 것은 道可道 非常道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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