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14일 금요일

루만의 보수성


고전의 반열에 오른 학자들의 글에선 입맛에 맞는 구절들을 찾아내기가 어렵지 않다. 대개 많은 글을 남기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높은 추상성을 가진 글들을 생산해 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고전이 오래된 것일수록 더 쉬워진다. 수 백, 수 천년동안 읽혀지는 고전들은 대개 알 듯 말 듯한 문구들로 이루어져서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 해석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그래야만 고전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성경, 불경, 노자, 장자, 그리고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까지. 최근 예로는 맑시즘. 참 많은 사람들이 맑스를 가져다가 필요한 대로 잘 써 먹었다. 가장 최신 버전은 포스트맑시즘. 혹 내가 관심을 갖지 않은 사이 다른 버전이 나왔을 지도). 이는 루만의 저작에 대해서도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 신보수주자들이 써 먹기 좋은 아이디어들도 많고, 동시에 포스트모던한 구석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입장만을 놓고 보자면 루만은 흔히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치이슈에 대해서 실제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개입했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정치 현안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학문을 위한 학문'을 지향한다는 점 때문에 우선 그렇다 (허나 그것 자체가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불문가지. 루만 직계 제자들도 대개 그런 경향을 보이지만, 좌파일간지인 TAZ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P. Fuchs등 루만 좌파라고 할만한 이들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각 개별 체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그의 입장이 작은 국가를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실제로 저작에서 보수적으로 읽힐 수 있는 발언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를 두고 학문적인 진술만을 하는 것 같으면서 은근히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하버마스 혹은 하버마스 학파와 비교된다. 하지만 루만은 하버마스에 비해 이론적으로 더 급진적임을 강조했고, 다른 맥락에서 좌파의 보수성을 직간접 언급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루만의 이론은 급진적인 편이다. 그 급진성을 좀 다른 맥락에서 찾아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어쩌면 모든 사회현상을 꿰뚫는 사회이론을 세우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 가장 도전적인 부분 아닐까? 현실 사회의 복잡성을 맑시즘이나 파슨즈의 구조기능주의보다 더 복잡한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했기 때문에 이론 구성이 매우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이론 내적인 급진성이라면 사회 구성의 단위로 커뮤니케이션으로 상정하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 심리체계를 사회 밖으로 내 쫓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이 정도로 급격하게 사회이론의 방향을 바꿀 학자는 나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학문으로서 사회학의 남은 생명이 그리 길 것 같지도 않지만). 루만의 이론에서 우리는 거시, 미시를 연결하는 드문 사회이론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고, 또 루만의 급진성, 천재성까지 찾아볼 수 있지만, 막상 좀 더 경험적으로 접근가능한 현상에 대해서 설명할 때면 - 기능체계, 조직 등 - 그 설명방식이나 함의가 너무 일반적이라는 데서 실망감을 느낄 때도 있다. 정치에 대한 설명방식을 보면 일반적인 것에서 더 나아가 오히려 너무 보수적이라는 느낌을 갖게된다. 루만이 그리는 이상적 민주주의 정치체계는 보수, 진보로 나눌 수 있는 양당 중에서 유권자가 어느 한 정당에 표를 몰아주면 그 당이 행정부를 구성하는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SPD, CDU가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런 모습을 그림을 그리면 되겠다). 아주 나이브한, 현실에서조차 잘 발견되기 힘든 (특정 시기 독일에서 혹은 전반적으로 드물게 관찰되는), 루만답지 않은 이상적인 입장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대개 의원내각제에서는 다당제로 가기 쉽고 - 독일이 그나마 덜 그런 편이었는데, 요새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 , 양당제는 오히려 대통령 중심제에서 더 자주 관찰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녹색당은 여도 야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책임한 정당이고, 사회운동은 기생적이거나, 책임을 지지도 않으니까 뭐든 정치화시키려고 하는 그런 세력 정도로 폄하된다. 그런 틀을 일종의 이상형으로 삼아 현실 분석에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어투를 가만히 살펴보면 철부지들에게 야단치는 노인네 모습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정치에 대한 말년 저작에서는 신사회운동에 '신주변부'라는 자리를 마지못해 내주기는 한다. 물론 루만이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정치가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슈들이 정치화되고 (정치의 확대), 실제로 조정할수 있는 수단은 제한되어 있으면서 할 수 있을 것처럼 큰 소리치는 정치, 국가가 심히 눈에 거슬리는 현상인 것이다. 기능적 분화가 복합성을 축소하기 위해 진화적으로 선택된 결과임을 신봉하는 학자의 눈에는 말이다. 루만의 이런 입장은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나 요즘 유행하는 거버넌스 이론에 훨씬 친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기능적 분화의 장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치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만이 최선일까라는 데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체계이론의 입장에서 복지국가에 관련해서 쓴 최근에 논문이 있는데, 거기에서 나름 신선한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루만은 복지국가의 역할을 각종 체계에서 '배제'된 이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제한적으로 생각했는데, 사실 국가, 특히 복지국가의 역할은 바로 각 가능체계들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경제의 식민화 경향에서 방패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만의 역할이 아니라 사실 비정부기구를 포함해서 정치체계에 주어진 역할로 볼 수 있다. 집합적으로 구속력있는 결정을 내린다는 정치체계의 기능이야 크게 바뀔리가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이 언제, 무엇을 위해서 사용되냐 하는 것이다. 지나친 정치화 경향도 물론 문제다. 루만은 그 점을 우려한 것이지만, 하지만 왜 정치화가 되는지 그 매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건 현대사회의 변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적 분화의 결과에 대한 성찰일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 서면 '성찰적 근대화'론은 그리 다른 얘기 아니다. 그 경향이란 것이 근(현)대의 발달 경향이 빚어낸 결과인지 아니면 근(현)대성 자체에 내포된 것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체계이론 내에서도 입장이 다르다. 루만과 오토독스 루만너들은 대개 후자를 지지하는 것 같다.) '정치화'라는 것은 어쩌면 제도화된 정치가 다루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음 알려주는 일종의 현대사회의 생존 자체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이슈들은 다른 이념을 지향하는 정당의 프로그램으로 다뤄지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 면에서 루만의 정치 구조에 대한 설명을 기계적으로 정치현상 분석에 적용하는 일은 매우 재미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루만에게서 가장 큰 장점은 체계는 그 경계를 스스로 관찰해 나가면서 유지된다는 시각과, 정치나 기타 어떤 기능체계의 문제를 다루든지 그것을 사회의 일부의 문제로 볼 수 있게 하는 포괄성에 있으니, 논문에서도 그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할 것이다. 보수적인 루만은 살짝 한 켠으로 제껴 놓아도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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